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아라스크는 무심히 이동했다.
너무나도 지루했다.
과거엔 어땠더라?
리치왕을, 루레이스를 따라다녔을 적의 그는 어땠던가.
그때의 그는 그녀를 바라보느라 바빴다.
허나 지금은?
그는 고개를 돌렸다. 관 속에 누운 이는 여전히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루레이스도 지금의 그처럼 무료했을까.
항상 먼 곳을 바라보던 사람.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끝없이 무언가를 추구했던 사람.
그녀는 여전히 눈을 뜰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선두의 언데드들에게서 다량으로 신호가 끊어졌다.
급하게 생존해있는 놈들 중 한 명과 감각을 공유해서 앞을 살폈다.
저번에 본 적이 있는 자들이, 언데드를 도륙내고 있었다.
검을 들고 있는 인간과 다크 엘프의 형상을 하고있는 데스 나이트.
그녀를 빼앗으러 온 것임을, 그는 직감했다.
‘더 있겠지.’
두 명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저번에 그가 직접 걸음을 했을 때 본 자들또한 있을게 뻔했다.
아라스크는 급하게 그쪽으로 다수의 언데드를 보내고 일어섰다.
그를 방해하는 이들은 상당히 강해서, 바로 추가된 언데드들마저 빠른 속도로 베어버렸다.
하급 언데드이긴 해도 떼로 몰려들면 힘에 부칠텐데.
언데드들은 오러를 쓰는 소드마스터의 검에 한번 썰리면 더는 움직이지 못했고 데스 나이트에게서 흐르는 그와 비슷한 느낌의 흑마력 때문에 전달되는 신호가 교란되었다.
입술을 깨물며 그는 몸을 일으켰다.
단 둘뿐이긴 하지만 저들이 길을 막고 있으니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루레이스의 곁을 떠나고싶진 않았지만 그가 나서지 않으면 더욱 지체될 터였다.
그녀를 감싼 결계는 쉽게 깨지지 않을테니 그것을 믿고, 그는 불안한 마음을 애써 무시하며 자리를 비웠다.
아라스크가 결계의 곁을 떠나 앞으로 가는 것을 보고 비셰와 카이엔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글러티나는 몸을 숨기고 있다가 바이스와 엔베인이 밀리는 것 같으면 가세하기로 해서, 지금 이곳에 있는건 둘 뿐이었다.
“…가자.”
한참을 숨죽이고 있다가 카이엔은 입을 열었다.
지금 움직인다면, 아마 아라스크의 감시에도 걸리지 않으리라.
비셰의 마법으로 모습을 감추고있던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걸음을 떼었다.
걸어서 언데드 무리 속으로 파고들 수는 없었기에 비셰가 카이엔을 안고 날아서 거대한 언데드에게 접근했다.
근처를 지키듯이 서있는 언데드 군단은 주인이 이곳을 지키라고 명령한 것인지 움직이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거대한 언데드 짐승 위에 올라탄 그들은 결계에 둘러싸인 이에게 다가갔다.
…프라우디에와는 전혀 닮지 않았다.
“이 사람이… 리치왕?”
“프라우디에와는, 닮은 구석이 없네요.”
닮은 점이라곤 머리색이 은빛이라는 것 뿐이었다.
어떻게 만든건지 모르겠지만 리치왕의 육신은 금방이라도 눈을 뜨고 움직일 것만 같았다.
조심스럽게 비셰는 결계를 살폈다.
언제 아라스크가 돌아올지 몰라 잔뜩 긴장하며 살피던 그녀는 조심스럽게 결계 위에 손을 얹었다.
“깰 수 있겠어?”
“힘들 것 같아요. 이게 없어져야할텐데… 깨면 바로 술자가 눈치챌 것 같아서요.”
작은 틈이라도 낼 수 있으면 좋겠는데.
비셰가 말끝을 흐렸다.
옆에서 구경만 하고있던 카이엔은 비셰가 손을 댔음에도 결계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의아해하면서 살짝, 결계에 손가락을 가져다댔다.
그런데 반투명한 결계의 벽에 막혀버린 비셰와는 달리 그의 손가락은 결계를 뚫고 쑥 들어갔다.
“어?!”
깜짝 놀라서 카이엔은 손가락을 뺐다.
이게 어떻게된 일인가 어안이 벙벙해져서 비셰를 보니 그녀역시 입을 딱 벌리고 놀란 상태였다.
