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엔베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쳤다고, 그래서 이렇게 됐다고 말할 법도 한데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손으로는 다 가릴 수 없는 무너진 얼굴을 애써 감추려고 했다.
그 모습에 다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물어보지도 못하고 멍하니 엔베인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에게 카이엔이 손을 뻗었다.
“엔베인.”
“…네.”
카이엔은 손을 뻗어 엔베인이 가리고 있는 손을 떼어냈다. 그 손을 대신해 자신의 손을, 무너지고 있는 그의 얼굴에 갖다 댔다.
뺨. 정확히는, 뺨의 위치에 있는 드러낸 뼈에 손을 짚었다.
그가 신성력을 쓰자 무너져내리던 얼굴이 서서히 회복되었다. 다시 원래의, 다크 엘프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냐. 너도 놀랐을 텐데 뭘.”
“…이건, 프라우디에의 마력이 끊어져서 그런 겁니다. 아마, 그자가… 제가 프라우디에와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고 일부러 끊었을 테죠.”
“마력을 끊었다니?”
“그야 전, 이미 왕자님이 발견하셨을 때부터 마검에게 먹히고 있었으니까요.”
그가 그 자리에서.
폐허가 된 마을에서.
얼마나 버텼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조차도 몰랐다.
“완전히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었으니, 천천히 썩어갈 수밖에.”
이미 다른 이들도 그의 몸이 부패할 것임을 알린 적이 있었다. 하나 모두, 그런 말을 들었음에도 멀쩡한 외관인 그를 보고 그게 먼 훗날에나 일어날 일이라고 짐작했을 터였다.
그러나 부패를 제일 먼저 눈치챈 프라우디에가 그가 완전히 언데드가 되지 않게 도와주었다.
몸이 썩어드는 것을 막아주고 다크 엘프의 형태를 할 수 있게끔, 말이다.
다크 엘프도 눈에 띄지만 완전히 언데드가 되어 데스나이트가 된다면 해골이니까. 그쪽이 더 눈에 띄고 카이엔의 평판에 누가 될 것이었다.
지금까지 숨겨온 사실을, 엔베인은 담담히 털어놓았다.
“…계속 숨길 생각이었어?”
“네.”
카이엔의 물음에 엔베인은 즉시 대답했다.
그 모습에 카이엔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래. 제일 힘들었을 네가 그런 선택을 내린 거니까,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을게. 하지만 난 네가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어. 다른 녀석들도 그럴 거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저희 뿐일 테니까요.”
“지금은… 일단 프라우디에를 구할 방법에 대해 생각하자. 지금쯤이면 외벽 쪽도 거의 정리됐을 테니까.”
“제가 통신을 할게요.”
“괜찮아?”
“그 정도 마력은 있어요. 목소리만 전달하면 되는걸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비셰는 마법을 썼다. 외벽 쪽에 가 있는 이들 중에 가장 마력을 다루는 데에 능숙한 그리델라에게 통신 마법을 연결해서 소통을 시도했다.
다행히 금방 연결이 되었다.
- 이쪽은 저택 바깥 조. 대장으로 보이는 인물이 나타나서 프라우디에를 데려가 버렸어요. 그쪽은 어때요?
- 응? 어어, 비셰구나? 이쪽은 정리 다 끝나서 태우고 있어. 더 밀려오진 않더라. 함부로 태웠다가 병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걱정되긴 한데 일단 불 질러서 태우고 있어. 성수 뿌리고 남은 걸 뿌리고 있어서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쪽으로 대장이 갔구나.
그리델라의 한숨 소리가 생생히 전달되었다.
- 어쩐지, 이쪽엔 대장 급으로 보이는 녀석이 없더라. 잡다한 괴물들만 몰려오고… 저택 내부는 어때?
- 그쪽은 아직 소통 전이예요.
- 그럼 그쪽으로도 연결해봐. 정리하고 바로 갈게.
