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억지로 몸 안의 마력 용량을 늘리려고 외부에서 마력을 주입한 결과, 비셰는 정신이 나갈 정도로 바닥을 구르며 고통스러워하다가 눈을 떴다.
눈을 뜨고 나서는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눈동자를 굴려 위를 올려다보니 아스모데우스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끝났나?”
“어…”
“몸은 어때?”
“모르,겠어요…”
“아직 기운이 없겠지.”
잔뜩 갈라진 목소리에 혀를 차며 그는 비셰를 일으켰다.
축 늘어진 몸을 부축해 그의 품에 기대게 한 다음 그는 테이블 위에 있던 금색 잔을 집어 들어 그녀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마셔라.”
물은 아니었다.
진한 향이 나는 걸 보면 술인 모양이었다.
탈진한 사람한테 물도 아니고 술이라니.
속으로 한숨을 쉬는 비셰였지만 마시라고 하니 마실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잔을 비우자 아스모데우스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아 들었다.
“아직은 움직이기 어려울 테니 가만히 있어라. 하루 정도 쉬고, 몸 좀 움직여보고 마법도 쓰는 거야.”
피와 눈물로 범벅이 된 옷이 신경 쓰이지 않는 건지, 그는 제 방 침대에 그녀를 눕혔다.
이불까지 덮어주는 섬세한 배려가 있었지만 비셰는 알지 못했다.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빨리 돌아가야 해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
“왕자님, 생일 파티를 하기로 해서…”
“…쓸데없는 일이잖아.”
“다 같이, 준비하기로 했는데… 선물도….”
목소리가 작아지더니 그대로 비셰는 잠들었다.
안정된 호흡에 대조되듯 아스모데우스는 한숨을 쉬었다.
비셰가 언제 정신을 차릴진 그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동안 무슨 일이 있을까 봐 인간계를 확인하고 있었지만 그의 걱정이 무색하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제 몸 상태는 생각도 안 하고 또 그 왕자란 녀석의 이야기를 하는 게 맘에 들지 않았지만 그는 속으로만 불만을 삼켰다.
그렇게 이틀 꼬박 정신을 잃은 것처럼 잠든 비셰는 카이엔의 생일 당일, 저녁에 눈을 떴다.
“으아아앙! 어떡해! 늦었어!!”
“…뭐야.”
“늦었다고요! 어, 얼른 가야 하는데…!”
“하아…”
발을 동동 구르는 비셰를 보고 아스모데우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옷장에서 수건과 옷가지를 던져주면서 말했다.
“일단 씻고 나와라.”
“그, 그럴 시간 없어요!”
“네 꼴을 봐라.”
“마법으로 해결해도-”
“목욕 좀 하면서 머리 좀 식혀.”
“그치만-”
“들어 가라면 들어가!”
고집부리는 비셰를 억지로 욕실로 밀어 넣은 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이틀 만에 깨어나서 한다는 말이 왕자 생일 파티에 늦겠다는 말이라니! 무슨 동화책 속에나 나올법한 이야기도 아니고!
“정신 좀 차렸나 싶었는데.”
제 주제에 뭐가 그리 바쁜 건지.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리는 걸 봐선 고집을 꺾고 씻고 있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 푹 젖은 비셰가 목욕가운을 걸치고 욕실에서 나왔다. 시키는 대로 씻긴 했지만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다가 아스모데우스가 중얼거렸다.
“뭐가 그리 늦었다고 호들갑인지…”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는 작은 목소리였다.
비셰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그가 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이마를 툭 건드렸다.
그러자, 물기가 뚝뚝 떨어지던 머리카락이 단숨에 마르고 걸치고 있던 목욕 가운이 드레스로 바뀌었다.
흰색과 은색이 어우러진 드레스는 별다른 장식 없이도 굉장히 화려했다.
그 변화에 비셰는 깜짝 놀라 아스모데우스를 바라보았다. 무덤덤한 얼굴로 그가 입을 열었다.
“충분히 쉬고 다시 와라. 마력이 회복되는 속도는 이쪽이 더 빠르겠지만, 네가 돌아가고 싶어 하니까.”
“그-”
“내 마음이 바뀌기 전에 가.”
툭 내뱉고는 아스모데우스는 비셰의 어깨를 잡고 살짝 뒤로 밀었다.
그러자 어느새 바닥에 생긴 시커먼 구멍 안으로 비셰가 쏙 빠져버렸다.
