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간단한 실력 검증을 마친 일행은 다시 세자르로 향했다.
돌아가면 지옥 훈련이다.
그 생각에 슬로세이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였다.
‘그래도 돌아가면 다들 놀라겠지!’
하루가 멀다 하고 그녀의 키는 쑥쑥 자라났다.
다들 성장한 그녀를 보고 깜짝 놀랄 거란 생각을 하니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세자르를 떠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다행히 카이엔의 부재 동안에도 영지는 별 탈 없었다.
집을 지키고 있던 이들은 못 본 사이 슬로세이의 키가 10센티미터도 넘게 자란 것에 크게 놀랐다. 물론, 못 알아볼 정도로 얼굴이 변한 건 아니라서 키 많이 컸네, 라며 한 마디씩 건넬 뿐이었다.
세자르에 도착해서야 그리델라가 비명을 질렀다.
“으악! 그러고 보니 슬로세이 키가 많이 커서 옷이 필요하잖아! 이럴 줄 알았으면 오는 길에 살걸!!”
“아.”
“그랬죠.”
“바이스 씨도 생각 못 하신 거예요?”
“뭐… 제가 입을 것도 아니고. 제가 신경 쓸만한 일은 아니잖습니까.”
냉정하게 대답한 바이스였지만 신경 쓰이기는 했던 건지 다음에 크게 장이 열리면 옷을 살 수 있게 돈을 준다고 약속했다.
그전까진 다른 이들의 옷을 빌려 입기로 한 슬로세이였다.
그러나 슬로세이의 늘어난 키보다도 충격적인 사건은 아직 남아있었다.
카이엔이 부재 동안 밀린 일을 끝내기가 무섭게 바이스는 모두를 불러놓고 실력 점검을 하겠다며 선포했다.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의 얼굴색이 어두워졌다.
“으음…”
“바이스 씨랑 대련…”
“꼭 저랑만 하는 건 아닙니다. 슬로세이 님의 실력도 점검해봐야 하고, 적당히 상대를 정해줄 테니 싸워보죠.”
“어쩔 수 없죠.”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으니…”
물론 영지 내에서 테스트를 할 수는 없으니 검은 숲으로 가야 했다.
몽땅 자리를 비우게 하고 카이엔만 영주성에 덩그러니 남겨둘 수만은 없었기에 바이스는 카이엔까지 데리고 갔다. 카이엔은 가고 싶어 하지 않은 눈치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다 같이 나오는 건 처음이네.”
“그러게요.”
“자,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바이스의 지시에 따라 검은 숲에 온 일행은 실력 테스트를 하기 위해 몸부터 풀었다.
그런데 처음부터 대련을 할 것이라고 여겼던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바이스는 슬로세이를 지목하며 말했다.
“슬로세이 님의 공격이 다른 이들에게 얼마나 통할지부터 확인하겠습니다. 먼저 라스 씨와 엔베인 씨가 나와주십시오.”
“엥? 두 명이나 상대해야 하는 거야?!”
“흠. 그럼 한 명씩 싸우기로 하죠. 그리고 시간 없으니 빨리빨리 하고 끝냅시다.”
“끄으응-”
앓는 소리를 내면서 슬로세이는 앞으로 걸어 나왔다.
라스와 엔베인도 주춤거리면서도 일단 앞으로 나오니 바이스가 서 있을 지점을 정해주었다.
“자, 슬로세이 님이 먼저 물을 만들어내 보세요. 물 한 방울도 없는 여기서 얼마나 잘 쓰는지 보겠습니다.”
“쳇.”
바이스의 말에 혀를 차며 슬로세이는 아티팩트를 꺼내 들었다. 왕실 보물 창고에서 가져온 물건이었다. 손바닥만 한 아티팩트를 손에 쥐고 마력을 불어넣으니 큼지막한 물방울이 생겨나며 한데 뭉쳐 거대한 물 덩어리를 형성했다.
다른 손을 휘저으면서, 슬로세이는 물을 조종했다.
가만히 허공에 떠 있던 물이 이리저리 비틀리더니 여러 갈래로 갈라져 창을 만들기도 했고 바닥을 뚫고 솟아오르기도 했다. 겉보기에는 무시무시했지만 바이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열었다.
“그럼 라스 씨, 엔베인 씨가 차례대로 저 공격을 격파해보기로 할까요?”
“음… 그럼 저부터 하겠습니다.”
라스가 먼저 앞으로 나섰다. 슬로세이에게 먼저 공격하라며 손짓하자 슬로세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물로 만든 창 다섯 개를 라스를 향해 던졌다.
손짓만으로 그 자리에서 발사된 물의 창은 거친 소리를 내며 돌격했다. 창이 가까워지자 라스는 자리를 박차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하나는 피하고 다른 하나는 팔로 쳐서 밀어냈다. 직접 몸을 부딪치면서 그 위력을 파악하려는 것이었다. 위험할 수도 있지만 카이엔이 있으므로 어느 정도의 상처는 바로 치유할 수 있었다.
