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사람은 어디에서나 죽는다.
짐승도, 몬스터도 마찬가지였다.
흑마법사와 네크로맨서는 그런 시체와 뼈들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그 군세를 불려나가니, 뛰어난 흑마법사 한 명으로도 수천의 군대를 조종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물론 현존하는 흑마법사 중에서 그 정도의 위용을 갖춘 자는 드물었다.
겔로스에서 한때 사령 기사가 나타나 나라가 거의 괴멸 직전까지 갔었다.
사령 기사는 마법 소녀의 손에 죽었고 그 후 겔로스는 서서히 복구의 움직임을 보였다. 하나, 완벽하지 않았다.
이미 망가진 땅이고 최근에 사망한 인간의 숫자가 천을 넘어가면서 땅이 오염되었다.
또다시 언데드의 군대가 나타나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뜻이었다.
“어, 어서 도망쳐! 이 사실을 전해야-”
목소리를 높이는 기사의 목이 맥없이 잘려 떨어졌다.
수백 구의 시신이 묻힌 땅에서 시체가 기어 올라왔다.
상처가 아물지도 않았는데 또다시 언데드가 몰려온 것에 그 땅에 다시금 자리 잡은 인간들은 절망했다.
죽은 자는 다시 언데드가 되어 다시 움직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뜨거운 피가 흐르고 심장이 뛰던 이들의 호흡이 멈추고 육체는 빠르게 식어갔다.
무리를 이끄는 흑마법사나 네크로맨서만 죽여도 군단은 와해될테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한두 명이 아니었다.
겔로스는 성국 에밀과 맞닿아있었지만 그자들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들의 편에, 고대부터 살아온 정점의 흑마법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말하길. 그는 그보다도 더 격이 높은 존재를 이 땅에 불러온다고 하였다.
파멸과 혼돈이 자리 잡은 세계. 제 욕망을 위해 흑마법사들은 움직였다.
비슷한 시기에 사막과 제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악령이 들끓어 산 자의 영혼을 현혹해 빼내고 그 혼을 잡아먹으며 몸집을 불려 나갔다.
기괴한 모습의 몬스터가 나타나 마을을 공격했다.
산채로 인간을 잡아가기도 했다. 불쌍한 피해자는 여지없이 언데드가 되어 그 군대에 섞여 있거나 반대로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비명을 모았다.
공포를 끌어내고 절망을 축적했다.
그녀를 이루는 힘이 그것이었기에.
그녀는 통곡을 연주했으며 좌절을 자아냈다.
그토록 수많은 어둠을 모아서, 그녀는 무엇을 하려고 했던 걸까?
아직도, 그는 알지 못했다.
아라스크는 자신이 만들어낸 리치왕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무엇으로도 뚫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결계를 두르고 또 둘러서 그녀의 몸을 지켰다.
여전히 눈을 뜨지는 못했지만 숨을 쉬는 것만은 느껴졌기에, 그녀가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라면 그는 무엇이든지 할 생각이었다.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쉬웠다.
끔찍한 괴물을 보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이성을 상실했으며 그 괴물이 행하는 잔인한 짓을 보게 된다면 너나 할 것 없이 미쳐버리고 만다.
낮에는 언데드들의 움직임이 주춤했지만 그땐 온갖 괴물들이 땅 위를 돌아다녔기에 인간들은 맘 편히 지낼 수 없었다.
인간의 군대가 몰려와도 마찬가지였다.
언데드의 수는 줄어도 다시 늘었다.
흑마법사들은 재료를 모으기 바빴다. 조금이라도 더 좋은 재료를 얻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움직였다.
아라스크 역시 나름대로 필요한 것을 챙겼다.
이제 와서 새 몸을 만드는 것은 무리니 몸을 움직일 수 있게끔 마력을 모으는 것이었다.
인간의 영혼을 재료로 한 절망을 모았다. 가장 농도가 짙은 어둠을 모았다.
인간들은 잡초처럼 짓밟혔다.
강한 자도 약한 자도 언데드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다.
각 국가는 오염된 땅을 떼어내기에 바빴다. 중심으로 몰리고 몰려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도망칠 수 있는 곳은 한정되어있었다.
언데드들의 소식을, 마녀로 인해 카이엔은 빠르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녀들은 몸을 피하면서 검은 숲 너머에서는 별일이 없을 것 같다며, 하늘을 날아 검은 숲 안쪽에 정착해도 될지를 물었다.
그 땅은 인간들의 영토가 아니었기에, 카이엔은 맘대로 하라면서 허락했다가 바이스에게 혼났다.
그들은 일단 언데드와 맞서 싸울 생각이었지만 적도 바보가 아니니 대놓고 이쪽으로 쳐들어오진 않을 것 같았다.