겨우 마음을 다잡고 그가 물었다.
“…될까?”
“괜찮지 않을까요?”
다시한번 카이엔은 결계 안으로 손을 밀어넣었다.
아무런 방해도 없이 손은 결계를 통과해 안에 있는 리치왕의 인형에 닿았다.
리치왕의 어깨에 손을 짚고, 카이엔은 비셰를 보았다. 비셰가 그의 팔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이렇게 되면 왕자님도 제 능력에 영향을 받을거예요.”
“어쩔 수 없지. 같이 프라우디에를 찾으러가자.”
“네.”
몽마의 능력은 사람의 꿈과 정신에 간섭하는 것.
정신에 침투해 사람의 기억을 엿보고 과거를 알아내는 것쯤이야, 기본이었다.
잠들어있는 프라우디에를 깨우기 위해 두 사람은 위험을 무릅쓰고 라이프 베슬의 의식 세계로 들어갔다.
의식 세계는 사방이 희뿌연 색으로 가득 차있었다.
마치 짙은 안개가 낀 것만 같았다.
눈을 감았다 뜨니 주변 환경이 바뀐 것에 카이엔은 놀라서 주위를 두리번거렸고 그런 그의 팔을 비셰가 잡아끌었다.
텅 빈 공간 속에서 둥둥 떠있는 모습이 아주 익숙해보였다.
“이제 어떻게 해야해?”
“저도 잘 모르겠어요. 꿈을 꾸는 상태라면 그 세계가 보여야하는데 여긴…”
아무것도 없었다.
뿌연 안개가 낀 것만 같아서, 가만히 서있기보단 움직이면서 직접 찾는게 나을 것만 같았다.
정신을 잃은 상태인건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깊숙한 곳까지 가면 기억을 볼 수도 있을거예요. 프라우디에의 의식을 찾아서 깨워야하는데, 찾는데만 한참 걸릴 것 같네요.”
한숨을 푹 쉬는 비셰였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해야한다며 양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도! 이곳에서의 시간은 바깥보다 느리게 흐르니까 괜찮을거예요. 일단 이쪽으로 가봐요!”
바깥에서 바이스와 엔베인이 아라스크를 상대하는 동안, 그들은 프라우디에를 찾아내야했다.
방향조차 알 수 없는 공간이었지만 비셰는 카이엔의 손을 잡고 안내했다.
몽마인 그녀의 눈에는 흐릿하게나마 길이 보인 덕분이었다.
애초에 프라우디에는 호문쿨루스였다.
리치왕의 라이프 베슬을 넣고 탄생시킨 존재지만 그 인격은 리치왕과는 별개였다.
게다가 그의 안에는 기억을 잃은 리치왕도 있었다.
지금이라면, 그 두 사람이 어떻게 해서 생겨난건지 알아낼 수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 속에서 두 사람은 쉴새없이 걸었다. 많이 걸어도 피곤하지 않아서 멈추지 않고 걸을 수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의식 세계의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배경이 바뀌었다.
희뿌연 공간의 안개가 더욱 짙어졌다. 그리고, 비눗방울처럼 보이는 것들이 나타났다.
그것을 보고 비셰가 말했다.
“기억이예요. 음, 여긴 프라우디에가 없는 것 같으니 넘어가요.”
“응.”
힐끗 보긴 했지만 카이엔의 눈에는 은은한 색을 띈 비눗방울로 보일 뿐이었다.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주변은 점점 어두워졌다.
그곳에도 수십개의 비눗방울 같은 기억들이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이곳의 비눗방울들은 안에서 무언가가 휙휙 지나가고 있었다.
“여기…!”
“어?”
몽마인 비셰는 프라우디에의 기척을 잡아냈고, 두 사람은 기억의 방울 가까이 다가갔다.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니 비눗방울이 쩍하고 벌어지더니 두 사람을 집어삼켰다.
***
처음 만들어졌을 때부터, 이런 모습이었다.
막 눈을 떴을 때가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이 좁고 어두운 곳에서 나가고싶어서 발버둥을 쳤던 것 밖에 알지 못한다.
하지만 겨우겨우 밖으로 나와봤자, 좋은 일은 없었다.
‘백작’이라는 사람은 나를 보고 한탄했다.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내게 손짓했다.
