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새 검도 받았겠다, 지금까지 체력 훈련에만 집중하던 바이스는 카이엔의 검술 훈련 시간도 차츰 늘려갔다.
물론 진검이 아니라 잘 만들어진 목검을 사용했다.
그러나 아무리 바이스가 봐주면서 상대해주긴 했지만 카이엔에게 그를 상대하라는 건 무리였다.
“무기만 좋으면 안 되죠. 쓰는 사람의 실력도 중요합니다.”
“응… 나도 알아. 아는데…”
“자세는 이렇게 잡아야 합니다.”
검을 잡는 것부터 서는 자세, 내딛는 걸음까지.
바이스는 작은 부분도 하나하나 가르쳐주었다.
그만큼 카이엔이 검술에 대해 아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제국에서 가르쳐준건 논외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렸을 적부터 검술을 심화 학습 시키는 거였는데.”
“나도 후회 중이야.”
“왕자님은 후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검술 스승을 해고한 건 저였으니까요.”
마검의 출연 이후로 세자르에 있는 이들의 시선은 전 대륙으로 향했다.
그리델라는 여전히 곳곳에 퍼져있는 마녀들로부터 검을 든 마물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가까운 곳이라면 직접 눈으로 보러 가기도 했고 먼 곳이라면 최대한 자세한 사정을 알아내려고 노력했다.
성국에서 성기사단을 파견해 마물의 퇴치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다는 건 소문으로도 에밀에서의 오는 안부 편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피스의 해안 지대에서 대규모 폴터가이스트 현상?”
“네. 그 외에도 밴시의 울음소리라던가 이상 현상이 자주 일어나나 봐요.”
“바다 쪽에 귀신이 많나?”
“아피스는 해양 산업이 발달해있고 배를 타는 사람이 많으니 빠져 죽는 사람이야 많겠죠.”
태연히 대꾸하는 바이스를 보고 카이엔은 한숨을 쉬었다.
“그 외에는?”
그의 물음에 그리델라는 헛기침을 하면서 마녀들이 전달해준 소식을 하나하나 읊었다.
마검을 든 마물과 정체불명의 귀신 소동. 그리고 검은 숲의 이상 현상에 대한 소문 등.
이쪽은 다른 영지에서 일어난 일인데 최근 괴상한 울음소리가 들려온다는 신고였다.
“…검은 숲도 가봐야 하나?”
일이 많았다.
바이스는 기사단을 꾸려서 보내면 될 일이라고 했다.
그게 아니라면 그 지역 영주가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확인하거나.
검은 숲과 인접한 북부 지역의 영주들은 전부 카이엔 앞에서는 설설 기었으니까.
그것이 과거 그를 내버려 둔 것에 대한 죄책감일지 왕위를 잇지 못했지만 왕족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소리만 들리는 거면 그쪽에서도 나서지 않겠죠.”
“그럼 아피스는?”
“멉니다. 여기서 제국 수도로 가는 것보다도 멀어요. 그쪽 사정은 그쪽에서 해결하도록 두어야 합니다. 타국까지 신경 쓸 정도로 우리가 여유로운 것도 아니고요.”
맞는 말이었다.
적은 프라우디에를 노리고 있을 테고 프라우디에의 위치를 알고 있을 확률도 높았다.
그러니, 적이 쳐들어올 때를 대비해서 중심부를 단단히 보호하는 수밖에.
야간 순찰은 더욱 강화되었고 기사들의 훈련도 이어졌다.
카이엔이 영지의 안위에 신경을 쓰자 마을 사람들도 자경단을 꾸려서 마을 내의 순찰을 맡겨달라고 말했다.
위험한 놈들이 나타나면 기사며 이종족 식구들이 나설 것이라는 걸 알기에 자질구레한 일은 이곳에서 사는 그들이 해도 된다고 말이다.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싸움에 대비해, 모두 철저히 준비해나갔다.
어느 날 밤. 프라우디에는 꿈을 꿨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호문쿨루스인 그는 꿈을 꾸는 일도 드물고 꾼다고 해도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꿈속에서 그는 은발의 여성을 보았다. 무언가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책을 읽고 연구 기록을 써 내려가면서 실험을 했다.
직접 사람을 죽이기도 했고 살덩이 속에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집어 넣었으며 손짓 하나만으로도 대군을 부렸다. 지금 그가 쓰는 힘보다 위험하고 위력적인 능력이었다.
프라우디에는 꿈속에서 그런 그녀의 뒷모습만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볼 수 있었다.
