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날이 밝자 엔베인과 글라스는 새벽에 있던 일에 대해 카이엔에게 보고했다.
아침이 되자 외벽의 병사들에게도 보고가 도착했으므로 카이엔은 밤새 일어난 일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해가 뜨고 나서도 썩은 시체들이 그대로 남아있으니 조사할 필요가 있었고 마검에는 성수가 통했다.
그 이야기에 바이스가 물었다.
“성수를 대량 생산이라도 해야 할까요?”
“…무리야.”
인상을 쓰며 카이엔이 대답했다. 그가 성수를 만드는 건 효율이 너무 안 좋았다.
게다가 대량으로 물을 받아놓고 기도하면 그만큼 많은 신성력을 불어넣어야 하는데 그의 기도 실력으론 무리였다.
마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카이엔은 그렇게 생각했다.
문제는 또 있었다.
마신이 그를 예뻐해서 신성력을 퍼준다고 해도 물뿌리개 역할을 해야 할 그의 몸뚱이가 이 모양이니…
‘체력이 붙긴 하는 건가?’
바이스가 하루가 멀다 하고 훈련을 봐주긴 하지만 힘든 건 똑같았다.
물론 이건 그가 훈련에 적응이 될 만 하면 바이스가 몰래 슬쩍슬쩍 강도를 높인 탓이었지만 카이엔은 알지 못했다.
“전투가 있었다라… 엔베인 넌 괜찮아? 다친 덴 없어?”
“네.”
“다행이다. 비슷한 마검이라고 해도 문제가 생길 수도 있잖아. 남은 시체는 어떻게 할까…”
“프라우디에 님에게 맡기는 건 어떻습니까.”
“그럼 회수도 프라우디에가 하러 가야 할 거 아냐.”
“흑마법으로 만들어졌을 테니 섣불리 누가 손을 대는 게 더 위험합니다.”
“그럼 그렇게 하자.”
카이엔이 동의하자 바이스는 잠시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글라스에게 프라우디에를 불러와 주라고 요청한 뒤, 그는 다시 집무실로 돌아왔다.
잠시 후 도착한 프라우디에는 새벽에 이미 엔베인과 만난 적이 있었기에 이야기를 듣자마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조사할게요. 단서가 얼마나 있을진 모르겠지만요. 그… 엔베인 씨가 가져다준 마검 조각을 조사해봤지만 남은 건 없었어요. 성수에 닿지 않은 것마저도요.”
“이전처럼 흡수된 걸까?”
“그런 감각은 없었습니다.”
“조사는 프라우디에 너한테 맡길게. 순찰도 강화해야겠고.”
짧은 회의를 마치고 난 다음에야 카이엔은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으로 갔다.
빠르게 식사를 마친 뒤에 그가 의자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신전으로 가야겠어. 가서 청소도 좀 하고 아침 기도를 해야겠다.”
“알겠습니다.”
바이스는 말리지 않았다.
빠르게 마차가 준비되었고 카이엔은 바이스만 대동하고 마신전으로 향했다.
여전히 한산한 신전은 아침이라 동네 아이들도 놀러 오지 않았다.
매일 청소를 해서 심하게 더럽진 않았지만 카이엔은 빗자루를 들고 앞마당부터 쓸었다. 그 뒤엔 챙겨온 먼지떨이로 조각상의 티끌만 한 먼지들을 털어냈다.
마신을 상징하는 문장은 대략, 사발 모양으로 기울어진 초승달과 그 아래의 기형적인 문양, 얽힌 뱀 등으로 구성되었다.
정교하게 새겨놓은 조각과 제단은 앙그라 마이뉴가 선물한 것이었다.
지옥에 있는걸 줘도 되겠지만 인간의 미적 기준과는 맞지 않을 것이라며 적당히 보기 좋게 바꿨으니 신전에 두라면서.
바꿔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마신이 기도를 들어주는 걸 봐선 괜찮은 모양이었다.
정원에서 꺾어온 꽃을 제단 위에 올려놓고 카이엔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전능하신 마신이시여. 당신의 은혜로 어젯밤, 나의 동료가 무사히 위험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천신의 사제들이 세자르에 머무르면서 기도하는 방법에 대해 많은 조언을 줬기에 이젠 소리 내 말하는 기도에도 익숙해진 카이엔이었다.
