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신 같은 건, 나와 상관없었다.
하지만 조금은 도움이 되는 것 같길래 내버려 뒀다.
몸을 숨길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기도 했고 준비해야 할 것도 많았으며, 필요한 재료 역시 상당했으므로.
어두컴컴한 지하에 몇 개의 불을 밝혀놓고 실험에 몰두하기를 얼마나 지속했을까. 고개를 들었을 때 세상은, 꽤 많이 바뀌어있었다.
기존의 신에 대항하기 위한 이단, 악마숭배, 사이비가 판을 쳤었던 시기가 있었고 신이 인간에게 줄 수 없는 것을 바라며 다른 것에 손을 뻗는 자들도 무척이나 많았다.
당신으로 인해 망가지고 부서졌던 세상이 복구되기까진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지금은, 그때보다 조금 더 나아졌을까.
인간은 죽음을 바라지 않는다.
질병을 겁내고 노화를 두려워하며 죽음을 거부한다. 그러기에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기를 원하고 최후의 최후까지 발버둥 치려고 하지.
죽음을 벗어나는 것은 가능하나 영원토록 살 수는 없는데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고집을 부리고 있다.
우드득.
뼈가 비틀어지고 근육이 뒤틀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괴이한 형상을 띈 것들이 철창 안에, 거대한 유리 수조 안에 들어있었다.
잠든 것처럼 움직임을 멈춘 것도 있었지만 그르렁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것도 있었다.
아아, 그토록 긴 시간을 살아왔건만 당신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오로지, 이 하나를 만들기 위해 살아왔으니.
그 몸이 몇 개의 뼈로 구성되어 있는지.
그 뼈의 길이는 어느 정도며 두께는 어느 정도며 그 빛깔은 어떠했는지.
그 뼈를 감싼 근육이 어땠는지, 당신이 육체를 가지고 있었을 적 그 신체는 어느 정도의 움직임을 보였는지.
그 몸을 감싸고 있던 살이, 피부가 어떤 색이었는지, 어떤 감촉이었는지.
이목구비의 생김새며 손가락의 길이, 손톱의 모양, 속눈썹의 길이와 머리카락이 자라나는 정도까지.
당신의 눈동자가. 눈빛이. 나를 바라보던 그 얼굴이 어땠는지.
그 모든 것을 매 순간 되새기며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만들어낸 완성품.
이 안에 당신이 담기게 된다면, 그것은 분명히 과거 당신의 재현이리라.
그리 생각하며 몰두했습니다. 무수한 폐기를 거듭 반복해나가면서 완성해냈습니다. 남은 것은, 당신을 담는 것뿐입니다.
당신은 과거, 마을을 공격한 정신 나간 흑마법사의 실험재료로 잡혀갔다고 했습니다.
운이 좋았던 건지, 그 쓸모가 다할 때 처분될 처지였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잡일거리를 하며 어깨너머로 흑마법사의 연구를 엿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반격에 성공. 그자를 죽이는 데 성공하고 그곳에 있던 것을 차지하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내게 말해줬습니다.
그 목소리를.
그 눈빛을.
그 표정을.
나는.
나는.
잊을 수가 없어서.
그래서…
“…만나고 싶어요.”
빛바래지 않은 소원이 그곳에 있었고 녹슬지 않은 소망이 그곳에 있었으며 스러지지 못한 집착이 그곳에 있었다.
***
여전히 마신전은 한산했다.
신탁도 없고 평화로웠다. 성국에서 온 편지도 안부 인사를 묻는 것이었다.
그 편지에 카이엔은 답장을 썼다.
신성력은 잘 쓰고 있는지, 연습은 잘 되고 있는지 궁금해하는 편지에 신전은 파리만 날리고 있고 평화롭다며 카이엔은 답장을 적었다.
메르실라에게도 편지가 왔다.
카이엔은 그가 성국까지 가는 건 힘들어서 나중에 한가하면 또 놀러 오라는 내용을 적어서 답장을 마쳤다.
