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네가 이번 사건의 주범인가? 아니… 저지른 일은 수도 없이 많군. 늑대 인간을 습격한 것도 마녀를 위협한 것도 모조리 너일 테니까.”
“…아. 당신이 그 소문의, 왕자군요.”
“왕자는 아니다.”
쫓겨났는데 왜 다들 아직도 왕자라고 부르는 건지 모르겠다며 카이엔은 한숨을 쉬었다.
“몰려온 언데드 군단은 모조리 격파했다. 너 혼자서 뭘 어쩔 셈이지?”
“흑마법사 한 명만으로도 그 정도의 군단은 얼마든지 다시 일으킬 수 있어요. 그녀를 돌려주세요.”
“돌려주라고? 헛소리를 하는군. 애초에 네 것이 아니었을 텐데?”
“그녀와 다시 만나기 위해 지금까지 살아온 거예요.”
“리치왕은 기억을 잃었어.”
“저라면 되살려낼 수 있어요.”
“기억을 되살려낸다면, 그 후엔 뭘 어쩔 거지?”
“그녀가 원하는 대로.”
청년의 물기 어린 눈동자에 빛이 번뜩였다.
“평화를 원한다면 평화를, 유지를 원한다면 유지를, 전쟁을 원한다면 전쟁을, 멸망을 원한다면 멸망을.”
“말이 안 통하네.”
혀를 차며 카이엔은 청년을 노려보았다.
“프라우디에는 못 넘겨. 충분히 잘 지내고 있고, 그 누구도 이 애의 삶을 방해할 수 없어. 멋대로 만들어놓고 또다시 멋대로 목숨을 거둬가려고 하는 것도, 용납 못 한다!”
프라우디에는 리치왕이되 리치왕이 아니다. 그 안에 라이프 베슬을 품고 있는 호문쿨루스일 뿐.
저자가 원하는 건 라이프 베슬 뿐이니 프라우디에를 죽이고 그 심장만을 꺼내 갈게 뻔했다.
청년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촉수도 플레시 골렘도 정리된 상태였다. 짧게 한숨을 쉬며 그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쿠구구구-
거대한 마력의 파동과 함께 땅이 거세게 흔들렸다.
단단한 지면을 뚫고 괴 생물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겉이 딱딱한 키틴질의, 커다란 지렁이처럼 생겼지만 큼지막하게 뚫린 입안에 몇 겹의 이빨들이 빽빽하게 자라있었고 혀 대신 수십 개의 촉수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청년은 멈추지 않았다.
“일어나세요, 죽음을 거슬러서.'
그 어떤 땅에도 시체는 묻혀있다.
전쟁을 겪지 않은 땅은 없다.
손바닥을 그으며 그가 내뱉은 말에, 그의 피가 바닥을 적시고 언데드들이 다시 일어났다. 그 광경에 프라우디에가 나서려고 하자 카이엔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할게.”
안심하라는 듯 웃어 보이고 카이엔은 사탄이 준 검을 손에 들었다.
그 안에 신성력을 담아서, 소드 마스터가 오러를 쓰는 것처럼 신성력을 압축했다. 검은 그것을 버텨냈다.
신성력을 충전한 검이 청년을 향했다. 쏘아진 신성력이 언데드들을 향했고 그 빛이 닿자마자 언데드 무리는 산산이 부서져 가루가 되었다.
그 여파는 청년에게도 닿았지만 머리카락이 살짝 잘려 나간 정도였다.
입술을 깨물며 카이엔은 서툰 움직임으로 언데드를 베어나갔다.
지금까지 같은 흑마법사들과 싸워도 항상 우위를 점했던 프라우디에지만 지금 나서게 둘 수는 없었다. 왠지, 느낌이 그랬다.
사탄이 준 검은 꽤 많은 신성력을 담아도 부서지지 않았다. 그것을 믿고 그는 거세게 검을 휘둘렀다.
