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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왕자는 조용히 살고싶다-192화 (193/219)

-192화

카이엔은 조심스럽게 편지를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정갈한 글씨체로 짧은 글이 적혀있었다.

「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군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과거의 가장 밝았던 빛이 」

“…뭐라는 거야.”

“전 누군지 모르겠군요.”

“앙그라였으면 진작에 찾아왔을 테고, 이렇게 편지나 두고 가는 꼴은 나랑 별로 안 친하다는 것 같은데…”

옆에 있던 바이스도 한마디 보탰다.

카이엔은 편지 봉투 안에 무언가가 더 든 것 같아서 손을 넣어서 꺼내 보았다.

작은 카드가 하나 들어있었다.

둘로 나눌 수 있게 일렬로 구멍이 뚫려있는 카드였다.

둘로 찢으면 마법이 발동되는 모양이라 카이엔이 바로 찢으려고 하니 바이스가 그를 말렸다.

“돌아오신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나가십니까?”

“내가 아는 녀석일 것 같아서.”

“그래도 생각 좀 하고 움직이세요.”

“으음.”

설마 바이스에게 저런 말을 들을 줄이야.

잠시 고민한 끝에 카이엔이 입을 열었다.

“짐작 가는 놈이 있어. 마왕 대리전을 벌인 녀석인데… 맞다! 그러고 보니 너, 그때 누가 대리인이 되라고 한 걸 거절했다고 했지?”

“네.”

“너한테 말을 건 게 그놈이라더라.”

“믿어도 되는 자가 맞습니까?”

“음… 아마도?”

카이엔의 대답에 바이스는 인상을 썼다.

“아무튼 만나보면 도움은 될걸? 이 검을 준 것도 그 녀석이고…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으니까.”

“다른 사람들한테 말해놓고 가도록 하죠.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너도 같이 가려고?”

“왕자님 혼자는 못 보냅니다. 그리고… 절 회유하려고 든 놈의 얼굴이 궁금하긴 하군요.”

“어… 보면 놀랄걸?”

“그렇게 위험하게 생겼습니까?”

“그건 아닌데….”

전혀 악마라곤 생각하지 못할 외모라 그렇지.

바이스는 잠시만 기다리라며 밖으로 나갔다가 금방 돌아왔다.

그들이 자리를 비울 것이란 걸 다른 식구들에게 말하고 온다면서 이렇게 금방 돌아온 걸로 봐선, 한 명에게만 말하고 온 모양이었다.

“그런데 둘이 같이 이동될 수 있을진 모르겠는데.”

“안 되면 어쩔 수 없고요. 딱 붙어있는 수밖에.”

그럼 한 사람으로 취급되지 않겠냐며 바이스는 카이엔에게 바짝 달라붙었다.

“…찢는다.”

“네.”

어쩌다 보니 바이스가 그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가까이 달라붙게 되었지만 순간 이동이 잘못되면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카이엔은 군말 없이 손에 들린 카드를 둘로 찢었다.

그러자 눈을 한번 깜빡이는 정도의, 찰나의 순간. 그들은 다른 곳으로 이동되었다. 바이스도 무사히 잘 있었다.

카이엔은 이전에 와본 장소였는데 청소를 깨끗이 잘했는지 저번보다 보기 좋았다.

무사히 이동하자 바이스는 바로 그에게서 떨어졌고 그 순간 ‘어?’하는 사탄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야, 둘이서 온 거예요?!”

“아. 혼자 왔어야 했나?”

“아뇨, 여긴 일단 마계니깐… 보통 인간은 죽을지도 모르고요.”

“멀쩡한데요?”

“보통 인간이 아닌 모양이네요.”

카이엔은 슬쩍 바이스를 보았고 바이스는 웃었다.

“소드 마스터니까 평범하진 않겠지…”

바이스가 뭘 해도 놀랄 자신이 없다며 카이엔은 고개를 젓곤 사탄을 보았다.

그가 직접 편지까지 두고 간걸 봐선, 뭔가 말할 게 있다는 뜻일 테니까.

역시나 옥좌 위에 앉아있던 사탄은 옥좌에서 내려와 카이엔에게 다가왔다.

“다 보고 있었어요. 설마 했던 일이었지만…”

“제대로 말해줘요.”

