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청년은 자신의 이름을 ‘아르지마스’라고 했다.
제 입으로 말해놓고 스스로도 그 뜻이 창피한지 고개를 숙였다.
‘쓸모없는’이라고 이름을 짓다니 누가 지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참으로 인성이 더럽구나, 라고 생각하며 루레이스는 그에게 말했다.
“아라스크로 부르지.”
“네…?”
“‘쓸모없다’라는 뜻보단, 아무 뜻 없는 게 낫지 않나.”
“…그러게요.”
그는 울면서 웃었다.
루레이스는 그의 동행을 허락했지만 그 뒤로 달라진 점은 없었다.
그녀는 먹지 않아도, 긴 시간 자지 않아도 버틸 수 있었지만 청년은, 아라스크는 그러지 않았기에 조금 속도가 느려진 것뿐이었다.
두 사람의 여행은 별거 없었다.
그저 루레이스가 돈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하게 되었을 뿐이다.
“진행이 느리다.”
그 뒤로 이어지는 여행의 기억에 카이엔과 비셰의 옆에 서 있던 루레이스가 손을 저었다.
배경이 빠르게 지나가면서 순식간에 몇 년의 기억이 지나갔다.
그녀가 멈춘 지점에서는 아직 리치가 되지 않은 루레이스의 주변에 수많은 이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카이엔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무 넘긴 거 아닌가요?”
“충분하다. …나는, 내가 없애지 못한 불꽃을 없애고 싶었다. 그리고 조사한 결과, 그러한 것이 하나가 아니란 걸 깨달았지.”
이젠 없는 이들.
그녀의 목적에 동의하며 자신들도 함께하겠다고 나선 이들.
이중의 절반은 그 불꽃에게 당했고 절반은 인간들에게 당했다.
다신 만나지 못할 이들에게 눈을 돌리고 조금은,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가 말을 이어나갔다.
“전부 다 놈의 일부였다. 그때 이후론 마주치진 못했지만 난 놈을 ‘검은 광대’라 부르기로 했지.”
“광대?”
“하는 짓이 미친 놈인 데다가 끔찍하게 웃어댔으니.”
별 이유는 없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런 놈한테 제대로 된 이름을 붙여주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나쁜 건지 그녀의 미간에 살짝 골이 파였다.
“그래서 그것을 없애려고 했다. 그것은 이전의 이교도들이 모시던 불꽃의 형상이기도 했고 신물로 내려오는 물건이기도 했으며 골동품 애호가들의 수집품 안에 속해있기도 했지. 그것들을 하나하나 줄여나가다 보니 괴상한 소문들이 붙으면서 따르겠다는 자들이 늘었다. 쓸모는 있을 것 같아서 받아들였고.”
“…세계 멸망을 위해서 모은 게 아니라요?”
“내 목적은 그 기분 나쁜 것을 없애는 것뿐이었다. 하나, 그것 중 몇 가지는 신이 인간에게 내린 물건이라고 여겨져서 인간들이 그렇게 받아들인 거겠지.”
그녀의 어조는 내내 평온했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았고 카이엔은 그런 루레이스에게 괴리감을 느꼈다.
흘러가는 루레이스의 기억 속에서, 그녀의 편에 선 이들은 최선을 다해 적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서로가 옳다고 여기는 것이 다르니 싸울 수밖에 없었다.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리치왕의 군대는 세상 누구보다도 사악한 이들인 것에 비해 리치왕의 군대에겐 인간은 안중에도 없었다.
다만 인간들이 신처럼 떠받드는 악한 것을 처단하는 게 그들의 목표였기에, 그들은 악착같이 맹세를 이루려 했다.
“또 한 번 마주치게 되었을 때, 불꽃을 파괴했지만 그것은 내게 각인을 남겼다. 추적하려는 속셈을 파악해서 난 육체를 버리기로 했지.”
“네?!”
“하지만 육체를 없앤다고 되는 일은 아니더군.”
“그, 그런건 좀 고민을 해보고 하는 게…”
“그렇다고 바로 죽을 수는 없었으니.”
세상 그 누가 미친놈의 표적이 되었다고 해서 육신을 버리고 리치가 되는 것을 택한단 말인가.
게다가 루레이스는 잠깐의 고민조차 하지 않았다.
제 육신에 불꽃의, ‘검은 광대’의 각인이 남자 즉시 ‘그럼 이 몸을 버려야겠군.’이라면서 리치가 될 준비를 했으니…
비셰는 극단적인 루레이스의 행동에 눈동자가 거세게 진동했다.