“…예전과는, 다르네요. 하긴. 아무리 기억을 되살린다는 목적이 있다고 해도, 같은 과거를 겪게 할 수는 없으니 차라리 다행일까요?”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청년은 무표정한 얼굴로 카이엔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같은 은빛 머리카락을 가진, 현재 그녀의 심장을 품고 있는 아이를 지키려는 듯 앞으로 나선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에게 와주세요. 예전처럼 곁에, 있고 싶어요. 예전처럼…”
그 목소리는 간절했지만 닿지 않았다.
그에게 검을 겨누며 카이엔이 물었다.
“넌 대체 뭐 하는 놈이지? 리치왕의 곁에 너 같은 놈이 있다는 건 듣지 못했다. 한 군단을 이끌 정도의 녀석들은 죄다 죽거나 봉인당한 거로 알고 있는데.”
“그들과 저는 조금, 달랐으니까요.”
시선이 살짝 내려앉았다가 다시 프라우디에를 향했다.
“…지금까지 당신을, 꽤 안전하게 보살펴주고 있어서 흠집을 내고 싶진 않았는데. 어쩔 수, 없네요…”
청년의 주변으로 검은 불꽃이 일렁이는 것을 보고 라스와 자네인이 달려들었지만 마력의 파동에 가로막혀 튕겨 나갔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지팡이가 하나 들려있었다. 프라우디에는 그것에서 익숙한 마력을 느꼈다.
“안 돼…!”
그가 지팡이를 휘두르자 프라우디에는 카이엔을 뒤로 끌어당기며 자신이 앞으로 나섰다.
저 마법을, 막을 수 없었다.
그저 억지로 궤도를 틀어서 빗나가게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마저도 완전히 틀어지게 할 수도 없었고 조금만 방해할 수 있었다.
청년이 마법으로 쏘아낸 검은 창은 카이엔을 비껴가 바닥에 꽂혔지만 그 여파는 사방으로 퍼졌다.
거센 바람이 휘몰아쳤고 이대로라면 폭풍에 버금가는 바람에 휩쓸려 날아갈지도 몰랐다. 비셰가 마법을 써서 모두를 땅에 붙들어놓았다.
바람이 몸을 때리며 귓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그 사이로 괴이한 비명이 파고들었다.
몸을 병들게 하고 정신을 좀먹는 역한 기운이었다.
카이엔은 신성력을 끌어올려 모두를 보호했다.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의 바람 속에서 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그는 신성력을 끌어올렸다. 과연 신성력으로 이걸 없앨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지만 해보지 않는 것보단 나았다.
끌어모은 신성력을 단번에 터뜨리며, 카이엔은 이 주변을 둘러싼 저주와도 같은 바람을 몰아냈다.
빛이 번쩍이며 비명을 토하던 바람이 멎었다. 그리고, 카이엔은 청년과 맞서 싸우고 있는 프라우디에를 발견했다. 프라우디에가… 밀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었다.
게다가 자세히 보니 검은색의 무언가가 프라우디에의 양 손목에 감겨있었다.
프라우디에의 공격을 막으면서 청년은 한숨을 쉬었다.
“…누군가가 마법을 풀어버렸네요. 하긴, 그게 있었다면 제가 훨씬 더 빨리 찾아냈을 테고 이렇게 시간 끄는 일도 없었겠지만.”
그는, 사랑하는 이의 심장을 품고 있는 호문쿨루스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는 처음과 달랐다.
리치왕과 프라우디에를 구분하는 듯, 담담한 눈동자가 프라우디에를 향했다.
“마법을 쓰지 못한다면 당신의 신체 능력은 형편없어요. 예전과 지금이 이거 하나는 같군요. 그 외엔 공통점이라곤 손으로 꼽을 정도로 적지만.”
“나를… 나를 이대로 내버려 둬요!”
프라우디에가 외쳤다.
그 외침은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가족도 가짜, 이 몸뚱이조차 누군가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가짜, 심지어 심장마저도 남의 것이에요! 하지만 이런… 이런 저여도 함께 있어 주는 사람이 있고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의지할 수 있는 동료들이 있어요! 이대로… 이렇게 살아가고 싶어요!!”
