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아라스크는 느릿느릿 이동했다.
언데드들이 휩쓸고 지나간 땅은 오염되어있었다. 사방에 고깃덩어리가 난무했다.
언데드조차 되지 못하고 죽은 시체또한 간간히 섞여있었다.
그는 그 땅에서 남은 파편을, 감정의 조각을 긁어모았다. 짙은 농도의 절망이 모였다.
가만히 채취해낸 그것을 리치왕의 몸에 가져갔다. 역시, 그 양이 터무니없이 적었다.
어떻게 해야할까. 그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리치왕은 절대적인 강자였다.
그녀를 따르는 언데드 군단은 수천만에 이르렀고 와중에는 변심해서 언데드의 편으로 돌아선 인간들도 있었다.
맹목적으로, 광신적으로 그녀를 따르던 불사의 교단과 그녀보다 능력은 모자랐지만 지극정성으로 모시던 상급 언데드들.
그러나 아라스크의 곁에는 그정도의 고급 개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어떻게 그녀는 제 의지가 남아있는 언데드를 만들 수 있었던걸까.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고 스스로 의지를 가질 수 있는 것들을 만들었던걸까.
아라스크는 알지 못했다. 그는 그저 그녀의 흉내만을 내고 있을 뿐이었다.
육편을 모아서 만든 거대한 짐승의 위에 검고 반투명한 결계를 만들어놓고, 그곳에 그녀가 잠든 관을 넣고 그는 이동했다.
공포를 모으려면, 두려움을 사려면 역시 좀 더 끔찍한 몰골의 개체를 만들어내야할까.
아니면, 한 곳에 모아두고 생명줄을 쥐락펴락하는게 나을까.
강자부터 죽여서 본보기를 보이고 협박을 해야할까.
그로서는 결정할 수 없었다. 예전에도 지금에도 그는 그저 쓸모없는 아르지마스였다.
그런 언데드의 움직임이 마녀들의 사역마와 몽마의 감시망에 포착되었고 그들은 바쁘게 그 소식을 카이엔에게 전달했다.
노리는 것은, 아라스크가 가져간 라이프 베슬이었다.
그의 위치를 파악한 즉시 카이엔은 움직이기로 결정했다.
“함께 가겠습니다.”
바이스가 뒤따르기로 했다.
자네인, 글러티나, 엔베인, 비셰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신, 언데드에 대항할 수 없는 이들은 세자르에 남기로 했다.
슬로세이의 노래는 언데드에게 통하지 않았다.
라스는 늑대 인간이기에 언데드에게 공격을 잘못 받으면 감염될 우려가 있었다. 그리델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비셰는 약하지만 바이스와 함께 카이엔을 돕기로 해서 따라가기로 했다.
저택의 몬스터들또한 세자르에서 움직이지 않기로 했다. 다들 걱정했지만 카이엔이 가겠다고 하니 말릴 수 없었다.
다만 소금이는 짧은 팔을 휘적이면서 자기도 가겠다면서 찍찍댔다.
“찍! 찍!”
- 나도 간다! 너 저번처럼 또 다쳐서 오려고 그러지?
“어… 소금아. 이번엔 진짜 위험하거든?”
“찌익!!”
- 그러니까 나도 가야지!
“안 돼. 페이리, 미안한데 소금이 좀 부탁할게.”
“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카이엔은 못 간다며 그의 소매를 붙잡고 대롱대롱 매달린 소금이를 조심스럽게 떼어낸 뒤, 페이리의 손 위에 올려주었다.
소금이의 외침을 뒤로 하고 카이엔은 급하게 밖으로 나왔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세자르는 에빌이 대신 맡아서 관리해주기로 했다.
늘 있는 일이라 에빌은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난 이제 내가 영주인지 영주 대리인지도 모르겠다. 일을 너무 많이 해서. …잘 다녀와. 내가 평범한 인간인게 참…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분하네.”
“미안하다.”
“아냐- 내 실력이 모자른 탓인걸? 그러니까, 몸 조심해.”
“그래.”
혹시라도 아라스크가 이동 방향을 바꾸면 곤란하기에 그들은 빠르게 움직였다.
빠른 이동이 필요해서 자네인이 드래곤 화 한 다음 타고 가기로 했는데 챙겨갈 짐을 확인하던 도중 비셰가 펄쩍 뛰어올랐다.
“왁…!”
“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자,잠깐만요!”
자네인이 공터에 가서 변신하려는 것을 막고 비셰는 급하게 바닥에 마법진을 그렸다.
