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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왕자는 조용히 살고싶다-191화 (192/219)

-191화

모진 말이 쏟아졌다.

하나 아라스크는 그녀가 뭐라고 말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저, 재회에 기뻐할 뿐이었다.

그녀가 처음부터 듣기 좋은 말을 했다면 의심했을 테지만 눈을 뜨자마자 날이 선 목소리로 그를 질책하는 걸 봐선, 틀림없는 리치왕… 루레이스 미오소티 본인이 틀림없었다.

루레이스가 입을 열 때마다 유리 깨지는 소리는 연달아 이어졌다.

“나는 그때 분명히 네게, 도망치라고 했다. 공연히 끼어들어서 고초를 겪지 말고 얌전히 숨어 살다가 죽으라고 했다. 왜 그렇게 하지 않았지?”

“아… 아아…”

“내가 봉인 당했다고 해서 너까지 그렇게 할 작정이었더냐? 내가 왜 너를 그 자들의 눈을 피해 도망치게 했는지 정녕 몰랐던 게냐?”

루레이스는 아라스크를 꾸짖었다.

“너는 아무 재능이 없었다. 그토록 내 곁에서 보낸 시간이 길었지만, 영혼을 보지도 못하고 소리도 듣지 못했다. 흑마력에 대한 저항력이 높았던 건지 그것이 아니라면 모든 것에, 모든 힘에 무감각한 몸이었던 건지.”

어느새 몸을 바로 하고 일어선 그녀는 자신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를 올려다보며 눈물을 흘리는 아라스크를 차가운 눈으로 응시했다.

질책이 이어졌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 네게 흑마법의 기운이 느껴지는 거지? 그뿐만이 아니다! 그 불길한 기운이…!”

“아, 아아, 루레이스… 루레이스… 당신을 만나고 싶었어요. 다시 한번, 한 번만이라도 당신을 만나고 싶었어요!”

아라스크는 날 선 말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다시 봤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감격할 뿐이었다.

바닥에 엎드린 채로 울음을 터뜨리며 그는 그녀의 발목을 붙잡고 흐느꼈다.

아무리 혼을 내도 아라스크는 그녀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인상을 쓰며 루레이스가 말했다.

“내가, 너와 함께해줄 것이라고 생각한 거라면 헛수고다. 어리석구나, 나는 널 보기 위해 눈을 뜬 것이 아니다. 내 스스로 죽음을 택했건만 내가 어찌하여 다시 눈을 뜰 거라고 생각한 거냐.”

“아아, 제발. 루레이스. 저를 버리지 말아 주세요… 제발… 저도, 저도 당신과 함께 있게 해주세요. 어디든지 따라갈게요.”

아라스크는 제발 자기를 버리지 말아 달라고 간청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쓰러운 마음이 들 정도로 애달픈 목소리로 빌어댔다.

하나 리치왕은 냉정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어지는 말들은 마치 날카로운 검과 같았다.

아라스크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단 1초라도 더 그녀가 살아 움직이고 말하고 눈을 깜빡이는 모습을 제 눈에 새기고 싶었다.

“그치만, 그치만… 당신이 보고 싶었어요. 그리웠어요. 루레이스… 저는, 저는 당신이 없으면 안 돼요. 그러니까 제발…”

“듣기 싫다.”

“아아아….”

“나에게는 그 무엇도 가치 없다. 소중히 여기는 것조차 없고 눈여겨보는 것도 없다. 너도 그걸 잘 알 텐데?”

“그런데… 그런데 왜 그때 저를 도망치게 한 거예요? 당신과 죽게 뒀다면 좋았을걸…!!”

“너는.”

절규하는 그를 바라보는 루레이스의 눈동자엔 아무 감정도 깃들어있지 않았다.

차분히 그녀가 입술을 떼었다.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 말은, 마치 사형선고와도 같았다.

“공연히 나와 엮여서 나쁜 꼴을 당하게 둘 필요가 없으니까.”

그녀의 애정을 갈구하는 이에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너를 바라보는 내 눈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하며 날 따라왔지. 그 말대로다. 나에게 있어서는 그 무엇도, 의미 없다. 가치 없다. 쳐다볼 필요도, 구태여 기억해둘 필요조차 없는 것뿐이다. 그리고-”

싸늘한 시선이, 아라스크를 향했다.

“연기를 무척이나 잘하는구나, 그림자여.”

그 말에, 근처에 있던 카이엔과 비셰는 크게 놀랐다.

비셰는 어찌나 놀랐던지 안고 있던 카이엔을 떨어뜨릴 뻔했다.

