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언데드와의 싸움으로 피곤할 이들을 모두 돌려보낸 뒤, 바이스는 카이엔을 데리고 방으로 갔다.
일 생각하지 말고 오늘은 푹 쉬라면서, 그가 말했다.
“억지로라도 쉬어줘야 합니다. 그래야 체력이 보충되어서 뭐든 할 수 있죠. …프라우디에 님의 조사는 어떻게 할까요?”
“꼬리를 잡을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야. 게다가 도대체 뭘 하는 녀석인 건지도 모르겠어.”
직접 두 눈으로 봤지만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벌레 한 마리도 못 죽일 것만 같은 얼굴을 하고선 수많은 언데드를 부리면서 인간과 이종족을 가리지 않고 실험대상으로 삼은 녀석이었다.
지금까지도 못 잡은 녀석인데, 이제 와서 자기를 잡을만한 단서를 남겼을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악마가 도굴해낸 걸 다른 악마가 제자리에 돌려놨고, 그걸 그 녀석이 다시 파냈지만 그 녀석도 도난당한 것 같았어.’
세력이 있긴 하지만 목적이 다를 터.
카이엔이 입을 열었다.
“…흑마법사를 좀 털어보며 좋겠는데. 독스 백작가로 라이프 베슬이 넘어온 걸 봐선 연금술사도 같이.”
“알겠습니다. 확실히 털어보죠.”
웃으며 바이스가 대답했다.
애초에 흑마법사를 찾기가 힘들긴 하지만 흑마법사만큼 인간이나 몬스터, 이종족을 실험체로 쓰는 연금술사가 있었다.
자신은 인체 실험과는 거리가 멀다고 선을 그어놓고 금속이나 물약만을 중점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도 있지만 키메라나 호문쿨루스 쪽으로 눈을 돌리는 녀석들도 있었다.
알고 있는 게 있는지 바이스가 말했다.
“일종의 길드가 있는데, 그쪽부터 털면 될 것 같습니다. 다만 그렇게 되면 제가 얼마 동안 자리를 비울 텐데 그게 걱정이군요.”
“네가 직접 가려고?”
“직접 가서 제 눈으로 확인해보는 게 나으니까요. 그 정도로 중요한 사안이고요.”
이렇게 말하면서도 바이스는 걱정스러운 듯 덧붙였다.
“비셰 씨의 역량이 늘어났다지만 그래도 호위로서는 아직 못 미덥고… 왕자님이 구호 활동을 나가게 되신다면 저택은 에빌 님에게 맡길 생각입니다. 업무처리 능력이 나날이 발전하시더군요.”
“우리 쪽 물자가 모자라진 않을까?”
“티아마티스 님께 도움을 요청할 겁니다. 멍하게 살아오진 않으셨을 테니 숨겨둔 돈이나 남몰래 하는 장사 밑천쯤은 있으시겠죠.”
‘드래곤한테 돈 뜯어낼 생각인 거냐.’
“나중에 갚는다고 하면 빌려주시겠죠. 그게 아니면 왕자님이 직접, 왕실에 요청하면 됩니다. 위험한 곳으론 당신이 가실 테니 물자나 대주라고.”
“…편지 써야겠네.”
“도와드리겠습니다.”
카이엔과 바이스가 방에서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해산하라고 했던 나머지 모두는 슬그머니 모였다.
장소는 그들 전용으로 만들어진 별채의 연무장이었다.
프라우디에를 찾기 위해선 납치범을 알아내야 하는데 카이엔은 인간의 법 때문에 자유롭게 움직이질 못하니 그들이 나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놈이 프라우디에의 마력의 흔적이 남는 것을 단단히 감춰놔서 그들로서는 찾기가 아주 힘들었다.
의심 가는 곳부터 뒤져볼 수밖에 없었는데, 그 많은 장소를 하나하나 뒤지는건 어려웠다.
“그렇게 커다란 생물을 타고 갔으면 분명히 본 사람이 있을거야. 마녀들의 소식통을 동원해서 경로를 유추해볼게. 그리고 흑마법에 민감한 자들을 찾아야지…”
짧게 한숨을 쉬고 그리델라가 말했다.
