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마계, 가미긴은 다른 악마들의 도움 끝에 네비로스의 거처를 찾아냈다.
워낙 꼭꼭 숨어 사는 놈이라 흔적을 찾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몇백 년 전부터 가진 거 다 내려놓고 어디 숨어있나 했던 녀석은 야산에 통나무 집을 지어놓고 검소하게 살고 있었다.
빽빽하게 자란 나무들 때문에 공중에서는 잘 보이지도 않는다며 투덜거리고 가미긴은 나뭇가지를 피해 숲속으로 들어갔다.
목표한 인물이 생각지도 못한 방문객을 피해 도망갈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가미긴이 통나무 집 가까이 가니 집 밖에서 가만히 서 있는 네비로스와 바로 마주칠 수 있었다.
평소 마른 몸에 딱 달라붙는 옷차림을 하고 있던 녀석은 은거하면서 취향이 바뀐 건지 몸을 감싸는 헐렁한 카디건을 입고 있었다.
가미긴을 발견하자마자 네비로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 어떻게 알고 온 건지 원.”
“너! 네가 내 창고에서 라이프 베슬을 훔쳐 간 거지?! 얼른 말해!!”
가미긴은 가미긴 대로 범인 유력 후보인 네비로스에게 달려들어 멱살부터 잡았다.
순순히 멱살을 잡힌 네비로스는 연신 한숨만 푹푹 쉬었다.
“그게 몇 년 전 일인데 이제야 깨달은 건지 원…”
“뭐야?!”
“네가 그걸 도굴하는 것까지 봤다. 네가 그걸로 무슨 짓을 벌일지도 모르고, 또다시 세계가 시끄러워질 테지. 마계에서 소란을 피우면 곤란하다. 그래서 도로 훔쳐 가서 네가 파온 데에 다시 묻어놨다.”
“너 때문에 더 이상한 사태가 벌어졌다고!!”
“마계는 아니잖아.”
자기 집 앞마당이 아니니 괜찮다는 뚱한 태도에 가미긴은 멱살을 잡았던 손을 놓고 제 가슴을 퍽퍽 두드렸다.
답답해 미치겠다는 그 모습에도 네비로스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눈썹 하나 찌푸리지 않고 가미긴이 혼자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팔짱 끼고 구경하던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상한 사태가 뭔데?”
“인간이 그걸 파냈고 이곳저곳 옮겨 다니다가 웬 호문쿨루스 안에 심어놓은 데다가 그걸 중심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흠.”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는데…!”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인 것 같은데.”
“뭐야?!”
“애초에 네가 봉인을 건드리고 파내지만 않았으면 아무도 발견해내지 못했을 물건이다. 그 후로 세계는 많은 변화를 거쳤어. 땅 속에 있던 게 솟아 올라가고 반대로 땅 위에 있던 것이 바닷속으로 가라앉기도 했지. 라이프 베슬 역시 그렇게 사라졌을 테고. 네가 파낸 곳에 다시 묻으면서 나도 어느 정도 눈가림을 해놓긴 했지만 네가 깬 봉인보다는 약했을 거다.”
“으으…”
분한 듯 이를 가는 가미긴이었지만 변명할 거리가 없었다.
그런 그에게 네비로스가 물었다.
“…그래서, 현재 리치왕의 심장을 품고 있다는 호문쿨루스는 어떻지?”
“잘 지내고 있어. 친구도 많고.”
“흐음.”
“왜?”
“리치왕은, 친구가 없어서 그렇게 된 게 아니야.”
“뜬금없이 뭔 소리야?”
반문하는 가미긴을 빤히 쳐다보던 네비로스는 그대로 걸음을 뗐다.
가미긴의 옆을 지나가며 그가 말했다.
“한번, 확인하고 싶은데. 일단 사과할 것도 있고.”
“…그래. 아, 그리고. 너 이렇게 외진 데에 살고 있으면서도 다른 악마들 감시는 하고 있었던 거지?”
“그렇긴 하다만.”
“그럼 알고 있겠네? 잘 됐다.”
“뭐가 말이지?”
중심이 빠진 대화에 네비로스가 질문했다.
그러자 가미긴은, 그를 도와줬던 앙그라 마이뉴 외에 다른 악마들도 궁금해하던 자를 입에 담았다.