아라스크조차 눈이 휘둥그레져서 루레이스를 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그 눈동자 안을, 그 너머를 샅샅이 파헤치는 듯한 매서운 시선이 아라스크를 향했다.

“영혼을 담보로 거래를 했구나. 계약인지 거래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에겐 참으로 불공평했겠지.”

“루레이스…”

“그 모습으로 내 이름을 부르지 마라. 꽤나 정교하게 만들어진 가짜구나.”

“아, 아니예요, 저는…”

“진짜는 이미 놈의 뱃속에 들어갔겠지. 너는 너를 아라스크로 인식하고 있겠지만 너는 그가 아니다. 그의 기억을, 겉모습을 베끼어 쓴 놈의 파편일 뿐이지.”

그녀는 힐끗 카이엔을 쳐다보곤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내게 함께 죽을 것을 요구하려 했겠지. 하나 들어줄 수 없다. 너와 함께 죽는다는 건, 곧 내가 스스로 놈의 손안에 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그녀의 발밑에 부복한 아라스크를 베려는 것처럼, 그녀는 높이 손을 치켜올렸다.

들어 올려진 손이 아래로 내리그어졌다.

그녀가 그를 베려고 함에도 불구하고 아라스크는 피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루레이스는 아라스크를 공격하지 않았다.

내리그어지던 손이 아라스크가 아닌, 그녀 자신의 가슴을 갈랐다.

뼈 위에 근육을 짜 맞춰 넣고, 살을 채워 넣고, 피부를 덮은 진짜 같은 가짜 육체.

살이 갈라지고 혈관이 찢어지고 뼈가 부러졌다. 심장의 자리에 위치한 라이프 베슬을 꺼낸 그녀는 그것을 힘껏 카이엔을 향해 던졌다.

그에게로 날아오는 피투성이인 라이프 베슬을 카이엔이 급하게 손을 뻗어 잡아채자 루레이스가 말했다.

“…도망쳐라. 나조차도 모르고 있던, 잊고 있었던 그 아이를 깨워.”

“루미나르. 허무를 헤매다가 나의 최초의 이름을 드디어 알게 되었구나.”

“그 아이야말로 신이 눈여겨보았던, 세계가 바랐던 아이. 정령의 가호를 받았던…”

목소리가 점점 가늘어지더니 라이프 베슬을 빼낸 육체가 힘없이 허물어졌다.

가슴이 갈라져 피투성이가 된 몸이 쓰러지자 아라스크는 비명을 질렀다.

“아…아… 아아아아아악!!!”

허우적거리면서 그는 자신이 만든, 빈 육체를 끌어안았다.

더는 움직이지 않는, 심장이 사라진, 더이상 만날 수 없는 이를 끌어안고 목이 찢어지도록 비명을 지르는 그의 모습이 점점 일그러졌다.

검고 끈적한 액체가 뚝뚝 떨어지는가 싶더니만, 시신을 놓고 양손으로 가린 얼굴의 손 틈새로 기괴하게 벌어진 입이 드러났다.

- 들켰구나.

상당히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목소리는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오싹한 기분에 비셰는 카이엔을 데리고 바로 도망쳤다.

“이, 이제 어떻게 하죠?! 전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나도 마찬가지야…!”

리치왕은 자세한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하나, 그녀가 아라스크라고 불렀다가 그림자라고 칭했던 저 존재가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다.

무언가가 그를 집어삼키고 그인 척 행세를 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게다가 정체가 들통나자마자 바로 모습을 바꾸었다.

비셰가 정신없이 날아가는 와중에 카이엔은 슬쩍 뒤쪽을 쳐다보았다.

꾸물거리는 무언가는 형체를 이루지 못하고 울렁거리다가 주변의 언데드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던 허허벌판에 나타난 까만 점 하나가 주변의 모든 것을 삼키고 있었다.

품속의 라이프 베슬을 꼭 껴안으며 그가 말했다.

“다른 녀석들이 걱정돼.”

“빨리 갈게요.”

다행히 그 존재는 그들을 뒤쫓지 않았다.

무사히 일행과 합류하고 나서야 카이엔은 안도할 수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갑자기 그자가 비명을 지르더니 가버려서…”

“다행히 무사해.”

“왕자님, 피가-”

“내 피 아냐.”

엔베인의 말에 카이엔은 품속에 있던 라이프 베슬을 내밀었다.

“리치왕과 만났어.”

“네?”