그 외에 굉장히 자질구레한 편지들이 많았다.
이전에 세자르에 방문했던 사제와 성기사들도 한 통씩 보냈다. 별거 없는 안부 인사였다.
그 틈에, 중요한 것이 하나 끼어있었다.
성국의 고위 인사… 아마도, 성왕이 보낸 걸로 추정되는 편지였다.
다른 편지와 같은 봉투에 들어 있어서 처음엔 알 수 없었지만 그 내용만은, 경고를 담고 있었다.
‘그대가 이단과 연관이 없다는 것을 믿는다. 우리에게도 그 어떤 계시도 없었으니.
하나 그렇게 생각하는 건 우리뿐, 이단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네.
부디 그대의 앞길에 평온만이 가득하기를.
혹여나 이단들의 수가 생각보다 많다면 언제든지 불러주세나. 천신의 사제들은 그대를 도울 터이니.’
대충 이러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카이엔은 그 편지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것을 바이스에게 보여주며 그가 물었다.
“어떻게 생각해?”
“천신 교단에 마신전은 엄청난 약골이죠. 이단의 목표가 되어 얼떨결에 그 중심이 되어버릴까 봐 걱정하시는 모양입니다.”
“으음.”
“괜찮습니다. 그런 자들이 여기로 올 낌새가 보이면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하면 되니까요.”
웃으며 목을 긋는 시늉을 하는 바이스를 보며 카이엔은 고개를 저었다.
“뭐… 네가 알아서 잘 하겠지.”
“네. 왕자님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나저나 어둠의 신이라니까, 마신이라니까 사람들을 겁박해서 끌어들이는 사이비들이 어떻게든 연관 지으려고 할지 모르니 조심하라는 말이군요. 왕자님이 정말로 성서를 쓰셔야 하는 거 아닐까요?”
“그거 내용 가지고 또 자기들 선전에 써먹으려고 하면 어떻게 해. 난 이대로 있을래.”
“하하. 석판에 써놓은 내용만으로도 날조에는 충분할지 모릅니다만.”
“너나 잘하면서 남한테 잘하라고 하라는 말도?”
“머리를 쓴다면야 어떻게든.”
“그런 놈들이 왜 사이비에 있는 건데…”
“머리 좋은 사람들일수록 그런 종교에 심취하기 마련이라고 합니다.”
“난 모르겠다.”
성왕의 편지에도 걱정해줘서 고맙다는 답장을 쓴 뒤에야, 카이엔은 편지 읽는 것을 끝낼 수 있었다.
이 편지들을 바이스가 이상한 것으로 취급하고 바로 벽난로에 던져버리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예전엔 보낸 사람 이름도 안 보고 태워버렸다던데 이 녀석도 많이 발전한 건가, 싶었다.
물론 지금도 바이스가 그에게 왔다고만 보여주고 불에 던져버리는 편지들은 많았다.
“왕자님이 그때 페이리 씨와 파티장에 있던 걸 보고도 이렇게나 많은 편지가 왔습니다.”
“허…”
“이 작은 땅의 영주님에게 둘째 부인으로라도 오고 싶은 사람이 있나 보군요.”
“어떻게든 끈을 만들고 싶어서 그런 거겠지. 자식들 생각도 해주면 좋을 텐데.”
“가진 재산은 적겠지만 왕자님은 매력적이신 분이니 그걸 알아주실 분이 나타나긴 할 겁니다.”
“어… 그래.”
떨떠름해 하는 카이엔의 얼굴을 보고 바이스는 몇 마디 덧붙였다.
“참고로, 이제 건축가 일을 하면서 귀족 영애로서 활동을 반쯤 접은 예스티카 님에게 다른 영애분들이 왕자님에 대해 물어보신다는군요. 예스티카 님이 마신전을 건축했다는 소문이 퍼진 모양입니다.”
“나에 대해? 왜?”
“관심이 있나 보죠.”
“별일 없겠지…”
“마신전을 구경하러 오겠다고, 기도하러 오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면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만.”