몸이 낙하하는 느낌에 비셰는 비명을 질렀고 바닥의 구멍은 곧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후우-”
비셰를 보내고 난 다음, 아스모데우스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그놈의 왕자, 왕자…
조만간 왕자 얼굴을 직접 보러 가야 겠다며 그는 이를 악물었다. 이번엔 진심이다.
그리고 아스모데우스가 만들어낸 구멍에 빠진 비셰는… 그대로 테라스에 나와 있던 카이엔의 위로 떨어졌다.
“우아아악!!”
“으악!”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셰를 피할 정도의 운동 신경은, 안타깝지만 카이엔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그대로 부딪치는 바람에 카이엔은 뒤로 넘어졌고 비셰는 그의 품에 안착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안 다친 건 아니었다.
“비셰?!”
“왕자님!!”
어쩌다가 하늘에서 떨어진 거지?
비셰도 비명을 지르고 있던 걸로 봐선 그녀가 의도한 바는 아닐 텐데.
얼떨떨해하며 카이엔은 몸을 일으켰다. 비셰는 여성체인데다가 드레스 차림이었다. 같이 넘어지는 바람에 옷은 좀 구겨졌지만 다친 데는 없어 보였다.
“어떻게 된 거야? 어쩌다가 하늘에서…”
“어… 별일 없었어요. 강해지기 위한 훈련을 하다가 좀…”
“끝난 거야?”
“도중에 나온 거라서 회복되면 다시 돌아가야 해요.”
“회복?”
“…아.”
“다치기라도 한 거야?”
“그게…”
카이엔의 물음에 비셰는 슬그머니 그의 시선을 피했다.
가장 위험한 방법을 택해서 죽다 살아났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그의 시선을 피하자 카이엔은 비셰의 어깨를 붙잡고 어떻게든 그녀의 얼굴을 보려고 했다.
“비셰.”
“괘, 괜찮아요! 그게- 몽마가 할 수 있는 일은 검을 쥐는 것보단 차라리 마법이 나아서 그거랑 관련되어서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느라 시간을 많이 소비한 것 뿐이에요.”
“정말이야?”
“정말이에요-”
“수상한데.”
“에이-”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라고 믿을게.”
옷을 툭툭 털며 카이엔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닥에 앉아있는 비셰에게도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워주었다.
슬쩍 테라스 입구를 보니 그림자가 보이는 게, 다들 비명을 들은 모양이었다. 아마 바이스가 밖에서 지키고 있을 테니 못 들어오고 있는 것 같고.
역시나, 문을 열어보니 다들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 앞에 모여있었다.
“왕자님!”
“큰 소리가 들리던데, 괜찮으세요?”
“어? 비셰?”
“도착한 거야?”
“네? 네에… 아하하.”
“그래도 늦지 않아서 다행이네.”
“이쪽으로 와. 드레스 예쁘다!”
“웬일로 여성체야?”
“어쩌다 보니까…?”
비셰를 기다리고 있던 별채 식구들이 얼른 비셰를 데려갔다.
술과 함께 음식이 준비되어있으니까 밥부터 먹으라고 데려가서 이것저것 내밀었다.
비셰가 그렇게 붙잡혀있을 때, 글러티나가 카이엔에게 말을 걸었다.
“흠. 많이 놀랐겠네.”
“응. 갑자기 떨어져서… 바이스가 튀어나올 줄 알았는데 아니어서 다행이야.”
“암살자였다면 그 자리에서 걷어차 버렸을 테지만 비셰 씨란 걸 알고 멈췄습니다.”
“큰일 날뻔했잖아.”
다행이라며 카이엔은 안도했다.
발이 나가기 직전에 가까스로 멈췄다는 바이스의 덧붙임에 한 번 더 한숨을 쉬었다.
바이스가 조금이라도 느리게 판단했다면 불쌍한 비셰는 하늘에서 떨어진 걸로도 모자라서 테라스 바깥으로 걷어차였을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바이스는 웃고 있었다.
“무서운 녀석…”
“제겐 왕자님이 우선이니까요.”
“그럼 나 대신 비셰를 받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글쎄요. 비셰 씨는 싫어하셨을 텐데.”
“…그래. 널 무서워하는 것 같긴 하더라.”
“하하.”
할 말 없으니까 웃기는.
얼굴을 찌푸리면서 카이엔은 비셰를 보았다. 그리델라와 슬로세이가 양옆에서 비셰에게 음식을 권하고 있었다. 저러다가 드레스에 흘릴지도 모르는데.
‘알아서 하겠지…’
마법을 쓰면 간단히 없앨 수 있을지도 모르고.
