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대륙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 전체적인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검은 숲 토벌로 인해 용병들이 세자르로 몰려오는 시기에 사람을 따라 소문 또한 끊임없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어느 나라 어느 지역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다. 어떤 몬스터가 나타났는데 피해가 이렇게 컸다. 이러다가 망하는 게 아니냐.
난데없는 종말설이 돌기 시작하면서 사이비가 판을 친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확실히 성국에서도 사이비 조심하란 편지를 보냈긴 해서 카이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사이비가 절대 영지 안으로 들어오지 않게 철저히 감시할 것을 명령했다.
종말설이 대두되면서 인간의 힘으론 도저히 벗어나지 못할 고난이 밀려오고 모두 죽을 것이니 다들 이러이러한 신을 모셔야 한다는 이단, 사이비의 교리가 퍼지기 시작했다.
영지민들도 외부 손님들로 인해 그런 소문을 하나씩 듣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르는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온 흉흉한 소문 속의 신보다는 가깝고 친근한 마신전으로 향했다.
꽃이나 그날 갓 구운 빵을 바치고 기도를 하러 찾아왔다.
기도하러 온 날 우연히 카이엔을 만난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불안해하며 유일한 마신의 사제인 카이엔에게 물었다.
“왕자…아니, 백작님.”
“왜?”
“정말 종말이 올까요?”
“어디서 이상한 소문을 듣고 온 모양인데, 안 와. 그런 말 없다.”
“다행이네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이들을 보고 카이엔은 신전에 있는 이들을 쭉 훑어보았다.
아닌 척하면서도 다들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담담히 그가 입을 열었다.
“사이비 보면 신고해라. 걷어차서 내쫓을 테니깐.”
“네~”
“이래야 우리 왕자님이시지.”
“내가 뭐.”
“왕자님이 최고라고요.”
신전에 방문한 영지민들은 나름대로 불안을 품고 찾아왔지만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카이엔의 행동에 안심하고 돌아갔다.
카이엔 또한 그걸 알기에, 평소처럼 행동했다.
불안은 전염되는 것이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볼 수 있는 신의 대리인인 그가 위태로운 모습을 보이면 그를 믿고 따르는 영지민들 또한 흔들릴 것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더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는 신전 주변의 풀을 뜯어서 엮어 팔찌를 만들어 제단 위에 올려놓았다.
“가져가고 싶으면 가져가. 부정한 것을 막아줄 수 있을 테니까.”
그 말에 몇몇 아이들이 그가 만든 팔찌를 가져가서 다른 친구들에게 자랑했다. 왕자님이 직접 만들어준 것이라면서.
그저 풀을 엮어서 만들고, 가운데에 꽃을 하나 장식해둔 팔찌일 뿐이었다.
하나 그것을 가져간 마을 소녀 한 명이, 늘 악몽에 시달리던 그 아이가 팔찌를 머리맡에 두고 잔 날은 악몽을 꾸지 않았으며 대신 아침에 눈을 뜨니 꽃 팔찌가 새까맣게 변해버렸다고 말했다.
그 소문이 퍼지면서 다들 앞다투어 영험한 효능을 보려고 신전을 찾아왔다.
성국 사제들이 걱정한 대로 사이비가 접근하기도 했다.
평범한 민간인으로 위장해서 들어온 이들은 신전 주변을 서성거리다가 카이엔이 나타나자 얼른 그에게 달려왔다.
“사제님! 사제님이신 왕자님 맞으시죠?”
“마신님을 모시는 유일한 사제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희도 신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너희 같은 사이비 말은 안 듣는다.”
“네? 저희는 사이비가 아니라…”
놀랍게도, 카이엔은 단번에 그들이 사이비란 걸 알아차렸다.