그 모습을 다들 의아해하면서 쳐다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그,급한 호출이…”
“가야하는거야?”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비셰는 말끝을 흐렸다.
아스모데우스에게서 온 전언은, 굉장히 불친절했다.
마법진을 얼른 그리라고 하니 신세지는 입장인 그는 냉큼 그 지시를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마법진을 다 그린 다음 마력을 불어넣으니 엄청난 굉음과 함께 연기가 주변을 가득 채웠다. 연기가 걷히자, 그 자리에는 거대한 마차가 있었다.
보기만 해도 음산한 기운을 풍기는 검은색 마차에 붉은 눈을 가진 검은 말, 그리고 난쟁이같은 마부까지.
허리가 굽은 마부는 비셰를 보더니 고개를 숙이며 품에서 편지를 하나 꺼내 내밀었다.
비셰는 바로 편지를 확인했다.
『타고가.』
짧은 한 마디만 적혀있었다.
아무래도 아스모데우스가 그를 지켜보고있었던 모양이다.
한숨을 푹 쉬며 비셰가 말했다.
“타고…가라네요…”
“응?”
“아스모데우스가…”
“아…”
“빠를까요?”
엔베인의 물음에 자네인이 마차와 마차를 끌 말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타고가다가 느릴 것 같으면 도중에 내리면 되지.”
“그럼 바로 짐을 옮기죠. 마차가 꽤 커서 짐도 사람도 다 실을 수 있겠군요.”
바이스의 지시 하에 다들 일사불란하게 짐을 옮겼다.
그와중에 마부는 비셰에게 연신 굽신거렸다.
“빠르고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이놈들은 지옥에 사는 놈들이라, 밤에도 지치지 않고 달릴테니 혹시 멈추길 원하시면 말씀해주십시오.”
“아, 네. 그럼 잘 부탁드릴게요.”
“부탁이라뇨! 오히려 영광입니다. 장차 미혹성의 안주인 되실 분께서-”
“안 될거거든요?!”
깜짝 놀라서 비셰는 거의 비명을 지르다시피했다.
아스모데우스가 그런 말을 했을리 없으니 아무래도 이 악마가 단단히 착각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마부는 흘흘 웃을 뿐이었다. 그 얼굴이 꼭 ‘부끄러워서 그러시는구나’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커다란 마차의 내부는 여섯명이 탑승했어도 자리가 남을 정도였다.
출발 신호를 보내자 마차는 즉시 앞으로 달려나갔다.
“덕분에 빨리 가겠네요.”
“아하하… 빨리 해결하고 지옥으로 오란거겠죠. 어휴.”
“비셰 씨를 많이 생각하시는 모양입니다.”
“절대 아니예요.”
바이스의 말에 비셰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마차는 굉장히 빨랐다. 눈 깜빡할 사이에 대문을 지나쳤고 거리로 나갔다.
달리는 마차 창 밖으로 손을 내밀어서, 바이스가 폭죽을 쏘았다.
대낮에 쏜 폭죽임에도 외벽의 경비의 눈에 띄었는지 그들이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문이 열렸다. 그것을 확인하고 바이스는 팔을 거두었다.
“전속력으로 달리다가 문에 부딪치면 큰일이니까요.”
“…그렇긴하지.”
다행히 지나가는 사람과 부딪치는 일도 없었다.
외벽을 넘어, 세자르 밖으로 나가니 마차는 더욱 빨라졌다.
엔베인은 창문 너머로 휙휙 바뀌는 배경을 살폈다. 이정도 속도라면, 자네인보다 빠를지도 몰랐다.
프라우디에도 없는 지금 드래곤의 등에 타고 가는건 꽤 위험해서 걱정했는데, 마차를 타고 간다면 카이엔이 이동 도중에 다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일단 우리는 바로 이 사건을 일으킨 자를 친다. 이동 방향을 알아냈으니 그쪽부터 처리하고 프라우디에를 되찾을거야. 이건 우리 밖에 못해. 남한테 해주라고 부탁할 수도 없는 일이고.”
카이엔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달리는 마차 안에서, 그들은 다시한번 작전을 점검하고 의견을 나누었다.
도착까지 얼마나 걸릴지는 아무도 몰랐다. 일반적인 이동 수단으로 움직인다면 한 달도 넘게 걸리겠지만 악마가 보내준 마차라면, 몇 배의 시간을 단축할 수 있을 터.
그래도 일주일은 걸리지 않을까, 라며 바이스가 말했다.
“마차가 계속 멈추지 않고 달릴 수는 없습니다. 식사를 하거나 용변을 보거나, 할 일이 있으면 쉬어야할테니까요. 다행히 멀미는 안 나네요. 음, 멀미할만한 사람도 저 아니면 왕자님 뿐이지만요.”