그와 똑같이 그녀의 뒷모습만을 바라보고 있던 남자를…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고 싶어서 손을 뻗었다가 거두었다. 그녀의 앞 혹은 옆에 서지 못하고 계속 뒤를 쫓았다.
마치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처럼.
프라우디에는 잠에서 깼다.
묘한 기분이 들어서 자리에서 일어난 프라우디에는, 지금까지 획득한 물건의 잔존 마력을 다시 한번 파악했다.
이것은, 이 힘은 누군가를 흉내 낸 힘이었다.
“리치왕…”
이런 힘을 당시에 낼 수 있었던 그녀가 위대한 건지, 그토록 긴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녀의 힘을 따라 할만한 능력을 가지게 된 그자가 무능한 건지.
지금의 프라우디에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리치왕의 라이프 베슬이 떨리고 있었다.
자신을 구성한 것과 비슷한 힘에 대한 떨림, 인 것 같다고 프라우디에는 생각했다.
그 뒤로도 세자르 영지는 마검을 든 마물을 세 차례나 더 격파해냈고 검은 숲 토벌에 나가서 정체불명의 키메라들을 처리했다.
누군가가 한 실험의 잔해인 것처럼,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몬스터들이 기괴하고 끔찍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이런 괴물들을 잡아봤자, 그 부산물은 쓸 수 없었다.
뒤틀린 신체와 마력 구조 때문에 땅에 영향을 주게 하지 않기 위해 불태워 없애야만 했다.
그걸로도 모자라 남은 재에는 성수까지 뿌려서 완전히 정화한 뒤에야 그들은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직접적인 공격 또한 있었다.
저택에 악령이 나타났다.
그때 나선 건, 카이엔이었다.
프라우디에에게 저택 식구들을 부탁한 그는 달려드는 악령 무리에게 맞서기 위해 앞으로 나서서 검을 뽑았다.
그가 검을 뽑으면서 내지른 신성력에 악령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소멸했다.
저택에 침범한 악령들을 모조리 내쫓기 위해 광범위하게 신성력을 쓴 카이엔은 그 뒤 이틀을 꼬박 앓아누웠다.
“저한테 맡기시면 됐을 텐데…”
쓰러진 카이엔을 보며 프라우디에가 힘없이 말했다.
하루 동안 기절했다가 눈을 뜬 카이엔은 시무룩해진 프라우디에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느리게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그가 말했다.
“너 혼자 짊어질 필요는 없어. 너도 봤잖아. 나도 충분히 할 수 있어.”
“그래도…”
“신성력이 대단하긴 하더라. 그 많던 악령들이 정화됐어. 그쯤 되면 언데드들한테도 통할걸? 조절을 잘해야겠지만…”
엔베인도 마검을 들고 있는데 괜히 휘말리면 낭패였다.
하지만 프라우디에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것밖에 못 하니까, 제가 해야 해요. 왕자님께 도움이 되고 싶은걸요.”
“넌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어, 프라우디에.”
카이엔이 그런 말을 할 줄은 알고 있었다.
워낙 다정한 사람이니까 자기가 거둔 이들에게 생긴 문제도 자기 문제로 생각하고 나서줄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어도 마음은 편치 않았다.
자네인과 이야기를 하는 내내 프라우디에의 표정은 어두웠다.
“…저 때문에 다들 위험해졌어요. 적을 얼른 처리하고 싶은데 그것마저도 잘 되지 않아요. 얼마나 강할지도 모르겠고… 분명 다들 다칠 거예요.”
“걱정하지 마. 지금까지 함께 몇 번이고 위험을 이겨냈잖아. 다들 너를 소중히 여기고 있어. 그리고 나 역시, 너를 지키고 싶어.”
“잔느…”
또르르 흐르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아주며 자네인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보고 프라우디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의 모두가 그를 멀리하려고 했다면, 버리려고 했다면 그의 심장이 리치왕의 라이프 베슬이란 것이 드러났을 때 즉시 티아마티스에게 떠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는, 카이엔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지금도 다들 힘을 모아서 어떻게든 이 난관을 극복해내려고 했다.
“…왕자님께 가볼래요.”
“같이 갈까?”
“혼자 가도 괜찮아요. 고마워요, 잔느.”
살포시 웃고 프라우디에는 카이엔의 방으로 찾아갔다.
한번 쓰러진 것 때문에 당분간은 실내 운동을 병행하기로 했던 카이엔인지라, 방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그가 찾아오자 카이엔은 읽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무슨 일이야 프라우디에?”
“인형의 태엽을 감을 때가 되었어요.”