“하지만 리치가 되고 나서도 바뀐 건 거의 없었다. 애초에 물만 먹고도 살 수 있었고 물을 마시지 않아도 살 수 있었으니까. …아라스크는, 내가 리치가 된 걸 반기지 않는 눈치였지만. 이질적인 생김새 때문이겠지.”
루레이스는 제 손을 바라보았다.
리치는 뼈밖에 없는 존재였다.
뼈밖에 없는 몸에 짙은 색의 로브를 걸치고 무기로 쓸 자잘한 보석과 마도구를 걸치게 되니 세상에 이보다 끔찍하고 무서워 보이는 것이 없을법한 존재가 되었다.
“다른 이들은 왕의 품격이 느껴진다며 좋아했지만.”
“…그놈들이 이상한 것 같은데.”
리더였던 그녀가 리치가 되자 아라스크를 제외한 군단들은 훨씬 늠름하고 대단한 모습이 되었다면서 좋아했다.
역병 의사는 지도자의 품위가 더욱 느껴진다면서, 가히 가짜 신에게 죽음의 철퇴를 내릴법한 모습이 됐다면서 당장 인간들에게 보여줘서 의지를 꺾어야 한다며 주장했다.
광전사단은 자신들도 백골이 드러날 지경까지 싸우겠다면서 환호성을 질렀다.
설령 진짜 백골이 되어도 버리지 말고 써먹어주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망령의 여왕은 리치가 된 그녀에게서 물씬 풍기는 죽음의 기운에 곁에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떨떠름한 마음을 가졌던 이들도 있었겠지만 주변에서 저렇게 좋아하고 환호하니 덩달아 그 감정에 휩쓸렸다.
살아있는 몸을 버리고 리치가 되자 신경 쓸 것들이 줄어들어서 편하다고 생각했건만.
아라스크는 군단에 비하면 평범한 인간이어서인지 리치가 된 그녀에게 조금 겁을 먹은 것 같았다. 물론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하나, 그 후엔 지쳤다.”
루레이스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놈을 막을 수 없었고 인간들마저 귀찮게 구니 어쩔 도리가 없었지. 게다가, 그놈은 여전히 날 노리고 있었다.”
“벗어나는 방법은 죽음뿐이었지. 정확히 뭔진 모르겠지만. 그자는 나를 원하고 있었음에도 온전히 나를 갖는 게 목적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를 얻음으로써 다른 것을 얻으려는 속셈이었겠지.”
루레이스가 손가락을 튕기자 흘러가던 기억이 사라지고 그들은 다시 텅 빈 세계로 돌아왔다.
“나는 결국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내지 못했다. 추측은 했지만 그것이 진실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
담담한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내가 너희에게 순순히 기억을 보여준 이유 또한 간단하다. 나를 노리는 녀석은 아직도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 내가 눈을 뜬다면 이번에야말로 발각되어서 붙잡히게 될 것이다.“
리치왕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이유.
티아마티스가 나타났을 때, 라이프 베슬이 드러났을 때조차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자신을 ‘리치왕’이라고 칭하는 거짓된 인격을 만들어내 드러냈을 뿐이다.
”스스로를 봉인하고 눈을 감고 나서야 나는 내게 쉼 없이 말을 걸었던 존재를 눈치챌 수 있었다.”
루레이스는 카이엔과 비셰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난도질당할 것만 같은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세계는 신이 창조하지. 신은 자신이 만든 세계에서 생명이 살아가는 모습을 구경한다. 관찰하며 관음한다.”
“나는, 그런 신 중 누군가가 유심히 관찰하는 개체였어.”
그 입에서 흘러나온건 그 누구도 감히 상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일종의 화신이라는 거다. 그 불꽃은 신과는 반대되는 존재였겠지. 신을 건드리지 못하니 대신 그와 한 가닥 실이라도 연결되어있을지 모를 나를 노린 거다.”
나를 노리고 있는 녀석의 앞에 나타나 줄 리가 없지 않은가.
그 말에 두 사람은 반박할 수 없었다.
리치왕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갖고 있있다.
그것은 그녀를 위한 게 아니라, 세계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나는 세계니 평화니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기분 나쁜 것을 없애고 싶었지.”
그러나 그녀는 세계 따위엔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오해를 하고 뭉친 녀석들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 힘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내 말을 이해했다. 멸망을 시킨다고 해도 자기 손으로 해야지, 남이 하는 꼴은 못 본다더군.”