“구경하고 가라고 해.”
“별채에 묵을 텐데요?”
“아, 릴리시아가 싫어하겠다.”
“하하.”
카이엔의 말에 바이스는 웃었다.
그 이유뿐만이 아닐 텐데 카이엔은 릴리시아 걱정을 했다. 영주성에 묵으려면 릴리시아가 확인하는 절차를 가져야 하니 그걸 염려하는 것이었다.
하긴, 그 몬스터 또한 카이엔을 굉장히 아끼고 있으니 누가 왕자님에게 친한척하며 달라붙으면 또다시 괴상한 소리를 내면서 위협을 할지도 모른다.
자신이 잡아먹은 것의 형상을 띄며 먹잇감을 유인하는 알라우네는 아직도 말미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진화를 할 줄 모르는 건지 아니면 최적의 상황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튼, 무려 성왕께서 직접 편지를 보내 왕자님을 걱정하실 정도니 영지 내로 불필요하게 손님이 오는 것을 막겠습니다. 그 사이에 사이비가 끼어있으면 큰일이니까요.”
“그래. 맡길게.”
“염려 마세요. 쥐새끼 한 마리 못 들어오게 하겠습니다. 불법 침입을 하려고 하면 처리하겠습니다.”
“…어.”
떨떠름해 하면서도 카이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이스가 입에 담는 저 ‘처리’라는 말이 죽여버리겠다는 말이란 건, 너무나도 당연했다.
‘그러고 보니 몬스터 말을 알아듣는 건 악마에게 받은 능력인데 사제들이 모르네?’
루키푸게 녀석이 실없어 보이긴 해도 나름 강한 놈인 건가 싶었다.
겉만 봐서는 전혀 그런 것 같진 않지만.
***
영주성에 손님이 찾아왔다.
자주 찾아오던 가미긴이 다른 악마와 함께 방문했는데 바이스의 안내를 받아서 집무실까지 오자 카이엔과는 초면인 악마, 네비로스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카이엔에게 사과를 했다.
“내가 가미긴의 창고에서 리치왕의 라이프 베슬을 꺼내 원래 있던 장소에 도로 묻어놨다. 그 탓에 이 사달이 났다는군. 미안하다.”
“어… 네?”
“하…”
옆에서 허탈한 표정을 짓는 가미긴을 한번, 사과하는 네비로스를 한번.
번갈아 가며 쳐다보다가 카이엔은 고개를 숙였다.
“…이미 일어난 일이니 어쩔 수 없죠.”
“흠”
“혹시 다른 이야기 들은 것 있으세요? 저번에 인어 왕국에 갔을 때 바다 괴물을 만났는데 이상한 걸 발견했거든요.”
프라우디에가 발견한 바다 괴물과 함께, 그가 파낸 것을 보여주니 네비로스는 그것을 보자마자 대답했다.
“봉인이군.”
“네?”
“유적지에 묻혀있었다면서. 그건 봉인이다. 뭔지는 열어봐야 확신할 수 있겠지만 유적지라… 그 장소를 생각하면.”
네비로스는 곰곰이 생각하던 끝에 입을 열었다.
“역병 군주. 온갖 병을 퍼뜨리고 다니던 놈인데, 이렇게 한번 봉인해놓고 신전의 강력한 신성력으로 한 번 더 봉인한 것 같다.”
“…괜히 꺼내온 건 아니겠죠?”
“파헤쳐진 흔적이 있었다면서? 차라리 마신전 밑에 다시 묻어서 마신의 기운으로 눌러버리는 게 나을 거다.”
“아…”
이거 봉인 풀리면 이 땅은 망한다.
카이엔은 마른 침을 삼키며 그렇게 하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응에 네비로스도 담담히 설명해주었다.
“역병 군주는 좀… 특이한 인간이긴 했지만 그 당시 인간의 군세가 그를 죽이지 못한 이유는 그를 죽였다가 온갖 병이 퍼질까 봐, 차라리 봉인하는걸 택한 거지. 리치왕과는 조금 다른 경우다.”