쉬려고 테라스로 나왔는데 쉬지도 못하고 다시 돌아왔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에 빠진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글러티나가 말을 붙였다.
“잠깐 시간 좀 내줄래?”
“그래.”
그렇게 두 사람은 다시 테라스로 나갔다.
다른 이들에게 들려줄 법한 이야기가 아닌 건지 글러티나는 바이스에게 양해를 구하고 테라스의 문을 닫았다.
홀과 격리된 테라스의 난간을 붙잡고 글러티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까만 하늘에 휘어진 달이 하나 떠 있었다.
초승달처럼 눈꼬리를 휘면서 웃곤, 그녀는 반 바퀴 몸을 돌려 난간에 등을 기댔다.
“미안. 피곤할 텐데 이야기하자고 해서.”
“괜찮아.”
“할 말이 있어서.”
잠깐 뜸을 들이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너도 알다시피, 이제 뱀파이어란 일족은 씨가 마른 거나 다름없어. 물론 제 영역이 지루해서 밖으로 나간 녀석들도 있겠지만 그놈들이 큰 세력을 만들 거란 생각은 하기 어렵거든. 이베리카 세르포그로 인해 굵직한 녀석들은 전부 죽었다고 해도 무방해.”
“남은 건 너와 글라스 정도라는 거야?”
“응. 하지만 나도 글라스도 일족을 늘리고 싶지는 않아.”
인간을 뱀파이어로 바꾸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그들의 피에 감염을 시키는 것이다.
질은 좀 떨어지겠지만 단기간에 일족을 늘리는 것은 그편이 가장 쉬웠다.
하지만 감염도, 인간과의 혼혈도 만들고싶지 않았다.
이베리카의 일을 알고 있기에, 그전에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뱀파이어들이 어떻게 됐는지를 잘 봐왔기에 글러티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노라 카이엔의 앞에서 선언했다.
그저, 글라스와 둘이서 이대로 쭉 살다가 뱀파이어라는 종족의 마지막을 장식하겠노라고.
“세상에 단 둘뿐인 뱀파이어 남매가 되어버렸네.”
피식 웃으며 그녀가 말했다.
이대로 홀로 스러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담피르라는 건, 만들어도 좋은 미래를 물려줄 수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가만히 그녀는 카이엔을 바라보았다.
그들 중에선 아마, 카이엔이 가장 먼저 죽을 것이다.
이종족인 그들과는 달리 카이엔은 인간이었으니까.
마신의 단 하나뿐인 사제로서 신이 그를 어여삐 여겨 수명을 늘려줄 수는 있겠지만 이종족인 그들에 비할 바는 아닐 터였다.
그러나, 언제 있을지 모를 이별을 두려워해 그를 바꾸고 싶진 않았다.
카이엔은 지금 이대로가 가장 좋았다.
“카이엔. 너는 어떻게 생각해? 우리가, 내가 이런 선택을 내려도 되는 걸까?”
“너와 글라스에 대한 문제잖아. 그러니까 네가 선택하는 게 옳지.”
“결국 이베리카가 원하는 대로 될 거야. 나는 종족을 늘리지 않을 테니까. 담피르를 만들지도 않을 테니까.”
그녀도 글라스도 누구와도 부부의 연을 맺지 않고 살다가 죽을 것이다. 그렇게 다짐했다.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고 결정을 내렸다.
그러니까 괜찮다면서 글러티나는 카이엔에게 손을 내밀었다.
“테라스까지 음악이 들리네. 한 곡 더, 어때?”
“좋아.”
테라스는 그리 넓은 편은 아니었지만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춤추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처음 파티장에서 췄던 춤과는 조금 달랐다. 살짝 더 느리고 부드러웠다.
달빛 때문일까, 그녀의 은빛 머리카락이 평소보다 더 반짝이는 것 같았다.
‘그대로 스러진다, 라…’
당사자인 남매가 결정한 사항이니 그가 참견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스러진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인간인 그보다 수명이 길 이종족인 이들을 걱정한다는 건 분수에 맞지 않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짧은 음악이 끝나고 글러티나는 그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살짝 고개 숙여 인사한 뒤 그녀는 테라스에서 나갔다. 혼자 남게 된 카이엔은 조금 더 바람을 쐰 뒤 홀로 돌아갔다. 테라스 밖으로 나오자 그 근처를 서성거리고 있던 비셰가 얼른 그에게 달려왔다.
“왕자님! 선물을 준비하지 못해서 죄송해요…”
“네가 무사히 돌아온 것만으로도 충분해.”
“강해질 수 있게 열심히 노력할게요.”