“과거에 ‘그리모어’라는 마도서가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읽기만 하면 아무리 재능이 없는 인간이라고 해도 마법을 쓸 수 있게 만든다는 물건이었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그놈이 퍼뜨린 게 맞을 겁니다. 그리고 제가 아라스크에게 건네준 마도서 중에 그것이 끼어있었을 테고요.”

“이름을 알고 있었군요.”

“그야, 제가 이름 알려줘서 당신들이 그 이름으로 부르게 되면 그 녀석은 더 화냈을걸요? 자기 이름 어디서 들었냐면서 더 발광하지 않았을까 싶ㅇㄴ데. 결국엔 가짜였지만요.”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고 바이스는 만족할만한 답을 얻어냈다.

사탄은 손가락을 까딱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마도서 ‘그리모어’를 만든 것이 바로 그 정체 모를 녀석일 겁니다. 아마 신 계열이 아닐까 싶은데 신이라고 하기엔 애매하고, 바깥 존재인 모양인데 구체적으로 어떤 놈인진 저도 짚이는 구석이 없어요. 마신님은 알고 있으시려나? 만날 일 있으면 물어보세요.”

“있겠냐고…”

“하긴 그것도 그렇죠?”

실실 웃는 모습에 한 대 때려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하지만 그가 때려봤자 아프지도 않을 터라 카이엔은 얌전히 서 있기로 했다.

“제 책임도 있단 거죠. 그 점에 대해선 미안해요. 좀 더 살펴봤어야 했는데 하도 징징거리길래 책만 한가득 던져주고 마계에만 신경 썼거든요. 아라스크 쪽에서는 영혼을 담보로 거래를 제안했는데 그런 영혼 필요 없어서 적당히 딴 걸로 받았었어요. 으음, 어떤 녀석인지 모르니 부를만한 이름도 마땅치 않네요. 마도서가 그리모어니 그걸로 불러야지.”

“당신도 좋은 방법이 없단 거군.”

“그런데 왕자님은 왜 부르신 겁니까?”

“아아, 전달할 것이 있어서요.”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마치 문과 같은 마법진이 나타났고, 그 안에서 가미긴이 나타났다.

품 안에, 무언가를 안은 채였다.

그의 품에 안긴 것을 보고 카이엔은 깜짝 놀랐다.

프라우디에의 빈 몸이었다.

라이프 베슬이 있는 심장 부분이 끔찍하게 파헤쳐져 있었지만 그 외엔 상한 부분이 없었다.

“이거, 돌려주려고요. 역시 몸이 필요할 테니까.”

“어떻게…”

“그것이 아라스크의 흉내를 내고 있을 때, 녀석이 원했던 건 라이프 베슬 뿐이니 몸뚱이는 한쪽에 내버려 뒀죠. 녀석이 연구실을 떠나는 모습을 확인하고 버려진 몸을 빼돌렸습니다.”

“수술은 당장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들었죠?”

그 말에 카이엔은 가지고 있던 라이프 베슬을 내밀었고 가미긴이 조심스럽게 그것을 받았다.

“내 연구실로 데려가도록 하지. 프라우디에가 눈을 뜨면 바로 데리고 올게.”

“부탁드리겠습니다.”

가미긴이 돌아가자 사탄은 서 있기 힘드니 앉아서 이야기하자며 의자를 만들어냈다.

두 사람 몫으로 두 개를 만들어줬지만 바이스는 카이엔의 옆에 서 있기를 고집했다.

본인이 싫다는데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 사탄은 제 몫의 의자에 앉아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실은 저도 너무 오래전 일이라 자세한 건 가물가물해서… 게다가 지켜보기만 했지 깊이 생각하진 않았어요. 인간들 일은 인간들이 알아서 잘 처리 했으니까 우리는 관심 없거나 구경만 하거나 둘 중 하나. 게다가 관심을 가진 자도 소수. 좀 더 집중했어야 했는데 말이에요.”

“후회는 그쯤 해두고, 중요한 이야기나 해줘요.”

“급하긴.”

사탄은 피식 웃었다.

우연히 발견했던 인간. 그가 손을 씀으로써 죽음을 피한 인간.

이 녀석이라면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본의 아니게, 운명에서 벗어나 버렸으니까.

“리치왕은, 그자를 뭐라고 불렀나요?”