“역병의 군주는 그 불꽃의 숭배자들이 있는 곳에 병을 퍼뜨렸다. 망령의 여왕은 영혼이 망가진 자들을 구분해내 제압했다. 불사교단이나 개인적인 추종자들은… 하늘 아래 두 명의 신은 필요 없다고 떠들더군. 어둠을 기리는 자들은 인간의 몸으로 강한 힘을 가진 나를 더 경외하여 나를 따랐다.”
“그러나 이길 수 없었다. 나는 이미 육체를 버리고 심장마저 라이프 베슬로 만들어 리치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건 노리는 것이 영혼 자체였을 수도 있었으니.”
“그래서… 봉인을?”
떨리는 목소리로 카이엔이 물었다.
그 물음에 리치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완전히 죽여주길 원했지만 그들의 힘으론 역부족이더군.”
“신마저도 당신을 버린 건가?”
“그건 알 수가 없다. 내가 광대의, 그자의 손에 넘어가면 더 상황이 나빠지리라 생각해서 일찍 목을 치려고 했던 걸지도 모르지.”
신에게 버림받았냐는 물음에, 그녀는 알 수 없다고 답했다.
잠시 침묵한 뒤 다시 루레이스는 입을 열었다.
“…나는, 그 녀석에게 평범하게 살라는 말을 남겼다. 나를 쫓아다녔지만 아라스크는 흑마법도 마법도 알지 못해. 녀석에겐 영혼을 보는 눈이 없었으니까. 공연히 내 옆에 있다가 내가 죽은 후에 붙잡혀서 고초를 겪지 말고 일찍 도망치라며 떠나보냈었다. 그런데…”
그녀는 고개를 들어 카이엔을 보았다.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카이엔 또한 루레이스를 바라보았다.
사백안인지 삼백안인지 애매한, 날카롭고 매서운 눈빛에 움츠러들만도 했지만 그는 꿋꿋이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내 말을 듣지 않고 무슨 수를 써서인지 천 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살아있다. 내가 지금 그 녀석 앞에 나서봤자 할 수 있는 말은 한정적이다. 분노와 모멸, 경멸. 이걸로도 괜찮다는 건가?”
“네. …아마도.”
아라스크의 소원은 다시 한번 리치왕을 만나는 것이다.
이 기억 속에서 본 리치왕은, 아라스크가 만든 가짜 육신과 정말로 닮아있었다.
만난다면 원한이든 소원이든 푸는 거니, 이루어질 테니 괜찮지 않을까.
그의 대답에 루레이스는 한심한 답이라며 평했다.
“그로 인해 내 계획은 전부 망가져 버렸다.”
한탄하면서 그녀는 카이엔과 비셰를 향해 손을 뻗었다.
“돌아가거라. 나도, 눈을 뜰 테니.”
“길지 않을 거다.”
루레이스가 감았던 눈을 확 뜨는 것과 동시에, 카이엔과 비셰의 몸이 뒤로 쏠렸다.
정신 속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 현실로 돌아온 그들은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
그와 동시에 음산한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당장 떨어져라!!”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비셰는 카이엔을 데리고 옆으로 몸을 던졌다.
어느새 다시 온 아라스크가 방금까지 그들이 있었던 자리에 서 있었다.
하나 그는 두 사람을 공격하지 않고 결계 안에 있는, 자신이 만들어낸 루레이스의 새 몸을 확인했다.
그 몸에 상한 구석이 없다는 걸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싸워야 하나?’
아직 리치왕은 눈을 뜨지 않았다.
비셰에게 안긴 채 하늘에 떠 있으면서 카이엔은 그와 싸워야 하나 고민했다.
그 순간, 지금까지 계속 눈을 감은 채 깨어나지 않던 그녀의 뺨을 만지려던 아라스크의 손이 붙잡혔다.
루레이스.
그녀가 눈을 떴다.
카이엔은 그녀가 눈을 뜨자마자 주변의 공기가 바뀐 것을 눈치챘다.
사방에서 날카로운 바늘로 찔러대는 것만 같은 살기.
영혼의 울음소리.
급격하게 공기의 온도마저 낮아지는 것만 같았다.
아라스크의 손목을 붙잡고, 그녀는 휙 내팽개쳤다.
입술을 깨물며 목소리를 냈다.
그 입에서 흘러나온 건 여전히 녹슨 것처럼 삐걱대고, 유리 깨지는 소리를 닮은 목소리였다.
“한심한 것.
닫혀있던 입술이 열렸고.
“나에게마저도, 쓸모없는 녀석이라고 불리고 싶었던 거냐?”
날카로운 말이 쏟아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