“정령이라고, 너희도 들은 적 있지? 정령은 어디에도 존재하지만 흑마법사와 네크로맨서, 언데드가 쓸고 간 부패한 지역에선 살 수 없어. 흑마법사가 있는 곳이라면 정령이 알아서 피하는 거야.”
“정령? 찾을 수 있겠어?”
“내가 알기론 정령의 숲은 제국 남부에 있어. 멀긴 하지만 일단 거기까지 가보려구.”
“정령은 보통 정령계라는 데에서 살지 않아?”
“그렇긴 한데, 자기들끼리 모여서 노는 데가 그 숲이야.”
자네인의 물음에 그리델라가 보충 설명을 해주었다.
일리 있는 설명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글러티나 역시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했다.
“난 역시 통곡의 원이 수상하니 그쪽을 조사해보고 싶어. 세르포그 가문이 인체 실험을 한 배경도 있을뿐더러, 말이 통하는 인간의 경우엔 꽤 인정해줬기에 그쪽 분야에 능통한 흑마법사나 연금술사의 경우엔 취미의 일치로 같이 연구를 했을 수도 있거든. 그 기록을 찾아봐야겠어.”
그녀의 말이 끝나자 그다음으로 엔베인이 입을 열었다.
“…난 지금까지 프라우디에의 도움으로 마력을 다루는 법을 배웠어. 오러를 쓰지 못하는 나지만 마검의 힘으로, 그리고 프라우디에의 가르침 덕분에 어느 정도는 자연의 마나를 느낄 수 있게 됐어. 다치지 않는 한, 다크 엘프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뼈만 남은 몸을 가릴 수 있고. 그렇게 해서 부패도 최대한 늦추고 있어. 아마 프라우디에는… 이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적성 없는 날 붙잡고 마력을 다루는 법을 알려준 거겠지.”
엔베인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오래전에 박동을 멈춘 심장. 숨 쉬지 않는 몸.
언제부터 그랬는지 이젠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이젠 나는 심장을 찔려도 죽지 않아. 아직은 기초적인 마나의 흐름만을 다루고 있지만 이 정도는 할 수 있게 되었고.”
그의 손끝에서 아주 작은 불꽃이 만들어졌다. 모닥불에 불붙일 때나 쓰기 좋을 크기의 앙증맞은 불이었다.
“나도 좀 더 도움이 되고 싶어. 지금까진 그저, 모두와 함께 어우러져서 평범하게 살고 싶었지만 더는 평범하지 않아도 돼. 내가 다크 엘프건 그 모습마저 녹아 없어지고 뼈만 남은 데스나이트가 되던 모두, 이전과 똑같이 나를 대해줄 것이란 걸 알고 있으니까.”
“엔베인…”
“맞아. 다들 그럴 거야.”
지금까지 많은 일을 함께해낸 그들이었기에, 신뢰는 무엇보다도 굳건했다.
엔베인이 말을 마치고 나서 라스가 조심스럽게 제 생각을 이야기했다.
“…우리의 적은, 리치왕 시절부터 살아온 녀석이지?”
“그렇지.”
“그렇다면 어딘가에 기록이 남아있지 않을까? 10년만 지나도 강산이 변한다고 하는데, 리치왕은 자그마치 천 년 전 과거의 인물이야. 그자가 숲이나 동굴에 은둔하고 있었다고 해도 그 긴 시간동안 그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해. 게다가 외모도 젊은걸 봐선, 거의 불사자에 가까운 건 아닐까 싶은데… 그렇다면 불사자의 전설을 되짚어봐도 되지 않을까?”
“일리가 있어.”
“하지만 그건 어떻게 알아내지?”
또 다른 난관이 등장했지만 다들 물러서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던 비셰가 말했다.