“검은 광대라던데. 하는 짓이 재수 없다고.”

“하하 그 말도 맞네요. 저는 마도서의 명으로 부르도록 하지요. 리치왕은 그리모어의 눈을 피하기 위해 육체를 버렸고 자신마저 죽으려고 했지만 세상에 그보다 강대한 존재는 없었기에 봉인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려 천년의 세월이 지났으니 놈으로서도 꽤 애가 탔을 거예요. 늑장 부리다가 다른 녀석이 오면 끝이니까요.”

“…다른 녀석이 또 있다는 말입니까?”

“네. 내가 알아본 바로는 꽤 많아요. 이럴 줄 알았으면 이전에 온 녀석한테 이 일을 맡길 걸 그랬어요.”

세계의 틈과 사이를 넘나들면서 신이 창조한 세계를 부수려는 놈들이 있고 그 녀석들을 없애는 자가 따로 있다면서 사탄이 살짝 덧붙였다.

“그땐 너무 조용해서 여긴 괜찮을 것 같다고 돌려보냈지만요. 이쪽에서 연락할 방법이 없으니 어떻게든 여기 사는 우리끼리 정리해야겠어요.”

“그런 일이 있었다니…”

“저도 자세한 건 모르고 들은 것밖에 없지만. 음, 세계는 신이 창조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지요? 그래서 신들이 자신의 피조물을 보살핀다는 것도. 그런데 창조주가 직접 자신의 피조물을 돌보기도 하지만 창조만 하고 다른 신들에게 돌보라고 넘기는 경우도 많거든요. 만드는 사람 따로 지켜보고 키우는 사람 따로 있다고 생각하면 편해요. 이쪽은 후자라더군요. 창조주는 떠났고 돌보는 자만 천신과 마신, 딱 둘.”

“…마신이 세계를 돌보긴 하나요?”

“푸핫!”

바이스의 질문에 사탄은 웃음을 터뜨렸다.

허리를 숙이고 끅끅거리며 웃던 그는 해맑은 얼굴로 대답했다.

“지금이야 무능해 보일지 몰라도 예전에는 안 그랬어요. 옛날엔 참, 그것 때문에 싸움이 많이 일어났는데 천신이랑 마신이 날 잡고 만나서 고민한 끝에 인간계에 개입은 극소수로, 신탁도 정말 위험할 때 아니면 쓰지 말자고 약속해서 이렇게 된 거죠. 덕분에 지금은 한가할 때나 인간계를 쳐다보고 있을 거예요.”

카이엔을 신자로 삼은 것도 예정에 없던 일일 것이라며 그가 말했다.

앙그라 마이뉴가 카이엔에게 줄 수 있는 힘은 마교황으로서 가진 힘일 테고, 그것은 신성력이니까.

마신은 생각지도 못한 인간이 신성력을 받게 되자 깜짝 놀라서 고민 끝에 천신을 찾아가서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이실직고 했을 테고.

“신은 개입하지 못해요.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존재감을 조금이라도 보이는 것만으로도 세계가 부서질 수 있어요. 그래서 항상 세계 붕괴의 위험이 있어도 본인이 나타나지 못하고 용사니 뭐니 하는 대리인을 내세우는 거고요. 자기가 직접 해결하려고 하면 오히려 더 빨리 부서지게 되어버리니까요. 아마 두 신이 이 세계를 지켜보고 있다면 지금 난리일겁니다.. 그리모어는 천년이 넘게 이 세계에서 버티고 있으면서 지식도 늘어났고 몸을 어떻게 숨겨야 할지도 알고 있을 테니까요. 섣불리 나섰다간 오히려 함정에 빠질 수도 있고요.”

바이스를 가리키며 그가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당신이 이단자들을 처리한 건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특히나 마신은 인간들에게 있어선 아직 낯선 존재이니 그리모어가 그쪽을 노리고 파고들었으면 꽤 힘들었을 거예요.”

“당연한 선택이었습니다.”

“문제는 천 년은 정말로 긴 시간이었다는 거예요. 함부로 세계에 손댈 수 없는 신들과는 달리 그자는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신기한 힘을 보였을 테고 그것은 인간들을 사로잡았겠죠. 그것은 종교가 되었을 테고 광신이 되었을 것이며 멀쩡한 종교의 시설 안에서 자라나고 있을지도 몰라요. 천신 쪽이 취약할 겁니다. 교단이 무너지지 않게끔 주의가 필요해요.”