“아, 맞다. 그랬었지.”
요새 바빠서 잊고 있었다며 카이엔은 머쓱해 했다.
한쪽에 세워둔 상자를 끌어와서 열자 처음 봤을 때와 똑같은 자세로 누워서 눈을 감고 있는, 정교한 인형이 있었다.
프라우디에가 지켜보는 앞에서 카이엔은 조심스럽게 인형의 태엽을 감았다.
끼릭. 끼릭.
삐걱이는 금속음을 내면서 다섯 번 정도 태엽을 감고 빼내자 그것을 신호로 인형이 서서히 눈을 떴다.
유리로 만든 건지, 보석을 깎아 만든 건지 모를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카이엔과 프라우디에의 모습을 담았다.
서서히 몸을 일으켜 두 사람의 앞에 선 인형의 입이 열렸다.
“…주인님?”
인형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면서 쳐다보았다.
그 모습에 프라우디에는 카이엔을 가리켰다.
인형의 안에 심어진 마석에 그의 마력을 불어넣었기 때문에 인형이 착각한 것이었다.
마력의 주인님의 행동에 인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카이엔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저를 깨워주셔서 감사해요.”
“…으음.”
“심장의 마석은 충전식이에요. 마력을 운용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충전할 수 있습니다. 인식이 되었기에 이제 주인을 바꿀 수도 없어요.”
“마석이라…”
“전투력도 우수하고 위력은 약하지만 마법도 쓸 수 있어요. 다만, 마석의 마력을 모두 소진하면 쓰러집니다. 태엽을 감는 식으로 마력 충전이 가능해요.”
“난 마력이 없는데도?”
“그런 경우엔 심장 부분을 열어서 마석을 꺼내 충전하면 돼요.”
“나 혼자서는 무리구나.”
프라우디에가 있어야 마력을 충전하는 것도 망가진 곳을 고치는 것도 가능했다.
인형이 인식의 절차를 밟는 동안 그 두 사람 말고 다른 이가 있으면 안 되었기에 바이스는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인형이 눈을 뜬 지금은 괜찮다며 프라우디에는 복도에서 대기하고 있던 바이스를 불러왔다.
카이엔의 생일 파티 때 인형을 보긴 했지만 정말로 태엽을 감은 것만으로도 움직이는 인형을 보고 바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종의 일을 가르쳐야겠군요. 아침의 세숫물 운반이라던가, 찻잔 옮기는 것 정도야 가능하겠죠.”
꼭 일을 시켜야 해?”
“그럼 방 안에 장식용으로 두실 셈입니까? 이상한 취미가 있다고 오해받기 딱 좋군요.”
“넌 무슨 말을 해도 그렇게 하냐…”
“이름은 지어주셨나요?”
“이름? 으음…”
바이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화제를 돌렸다.
그것에 걸려든 카이엔은 심각하게 인형의 이름을 고민했다.
인형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긴 고민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베누스. 앞으로는 그렇게 부를게.”
“네.”
인형은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형이지만, 베누스는 살아있는 사람처럼 미소를 지었다.
프라우디에가 만든 살아있는 인형.
마력을 원동력으로 움직이는 무기물.
라이프 베슬을 중심으로 해 피가 흐르고 맥박이 뛰는 호문쿨루스, 프라우디에와는 달리 베누스는 완전한 인형이었다.
어찌나 정교하게 만들었는지 이 모습만 봐서는 그 누구도 베누스가 인형이란 걸 알지 못할 것이다.
“이번에도 꽤 그럴듯한 이름을 지어주셨군요.”
“또 놀리려고 했어?”
“이상했다면요. 어떤 이름이든지 소금이보단 낫겠지만요.”
“후추라고 했어야 했나?”
“둘 다 이상하지만요.”
소금보다는 후추가 낫다고 했던 게 누구더라?
카이엔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바이스는 평소처럼 그의 불만을 무시했다.
그런 두 사람을 멀뚱히 쳐다보다가 베누스가 물었다.
“저는 무엇을 하면 되나요?”
“지금부터 하나씩 알려드리겠습니다.”
“마법은 제가 가르칠게요.”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마력으로 움직이는 인형인 만큼, 그 마력을 소모해 마법을 쓸 수 있노라 프라우디에는 설명했다.
물론 마법을 쓴다면 마력 소모가 극심하겠지만 언제든지 그가 다시 충전해줄 수 있었다.
위력은 약하겠지만 통신 마법 정도라면 얼마든지 쓸 수 있을 것이라는 말에 카이엔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