“인간이긴 했나 보군요.”
“그렇지.”
“이 외에 더 봉인된 녀석들이 있습니까?”
옆에서 슬쩍 바이스가 끼어들었다.
네비로스는 그런 바이스의 질문을 무시하는 대신 친절하게 이야기를 해주었다.
“주로 대장급 정도는 되는 놈들은 봉인됐다. 죽여도 제힘으로 죽음까지 되돌려 언데드 혹은 더 큰 재앙으로 발아할까 봐 염려해서 봉인했지. 기껏 죽여놔도 또다시 부활하려고 해서 난감했을 테고.”
덕분에 긴 시간이 지난 지금, 막장 일보 직전이었다.
네비로스의 말에 따르면 봉인 당한 이들은 리치왕의 세력 중에서도 강한 자들이었다.
역병 군주, 부두 술사, 해양신족(고대 괴물), 망령 여왕, 시쳇더미(플레시 골렘)
무려 다섯이었다. 리치왕의 라이프 베슬 말고도 다른 봉인들 역시 관찰했던 건지 그는 무덤덤하게 손가락을 꼽으며 봉인지 위치를 읊었다.
“대충 다 어딨는지는 알고 있다. 다만 긴 시간이 지난 지금, 땅속 깊은 곳에 묻힌 놈도 있고…”
“그리고요…?”
“하나는 몇백 년 전에 터진 화산 때문에 완전히 묻혀버렸지.”
“아.”
“그쪽은 걱정 안 해도 될 거다.”
지각 변동으로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신전도 특이한 것 같았는데 용암에 묻혔다니.
봉인이 안 풀렸다니 다행이긴 했다. 용암에 녹아서 없어진 걸까?
리치왕의 라이프 베슬을 가진 프라우디에는 말이 통했지만 역병 군주의 봉인이 풀렸을 때 그와 말이 통할 거라는 기대를 하기는 어려웠다. 고대와 현대의 언어는 분명히 다를 테고, 깨우는 짓은 너무 위험했다.
그래서 네비로스의 제안대로 마신전에 묻어 마신의 기운으로 누르는 게 바람직했지만 저택과 신전은 거리가 있었다.
신전에 묻어놨을 때 사건이 벌어지면 대처가 늦다는 이유로 역병 군주의 봉인은 저택 뒤뜰 적당한 곳에 묻어두기로 했다.
어디에 묻었는지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석상을 하나 세워놓고 카이엔이 생각날 때마다 그 앞에 서서 마신께 기도하고 성수를 뿌리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말 나온 김에 바로 실행에 옮기기로 하고 그들은 뒤뜰로 향했다.
중요한 일이었으므로 별채 식구들이 모두 모여서 역병 군주의 봉인에 대해 들었는데 그러던 중, 그리델라가 손을 들며 물었다.
“왕자님! 석상은 어떤 걸 세워둘 거야?”
“어… 비석?”
“비석?”
“조각상이 낫지 않나?”
“봉인인 걸 모르게 위장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치만 쓸만한 조각상이 있나?”
“저번에 예스티카 씨가 신전 짓다 남은 대리석이 많다고 주고 간 것이 있어요. 가져올까요?”
“괜찮겠는데?”
“조각 대회다!”
…순식간에 조각 대회가 열리게 되었다.
“…따라가기가 힘들군.”
“뭐, 인간이니까.”
악마조차 그 대화의 흐름에 난감을 표했다. 황당해하는 네비로스의 옆에서 가미긴은 대충 대꾸했다.
그 흐름에 카이엔은 별채 식구들이 각자 대리석을 하나씩 앞에 두고 조각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되었다.
그도 해야 하나 싶었지만 바이스가 분명히 손을 다칠 테니 가만히 있으라고 했기 때문이다.
‘가만… 생각해보니 기분 나쁜데… 왜 분명히 다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살짝 불만이 생겼지만 바이스에게 대놓고 따지기엔 무서웠으므로 카이엔은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예정에 없던 조각 대회가 시작되었다.