“알려야겠는데…”

“약간의 경고만 주시는 걸 권장합니다. 그쪽에서 알아서 잘 해결할 거예요. 지금이야말로 ‘신탁’이 내릴법한 상황 아닙니까.”

사탄은 허공에 가볍게 손을 털더니만 그대로 턱을 괴었다.

살짝 눈을 내리깔고 그는 카이엔을 보았다.

다친 데도 없고 뭐에 쓰인 것 같지도 않고. 다행히 아직 그자가 카이엔에게 손을 뻗진 않은 것 같았다.

“제가 빌려준 검은 어떻던가요? 쓸만하던가요?”

“어? 으음… 나름대로…”

“좀 더 빌려드리겠습니다. 그리모어는 본체가 아니라 제 존재의 일부를 떼어 이 세계에 심어놨을 가능성이 높으니 잘만 하면 물리칠 수 있어요. 그럼 더이상은 이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을 겁니다. 다시 한번 침입하려고 한다면 그땐 두 신들이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요.”

“일단 온 놈만 쓰러뜨리면 된다는 거군요. 어렵겠지만.”

그자뿐만이 아니라 그를 따르는 이들마저 센다면 굉장히 많을 테니. 바이스는 머릿속으로 열심히 어떻게 하면 그들을 일망타진 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카이엔은 바이스를 건드리지 않고 대신 사탄에게 말을 걸었다.

“리치왕은, 프라우디에의 안에 깨어있었습니다. 허무를 헤매다가 자신의 진명을 찾았고, 그것을 깨우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프라우디에인 것 같은데 솔직히 말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저도 몰라요.”

사탄은 뚱하니 대꾸했다.

그 말에 카이엔은 인상을 찌푸렸고 사탄은 그 눈빛에도 주눅 들지 않았다.

“대리전 때는 계약이라는 명목으로 끼어들긴 했지만 저희가 발휘할 수 있는 힘은 극소수였어요. 이대로 저희가 인간계의 싸움에 힘을 보태려고 해도 발목만 잡을 게 뻔합니다.”

“프라우디에는, 리치왕은 어떤 존재였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세계가 선택한 자라는 건 대체…”

“아아. 극히 드물게 태어나는 체질이에요. 흔히 말하는 정령에게 사랑받는 자, 라고도 할 수 있죠.”

“정령?”

“요즘엔 더 보기 드물 거예요. 천 년 전이라면 모를까나… 아, 리치왕이 그렇게 돼버렸으니 그럴 법도 하네요.”

작게 웃으며 그가 말했다.

“아주 드물게, 극히 드물게 정령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자연의 기운이 타고난 아이가 태어나요. 갓난아기들은 워낙 영혼이 순수하기에 그땐 영혼도 정령도 볼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눈이 사라지게 되죠. 리치왕은 아마 태어났을 때부터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을 거예요. 그것이 잘못되어서 흑마법사의 길로 빠져들었겠지만 정령들이 그를 포기했을 리가 없어요.”

힘이 없는 정령들은, 아이를 주시할 뿐 다가가지 못했을 것이고 그 아이가, 루레이스가 위험에 처했음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는 것뿐이었다.

그녀가 흑마법에 물들어서 흑마법사가 됐음에도. 악령을 이끌고 다니면서 영혼을 수집하고 다님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녀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 뒤로도 주변을 맴돌았을 겁니다. 자신들의 존재를 숨긴 채 말이죠. 좀 더 안정적인 삶을 살았다면 그들과 함께했을 아이가 불행한 사건 때문에 흑마법사가 되어버린 거예요. 더욱 포기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토록 사랑했던 아이인데,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인데.

대부분이 포기했다 하더라도 루레이스를 끝까지 놓치지 않고 따라다니는 정령 또한 존재했다.

만약, 그녀가 그 사건을 겪지 않았다면. 마을이 흑마법사의 습격을 받지 않았다면.

어느 정도 성장해 제 몸에 흐르는 마력을 느끼고 다룰 수 있게 되었다면…

“평범하게 살았다면 정령사가 되었을 겁니다.”

그것이 검은 광대가, 그리모어가 루레이스를 쫓는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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