그리델라와의 통신을 마치고 비셰는 슬로세이에게 통신을 시도했다. 다행히 문 너머의 저택 쪽은 아무런 피해도 없다고 했다.
그 사실을 전달하니 카이엔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단 모여서 이야기하자. 벌써 해가 뜨네…”
“아…”
“조금 더 버틸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비틀거리면서 다들 걸음을 내디뎠다.
에너지 드레인에 당한 탓에 남은 힘이 얼마 없었지만 서로를 부축하며 영주성의 대문을 넘어갔다.
안절부절못하면서 밖으로 나간 이들의 귀환을 기다리던 이들은 힘없이 걸어오는 그들을 보고 놀라서 달려왔다. 내부를 지키는 역할을 맡은 슬로세이와 에빌은 사색이 된 이들을 보고 크게 놀랐다.
“왕자님!”
“카이엔! 너희 왜 이렇게 창백해?”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다.”
“프라우디에는…”
“…막지 못했어.”
짓씹으며 내뱉은 말에 두 사람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다들 모이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는지라 그들은 일단 저택 1층의 빈방에 들어가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그들 중 가장 체력이 좋고 건강한 라스조차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잠시 후 외벽을 지키던 이들이 영주성에 도착하자 그들은 자리를 옮겨서 대화하기로 했다. 처음엔 회의실로 가려는 이들이었지만 바이스가 식당으로 가야 한다며 엄포를 놓았다.
“이런 말 할 때가 아니란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만, 식사를 거르지 마십시오.”
“으음…”
“바이스 씨…”
“다들 밤을 새우면서 싸운 데다가 다 죽어가는 몰골이지 않습니까. 왕자님도 마찬가집니다.”
“아니 나는-”
“신성력 써서 회복한다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돌려막기잖습니까.”
그 역시 밤을 새워서 전투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바이스는 멀쩡히 다른 이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결국 식당으로 간 모두였지만 눈앞에 놓인 아침 식사를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절반도 비우지 못했다.
카이엔도 식사를 할 기분은 아니었지만 옆에서 바이스가 눈에 불을 켜고 지켜봤기에 억지로 입안에 쑤셔 넣었다.
“…넌 안 먹냐?”
“나중에 먹겠습니다.”
“네가 억지로 앉혀놓은 자리잖아.”
“알겠습니다.”
카이엔이 인상을 쓰며 말하자 바이스는 고개를 젓더니만 식탁에 놓인 빵 하나를 집어서 입에 넣었다.
잼도 버터도 바르지 않은 둥근 빵을 대충 입에 넣고 씹어 삼킨 뒤 그가 ‘이제 됐습니까?’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로 카이엔을 바라보았다.
주인과 겸상할 수 없다는 이런저런 핑계로 함께 식사하는 걸 회피하던 바이스가 처음으로 같은 자리에서 식사를 한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다들 그걸 눈치챌만한 여력은 없었다.
“…프라우디에가 납치됐다. 이곳까지 도달한 녀석은 과거 리치왕의 수하로 있던 놈이야. 믿을 수 없지만… 지금까지 죽지 않고 살아온 데다가 이상한 힘도 쓰고 있었고.”
“혹시 그 사람도 언데드가 아닐까요? 오랜 시간 살아온 데다가 흑마법도 쓰고 있잖아요.”
“움직임도 굉장히 이상했습니다. 신체가 꺾이는 각도가 비상식적이었어요.”
직접 그자를 봤던 비셰와 자네인도 한마디씩 했다.
카이엔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그는 리치왕이 원하는 대로 움직인다고 했다.
그녀가 평화나 유지를 원한다면 더 이상의 사건을 벌이지 않을 테고 전쟁을 원한다면 전쟁을 벌이겠지.
그자의 목적이 리치왕을 깨우는 것이라면 프라우디에가 위험하다. 어떻게든 구해야 하지만 그들은 적진이 어디인지도 몰랐다.