당황하는 사이비에게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마신께서는 신도 늘리는 데에 열중하지 않는다. 그저 믿는 자에겐 조금이나마 더 관심을 주고 믿지 않는 자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지. 믿어주면 좋고 안 믿어도 나쁠 건 없다는 거다. 멸망이 다가왔을 때, 신자들만을 구원한다는 말은 옳지 못하군. 신자들만이 살아남는다는 법이 없으니.”
도대체가, 멸망의 때가 찾아오면 신도들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다 죽는다는 건 누가 생각해낸 건지 모르겠다며 카이엔은 혀를 찼다.
그런데 사이비들 앞에서 당당하게 이런 말을 하며 쫓아낸 날 밤, 그는 꿈 속에서 마신을 만났다.
힘을 줄이고 줄인 탓에 어린애 모습을 한 채로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다니고 있었다.
“신도 필요해! 사제들도 더 필요하다고!!”
…라면서 떼를 썼다.
한참 동안 바닥을 굴러다니다가 그에게 매달려서 엉엉 울다가 다시 바닥을 구르기 시작하니, 하는 수 없이 카이엔은 어린애 모습을 한 마신을 안아 들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어린애 모습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아니… 그렇다고 신도를 억지로 모을 순 없잖아요?”
“으허엉-”
“천신이랑 싸우셨어요? 어차피 인간계에선 인기 없을거란 건 알고 계셨잖아요.”
“그치만, 그치만!!”
“저랑 저희 식구들만으로 만족하세요. 양보단 질이라잖아요.”
“…훌쩍.”
카이엔의 품 안에서 마신은 열심히 투덜거렸다.
어린아이 모습을 하고 있으니 유치해지기로 한 모양이었다. 카이엔은 군말 없이 그 투정을 받아주었다.
“마계에서 악마들이 대접 안 해줍니까?”
“…걔네는 하도 오래 살아서 신 안 믿어. 존재는 믿어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아.”
그런 문제가 있구나.
하긴 수명이 몇백 년을 넘어서 천년이 넘어가면 그럴 만도 했다. 그렇게 오래 살았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신으로 추앙받을 정도가 아닌가.
드래곤은 자연과 균형의 종족이라 정해진 수명이 있지만 악마의 경우엔 시간이 그들을 죽일 수는 없었다. 그런 악마들이니 마신의 존재는 알고있어도 떠받들 마음은 생기지 않을지도 몰랐다.
전 마왕에 그가 아는 악마들만 봐도 악마들은 제멋대로에 이상한 놈들 투성이었으니까.
꿈속에서 카이엔은 마신과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신은 그에게 이러저러한 것들을 요구했다.
첫 번째, 기도문을 만들어주라는 것.
거창하지 않아도 좋다. 대충 만들어놓은 저 석판 떼어버리고 좀 멋지게 말을 가꿔주라는 것.
두 번째, 신전은 계속 깨끗이 관리해주라는 것.
꽃이든 깨끗한 물이든 빵이든 다 좋으니까.
세 번째, 될 수 있으면 사제도 만들어주라는 것.
카이엔은 교황이라고 칭하는 데엔 무리가 있고 일단은 주교라고 칭하기로. 딱 하나뿐인 교구를 다스리는 중심인물이니까.
딴 건 몰라도 저 세 가지는 꼭 해주라면서 마신은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했다.
꿈속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눈 뒤 카이엔은 눈을 떴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아직도 생생해서, 잊어버리기 전에 얼른 종이에 옮겨적었다.
마신이 부탁한 것들은, 좀 더 머리를 짜내서 해보기로 했다.
정말, 정말 기본적인 것부터 시작한다면. 하다 보면 마신의 맘에 들 정도까진 되겠지.
애초에 그는 영지에 마신의 신전을 떡하니 세워놓긴 했지만 그 누구에게도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그냥 만들었으니까, 신전이 있으니까 한 번씩 구경하러 오고 기도도 해보라고 할 뿐이었다.