그는 기도의 첫 운을 이렇게 떼었다. 성수가 도움이 되었으니 일단 그것부터 감사하는 것이었다.
누가 기도를 듣는 건 창피하다며 바이스를 멀리 떨어뜨려 놓은 뒤였기에 지금 바이스는 신전 입구를 지키고 서 있었다. 그의 청력이라면 고요한 신전에서 잔잔하게 퍼지는 목소리를 들을 수도 있겠지만 옆에 두는 것보단 나았다.
가만히 카이엔은 기도를 이어나갔다.
“…저는 당신이 왜 저를 선택했는지 아직도 모르지만, 언제나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죽음을 제멋대로 휘두르며 조종하는 자가 나타났습니다. 누군지는 아직 모릅니다만, 위험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부디, 당신의 백성들을 어여삐 여기시어 지켜주십시오. 지킬 것이 생겼으니 저는 이 땅을 지킬 것이고 제 곁의 사람들을 지킬 것입니다.”
“저는 무력합니다. 당신이 선사하신 힘을 절반도 채 쓰고 있지 못합니다. 이런 미련한 신자지만 부디 끝까지 놓지 말아 주시길.”
“제가 당신을 믿는 한 당신이 저를 믿고 당신이 저를 버리지 않는 한 저 역시 당신을 떠나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기도가 이어졌다.
그 순간 제단에 올려놓은 꽃 한 송이가 빠르게 시들었다.
카이엔은 고개를 들었고 짤막한 음성을 들었다.
- …과거의 망령.
- 억겁을…넘어서, …있다.
- 희망을… 리지 마라.
- 너와, 네 동료를 믿어라….
카이엔은 고개를 숙였다. 음성은, 그것으로 끊어졌다.
신이 띄엄띄엄 그에게 전한 말은 무엇일까.
그를 걱정해서 한 말인 것이 분명했다.
“기도는 잘 하셨습니까?”
“응.”
그가 신전 밖으로 나오자 바이스가 바로 옆에 붙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카이엔이 말했다.
“과거의 망령, 이라는 말을 들었어. 역시 리치왕과 관계가 있는 모양인데 악마들한테 물어봐야겠다. 일 끝내고 여유 있을 때.”
과거, 리치왕의 시절 경계가 무너져서 마계와 인간계의 결계에 틈이 생겼다고 했다. 그래서 약한 개체인 몽마들이 인간계로 이주할 수 있었던 것이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세계의 경계마저 틈이 생겼다는 걸까.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다며 카이엔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저녁 무렵, 식사 전에 카이엔은 앙그라 마이뉴와 연락을 취했다.
수정구를 앞에 두고 통신을 시도한 지 삼십 분째.
다른 일을 하는 중인지 답신이 들려오지 않았다.
“식사부터 하시죠.”
“아무래도 그래야겠다.”
계속 기다릴 수만은 없는 노릇이라 카이엔이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수정구에 빛이 반짝이면서 앙그라 마이뉴의 음성이 들렸다.
- 카이엔? 너냐?
“어. 됐네.”
- 무슨 일이야?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이따가 다시 연락하려고 했는데 다행이네요.”
- 그렇군. 이런 통신은 오랜만이구나.
“그러게요. 잘 지내셨습니까?”
- 나야 항상 같지. 요즘은 마계도 서서히 기틀이 잡히고 있고. 인간계는 큰일인 모양이던데.
“네. 모든 증거가 리치왕의 시절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프라우디에가 위험할 것 같아요.”
- 그 애의 안에 리치왕의 라이프 베슬이 있으니까. 흠, 네가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알 것 같구나.
잠깐의 침묵 뒤, 앙그라 마이뉴가 물었다.
- 시간 있니?
“아, 네. 어느 정도는…”
- 그럼 얼굴을 보면서 이야기하자.
“네? 잠깐-”
그가 말을 잇기가 무섭게 수정구에서 팔이 쑥 튀어나와 카이엔을 잡아끌었다.
옆에 있던 바이스가 놀라서 카이엔을 붙잡으려고 했지만 그 순간 앙그라 마이뉴의 목소리가 들렸다.