무거워진 분위기 속에서 가만히 서 있던 바이스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과연 리치왕이 눈을 뜰지가 문제군요. 스스로가 누군지도 몰랐던 자니까요.”
“그렇지…”
“공연히, 깨우겠답시고 이상한 짓을 저지를 것만 같아.”
“하지만 어디에 있을까요? 정보에 따르면 그자는 갑자기 나트폰트라 변경백령에 모습을 드러내고 공격을 감행했는데.”
“…눈에 안 띄는 곳이 한 군데 있긴 하지.”
검은 숲과 마찬가지로, 몬스터들이 우글거리는 곳이 있었다.
검은 숲만큼이나 광활하진 않지만 위험한 몬스터들이 서식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의 접근이 뜸한 곳.
제국 아이칸트라와 소시에라의 사이에 위치한 통곡의 원.
한 나라의 절반쯤 되는 크기의 거대한 숲은 몬스터들의 낙원이었다.
흑마법사의 연구실이 눈에 훤히 보이는 곳에 있을 리 없으니 그곳이 아니더라도 겹겹의 결계로 감싸 모습을 감추고 있을지도 몰랐다.
“통곡의 원이라…”
“검은 숲은 저희가 자주 들락거리니 아닐 테죠.”
“그렇지 않을까?”
“그럼 그쪽으로 조사단을 꾸려서 보내봅시다.”
“에? 괜찮은 거예요? 위험하다면서…”
“그쪽도 검은 숲만큼은 아니지만 주기적으로 몬스터들을 사냥해줘야 해서 전문적으로 사냥을 하러 다니는 이들이 있습니다. 겸사겸사 수상한 부분을 발견하면 알려주라고 하면 됩니다.”
“…통곡의 원이라면, 세르포그 가문의 성이 있는 곳이다.”
조용히 있던 글러티나가 입을 열었다.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세르포그.
복수하기 위해 제 가문은 물론이고 다른 혈족까지 모조리 죽여버린 이베리카가 몸담았던 곳이었다.
맨 처음 학살당한 이들의 성이 그곳에 있다고, 그녀가 말했다.
“이베리카의 손에 모조리 죽임을 당했겠지만 그 성을 조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세르포그는 통곡의 원에서 잘 나오지 않으니까 그곳에 무슨 일이 생겼다면 그들이 알아냈을 테고.”
“하긴, 뱀파이어들은 죽였지만 성 자체를 무너뜨리진 않았으려나?”
“남은 기록이라도 찾겠다는 거죠?”
“응. 시체들은 어차피 이베리카의 능력 때문에 그림자에 흡수당했을 테니 깨끗할 테고 특히 세르포그의 경우엔 인간을 재료로 한 실험도 빈번하게 했거든.”
“…통곡의 원에 들어온 민간인이 재료였겠군요.”
“그렇지.”
이야기를 마친 글러티나는 카이엔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통곡의 원으로 가겠어. 난 당주 후계자로서 일족의 회의에도 참석한 적이 있어서 세르포그의 성에도 방문한 적이 있거든. 먼 옛날 일이긴 하지만… 다른 이들보단 잘 찾아낼 수 있을 거야.”
“혼자 가지 말고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가. 같이 갈만한 사람이-”
“아뇨. 안됩니다.”
바이스가 카이엔의 말을 끊었다.
단호한 얼굴로 그가 제 생각을 이야기했다.
“언데드의 진군이 나트폰트라 변경백령부터 시작해서 몇 개의 영지를 걸쳐 이곳에 도착했다가 격파당한 건 다들 아실 겁니다. 문제는 피해 복구입니다. 세자르는 큰 피해를 보지 않았지만 언데드들이 쓸고 지나간 서쪽 지역은 완전히 망가져 버렸으니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물론 언데드들이 휩쓸고 지나간 터라 심각하게 오염되고 말라버려서 재건은 힘들지도 모르겠지만요.”
“제국에서 쳐들어올 수도 있단 거야?”