“사탄 말이야. 마왕… 아니, 이젠 전 마왕이라고 해야 하나? 그놈, 마왕 자리 냉큼 넘겨주고는 잠적해버렸잖아. 이전부터 대놓고 모습을 드러내고 다니진 않았지만, 이젠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사라져버렸으니까.”
“흠.”
“알고 있어?”
“뭘 할 생각이지?”
“그놈한테까지 손 벌리고 싶진 않지만, 적어도 어딨는진 알아두고 싶으니까.”
***
늑대 인간 아이들은 그들이 만나고 싶었던 아베르나 백작과 만나게 되었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사람이었다며 아이들은 각자에게 마련된 방에서 여유롭게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하나씩 쓰라고 방을 줬음에도 아이들은 한군데에 뭉쳐서 다 같이 자곤 했다.
그들은 지금까지 굉장히 많은 사건을 겪었기에 지금 이 상황도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꿈이라고 여겼다.
딱하게 여긴 별채의 식구들이 어떻게든 도움을 주려고 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좋은 꿈이라도 꾸게 해줘야 하나?”
“어떻게 생각해?”
“일단 여기 적응하는 것부터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요?”
같은 늑대 인간이긴 하지만 라스와는 전혀 다른 곳에서 살던 애들이라 양쪽 모두 동족을 만난 건 반갑지만 그 이상 뭘 해야 할지 몰라 헤매고 있었다.
차라리 마법 소녀들처럼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닌다면 마주칠 일도 많고 이것저것 알려주기도 하겠지만 아이들은 영주성 내를 잘 돌아다니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결론을 냈다.
어려운 일은 왕자님한테 미루기로.
“…그래서 나한테 말한다는 거야?”
“방법이 없으니까?”
그리델라의 말에 카이엔은 인상을 쓰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엄밀히 말하면 그가 주워온 게 아니라 다른 이들이 구출해온 것이었다.
하지만 바깥사람들이 보기엔 그게 그거인 모양이다.
나중에 그 애들도 영주성 밖으로 나가 마을 구경도 하고 외출할 일도 생길 텐데.
그의 시름을 눈치챈 바이스가 옆에서 첨언했다.
“결혼도 안 했는데 애가 여섯이라는 소문이 더 붙겠군요.”
“하…”
“뭐 어떻습니까. 괴소문이 붙으면 붙을수록 오히려 진심으로 왕자님을 생각하는 분이 나타날 테니까요.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어떻게 할까?”
“영주성 구경이라도 시켜준다고 해야죠. 길 잃어버리지 않도록요.”
그건 라스에게 맡기면 된다며 바이스가 말했다.
“그리델라 님도 같이 다니시는 게 어떻습니까?”
“나? 그래도 되려나?”
“라스 씨는 말주변이 없으니까요.”
“아하하- 알겠어! 그럼 당연히 내가 도와줘야지!”
라스가 좀 더 활발한 수다쟁이였다면 문제없겠지만 말수 없기가 엔베인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엔베인처럼 낯을 가리진 않지만 안내역을 맡긴다면 분명히 아이들과 어색해질 거다.
그 광경이 상상이 가서 그리델라는 웃으며 말했다.
“그럼 가볼게요. 재밌을 것 같아.”
“부탁할게.”
“부탁드리겠습니다.”
“응!”
손을 흔들면서 그리델라는 카이엔의 집무실에서 나갔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녀는 라스를 찾아갔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어떻게 할지 물으니 라스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나서서 돕는 게 낫겠지. 다들 낯선 어른이긴 하지만 같은 늑대 인간이라는 것만으로도 대하기가 좀 더 편할 테니까.”
“그리고 어색해지는 걸 막기 위해 나도 동행할 테고. 아, 맞다. 애들은 저번에 릴리시아를 안 만나봤지? 근처를 지나가도 항상 우리가 옆에 있어서 릴리시아도 별생각 없었을 테고. 이렇게 된 김에 보여주러 가자.”
“왕자님 없이 우리만 가도 될까?”
“당연하지! 신호만 보내면 될 거야!”
당당한 그리델라의 말에 라스 또한 동의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늑대 인간 아이들에게 배정된 별채의 방으로 향했다.