적당한 수준으로 배운 언어와 세상의 규칙들.
그렇게 나는 ‘독스 백작가’라는 곳의 장남으로 알려졌지만 그것뿐이었다.
이곳의 주인으로 보이는 백작이란 사람도 백작 부인이란 사람도 나를 멀리했고 내가 바깥 생활을 하게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른 아이가 생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바로 없애지 않았다.
혹시나 뱃 속의 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곤란하니까, 나는 만약의 때를 대비한 보험이었다.
그래서 필요한 분야의 지식만을 습득할 수 있었다.
연금술에 뜻을 둔 백작이 스승을 붙여서 내게 연구를 하게 만들뿐이었다.
이상하게도 그러한 연구가 익숙해서. 약물을 뒤섞고 무언가를 만들어내는게 너무나도 익숙해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내 육신을 구성한 지식이기에, 이따금 섬뜩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그건 사소한 문제로 취급받았다.
나의 육신은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지만 이 몸에 깃든 영은 무엇일까.
생명조차 창조해내는 이들은 대체 무엇을 바라며 지식을 쌓아가는걸까.
의문을 풀 방법은 없었다.
어느날, 회색 머리카락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대단한 사람인 듯, 백작이 연신 고개를 꾸벅거렸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라는 사람이 내게 붙었다. 키가 큰 여성이었다.
어딘가, 인간 같지 않은 느낌이 들었지만 아무도 내 말을 귀담아들을 것 같지 않아서 가만히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내 곁을 지켰다.
나는 백작이 어떠한 방법으로 만들어낸, 만들어지게 한 존재였지만 백작과 백작 부인말고 그 사실에 대해 아는 이는 없었다.
그저, 밖에서 만들어온 사생아 쯤이라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나를 지키는 호위 기사가 생기자 이따금씩 벌어지던 방해와 괴롭힘은 사라졌다.
날아오는 돌멩이를 그대로 낚아채 던진 이의 머리통을 깨버린건 조금 무서웠지만, 그때만큼 크게 웃었던 적은 없는 것 같다.
쌀쌀맞은 세계에서, 그 사람만이 유일하게 내게 관심을 보였다.
그녀에게 나는 그저, 호위하는 대상일 뿐이겠지만.
낯선 이의 낯선 관심이었음에도, 기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버렸다.
***
“…자네인 씨에 대한 거네요.”
“그러게.”
짧은 기억과 짧은 속내.
기억은 더 이어졌지만 갑자기 주변이 흐릿해지면서 두 사람은 기억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큼직한 비눗방울의 앞에 누군가가 서있었다.
검은 로브를 입고있는 프라우디에는 그들을 발견하고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왕자님, 비셰 씨.”
“프라우디에!”
“무사해서 다행이다!”
“이제 얼른 빠져나가자!”
“아직 안 돼요.”
비셰의 말에 프라우디에는 고개를 저었다.
쓰게 웃으면서 그는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주세요.”
“응?”
“지금 필요한건 제가 아니예요. 절대로 눈을 뜨려고 하지 않는 그 사람을 깨워주세요.”
리치왕을 말하는건가.
두 사람의 얼굴을 보고 프라우디에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헐렁한 로브의 소매 밖으로 살짝 튀어나온 손가락을 기도하듯이 깍지껴 잡으면서 프라우디에가 입을 열었다.
“그 사람만이, 그를 말릴 수 있어요. 저는 못 해요.”
“하지만…”
“괜찮을거예요. 믿어주세요.”
그들을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단호한 빛이 어려있었다.
프라우디에의 설득에 카이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셰역시 마찬가지였다.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손을 잡고 두 사람은 프라우디에가 가리킨 방향으로 향했다.
어둠이, 더욱 짙어졌다.
손을 잡고있어서 서로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까만 공간이었지만 사물을 분간할 수 있었던 아까와는 달랐다.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앞뒤를, 좌우를, 상하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의 어둠 속을 걸어갔다.
한참을 걸어가자 저 앞에서 가느다란 불빛이 보였다.
도착한건가.
좀 더 힘을 내기로 하고 두 사람은 달리기 시작했다.
그곳에, 누군가가 있었다.
긴 은발을 하나로 땋아내린 이는 바닥에 앉아있었다.
불은, 그 자의 옆에 있는 등불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뒤돌아 앉아있는 그를 향해 카이엔이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