프라우디에의 처절한 외침에 청년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입술을 깨물며,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을 주며 그가 말했다.
“…싫어요.”
처음은 작은 중얼거림이었다.
“나만, 나만 놔두고 그렇게 떠나버렸으면서… 나는 당신이 없으면 안 되는데. 차라리 그때 나도 같이 데려가 줬으면 좋았잖아요. 난 못해, 난… 왜, 왜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거야, 왜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난 당신밖에 없었는데, 당신 말곤 다 필요 없는데…”
그의 손에 들린 지팡이가 눈 녹듯이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 흉흉한 기운을 뿜어내는 검이 한 자루 생겨났다.
이윽고 고개를 든 그는 일그러진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가짜 몸. 당신과는 닮지 않은 육체니까.”
“부수고, 갈라서 심장만을 가져갈게요. 괜찮아요. 더 좋은 몸을 준비해놨으니까요.”
정말로 프라우디에를 죽이고 라이프 베슬만을 가져가려는 듯, 살기가 퍼졌다.
죽일 듯이 달려드는 그의 검을 자네인이 막았다. 몇 합을 겨루었고 독룡인 자네인이 밀릴 정도의 힘으로 그는 검을 휘둘렀다.
“죽이게 둘 것 같아?!”
“방해하지 말아요!”
청년은 순수하게 검으로 상대하는 것도 아니었다.
상대를 위축시키는 기운이 그의 몸에서 흘러나왔다. 아무리 자네인이 독룡인 티아마티스의 피를 받았다고 해도 살아있는 생명인지라, 자신도 모르게 몸이 굳었다.
그녀에게 방해가 될까 봐 다른 이들은 섣불리 그 싸움에 끼어들지 못했다.
프라우디에는 알 수 없는 이상한 감정에 몸을 떨었다.
저 청년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이, 힘이 너무나도 익숙했다. 토할 것만 같았다.
마력이 구속되어서 그것을 부수려고 해도 잘되지 않았다. 그보다 상급의 힘이라니 믿을 수 없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지금의 내가 약한 거야…’
리치왕의 힘을 모조리 이끌어낼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지 못하기에 발목을 잡고 만 것이다.
그때 카이엔이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았다.
“프라우디에.”
“왕자님…
“이거, 부술 수 있을까?”
“모르겠어요. 해보려고 해도 안 돼요…”
“…신성력 좀 써볼게.”
프라우디에에게 양해를 구하고 카이엔은 그를 붙잡고 있는 구속구에 신성력을 보냈다.
따끔한 느낌에 프라우디에게 움찔 몸을 떨자 카이엔은 바로 손을 뗐다.
“이런… 괜찮아?”
“네. 조금 따끔하기만 했어요.”
“마신의 신성력이란건 애매하네.”
언데드를 멸할 수도 있고 그들을 치유할 수도 있으니.
술자의 마음대로 발현된다는 건 좋았지만 지금 상황에선 미묘하게 작용했다.
프라우디에는 주먹을 꽉 쥐었다. 자네인이 열심히 맞서고 있기는 하지만 저 청년의 움직임은 상당히 이상했다.
저렇게 틀어질 리 없는 근육을 억지로 비틀어서 움직일 수 없는 방향으로 팔이며 손목을 꺾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느끼지 않는 모양인지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네인이 잘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검에 희미하게 띈 것은 오러와 유사했다.
멋으로 리치왕의 부하였던 건 아닌 건가.
카이엔의 중얼거림에 프라우디에는 무언가를 떠올렸다.
리치왕을 알고 있는 저 남자는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괴물이었다.
하지만 인간의 형상을 띄고 있고 말도 안 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재능이 없어도 백 년 이백 년을 넘어 천년 가까이 수련을 하게 되면 실력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여러 가지 힘이 엉켜있는 것만 같았다. 억지로 마력을 쥐어짜 청년을 관찰하던 프라우디에는 탄식에 가까운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큰 목소리로 외쳤다.