영주성의 별채는 두 군데에 있었다.
하나는 이종족 식구들을 위한 곳이고 다른 하나는 외부에서 오는 손님을 위한 곳이었다.
현재 늑대 인간 아이들은 낯가림을 하고 있기도 하고 갑자기 어른들만 모여 사는 별채에 넣으면 어색해할까 봐 외부 손님을 위한 별채의 건물에서 지내고 있었다.
바깥에서 손님이 오는 일은 드문지라 현재 그곳에 있는 건 늑대 인간 아이들 여섯이 전부였다.
아이들을 찾아가 영주성 곳곳을 소개해 준다고 말하니 모두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그러니까 이름이- 자자, 헷갈리니까 나이순으로 서봐. 세아나, 리안, 오르트, 마리아, 티미, 리키였지?”
“네.”
“맞아요.”
여섯 명 모두 조금씩 빛깔이 다르긴 하지만 대체로 은색 계열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나이가 많은 세아나가 열두 살이었고 그다음인 리안이 열한 살이었다. 제일 어린 리키는 고작 일곱 살이었다.
아이들을 줄지어 세워놓고 그리델라는 주머니에서 기다란 줄을 꺼냈다.
그녀가 맨 앞에 서고 라스를 맨 뒤에 세워서 줄을 잡게 하니 줄줄이 소시지처럼 보였다.
손수건을 흔들면서 그리델라가 외쳤다.
“자 그럼 출발! 일단 몬스터부터 보러 가자! 왕자님이 안내해주면 더 좋겠지만 나도 충분히 좋은 안내인이라구!”
활기차게 말하는 그리델라였지만 맨 뒤에 선 리키가 뒤처지지 않게 걷는 속도는 아주 느렸다.
빙 둘러싼 줄을 잡고 걷게 하니 중간에 누가 이탈할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여덟 살, 일곱 살인 티미와 리키는 재잘거리면서 열심히 다리를 움직였다.
“자, 우리 세자르의 명물! 여기서도 유명하고 밖에서도 유명한 사트로누스! 하지만 왕자님 빼고 다른 사람들은 신경 쓰는 척도 안 하니까 멀리서 인사만 하면 돼. 자, 손 흔들어주자. 안녕~”
“안녕~”
그리델라가 손수 시범을 보이자 여섯 명 모두 어색해하면서도 그리델라를 따라 했다.
‘나도 같이 해야 하나?’
라스는 굉장히 망설였지만 혼자 가만히 서 있는 것도 이상해서 같이 손을 흔들었다.
사트로누스는 그런 그들을 멀뚱히 쳐다보더니만 홱 고개를 돌렸다.
“사트로누스는 원래 이래! 자 다음! 플루토…는 어디 갔네? 나중에 보면 소개해줄게. 루브랑 소금이는 왕자님 방에 있으니까 두고 페이리도 나중에 만날 테니까 두고, 릴리시아다!”
어쩐지 굉장히 많은 이들이 생략되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루브야 맨날 잠만 자고 있으니 만날 일이 없고 소금이는 혼자서 방을 탈출하지 못하게 카이엔이 엄하게 가르쳤으니까.
그렇게 그리델라는 늑대 인간 아이들을 릴리시아 앞까지 데려갔고, 아이들은 ‘알라우네’라는 난생처음 듣는 이름의 몬스터를 보고 경악했다.
“크, 크다…”
“세상에…”
“식물형 몬스터인가?”
“저 애는 뭘 먹고 살아요?”
“어- 고기!”
그리델라의 말에 세아나와 리안은 마른 침을 삼켰다.
저 정도 크기라면 아주 많은 양의 고기를 먹을 거다. 그런데 입이 도대체 어디에 있지?
주변이 시끌벅적해지자 릴리시아는 촉수를 꺼냈다. 익숙한 얼굴이 둘, 낯선 얼굴이 여섯.
하지만 다들 작은 데다가 라스와 그리델라의 사이에 서 있었다.
릴리시아의 촉수가 흔들거렸다.
“릴리시아! 식구! 새!식!구!”
릴리시아는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리델라는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힘주어 외쳤다.
릴리시아의 촉수가 더욱 흐물텅거리면서 흔들렸다.