그래서 신전은 마을 아이들의 새로운 놀이터가 되어서 아이들이 꽃을 꺾어다 놓으면서 기도하는 시늉을 하거나 잡다한 고민거리를 안고 신에게 마음속으로 열심히 말을 거는 장소가 되었다.
하지만 이전의 꽃팔찌도 그렇고, 카이엔이 매일 두고 가는 성수가 효력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자 어른들의 발길 또한 늘어났다.
그러다 보니 카이엔이 신전에 방문할 때 마주치는 사람의 수도 점점 많아졌다.
“왕자님…아니 백작님이다!”
“아냐! 신전에서 만났으니까 사제님이지!”
“왕자님!”
“백작님!”
“그럼 난 사제님!”
아이들이 신이 나서 갖가지 호칭으로 카이엔을 부르면서 반가워했다.
그 외침에 기도하고 있던 어른들도 벌떡 일어나서 그에게 인사를 했다. 카이엔은 손을 흔들면서 그 인사에 답해주었다.
“흠, 왕자님께서 사제로서 한 마디 하는 건 어떠신가요?”
“뭐?”
“나쁘진 않을 겁니다.”
“그렇긴 하겠지만…”
고민 끝에 카이엔은 홀 안쪽까지 걸어갔다.
제단의 앞, 단상. 그곳에 서서 카이엔은 신전에 모인 이들을 둘러보았다.
제단 위에는 사람들이 가져온 꽃이 한가득이었다.
그를 향한 시선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섞여 있었다. 어른들의 경우엔 의문과 불안이었고 어린아이들은 반가움과 호기심 등이었다.
사제로서 사람들 앞에 서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던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카이엔이 입을 열었다.
“…여기에 이렇게 사람이 많다는 건 다들 불안한 일이 있어서겠지. 이해한다. 요즘 불온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는 건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괜찮을 거다.”
그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이곳을 지킬 거다. 나와 함께하는 이들에게 있어서도 이곳은 또 다른 고향이나 마찬가지니까. 그 어떤 괴물들이 몰려온다고 해도 나는 이 땅을, 그리고 이 땅에서 살아온 너희를 지킬 거다.”
이중에선, 그가 세자르에 왔을 때부터 그를 봐왔던 이들도 많았다.
어린아이는 쑥쑥 크기 마련이고 그런 그들에게 있어서는 카이엔 또한, 갑자기 쑥 커버린 데다가 대단한 존재가 되어버린 인물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성력은 타인을 지키기 위해 쓸 수 있는, 써야 하는 고결한 힘이니까. 내가, 좀 더 잘 해내겠다.”
“왕자님…”
“임시 진료소, 같은 것도 열면 좋겠지. 매일 열지는 못하고 내가 나중에 공지하겠다. 신성력으로 치유할 수 있는 부상자에 한해서는 내가 돌봐줄 수 있으니까. 치료받은 사람은 마신께 감사 인사만 해도 돼. 그것만으로도 기뻐하실 테니까.”
신전에서, 단상의 앞에서 바라보는 이들은 평소와는 달랐다.
마음속에 불안이 생겨서 그것을 혼자서는 이겨낼 수 없어서 모인 이들이었다.
그런 그들을 이끌어주는 게 신의 사자인, 사제의 일이었다.
온화하게 웃으며 카이엔이 말했다.
“기도하시겠습니까?”
그의 말에 다들 손을 깍지껴 잡고 고개를 숙였다. 어린아이들조차도 떠드는 것을 멈추고 어른들을, 눈앞에 있는 카이엔을 따라 했다.
유일하게 눈을 뜨고 있는 이는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위험한 상황에 대비해 카이엔의 곁을 지키고 있는 바이스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볼 수 있었다.
카이엔이 모두와 함께 기도하고 있는 순간, 아주 잠깐이지만 그의 등 뒤에서 빛이 반짝였다가 사라진 것을…
‘지켜보고 있으신 모양입니다.’
이곳은 신전이니까. 게다가 카이엔이 있으니까.