각자 마신의 위엄을 살릴 수 있게 멋진 조각을 하자며 손을 들고 기합을 넣었다. 저 하늘 위에서 보고 있을 마신은 이 광경을 보고 흐뭇해할까?
싫어하진 않을 것 같다며 카이엔은 의자에 앉아서 다른 이들이 예술 작품을 만들 수 있을지 살짝 걱정하면서 지켜보았다.
손에 끌과 망치 등을 쥐고 눈앞의 대리석을 조각하는 모두였지만 난생처음 해보는 조각인지라 굉장히 어려웠다.
잘 깎이지도 않고, 예쁘게 나오지도 않았다.
대리석이 다른 암석에 비해 무른 편이긴 했지만 초보자가 다루기엔 어려웠다.
“음…”
“기상천외한 모양이네.”
다들 머릿속으로 떠오른 모습이 있었겠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서툰 솜씨지만 저걸 다 일렬로 세워두면 그대로 괜찮지 않을까? 어린 양들이 만든 거니 그래도 마신은 기뻐하지 않을까?
카이엔은 속으로 열심히 생각에 잠겼지만 마신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을 안 보고 있는 건지 뭐라 할 말이 없어서 대답이 없는 건지 그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쓰레기를 만들어버렸다면서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엎드려 통곡하는 그리델라를 보고 카이엔은 한숨을 쉬었다.
“…그냥 마법으로 만들면 안 되나?”
보다 못한 네비로스가 물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그 모습을 지켜본 그는 도대체 이 사람들이 뭘 하는 건지 도통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냥 아무 돌조각이나 세워둬도 됐을 텐데 갑자기 조각 이야기가 나오질 않나, 그럼 하나 사 오기라고 하면 될 것을 직접 만들어보겠다고 나섰다가 돌가루만 잔뜩 날리질 않나.
저것들을 치우는데에도 한나절이 걸릴 터였다.
그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고 네비로스는 가볍게 손을 들어 마법을 썼다.
다른 이들이 조각하느라 생긴 잔해들이 한데 뭉치더니 서서히 변화했다.
“봉인을 위한 것이니까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대답은 쉽게 하는 그였지만 굉장히 섬세한 조각이 만들어졌다.
위로 뻗어 나가는 덩굴과 겹쳐진 고리 모양의 안에는 별 모양 조각이 들어있었다.
마신 숭배를 하는 악마들 사이에서도, 그들이 너무 오래 산 탓인지 이제 신앙은 구세대의 유물로 남은 지 오래였다.
적당히 마신이 좋아할 만한 모양을 집어넣으면서도 인간들의 눈에 보기에 너무 흉하지 않게끔 세심하게 조절한 그는 완성된 조각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차피 봉인을 더 견고히 누르기 위해서. 힘을 집중시키려고 세우는 거다. 그리고 그 이전에 봉인이 묻혀있다는 걸 나타내는 표식이지. 대충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다들 초보자들이라 결과물이 너무하군. 저거라도 써라.”
“어… 감사합니다.”
“이곳에 바로 묻을 건가?”
“네. 그래도 될 것 같아요.”
“땅부터 파야겠군.”
“삽을 가져오겠습니다.”
“됐다.”
바이스를 제지하면서 네비로스는 친절하게도 땅까지 파주었다.
네모반듯하게 쑥 파인 땅속에 봉인을 넣으니 다시 그 위에 흙이 덮였고 조각상이 그 위에 자리 잡았다.
저 모습만 봐서는 조각상의 밑에 흉악한 존재의 봉인이 묻혀있다고는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위장이었다.
가져온 성수 한 병을 그 위에 뿌리며 카이엔이 물었다.
“다른 봉인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거죠?”
“그래. 찾기도 힘들 거다.”
게다가 너무 긴 시간인지라, 봉인된 놈들도 아예 스러졌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공연히 건드릴 필요는 없기에 역병 군주의 봉인은 얌전히 묻어놓고 이따금 들러서 조각상에 기도를 올리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