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생각지도 못한 무도회에 카이엔은 방으로 돌아와 옷부터 갈아입었다.
바이스가 그의 옷 시중을 들었는데 셔츠의 단추를 채워주는 그에게 카이엔이 물었다.
“넌 안 갈아입어?”
“제가 무도회에서 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래도.”
“장식이 많은 옷은 시중드는데 불편하기만 합니다.”
이번에 좋은 옷감이 들어와서 좋은 옷을 만들 수 있었다며, 바이스는 정성껏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파티용 의복으로 갈아입고 나서 무도회장으로 가니 다들 와있었다.
식당에서 축하 인사를 건넸지만 다시 한 번 그에게 생일 축하한다며 인사를 하는 그들은 다들 손에 술잔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영주성의 사용인들은 교대로 돌아가면서 무도회를 즐기기로 한 모양이었다. 꽤 사람이 많았다.
어디서 불러온 건지 모를 악단도 잔잔한 음악을 연주했다..
“한 마디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왕자님 생일인데.”
“…꼭 해야 돼?”
“네.”
“으으음…”
카이엔이 무어라 대답도 하기 전에 바이스는 홀에 있는 모두의 시선을 그에게 집중시켰다.
살짝 목소리를 높여 외치는 것만으로도 모두 이야기하던 것을 멈추고 카이엔을 바라보았다.
그런 시선이, 그에게 향하는 눈빛에 예전이라면 참으로 부담스러웠을 테지만 지금은 괜찮았다.
피식 웃고 그가 입을 열었다.
“별것도 아닌 날인데, 다들 이렇게 모인 데다가 축하까지 해줘서 고맙다. 너희에게도 오늘이 즐거운 날이 됐으면 좋겠어.”
“와아아-”
“왕자님 축하드려요!”
“평생 같이 있어요!”
그 말이 끝나는 것이 무도회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가 된 건지 악단이 연주하던 곡을 바꾸었다.
무도회답게, 춤을 출 시간이었다.
슬로세이가 손을 번쩍 들더니 카이엔에게 물었다.
“왕자님! 누구랑 먼저 춤 출 거에요?”
“응?”
“아.”
그걸 안 정했구나.
다들 슬쩍슬쩍 서로 눈치를 보았다.
그러면서도 카이엔을 힐끔거렸다.
무도회에 대한 걸 오늘 처음 들은지라 카이엔은 어색해하면서 바이스를 보며 물었다.
“…골라야 하나?”
“하하.”
“난 상관없는데…”
“왕자님은 그러시겠죠. 흠, 아직 못 정했으면 제비뽑기라도 하세요.”
“그런 건 언제 만든 거야?”
“이런 일이 있을까 봐 미리 만들었죠.”
바이스는 겉옷의 주머니에서 나무 막대 여러 개를 꺼냈다.
다들 긴장해서 하나씩 막대를 뽑았는데 끝에 붉은 잉크가 묻어있는 막대를 뽑은 건 그리델라였다. 용케 당첨을 뽑아낸 그녀는 신이 나서 막대를 흔들었고 바이스가 웃으며 덧붙였다.
“두 번째부턴 어떻게 되던 좋을 테니 그 뒤는 알아서 정하세요.”
“아하하, 그렇긴 하지! 왕자님, 나랑 춤 춰줄 거야? 나, 무도회 같은 데에 꼭 가보고 싶었어!”
“그래?”
“응. 왕자님은 많이 가봤지?”
“가긴 했지. 춤출 일은 없었지만.”
“왕자님은 항상 벽의 꽃을 자처하시는지라.”
“바이스 씨가 눈에 불을 켜고 있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
농담을 주고받으니 분위기가 금세 누그러졌다.
첫 번째 파트너라는 영광을 손에 쥔 그리델라가 카이엔의 손을 잡고 홀의 중앙으로 걸어갔다.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중앙으로 나왔다.
적당한 지점에 멈춰서서 손을 잡은 채로 그리델라가 말했다.
“이런 무도회는 항상 귀족들이나 나오는 데라서 일하는 사람들은 멀리서 구경만 한다면서요?”
“그런 셈이지.”
“우리끼리만 노는 것도 불공평해서, 바이스 씨한테 다른 분들도 참석할 수 있는지를 물어봤어요. 흔쾌히 동의했고요.”
“함께 보낸 시간이 꽤 기니까.”
세자르 남작은 저택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에게 너그러웠다. 오랫동안 얼굴 보고 지낼 사이니까 잘 지내자면서.
그래서 카이엔 역시 저택의, 영주성의 사용인들이 그의 아랫사람이라며 하대하고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다들, 사트로누스를 보고도 이곳에 남기로 선택한 사람들이었으니까.
그에게 말하지도 않고 무도회를 연 것에 대한 불만은 없었다. 사용인들은 항상 열심히 제 일을 하고 있었으니까.