“무리 하진 말고. 정말 괜찮으니까.”
무도회는 한창이었다. 뒤늦게 참석한 비셰에게 카이엔은 손을 내밀었다.
부끄러워하면서 비셰는 그 손을 잡았다.
함께 손을 잡고 춤을 추면서 카이엔이 말했다.
“드레스 멋지네.”
“아, 이건…”
입을 우물거리다가 비셰는, 아스모데우스가 줬다며 털어놓았다.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자가 그 밖에 생각이 안 나서, 찾아갔어요. 아직도 몽마는 그의 권속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여러모로 악마랑 많이 엮여버리는구나…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애초에 전 몽마여서 그런 거지만요.”
아마, 파티가 끝나면 다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괜찮겠어?”
“아마도요. 자주 놀리긴 하지만 저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 것 같진 않아요. 처음이야 말로는 죽인다 어쩐다 했는데 보고 있으니까 그럴 것 같지도 않고요.”
그녀가 릴리트의 얼굴을 한 이상, 아스모데우스는 그녀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지켜준다면 모를까.
기나긴 기다림이 과거에는 좋았을지도 모르는 악마의 성격을 완전 더럽게 만들어버렸다.
파티는 밤늦게까지 이어졌지만 자정이 되기 전에 바이스가 종료 선언을 했다. 더 늦기 전에 다들 돌아가서 쉬라는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파티장도 정리해야 하고 할 일이 많으니 다들 옷을 갈아입고 돌아와서 홀을 정리하기로 했다.
카이엔도 도우려고 했지만 다들 손사래를 쳤다.
“왕자님 생일이라 준비한 건데 왜 왕자님이 치우려고 하세요!”
“저희가 할 테니까 들어가서 쉬세요.”
다들 얼른 가서 쉬라며 손을 저은 탓에 카이엔은 바이스와 함께 방으로 돌아갔다.
무도회로 인해 다들 좀 더 친해진 것 같았다. 다른 별채 식구들도 저택에서 일하는 사용인들과 함께 춤을 추기도 했고, 평소 이야기할 일이 없는 이들과도 파티를 핑계 삼아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바이스는 좀 늦게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말해지만 다들 그에게도 가서 쉬라고 말할 뿐이었다.
카이엔이 옷을 벗는 것을 도와주고 목욕 시중까지 마친 다음, 바이스는 카이엔이 침대에 눕는 것까지 확인하고 방에서 나왔다. 회중시계를 확인하니 다들 파티장을 정리하고 돌아갔을 법한 시간이었다.
‘흠…’
또 한 해가 무사히 지나갔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에게 있어선 카이엔의 생일이 지나는 날이 1년이 지나가는 것과 같았다.
그 연약했던 소년이 벌써 성인이 되었다. 여기까지 오는데 참 사건 사고가 잦았다..
본래, 그는 카이엔이 원한다면 그를 왕으로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카이엔은 왕이 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기에 그 바람을 들어주기로 했다.
카이엔이 살아남을 수 있던 배경에 악마가 손을 쓴 게 조금 기분 나쁘긴 하지만 덕분에 카이엔이 지금까지 살아있기도 하고 주변에 그를 지키려는 자들이 늘어났으니 너그럽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파티. 무도회라는 명분으로, 핑계를 대며 결정을 내린 이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는 카이엔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기에 주변인들이 그를 어떻게 보는지도 면밀히 관찰하고 있었다.
슬로세이처럼 대놓고 애정을 드러내는 타입이 있지만 눈치를 보면서 소극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도 있었다.
‘어차피 왕자님께 그 이상은 다가오지 않을 테니까.’
그것이 종족 차이, 수명의 차이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함부로 접근하지 않으려는 건 기꺼운 일이었다.
…슬로세이 빼고.
길을 잃은 자들이 카이엔에게 모였다.
동족을 잃어버리고 하나뿐인 가족과 홀로 남게 된 뱀파이어
일족이 몰살당한 늑대인간
다른 존재가 되어버려 고향을 떠난 다크 엘프
안전을 버리고 스스로 땅 위에 올라온 인어
불가침을 깨고 인간의 곁에서 살기를 택한 마녀
마계를 떠나 인간계를 방황하는 몽마
그리고…
자신의 존재 이유를 모르는 호문쿨루스
카이엔 자체도 불안정한 인간이었지만 서로 아슬아슬하게 지탱하면서 의지하고 있었다.
그를 받치는 가장 단단한 기둥이 되겠노라 다짐한 바이스는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자정이 넘어갔다. 또다시, 새로운 1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