그야 그들은 틈이 나는 대로 프라우디에를 되찾으려고 할 테니 굳이 들이닥쳐서 싸움을 벌이려 하진 않을거다. 그들은 언데드의 군단에 돌격하는 대신 그 군단을 주시하며 경로를 확인하기로 했다.
한편 에밀에서는 언데드를 물리치기 위한 군대를 이루어서 각국에 파견했다.
신전을 지키는 것도 중요했지만 죽어가는 자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성녀인 메르실라 역시 언데드와의 전쟁에 나섰다.
신성력으로 무장한 성기사들과 뒤에서 그들을 보조하는 사제와 성자, 성녀.
성가가 울려 퍼지면서 아군에게는 축복을, 언데드에겐 징벌을 내렸다.
그들이 막아서야만 더이상의 피해가 나지 않을 것이라는, 고결한 희생을 마음먹은 채 그들은 전쟁터로 나섰다.
하급 언데드들 중간중간 섞인 키메라와 중급 언데드. 그리고 그들을 조종하는 흑마법사와 네크로맨서.
도대체 어디 숨어있다가 단체로 튀어나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참에 뿌리를 뽑아주겠노라, 그들은 검을 들고 그들의 신께 맹세했다.
끊임없이 몰려드는 언데드를 상대하기 위해 에밀의 군대들은 치고 빠지는 전술을 시행했다.
적들 사이에 언데드는 있지만 리치나 그에 준하는 상급 언데드는 없었기에 드넓은 땅에 광범위한 축복과 축성을 하는 것만으로도 대지에 발을 디디고 있는 언데드들이 녹아내리고 땅에서 솟아오르려던 것들도 신성력으로 인해 소멸했다.
끔찍한 광경에도 눈을 돌리지 않고 에밀의 군대는 전투에 임했다.
메르실라는, 긴 머리카락을 질끈 동여 묶고 검을 잡았다.
한 손으로도 휘두를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검에 신성력을 덧씌워서 휘두르니 좀비며 구울의 목이 뎅겅뎅겅 잘려 나가며 다시 붙지 못했다.
‘괜찮을까.’
가르간트에는, 아직 위협이 닿지 않은 걸로 알고 있었다.
어째서일까. 이번 일이 끝나고 나면, 카이엔을 만나러 가고 싶었다.
그에게도 이 소식이 전해졌겠지만 걱정이 되었다.
이 싸움도, 이 싸움 뒤에 일어날 일들도 모두.
***
제국 황실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언데드의 공격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쪽도 방어하기에 급급했다.
이미 한 차례 언데드로 인해 홍역을 치른 뒤라 더욱 조급한 참이었다.
그 와중에, 온다는 전보 하나와 함께 이노스가 도착했다.
티아마티스 없이 홀로 제국행에 나선 그는 웃는 얼굴로 아는 이들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스스로 후계자 자리를 포기하고 마법사가 되겠다며 나간 황자가 돌아오자, 다들 긴장하면서도 반기는 눈치였다.
이노스가 마법에 소질이 있다는 건 다들 알고 있었기에 그에게 기대를 건 것이었다.
반면, 그가 돌아와서 이번 전쟁에서 공을 세우고 황태자 자리를 노리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손톱을 잘근잘근 깨무는 이들도 있었다. 물론 이노스는 그런 이들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말할게요. 수도를 보호할 거대 마법진을 설치합시다.”
“네??”
“재료가 많이 필요하니까 좀 도와주세요.”
“이노스??”
“오라버니?”
“너 갑자기 무슨 소리야?”
“제 능력으로 이 땅의 모든 것을 지키는 건 힘드니까, 가능한 넓은 범위를 보호하려구요. 보호막 밖은 군대를 보내서 싸우게 하도록 하죠.”
그리하여 회의가 열렸다.
황족만이, 정확히는 현 황제와 그의 다섯 명의 자식이 모인 자리에서 이노스가 제안한 거대 마법진 설치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갔다.
“일단 폐하께선 자리를 지키고 계시는 게 나아요. 형제자매님들도 마찬가지고요.”
“오라버니는 어떻게 하시려고요?”
“일단 수도를 지킵니다. 이기적인 건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어요. 제힘으론 수도까지가 한계에요. 그마저도 조금 범위가 좁아질 수도 있고요. 그리고 마법진을 설치할 준비가 다 끝나기 전에 언데드들이 몰려오면 불가능하고요. 빨리 움직여줬으면 합니다.”
지지 않고 이노스는 제 의견을 관철했다.
실은 그가 다시 제국에 온 것은 티아마티스 때문이었다.
너네 집 걱정만 하고 있지말고 가서 도와라, 그리고 수상한 녀석을 보면 바로 연락해라.
퉁명스럽게 말하긴 했지만 그가 가족들을 걱정하는 걸 알고 꺼낸 말이었다.
“나는 못 간다. 계시도 임무도 내려오지 않았으니까.”