- 너는 못 데려간다. 평범한 인간은 마계에 올 수 없어.
“평범하진 않습니다만… 아무튼 알겠습니다. 저희 왕자님을 잘 부탁드립니다.”
- 물론이지.
그 목소리 탓에 바이스가 멈칫했고 카이엔은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눈앞에서 카이엔이 사라졌지만 바이스는 순순히 물러났다.
마법을 쓰지 못하는 그의 입장상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없을뿐더러, 앙그라 마이뉴가 카이엔을 해치지 않을 거라는 기본적인 신뢰는 바닥에 깔려있었다.
그 음성을 끝으로 통신이 끊어졌다. 그리고 카이엔은, 난데없이 앙그라가 그를 잡아끌어서 잔뜩 당황한 상태였다.
그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면서 그녀가 말했다.
“정신 차리거라. 시종이 없으면 아무 것도 못 하는 건 아니겠지?”
“갑자기 끌어당기면 어떻게 하란 거야…”
“네 의문에 답해주려면 이쪽이 편하다. 악마들은 수백, 수천, 수만 년을 살아가지. 거의 불멸이다. 리치왕의 시절은 너희들에게 있어서는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먼 과거의 일이지만 우리에겐 그 정도까진 아니거든.”
물론 관심이 있는 녀석들이나 알겠지만, 이라고 그녀가 덧붙였다.
“그 외에도 너한테 보여줄 녀석이 있고.”
“누군데요?”
“전 마왕.”
“네??”
“마왕 대리전이라는 정신 나간 짓을 벌인 녀석이지.”
“잠적했다고 들었는데요.”
“네비로스가 추적조에 합류했다. 마계를 이 잡듯이 뒤져서 결국엔 찾아냈지.”
네비로스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능력 있는 악마인 것 같았다.
카이엔은 열심히 고개만 끄덕이면서 앙그라의 말을 들었고 그녀는 피식 웃으면서 카이엔의 어깨를 두드렸다.
“네가 연락한 타이밍이 좋았다.”
“네? 그게 무슨…”
“왕자님?!”
익숙한 목소리에 익숙한 호칭.
카이엔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 자리에는, 그와 마찬가지로 깜짝 놀란 얼굴을 한 비셰가 있었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비셰의 옆에는 갈색 피부에 은발의 남성이 서 있었다.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건지 그는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옆에 있던 사람이 그러든 말든 비셰는 얼른 달려오더니 카이엔의 뺨을 붙잡았다.
“왕자님 맞으세요? 진짜??”
“…네가 있는걸 보니 여기가 마계가 맞긴 하구나.”
“어, 어떻게 여기 오신 거예요?! 인간은 못 올 텐데…!”
“마신의 사제이며 과거 나의 계약자였으니 내 권능으로 충분하도다.”
“쓸데없는 짓을 했군, 앙그라 마이뉴.”
비셰의 옆에 있던 악마, 아스모데우스가 입을 열었다.
그는 여전히 인상을 쓴 채 걸음을 옮겨 카이엔의 앞에 섰다. 비셰가 그의 눈치를 보면서 슬그머니 물러났지만 아스모데우스는 카이엔에게 시선을 떼지 않고 탐색하듯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폈다.
처음 보는 악마가 어쩐지 화가 난 것 같아서 카이엔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그런데 탐색을 마친 아스모데우스는 어쩐지 잔뜩 가시가 돋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인가? 릴리트의 새 남자가-”
“악! 아니라니까 왜 내 말을 못 믿는 거야?!”
옆에서 비셰가 비명을 지르면서 그의 말을 잘랐다.
멱살을 잡고 흔들었지만 아스모데우스는 멀쩡히 서 있었다. 오히려 떼어내기도 귀찮다는 표정으로 그냥 멱살을 잡힌 채로 비셰에게 흔들렸다.
뜬금없는 말에 잠시 할 말을 잃은 카이엔이 가까스로 정신줄을 붙잡고 물었다.
“…새 남자?”
“어찌나 네 이야기를 하던지. 왕자님, 왕자님 하면서.'
“악!!”
“도대체 이번엔 뭐에 취미를 들여서 그런 건지 전혀 이해할 수 없-”
“제발 좀 닥쳐요!!”