오랫동안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던 마신이 유일한 인간 사제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듯 작은 깜빡임이 있었다.
며칠 뒤, 임시 진료소가 열렸다
애초에 세자르 영지는 그리 넓지 않았기에 환자의 수도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노인들이 관절염의 통증으로 온다거나 어린애들이 놀다가 다쳐서 오는 일뿐이었다.
넘어져서 다쳤다고 엉엉 울면서 온 아이의 무릎을 치유해주면서 카이엔이 말했다.
“너희, 내가 고쳐준다고 막 위험하게 노는 건 아니지? 낫는 건 금방이어도 아프잖아.”
“히잉-”
“울지마. 뚝.”
“울면 지옥 가요?”
“누가 그런 미친 소리를 해!?”
“저번에 어떤 아저씨가-”
“외부인이지?”
“네.”
“외부인 말 듣지 마. 특히나 지옥 간다 어쩐다 하는 거 다 거짓말이야.”
“정말요?”
“그럼.”
아이의 눈을 보며 카이엔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르는 아저씨보다는 익숙한 카이엔이 더 믿음직스러웠으므로 아이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제 안 아프지?”
“네!”
“너무 달려 다니지 말고, 위험한 놀이 하지 말고. 또 다쳐서 오면 그땐 혼난다.”
“헤헤. 잘 있어요 왕자님~”
“너 대답은 안 하냐?”
웃으면서 아이는 손을 흔들면서 가버렸다.
그러다가 돌부리에 걸려서 다시 넘어질 뻔했지만 가까스로 균형을 잡고 넘어지지 않았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카이엔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임시 진료소는 일주일에 두 번, 두 시간 정도 열렸다. 환자가 적은 탓이기도 했고 카이엔이 낼 수 있는 시간이 그 정도 뿐이어서였다.
물론 두 시간 동안 쉼 없이 치료를 하는 일은 없었다.
그를 보러온 아이들이 열심히 말을 걸어서 놀아주는 게 대다수를 차지했다.
그러던 중, 그들의 귀에 테러에 대한 소식이 들려왔다.
대상은 제국의 상단과 가르간트의 상단, 그리고 귀족 가문 몇몇 군데였고 그 안에 독스 백작가가 끼어 있다는걸 확인한 카이엔은 인상을 썼다.
“…슬슬 오겠군.”
실력을 가늠하려는 듯, 그것이 아니라면 힘을 확인해보려는 듯.
무작위 위치에 뿌려지듯 나타나던 몬스터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강해졌다.
카이엔은 긴장을 늦추지 않기로 했다. 주변 경계를 강화하고 어떤 위험이 닥쳐도 대처할 수 있게끔 기사며 병사들을 훈련시켰다.
그리고…
“이 근처, 려나…”
검은 망토를 뒤집어쓴 청년이 중얼거렸다.
그는, 높은 방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드디어 도달한 것이었다.
그보다 먼저 선수 쳐서 라이프 베슬을 손에 넣은 녀석들이 만들어낸 것이 사는 곳에…
조사는 어느 정도 한 뒤였다.
몬스터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쫓겨난 왕자가 이종족과 어우러져서 사는 마을을 만들었다고 들었다.
물론 거주민의 90퍼센트 이상은 인간이었고 다른 지역의 인간들보다 이종족을 배척하는 부분이 적다는 것뿐이었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어우러져서 산다고 할 수 있지 않나?
짧은 잡념을 털어내고 그는 방벽에 집중했다.
그가 잘못 알아낸 거라면 다른 곳으로 가면 그만이었다.
하나하나 확인해보다 보면, 부수다 보면 당신이 나타날 테니까.
그는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걸음을 떼었다. 그림자 안에서 괴물들이 솟아올랐다.
구울과 스켈레톤, 좀비가 그의 뒤를 따랐다. 마치 물결처럼 솟아올라 대군을 이루었다.
아직 해가 떠 있는 시간이라 악령들은 힘을 쓰지 못했다.