“어… 제가 아스모데우스의 성에서 혹사당하면서 마법을 배우면서도 꼬박꼬박 리치왕에 대해 물어봤어요. 아스모데우스는 리치왕에 대해 관심은 없었지만 들은 게 있다고 했어요. 정점에 다다른 자는 마침내 모든 것을 내팽개쳐버리고 싶어진다, 라고요 혹시 리치왕도 그랬던 건 아닐까요?”
“쉽게 봉인 당할 자는 아니긴 하지.”
“만약 리치왕이 끝까지 용사 일행과 맞서 싸웠다면 그녀의 수하인 그 남자는 복수심이든 뭐든 감정에 불타올라서 그녀를 죽인 자들을 쳐 죽이려고 했을 거예요. 하지만 그 사람, 길고 긴 시간이 지난 뒤에야 리치왕의 라이프 베슬을 찾으러 왔잖아요. 애초에 라이프 베슬을 발견한 게 최근일지도 몰라요.”
가미긴이 도굴해서 창고에 넣어둔 라이프 베슬이다.
인간의 시간과 악마의 시간은 상당히 다르게 흘러가고 네비로스가 제자리에 돌려놨다고 해도 이미 그 청년이 봉인된 곳을 찾아와서 빈손으로 돌아간 다음에 되돌려졌을 가능성이 있다!
비셰는 그 이야기를 했다.
“긴 시간의 흐름뿐만이 아니라 스스로도 모든 것을 포기했기에 리치왕이 기억을 잃어버린 걸 수도 있어요.”
“그럴 수도 있지만… 잘 모르겠네.”
“리치왕이란 존재는 굉장한 악인이라고 들었으니까.”
“그것보다, 프라우디에가 눈을 뜬다면 도망칠 수 있을지가 중요한 거 같은데.”
슬로세이가 손을 들며 말했다.
“그게 아니라면 리치왕의 기억이 되살아난다고 해도 여전히 프라우디에일 가능성에 대해서도. 그렇잖아. 리치왕이라면, 분명 무지 나쁜 일들 많았을 텐데. 자기가 한 일 말고 겪은 일들도.”
슬로세이는 별채의 식구 중에서도 자신과 가장 연령대가 비슷해 보이는 프라우디에와 함께 놀곤 했다.
그때마다 흑마법사에 대한 이야기를 물어봤고 들을 수 있었다.
대부분 본인이 세상을 등지고 마도에 빠진 이들이지만 예외는 있는 법.
흑마법을 익히지 못하면 죽을 수도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배우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에서 되돌리고 싶다는 일념으로 스스로 선택하기도 하고, 혹은 실험체로 팔려 왔다가 흑마법사를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하거나 흑마법사가 육체를 바꿔치기한 경우…
손을 꼽아가면서 그녀가 말했다.
“어차피 옛날 일이긴 한데… 리치왕의 기억이 돌아온다고 해도 프라우디에는 프라우디에니까.”
“그렇지.”
“계속, 계속 같이 여기서 살고 밥도 먹고 함께 놀았으면 좋겠어.”
슬로세이의 말에 다들 고개를 숙였다.
그것은, 그들 모두 바라는 것이었다.
***
영주로서, 아베르나 백작으로서 카이엔은 이번 언데드 사태에 대한 입장을 발표했다.
마찬가지로 검은 숲과 영지를 가르는 벽을 지키고 있는 곳이 이번 일로 인해 파괴되었고 그로 인해 벽의 손상이 있을지도 몰라 조사단을 보낸다는 것.
그리고,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사람들을 구조하고 이쪽으로 데려올 수도 있다는 말.
물론 비어있는 땅에 임시로 거주하게 할 테지만 원래 살던 사람들 입장에선 싫을 수 있으니 미리 말해두고 의견을 구한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카이엔의 생각과는 달리 영지민들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왕자님이 잘하시겠죠. 늘 걱정만 앞서지, 막상 하시면 잘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어차피 이곳은 시시때때로 용병이든 사냥꾼이든 마구 찾아오지 않나요?”
“이제 와서 인간이 더 늘어난다고 해도…”
“솔직히 여기 분위기에 적응 못 해서 딴 데로 떠날 것 같은데요.”