나머지는 종족이 다르니까.
바이스의 말에 카이엔이 인상을 썼다.
“…네가 그 이야기를 하니까 울렁거리는 것 같잖아.”
“이런. 창 밖을 보지 마세요. 한숨 주무시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어깨던 무릎이던 빌려줄테니 푹 쉬라는 말에 카이엔은 고개를 저었다.
대신, 마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들 중 누구도 프라우디에를 납치해간 청년에 대해 알지 못했다. 이름조차 몰랐다.
그저, 그가 연금술사와 흑마법사, 그리고 뱀파이어와 접촉한 적이 있다는 것과 불사자로 불렸다는 것, 그러나 그 이름조차 남아있지 않다는 것 정도만 알아냈다.
구출 작전은 단순했다.
둘로 나뉘어서, 한쪽이 그 자와 언데드를 상대하고 견제하는 사이 비셰가 카이엔과 함께 프라우디에를 구출하는 것이었다.
비셰는 원거리에서는 프라우디에의 정신에 접촉할 수 없었지만 가까이 다가간다면 할 수 있다고 했다.
지금은 무언가가 가로막고 방해하는 느낌이라, 그 주변에 방어벽이 있을 것이라 추측했다.
만약 비셰가 실패한다면…
“그땐, 그냥 지옥이랑 연결되는 문을 열고 프라우디에 데리고 도망칠게요. 거기서 다른 문 열고 저택으로 돌아가는걸로…”
“그게 낫겠군요.”
“그… 인간이 지옥에 가도 되는건가?”
“일단 프라우디에는 인간이 아니니깐…”
자네인이 말끝을 흐렸다.
그 말에 조심스럽게 카이엔이 첨언했다.
“으음… 저번에 나도 가본적이 있는데 멀쩡한걸 봐선 괜찮을 것 같아.”
“네?”
“아… 갔었구나…”
“어쩐지 못 보던 검이 있다 했는데.”
다들 떨떠름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엔이 무슨 이유로 지옥에 갔겠는가. 분명 악마들과 관련이 있는 일일터였다.
바이스가 아무 말도 하지않는걸로 봐선, 바이스는 알고있던 모양이다.
그들이 안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중에도 마차는 멈추지 않았다.
잠시 멈출 때마다 주변을 둘러보면서 이곳이 어디인지 파악했다. 이동 속도는 굉장히 빨라서, 이정도면 충분히 언데드 군단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식사 준비는 밖에서 하고 잠은 마차 안에서 자기로 했다.
불편하지만 어쩔 수 없었는데 다행히 아무리 거친 길을 달려도 마차는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비셰가 슬쩍 마부에게 물어본 바에 따르면, 아스모데우스가 가진 제일 빠른 마차를 보낸거라서 사이즈가 작은 편이라고 했다.
“하지만 혼자 쓰기엔 아주 넉넉하군요.”
“우리는 여섯이니까 좁을만도 하지.”
이동한지 나흘째 되는 날, 그들은 본대에서 떨어져나간 언데드 무리와 마주칠뻔했다.
다행히 노련한 마부가 크게 선회해서 움직인 덕분에 마차 사고가 나지는 않았다.
달릴 수 있는 땅에서는 달리고 커다란 방해물이 있으면 마차는 하늘을 날기도 했다.
수많은 마을이며 민가를 지나치며 그들은 계속 이동했다.
가는 도중 마주친 언데드를 모조리 쓰러뜨릴 수 있다면 좋을테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밤.
비셰와 글러티나가 사역마를 내보내 주변을 정찰했다.
밤은 언데드의 시간이었기에 그들의 움직임은 더욱 빠르고 날카로워졌다.
상당히 가까워졌다는걸 확인하고나서 비셰는 마차를 다시 지옥으로 돌려보냈다. 이제부턴 걸어서 이동해야했다.
사역마와 시야를 공유하면서 그들은 적의 위치를 확인했다.
하급 언데드는 하늘을 날며 정보수집을 하는 사역마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공격도 못할테니, 이게 공격당한다면 어느정도 강한 놈이 있다는 증거였다.
혹시라도 적의 눈에 띈다면 곤란했기에 일행은 조심스럽게 이동 흔적을 지우며 움직였다.
그렇게 며칠간 이어진 탐색의 끝에 사역마가 네발 짐승 모습을 한 언데드의 모습을 눈에 담았고, 연결이 끊어졌다.
“…찾았어요.”
“어서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