“가능성은 낮지만 생각은 해보시라는 겁니다. 이런 혼란스러운 와중에 사건 사고가 많이 나는 법이니까요.”
“내 안전 때문인 거지?”
“네.”
고개를 끄덕이며 바이스는 많은 이들이 세자르를 벗어나는 것을 반대했다.
그 마음을 충분히 아는지라 카이엔은 생각에 잠겼다.
“그럼 어떻게 하나… 그렇다고 내가 따라갈 수도 없고.”
“안 돼. 통곡의 원은 아주 험한 곳이야.”
“알아. 그렇다고 오염된 지역을 정화하러 나서는 것도 눈치가 보이네.”
흑마법 전문가인 프라우디에도 없으니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언데드 때문에 오염된 땅에 성수를 붓거나 신성력을 흘려서 정화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나서서 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이런 건 왕성에 있는 왕이 직접 나서서 관리해줘야 했다.
‘바이스가 괜히 이런 말을 했을 리도 없고…’
갑자기 오염된 땅의 이야기를 꺼내다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카이엔이 물었다.
“…내가 나서긴 해야겠지?”
“국왕이 나서는 걸 기다린다면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도 다 죽습니다. 간단한 구호는 저희가 해야 합니다.”
“네가 그저, 거기 있을지 모를 생존자들이 불쌍해서 이런 말을 꺼낸 것 같진 않은데.”
“어차피 망가진 땅이니 아무도 가지려 하지 않을 겁니다. 자연적으로 정화되기 전에 저희가 먹죠.”
“아 역시나.”
그럴 줄 알았다며 카이엔이 이마를 짚었다.
바이스의 말은, 어차피 가르간트에 언데드로 피해 본 땅을 정화할 수 있는 이가 없으니 다들 기피하는 죽음의 땅을 카이엔이 나서서 해결하고 은근슬쩍 먹어버리자는 것이었다.
본인이 나서서 사람들을 구하고 땅도 정화하고 관리하면 국왕도 일부는 떼어줘야만 할 테니까.
게다가 언데드의 공격이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있을지 모르는데 그때마다 에밀에게 부탁하는 것도 부담이 크니 오염된 땅 몇 군데 주는 것으로 합의를 보는 게 낫다, 라고 여기게 거래를 하자는 것.
한숨을 푹 쉬면서 카이엔이 말했다.
“네 생각대로 될까?”
“나트폰트라 변경백령은 망했습니다. 그쪽도 검은 숲을 관리하고 있죠. 다른 영지들은 무사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쪽이 줄줄이 망했다면 다 왕자님의 것이 되겠군요.”
“작은아버지가 그렇게 둘 것 같아?”
“그렇게 안 하면 무력행사를 하면 됩니다.”
“나 왕 안 될 거다.”
“백작은 너무 약하지 않습니까?”
기가 막혀서 카이엔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위기를 기회로 삼는다는 말은 그도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건 좀…
그의 눈빛에 담긴 감정을 알아차린 건지 바이스가 웃으며 말했다.
“변경백의 방벽도 새로 쌓아야 하고 땅의 정화 역시 필요합니다. 가르간트 왕성에서 에밀에게 부탁하는 데에 시간이 걸리고, 또 성국에서도 공짜로 해주진 않을 거 아닙니까. 마신의 사제인 왕자님이 나설 차례입니다.”
“프라우디에는 어쩌고?”
“물론 그쪽도 최선을 다해서 조사해야겠지만 저희보다 더 나은 자에게 맡기면 되지 않겠습니까?”
“악마? 해주려나…”
“추적만 도와주라는 건데 뭐 어쩌겠습니까. 게다가 리치왕이 눈 뜨고 그걸로 모자라서 또 발광이라도 한다면 그게 더 큰 문제죠.”
“으으음…”
될진 모르겠지만 가미긴이 프라우디에를 아끼는 걸 봐선, 조금은 도와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