“맞아요. 만티코어랑 케르베로스가 목줄 달고 산책 나오고 왕자님은 햄스터를 머리에 얹고 다니시는데.”
맞는 말이라 카이엔은 반박할 수 없었다.
세자르에 자주 찾아오는 이들이야 그가 기르는 몬스터를 마을 명물이랍시고 좋아하곤 했지만 적응 못 하는 이들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왕자님이 직접 가시는 거예요? 그냥 여기 계시지… 위험한데.”
“혹시 가시는 거면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으음… 자세한 사항은 광장에 공고문을 붙여놓을 테니 나중에 읽어봐라.”
“네!”
영지민에게 설명도 했겠다, 카이엔은 바로 조사단을 파견하기로 했다.
일단 구호품을 챙긴 뒤 병사와 기사 일부를 내보내기로 정했다. 그 정도의 인력이 빠져도 세자르를 지키는 데에는 문제없을뿐더러, 프라우디에를 납치해간 그 남자가 또다시 이 땅을 공격하진 않을 테니 위험할 일은 없을 터였다.
바이스가 제안한 대로 티아마티스에게도 이하 사정을 설명해 연락을 취하니 남모르게 도움을 주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 “그래서, 프라우디에는 어떻게 할 거지?”
“찾을 겁니다.”
- “쯧. 너희가 찾는 것보단 그 납치범 놈이 더 빨리 나타날 것 같은데.”
“끄응…”
- “일단 행운은 빌어주마.”
통신을 끊고 티아마티스는 옆을 돌아보았다.
열심히 그가 내준 숙제를 하는 중인 이노스를 보며 그가 말했다.
“이노스.”
“네?”
“너 살던 집에 편지 한 통 써라.”
“네? 제국에요? 왜요?”
“하라면 할 것이지 말이 많다.”
그 말에 이노스는 투덜거리면서 숙제하던 종이를 한쪽으로 밀어놓고 바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입이 삐죽 튀어나온 그를 보며 티아마티스는 이마를 짚었다.
“이미 제국도 한바탕 언데드로 골머리 썩었다. 물론 그건 마왕 대리전 때문이긴 하지만 어쨌든 간에. 제국의 연금술사와 흑마법사에 대한 정보를 조사해달라고 편지 써.”
“쳇. 제가 부탁한다고 해줄지 모르겠네요.”
“네 여동생은 해주겠지.”
“모두에게 부탁하는 게 나으려나요…”
이노스는 말끝을 흐렸다.
“해보긴 하겠는데 제대로 해줄지 장담은 못 해요.”
“걔들도 그때 본 게 있으면 흑마법사 위치쯤은 추적하고 있을 거다. 죽을뻔했으니까.”
“그래도…”
“네 여동생도. 뱀파이어 때문에 곤욕을 치렀으니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을 테고.”
“과한 평가네요. 제 형제자매들은 그 정도로 생각이 깊지 않아요.”
“널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구나.”
“이이익…”
분했지만 이노스는 티아마티스에게 대들지 않았다. 괜히 대들었다간 혼나기만 할 테고, 한 대 쥐어박히는 것만으로도 머리에 혹이 생긴다는 건 이미 충분히 경험했다.
흑마법사에 연금술사까지 싸잡아서 조사하라는 게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양쪽 다 인체 실험을 해서 그런가보다, 라며 자체 해석했다.
실제로 그러한 이유로 투자만 잘하면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설득에도 불구하고 황실은 연금술을 지원하지 않았다.
게다가 프라우디에는 호문쿨루스라고 들었는데 인간과 다른 점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정교했다.
그 정도의 호문쿨루스를 만드는 데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재료로 들어갔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하나 그런 기술력을 가진 자라면 어느 정도 유명해졌을 터.
티아마티스는 그쪽을 파고들어 한놈 한놈 잡아다가 조질 생각인 모양이다.
탁월한 선택이라며 이노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들이 조사를 개시한 지 2주도 채 되지 않아서, 연금술사와 그와 관련된 자들이 줄지어 죽어 나갔다는 소식만을 접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