아스모데우스의 입을 틀어막으면서 비셰가 외쳤다.
피하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겠지만 아스모데우스는 잠자코 비셰에게 잡혀있었다.
그렇게 그의 입을 막은 채로 비셰는 연신 고개 숙여 사과했다.
“죄송해요. 이 악마가 나쁜 놈은 아닌데… 아니, 나쁜 놈 맞나? 아무튼 성격이 엄청 꼬여서요!! 나이 먹고 갈수록 속이 꼬여가는 고대 악마-”
물론 비셰의 말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말을 못 하게 막는 건 그렇다 쳐도 눈앞에서 욕하는 건 두고 볼 수 없었던 건지 아스모데우스가 비셰의 뺨을 잡아당겼다.
빵 반죽만큼이나 말랑거리는 뺨을 꼬집으면서 아스모데우스는 비셰의 손을 떼어냈다.
“으그그그-”
“입이 산 걸 보니 훈련이 힘들지는 않은 모양이군.”
“아… 그럼 그쪽이…”
“아스모데우스다.”
“비셰를 잘 부탁드립니다.”
“말 안 해도 알고 있어.”
“자기소개 끝났으면 이쪽으로 와라.”
어느새 앙그라 마이뉴는 저만치 앞까지 가 있었다.
바보짓 하는 이들 사이에 끼어있지 않고 싶었던 건지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팔짱끼고 지켜보고 있는 그녀를 보고 카이엔은 얼른 앙그라에게 달려갔다.
“루키푸게가 지금 다른 녀석들도 모으고 있어. 오기로 확정된 건 벨레드랑 가미긴 말고도 몇 명 더.”
“네비로스는?”
“계속 전 마왕의 동태를 살피는 중.”
“…그런데 전 마왕을 찾아가서 뭘 하려고요?”
“그놈이라면 리치왕의 재해에 대해선 가장 많은걸 알고 있을 테니까.”
“혹시 그때도 악마와 인간의 계약이 흔했습니까?”
“아니. 그땐 경계가 명확해서 드나드는 게 쉽지 않았어. 바늘구멍만 한 틈이 생겨도 하급 중의 하급이나 넘어갔지, 우리처럼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 통과하기도 쉽지 않고 만약 넘어가는 데 성공해도 힘이 대폭 줄어들고 압박이 심해서 제대로 된 능력도 못 썼을걸?”
그러나 앙그라는 이렇게 덧붙였다.
“하지만 마왕 정도 되면 다르지. 스스로 게이트를 열 수도 있으니까.”
“아…”
“물론, 리치왕의 재해 때 악마들이 나선 기록은 없어. 악마 숭배자들은 있었지만 그놈들이 소환하는데 성공한 건 하급뿐이었고. 하지만 리치왕은 상당히 강한 개체였고 마왕이라면 그 존재를 주시할 수밖에 없었을 거야. 결국엔, 인간계와 마계의 결계에 틈이 생겨버렸을 정도니까.”
그만큼 전 마왕 정도로 당시 인간계 사정에 능통하고 그곳 사정을 꿰뚫어 볼 수 있었던 놈은 없을 거라며 앙그라 마이뉴는 확신을 담아 말했다.
마법으로 다른 악마들과 소통하고 있던 건지 그녀는 잠시 무어라 중얼거리다가 카이엔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머지와는 그쪽에서 만나기로 했다. 잡아라.”
“장소는?”
“불러줄게.”
악마들의 언어인 건지 카이엔은 앙그라가 불러주는 좌표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나 아스모데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앙그라가 카이엔을 챙기는 것처럼 그는 비셰에게 팔을 내밀었다. 잡으라는 뜻이었다. 비셰는 질색을 하면서 손끝으로 그의 소매 끝만 잡았다가 머리를 한 대 쥐어 박혔다.
어쩐지 그 두 사람의 모습에서 티아마티스와 이노스가 떠올라서 카이엔은 힘들게 웃음이 터질 뻔한 걸 참았다.
머리를 많이 맞으면 멍청해진다던데 티아마티스는 이노스가 헛짓거리를 할 때마다 쥐어박곤 했으니…
“자, 그럼 멋대로 일 떠넘기고 잠적한 놈을 잡으러 가자.”
그 말을 끝으로 시야가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