이번 무도회를 계기로 커플이 많이 생길 것 같다며 그리델라가 킥킥 웃었다.
잘 보니 다들 나름대로 멋을 낸 복장을 하고 있었다. 유행에 관심이 없는 그가 봐도 꽤 노력해서 준비한 것 같은 옷들이었다.
흐르는 음악에 맞춰서 손을 잡은 두 사람이 걸음을 떼었다.
가벼운 왈츠였다.
춤을 배우긴 했지만 출 일이 없었기에 카이엔의 스텝은 어설펐지만 그리델라도 만만치 않게 엉성해서 사이좋게 서로의 발을 밟아댔다.
“아하하- 으왓!”
“으악!”
춤이라기보단 이상한 움직임. 실로 꼭두각시 인형을 조종해도 두 사람보다는 춤을 잘 출 터였다.
그러나 주변을 돌아보면 다들 비슷한 상황이라 두 사람 다 얼굴을 붉히면서도 웃음을 터뜨렸다.
“이따가 또 파트너 해줄 거지?”
한 곡이 끝나자 그리델라는 저렇게 말하곤 미련 없이 그의 손을 놓고 가버렸다. 그녀가 그에게서 떨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슬로세이가 다가와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왕자님, 다음은 나!”
“어? 어, 그래… 뭐가 그리 급하다고-”
“급하지 당연히!”
첫 번째를 뺏긴 게 심통이 난 건지 슬로세이는 카이엔을 재촉했다.
굽 있는 구두가 아닌 끈으로 묶어서 신는 샌들을 신고 온 슬로세이는 머리색에 맞춘 듯한 파란색 미니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양 뺨이 발그레한 슬로세이는 그의 손을 잡고 열심히 흔들었다.
“무도회가 그렇게 좋아?”
“그치만 이럴 때 아니면 왕자님 손도 못 잡잖아. 바이스 씨가 막 노려보고!”
“그랬어?”
“다들 모르더라. 칫.”
얼마나 눈치를 주는데! …라면서 슬로세이는 힐끔 바이스를 살폈다.
슬로세이를 따라 고개를 돌린 카이엔은 바이스와 눈이 마주쳤다. 꽤 거리가 멀었는데, 어쩐지 눈이 마주친 것만 같아서 저절로 흠칫 몸이 떨렸다.
“봤지?”
“으으음…”
“저렇다니깐.”
혀를 차면서 슬로세이는 카이엔의 팔을 붙잡았다.
바닷속의 연회는 몇 번이고 참석한 적이 있는 그녀였지만 물 위의 무도회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당연히, 춤을 추는 방법도 몰랐다.
하나 주변 사람들 모두 엉성한 춤을 추고 있었고 그리델라 역시 카이엔의 발을 몇 번이고 밟았으므로 긴장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의 움직임에 맞춰서 걸음을 내딛는 카이엔이 답답한 건지 잡고 있는 손을 홱 끌어당기며 외쳤다.
“좀 더 이끌어도 되니깐!”
“아니 그랬다가 너 발 밟혀.”
“괜찮다구! 왕자님은 남자면서 기개가 없어!”
“있어야 하나?”
“몰라!”
토라진 것 같으면서도 슬로세이는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슬로세이에게 잔뜩 휘둘린 뒤에야 카이엔은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음악을 무시하고 슬로세이가 제멋대로 그를 데리고 홀 안을 누비면서 춤을 췄기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괜찮아?”
“응? 어… 조금 어지럽긴 하지만.”
그런 그에게 이번에는 글러티나가 다가왔다.
활동성을 높이기 위함인지 옆을 터놓은 와인색 민소매 드레스 차림의 그녀는 머뭇거리면서 그의 눈앞에 손을 대고 흔들어보았다.
“힘들어 보이는데.”
“슬로세이가 고집을 부려서.”
“흠, 그렇구나.”
“바이스 녀석… 무도회를 할 거면 춤 연습 좀 하라고 말해줄 것이지.”
“깜짝 파티라도 하고 싶었나 보지.”
카이엔에게 손을 내밀며 그녀가 말했다.
“나한테도 시간 좀 내줄 수 있지?”
“으음… 혹시 춤 출 줄 알아?”
“그 정도는 교양이지.”
“휴우-”
“인간들의 사교댄스와는 다르겠지만.”
안도의 한숨을 내쉰 카이엔이었지만 뒤이어 들린 말에 헉,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을 보고 글러티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알아서 잘할게. 넌 나만 따라와.”
“그래. 아, 드레스 입은 건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잘 어울리네.”
“흠? 그 말, 나한테만 한 거지? 어쩐지 슬로세이가 삐진 것 같더라니.”
“아.”
칭찬해줬어야 했나.
어린애들이 하는 생각을 알 수가 있어야지.