“진짜… 믿을 수 없는 말들뿐이었는데 믿을 수밖에 없더라. 비셰랑 같이 정신세계로 들어갔는데 거기 프라우디에도 있고 리치왕도 있고 기억을 보여주는데-”

“숨이나 좀 가다듬고 제대로 말하세요.”

허둥지둥 이야기 하는 카이엔을 보며 바이스가 짧게 대꾸했다.

그 말에 카이엔은 진정하기로 했다.

품속의 라이프 베슬은, 따뜻하기보단 차가웠다.

보통 이런 걸 맨손으로 만질 수 있을 리가 없는데 그는 마신의 사제이다 보니 흑마력에 영향을 받지 않는 걸지도 몰랐다.

아무튼 본론부터 꺼내기로 하고 그가 말했다.

“…리치왕은 악한 존재가 아니었어.”

“네?”

“사정이 있었어. 자신을 노리는 녀석을 치기 위해서 세력을 만들고 움직였다고…”

“그녀를 노리는 놈이 더 나쁜 놈이라는 말이군요.”

바이스가 그의 말을 요약했다.

프라우디에가 어디 있는지 알게 된다면 좋을 텐데. 그쪽을 추적하는 것보다 아라스크의 모습을 하고 있던 괴물을 치는 것이 훨씬 중요했다.

리치왕의 말에 따르면 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과거에는 신처럼 떠받들어졌던 놈인 모양이다.

그놈을 없애려던 리치왕이 오히려 세상을 멸망시키려고 한다는 의심을 받았던 것처럼…

“아.”

카이엔이 탄식했다.

“일이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그냥 왕이 되고 싶지 않아서 구석에 처박혀서 조용히 살고 싶었는데.

그가 한숨을 쉬자 바이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지금까지 기승을 부렸던 사이비도 관련이 있었나 보군요. 신이되 신이 아닌 존재일 테니. 미리 처리하길 잘했네요.”

“처리요?”

“눈에 보이는 족족 없애버렸으니까요.”

“넌 진짜…”

“잘된 일 아니겠습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대량 학살했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카이엔이 속마음이 전해진 건지 바이스는 변명 같지도 않은 변명을 입에 담았다.

“실은 그 사이비들이 왕자님께 접근하려고 해서 미리 막고 다 없애버린 겁니다.”

“…왜 이제야 말하는 건데?”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지금은 말해도 혼나지 않을 것 같아서요.”

“하여간…”

“왜 왕자님을 노린 건진 모르겠지만요.”

그가 단 하나뿐인 마신의 사제라서? 그게 아니라면 리치왕의 라이프 베슬을 노렸던 걸지도 모른다.

지금은 빛의 신의 교단의 권세가 굳건하니 사이비들이 끼어들 일은 없을 터였고 세자르로 들어오려는 놈들은 바이스가 죄다 파묻어버렸다.

“그자가 쫓아올지도 모르니 지금은 몸을 피하도록 하죠.”

“마차를 다시 부를게요.”

연락 수단이 있었던 건지 비셰가 마법으로 마차를 다시 불렀다.

대기하고 있던 마차는 쏜살같이 달려왔고 그들은 세자르로 향했다.

덜컹거리는 마차의 안에서, 카이엔은 손에 쥔 라이프 베슬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안에, 프라우디에와 리치왕이 함께 잠들어있다.

과거의 프라우디에는 리치왕에 대해서 몰랐지만 카이엔과 비셰가 그의 영혼의, 의식 세계 안에 들어가서 만난 프라우디에는 리치왕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수많은 소통을 했던 걸까.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마차는 쉴 새 없이 달렸다. 이따금 멈춰서 추적이 있는지 확인했지만 누군가가 뒤쫓는 기색은 없었다.

하지만 적도, 그들이 세자르로 가는 것쯤은 알고 있을게 뻔했다.

게다가 그들의 적은 이제 흑마법사도 아니지 않는가. 리치왕조차도 확실히 정체를 파악할 수 없었던 괴물이다.

고대 기록이라도 찾아봐야 하는 걸까. 카이엔은 고민에 빠졌다.

서둘러 움직여도 세자르 영지로 돌아가는 데에는 며칠의 시간이 걸렸다.

막 도착해서 영지의 안전 여부부터 살펴보고 업무를 하려는데 집무실에 들어가자마자 책상 위에 편지가 하나 놓여있었다.

에빌의 말에 따르면 그가 떠난 직후 그의 집무실은 문을 단단히 잠가뒀다고 했는데…

정말로 청소도 안 해서 먼지까지 앉아있었지만 편지 위엔 먼지 한 톨 내려앉지 않았다.

의아하게 여기며 카이엔은 편지를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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