“대리인으로 절 보내는 건 괜찮고요?”
“…그것까진 괜찮겠지.”
“안 괜찮으면요?”
“지금이 장난칠 분위기냐?”
“으아아-”
까불다가 뺨을 꼬집히긴 했지만 어쨌든.
다행히 이노스의 주장이 받아들여졌기에 제국 내 모든 마법사가 거대 마법진을 만들기 위한 준비에 투입되었다.
이노스는 바로 곳곳에 마법으로 만들어낸 사역마를 풀어놓고 그의 마법 연산을 도울 장치를 설치하게 했다. 물론 그 장치를 만드는 데에는 제국 마법사들의 기나긴 야근이 필요했다.
또다시 언데드 때문에 쑥대밭이 될 위험에 처한 제국이며 대륙을 보며 이노스는 혀를 찼다.
‘이참에 싹 쓸어버리면 더이상 이런 일은 안 일어나겠지?’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며 이노스는 집중하며 마법진에 주문을 새겨넣었다.
언데드들이 사람 가려가면서 잡아먹는 건 아니니 이참에 바깥 지역에서 기승을 부리는 사이비며 이교도들도 싹 사라지면 좋겠다는, 약간의 딴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다른 이들은 이 일이, 단 한 사람으로 인해 일어났다는 사실을 과연 알고 있을까?
천 년 전에 존재했던 리치왕. 그자가 대체 어떤 사람이었길래.
무려 천 년이나 지난 지금, 또다시 그 이름이 입에 오르는 걸까.
잠깐의 휴식 시간. 사샤가 독대를 요청했기에 이노스는 웃는 얼굴로 여동생을 맞이했다.
마법진을 준비하느라 마력이 쪽쪽 빨려서 마법진을 그리다 말고 대충 빵으로 식사를 때우고 바닥에 드러누워 자는 일이 며칠이나 이어졌기에 이노스의 꼴은 빈말로라도 좋다고 할 수 없었다.
까치집이 된 오라비의 머리를 보고 사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누가 오라버니를 황자라고 생각할까요?”
“네? 저 이제 황자 아닌 거 맞는데요?”
“어휴-”
“아하하. 잘 지내고 있어서 다행이에요.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저 시간 많이 못 내주는데.”
“…저, 몽마들을 제 시녀로 쓰고 있어요.”
“아, 그래요? 그럼 여차하면 그들이 사샤를 데리고 도망치면 되겠네요.”
여전히 가벼운 반응이 돌아오자 사샤는 인상을 썼다.
“오라버니. 농담할 때가 아니에요.”
“저도 압니다. 상황이 심각하긴 하죠. 전 제 가족 지키겠다고 여기까지 온 거고.”
“…….”
“노려보지 마세요. 아하하. 그치만 맞는 말인걸요? 제 힘은 고작 이정도예요.”
“그 친구분은요?”
“카이엔도 나름대로 힘쓰고 있답니다. 저도 그를 도우려고 온 거예요. 언데드 군단은 가르간트를 치기 전 제국부터 먹으려고 할 테니까요.”
리더를 알아내 위치를 알린다.
그의 역할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 땅에서 싸움이 일어나겠지만 뭐 어때요. 다들 골고루 망할 테니 어떻게든 될지도!”
“후우우-”
여전히 대책 없이 낙천적으로 사는 사람이다, 라고 사샤는 생각했다.
그녀의 앞에서 오라버니인 이노스는 항상 저랬다.
나이 어린 동생 앞에서는 늘 멋진 척을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원래 생각이 없는 건지.
둘 다 그리 마음에 들진 않았다.
“…다음에 돌아갈 때 되면 저도 데려가요.”
“네? 뭐라고요?”
“황녀 하기 질렸으니까 데려가라고요.”
“황녀란 것 빼면 사샤에게 남는 게 뭡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얌전히 집에 있으세요.”
“하?”
“원래는 카이엔이랑 엮어줄까 했는데, 연하보단 오히려 연상 쪽이 취향이었던 것 같더라구요. 안 되겠어요.”
그 말에 사샤는 더욱 인상을 찌푸렸다.
“그것 말고도-”
“일단 살아남고 보죠. 벌써 몇 번이고 위험을 이겨냈으니까요.”
“…잘 될 것 같아요?”
“확신은 안 가요. 그러니까 머리 싸매고 노력하고 있는 거죠. 그렇다고 수도 바깥의 이들을 버릴 생각은 없어요.”
지금도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이들을 구하기 위해 제국의 군대가 최전선에서 언데드와 싸우고 있다.
에밀에서 파견된 지원군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들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줄여주기 위해서, 보호막이 필요했다.
적어도 생존자들을 한 곳으로 모을 수 있는 안전한 장소가 존재한다면 설령 군대가 패하더라도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면 그만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