이미 지나간 일이니 어쩔 수 없다며 카이엔은 글러티나의 손을 잡았다.
인간보다 균형감각이며 반사신경이 월등한 뱀파이어들이 추는 춤도 인간과는 별로 다를 것이 없는 모양이었다.
절도있게 움직이는 글러티나에게 맞춰서 카이엔도 등을 꼿꼿이 펴고 정면을 바라보며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세 번째가 되어서야 파트너 덕분에 춤 다운 춤을 추게 된 것이다.
그가 이전에 배웠던 댄스를 기억해낸 것이 아니라 글러티나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었는데 춤을 추던 도중, 음악에 맞춰서 글러티나가 그에게 다가오고 어쩌다 보니 그의 허리가 뒤로 기울어지면서 글러티나가 붙잡는 형태가 되었다.
그제야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낀 건지 카이엔이 물었다.
“어… 혹시 내가 여성 쪽 파트였던 거야?”
“눈치채는 게 느리네.”
“모르니까 어쩔 수 없지.”
“그래?”
글러티나가 단단히 붙잡고 있다는 게 느껴졌지만 반쯤 뒤로 기울어진 자세 때문에 굉장히 불안해진 카이엔이었다.
게다가 자세 때문인지 글러티나의 얼굴이 굉장히 가깝게 보였다.
“그럼 여기까지.”
팔에 힘을 줘서 그를 일으켜 세운 글러티나가 가볍게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나중에 또 시간 내줘.”
손을 흔들며 그녀는 다음 상대를 찾으려는지 가버렸다.
글러티나 다음으로 카이엔의 파트너가 된 건 페이리였는데 그녀 역시 춤을 잘 추지 못해서 그와 손을 잡고 스텝을 밟기만 했다.
다리가 여러 개라 어려운 스텝을 밟다간 다리가 꼬여버려서 신중히 움직여야만 했다.
어느새 파티장 안에 들어온 건지 플루토도 신이 나서 근처를 뱅뱅 돌면서 멍멍거리면서 짖어댔다. 그 소리가 너무 커지려고 하면 사트로누스가 낮게 짖어서 조용히 시켰다.
자네인은 에메랄드빛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꽤 튀는 색이었지만 미인이어서인지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저것도 티아마티스가 보내준 옷일 텐데, 티아마티스는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몇 곡 추고 나서 자네인이 그에게 다가왔다.
“생일 축하해요.”
“고마워. 드레스, 잘 어울리네.”
“몇 번 입어보진 않았지만요. 솔직히 불편하기도 하고요.”
칭찬에는 얼굴을 붉힌 그녀였지만 곧 푸념을 늘어놓았다.
“검을 잡는 게 더 편하고 티아마티스 님도 파티장 잠입 같은 임무는 시키지 않았거든요.”
“그렇구나.”
“다들 왕자님과 한 곡씩 춘 것 같으니 제가 마지막인가요?”
“아마도?”
“그렇군요.”
자네인을 마지막으로 카이엔은 이종족 식구 중, 여성 멤버들과는 다 한 번씩 손을 잡고 춤을 추게 되었다.
그 외에도 다른 이들의 눈치를 보다가 다가온 사용인들과도 어울려주었다. 어렸을 적부터 일해서 그와 나이가 비슷한 시녀부터 시작해서 입사 3년 차 막내인 하녀까지. 카이엔이 거부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기뻐하면서 그와 함께 엉성한 왈츠를 추었다.
물론 춤은 한 사람당 한 곡, 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리델라와 슬로세이에겐 몇 번이고 붙잡혀서 춤을 추었다.
도와달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바이스도 라스도 엔베인도 웃으면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누구 좋으라고 하는 무도회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두 시간도 넘게 시달린 끝에야 카이엔은 쉴 수 있게 되었다.
돌아온 그에게 바이스가 물부터 건네주었다.
“하하. 바쁘시네요.”
“너 진짜…”
“제가 도와드릴 만한 일은 아니었잖아요? 왕자님이 거절하시면 됐을 일을 가지고, 왜 저한테 그러십니까?”
“끄응…”
맞는 말이라 뭐라 할 수가 없었다.
계속 춤을 춰서인지 피곤하기도 하고 덥기도 해서 금세 물 한 잔을 비우고 카이엔이 말했다.
“테라스에 나가 있어도 되지?”
“네. 위험한 일은 없을 겁니다.”
“바람 좀 쐬어야겠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다들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래, 그럼 됐지.
작게 웃으면서 그는 테라스로 나갔다.
이미 어두워진 밤하늘에선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비셰가 보이지 않았다.
지옥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쉬워하겠네.’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비셰만 빼놓고 논 셈이 되어버렸으니까.
어떻게 연락할 방법이 없을까 그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으와아아악-!!”
“?!”
하늘에서 비명이 들리더니 비셰가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