“물러나세요, 잔느!!”
그러나 그 외침이 무색하게 그 순간 모두의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며 비틀거렸다.
광범위한 에너지 드레인이었다.
바닥의 풀조차도 바짝 말라 시들어버렸다. 죽일 수 있음에도 청년은 자네인을 무시하고 카이엔을 지나쳐 프라우디에에게 다가갔다. 비셰가 쏜 마법은 빗나갔다.
“함께 가요.”
“나는…”
청년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프라우디에의 목을 움켜쥐었다.
손의 마력을 구속한 것만으로도 모자랐던 건지, 움켜쥔 가느다란 목에도 그와 비슷한 검은 고리가 생겼다.
목을 조르지는 않았다. 대신, 마력으로 충격을 주었다.
뇌를 흔들 정도로 강한 충격을 주어 기절시킨 다음 그는 프라우디에를 안아 들었다. 이걸로 그의 목적은 달성되었다. 다른 이들은, 그의 관심 밖이었다.
그때, 또 다른 불청객이 끼어들었다.
새까만 검날이 허공을 갈랐고 청년은 엔베인과 마주 보게 되었다. 잠잠했던 눈동자가 거세게 떨렸다.
“그런…!!”
그는 프라우디에와 엔베인을 번갈아 가면서 쳐다보더니만 이를 갈았다.
“어째서, 어째서… 나만, 나만 있으면 되는데. 어째서!!”
그 외침은 절규와 같았다.
엔베인에게 맞서기 위해 그는 다시 검을 손에 들었다. 그를 공격하는 다크 엘프의 손에 들린 마검을 알아보고 청년은 허망한 웃음을 흘렸다.
“하,하하… 그런 거였구나. 이젠 상관없지만.”
이걸로 됐다면서, 그는 프라우디에를 안아 든 채 땅에 발을 한번 굴렀다.
크고 작은 뼈들이 솟아올라 새의 형태를 이루고 빈 곳을 검은 마나가 가득 채웠다. 그 위에 올라탄 그는 마법으로 엔베인을 견제했다.
도망친다.
에너지 드레인의 후유증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와중에도 다들 그 광경을 목격했다.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움직이고, 일어나다 고꾸라지면서도 그들은 몸을 일으켰다.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방해하려 드는 그들을 보고 청년은 귀찮다는 듯 마법으로 그들을 견제했다.
신성력을 써서 몸을 일으켜 세운 카이엔은 청년이 만들어낸 새의 형태를 무너뜨리려고 했지만 힘이 모자랐다.
“다시 만날 일은 없으면 좋겠네요.”
그 한 마디를 남기고 그는 검은 새를 움직였다.
카이엔은 이를 악물고 들고 있던 검에 신성력을 덧씌우고 새를 향해 던졌다. 검은, 새에 닿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졌고 그 뒤를 이어 비셰가 마법으로 만들어낸 화살을 쏘았지만 방어에 가로막혔다.
이어지는 방해에 청년은 더욱 강한 공격을 했다.
마력을 뭉쳐서 만든 거대한 창이 지상을 향해 낙하했고 쓰러진 모두를 지키기 위해 엔베인이 마검으로 창을 받아냈다.
“큭…!”
마검으로 충격을 상쇄하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버티고 선 그의 몸이 저절로 뒤로 밀려났고, 마력으로 구성된 창은 마검 때문에 사방으로 조각나 퍼지는 대신 그대로 폭발했다.
“엔베인!”
“너 괜찮아?”
폭발한 뒤 창은 소멸했고, 동료들은 발을 질질 끌며 엔베인에게 다가갔다.
엔베인은 부상을 당한 건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볼 수 있었다.
그의 얼굴 절반이 날아가 흰 뼈가 드러났고 안구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푸른 불꽃이 넘실거렸다.
잘 보니, 공격으로 인해 얼굴이 사라진 게 아니라 피부가 녹아서 떨어지고 있다는 게 정확했다.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른 손으론 마검을 잡은 채 엔베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