흙바닥에 손을 짚고 그는 땅속에서 괴물을 불러냈다. 연구실에 있던 실험체를 꺼내오는 것이었다. 그것들은 그를 앞질러서 달려 나갔다.
“…아.”
얼마나 더 오래 가야 할까.
아마 소문이 먼저 퍼질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아이칸트라 제국과 가르간트의 국경 부근에 위치한 나트폰트라 변경백령이니까.
‘상관없겠지.’
고개를 젓곤 그는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그보다도 먼저 앞으로 달려 나간 괴물들로 인해 그가 성벽 앞까지 도착했을 땐 이미 전투로 인한 소란이 엄청났다. 눈먼 화살이 그의 발치에 날아와 박혔다.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그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인간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기에 그는 품에서 검은색 유리 조각 같은 것을 꺼냈다. 그것을 전투를 하는 기사들을 향해 던지자 유리 조각이 칼날처럼 날아들어 그들의 몸에 박혔고, 그대로 그 몸뚱이를 파먹고 흡수했다.
비명이, 울려 퍼졌지만 그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조종당하는 인간은 제 심장에서 검을 뽑아내 닥치는 대로 아군이었던 자들을 베기 시작했다.
베어서 흡수하고, 몸체를 불려 나갔다.
소란 속에서도 그는 묵묵히 걸어갔다.
귀가 멀 정도의 굉음이, 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누군가의 울부짖음이, 마법이 내는 폭음이, 그에게는 아무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그가 불러낸 괴물들이 인간을 도륙하고 있는 와중에 도망치는 자들의 모습이 눈동자 안에 비쳤다.
그는 도망치는 이들을 무시했다. 죽든 살든, 그가 알바가 아니었다.
‘아아.’
양손으로 얼굴을 덮어 가리면서 그는 탄식을 흘렸다.
‘빨리, 당신을 만나고 싶어.’
그렇게 생각하는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피가 튀기고 비명이 울려 퍼지는 와중에 그는 즐거워하고 있었다. 곧 찾아올 기쁨과 환희에 젖어 웃고 있었다.
죽은 자들이 언데드가 되어 그 뒤를 따랐다. 군세는 수십에서 수백으로 불어났고 그는 계속 걸음을 옮겼다.
언데드들에겐 휴식이 필요 없었기에 밤에도 이동은 계속되었다.
괴물들의 습격에 나트폰트라 변경백령에서 주변 영지와 수도에 위험을 알렸고 인접한 영지들도 언데드의 공격에 대해 방어책을 만들었지만 그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 아아아아
악령들이 울부짖으며 산 자의 혼을 현혹하고 빼냈다.
사람을 악몽에 밀어 넣고 공포에 젖게 하여 미치게 했다.
정신이 파괴된 이들은 아군을 죽였다. 근처에 있는 동료를, 친우를, 가족을 제 손으로 죽이고 죽임당했다.
악령들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것은, 기괴하고 음산한 성가와도 같았다.
반투명한 모습의 여인이 악령들의 중앙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녀의 지휘에 맞춰서 악령들은 춤을 추고 입 모아 저주를 읊어댔다.
“망령의 여왕.”
그 목소리에 그녀는 검은 후드의 남자에게 다가갔다.
말괄량이처럼 웃으며 그녀가 공중을 날아다녔고 그녀의 목소리에 힘입어 악령들은 더욱 날뛰었다.
“그래요. 밤은 짧지만 몇 번이고 올 테니까, 계속 즐기세요.”
걷다 지친 건지 그는 검은 말 위에 올라탔다.
갈기 대신 푸른 불꽃이 휘날리고 있는 말을 타고 그는 계속 움직였다. 그가 밟고 간 땅에서도 언데드가 솟아올랐다.
변경백령을 거치고 지나가는 길에 있는 지역까지 싸그리 짓밟으며, 언데드의 군대가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