“가족! 새로운 가족이야! 같이 살 거야!”
“모르는 것 같은데.”
“하는 수 없지.”
그리델라는 이번엔 주머니에서 긴 나뭇가지를 꺼냈다.
그걸로 땅바닥에 그림을 그렸다.
굉장히 간략화한 영주성 그림을 그리고 그 옆에 카이엔의 얼굴과 릴리시아, 페이리, 사트로누스를 그렸다.
“이건 나!”
빗자루를 그리며 그리델라가 말했다.
귀가 긴 사람은 엔베인, 박쥐 두 마리는 글라스와 글러티나, 물고기는 슬로세이, 개인지 늑대인지 모를 그림은 라스였다.
프라우디에와 자네인은 작은 사람과 큰 사람이 손잡고 있는 모습으로 그렸고 비셰는 사람 그림에 날개를 단 것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늑대인간 아이들은 대충 동그라미 여섯 개로 그려놓은 뒤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뒤, 모두를 둘러쌀 정도로 큰 원을 그렸다.
릴리시아의 어디에 눈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난번에 페이리와 땅바닥에 낙서하는 걸 본적이 있으므로 이 그림도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한참동안 반응이 없던 릴리시아지만 촉수를 흔들면서 바닥에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렸다.
“오, 이해한 것 같아.”
“다행이다.”
“자, 그럼 인사해야지.”
“아, 안녕하세요…?”
“안녕…”
특이한 생김새에 머뭇거리는 아이들이었다.
어색한 인사에 화답하기 위해 릴리시아는 가느다란 촉수를 꺼내 아이들 앞에 내밀었다.
차례대로 릴리시아와 악수를 하고 나자 라스는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릴리시아는 영주성 최고의 경비거든. 모르는 사람이 오면 일단 잡아서 묶어놓으니까. 이제 너희를 기억했으니 괜찮을 거야.”
“헉…”
“몬스터를 경비로 쓰는 거예요?”
“우와.”
“신기해.”
역시 아베르나 백작님은 대단한 분이라며 다들 이야기했다.
밖에서 살다 온 아이들은 카이엔을 왕자가 아니라 백작님으로 불렀다.
하지만 영주성 사람들은 모두 카이엔을 왕자님이라고 부를 테니 이 애들도 호칭을 수정하게 되겠지.
앞으로도 곤란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이야기하라며 그리델라는 잠시 바닥에 내려놨던 줄을 다시 잡았다.
“자, 그럼 마저 구경하러 가자! 여기 사람들은 다들 착하거든. 그러니까 너희도 너무 걱정하지 마.”
“네.”
“네!”
“익숙해지면 슬로세이처럼 주방 근처를 지나가기만 해도 요리사들이 간식을 척척 건네줄 거야.”
“와.”
“간식이래.”
“부럽다.”
역시 애들 흥미를 끌기엔 간식이 최고인 모양이다.
그런데 그리델라는 갑자기 뒤돌아서더니 말했다.
“자, 그럼 거꾸로 간다! 이젠 라스가 안내해주기로!”
“뭐?”
“같은 늑대 인간이니까 친해져야지! 거의 조카뻘이잖아. 삼촌이라고 불러도 되겠다. 헉, 그럼 난 이모인가? 뭐 어때!”
얼른 출발하라는 재촉에 라스는 쩔쩔매면서 그리델라의 말에 따랐다.
그의 뒤를 졸졸 따라오는 아이들은 삼촌이라는 호칭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그럼 삼촌이라고 불러도 돼요? 진짜?”
“그럼! 그래야 친해지지!”
“보통은 형이라고 부르라고 하던데.”
“에이, 그건 양심 없다. 별채 사람들은 프라우디에랑 슬로세이 빼곤 다 너네한테 삼촌 이모뻘일걸?”
그리델라 본인과 글러티나, 자네인 모두 꽤 오래 살았으니 이 어린 애들에게 누나라고 부르라고 시키는 건, 양심에 찔렸다.
그렇게 그 두 사람을 제외한 모두를 이모와 삼촌으로 만들어버린 그리델라는 한 마디 덧붙였다.
“아, 그치만 왕자님은 왕자님이야. 바이스 씨도 바이스 씨고. 이건 꼭 기억해둬야 한다?”
“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