그렇게 위력을 파악한 다음, 세 번째 창을 향해 그가 주먹을 내질렀다.
쾅!
물과 몸이 부딪치는 것 치고는 굉장히 큰 소리였다.
라스의 주먹에 물의 창이 반쯤 터져나갔다. 슬로세이는 아연실색해서 나머지 두 개의 창을 조종, 라스의 양옆을 공격하려고 했다. 물론 맞고만 있을 라스가 아니었다.
빠르게 몸을 뒤로 빼 창을 피하자 창은 서로 부딪치며 폭발했다.
라스는 안도했고 슬로세이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 모습을 보고 바이스가 말했다.
“자, 다음은 엔베인 님.”
“네.”
바이스는 바로 중지를 알렸다.
슬로세이는 다시 물의 창을 만들었고 라스 대신 엔베인이 슬로세이와 마주보고 섰다.
“이번엔 다른 공격을 해도 되죠?”
“있는 힘껏 싸우세요. 위험하면 끼어들 테니까요.”
“으음-”
슬로세이는 살짝 인상을 쓰면서 물의 창 말고 다른 것을 만들어냈다.
라스 때와는 달리, 다른 공격을 하겠다고 선언한지라 엔베인은 방심하지 않았다.
바이스가 시작을 알리자 엔베인은 바로 슬로세이를 향해 달려갔다. 그 순간, 큰 소리와 함께 바닥에서 물기둥이 치솟아 올랐다.
휩쓸리면 그대로 하늘로 튀어 오를 수 있을 정도의 강도였다. 앞으로 달려 나가는 엔베인을 방해하려는 듯, 물기둥은 여러 굵기로 치솟았고 엔베인은 그것을 피하면서 달려갔다.
물기둥으로 인해 방해받는 시야의 사각에서 물의 창이 날아들었다. 예민한 감각으로 마검을 휘둘러서, 엔베인은 창을 파괴했다.
검을 휘두르면서, 맞부딪쳐 상쇄시켰다.
슬로세이는 점점 가까워지는 엔베인을 피하려고 계속 마력을 끌어와 물을 생성해냈지만 턱없이 모자랐다.
마침내 그녀가 물을 조종하는 것보다 엔베인이 검을 휘두르는 게 더 빨라졌고, 슬로세이의 발치에 검을 꽂아 넣는 엔베인을 보고 바이스가 입을 열었다.
“중지. 흠, 이번엔 나름 머리를 썼군요.”
“그래도 졌잖아요!”
“실전 경험이 없으니까요. 그럼 다음은 누구로 할까요? 프라우디에 님?”
“엑? 저 또 싸워요? 좀 쉬면 안 돼요?”
“그럼 프라우디에 님이 다른 이들을 상대해주면 되겠군요. 전부 달려들게 해도 됩니까?”
“어… 바이스 씨가 빠지신다면야…?”
프라우디에는 자신 없다는 듯 바이스를 보며 얼버무렸다.
소드 마스터가 오러를 휘두르면 기껏 만들어낸 언데드 군단의 절반이 격파 돼버릴 테니 걱정스러운 마음이 컸다.
그 표정을 보고 바이스는 웃으며 말했다.
“저랑은 나중에 일대일로 대결할 일이 있을 겁니다. 그럼 다른 분들을 상대해주시죠.”
“네. 그치만 적어도 서너 명씩만 오시면 좋겠어요.”
“일대 다수 전을 연습하기엔 프라우디에 님의 능력이 적격이니까요. 그리고 실험할 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왜 날 보냐?”
“왕자님의 신성력이 언데드에게 약일지 독일지 시험해봐야 하니까요.”
“아, 하긴.”
멍하니 구경만 하고 있던 카이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흑마법사인 프라우디에와 마검과 융합한 엔베인의 상처마저 치료했는데 이게 언데드에게 해가 된다면 과연 무엇으로 해석해야 하는 걸까.
찜찜한 마음을 숨기고 카이엔도 몸을 일으켰다.
다른 이들에게는 해골 병사를 상대하게 한 뒤, 프라우디에는 카이엔이 신성력을 연습하게 할 대상으로 좀비 한 마리를 만들어냈다.
끔찍한 모습에 인상을 쓰며 카이엔은 신성력을 끌어올렸다. 이걸로 어떻게 공격을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공처럼 덩어리로 뭉쳐서 좀비를 향해 던졌다.
신성력으로 만든 공이 좀비의 머리에 명중했고 좀비는 아침햇살에 눈이 녹듯 스르르 녹아버렸다.
“음…”
“어…”
“효과는 있군요.”
“그런데 저번에 엔베인은 치료했잖아.”
“언데드가 아닌가 보죠.”
“프라우디에한테도 해는 없잖아.”
“이상하긴 하네요.”
“어- 왕자님, 파괴 말고 치료 목적으로도 써보실래요?”
스르르 녹은 좀비는 하반신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카이엔은 이걸 어떻게 복구해야 하나 인상을 쓰고 좀비를 노려보다가 신성력을 썼다.
녹아내린 살덩이가 꾸물꾸물 기어오르며 빈 곳이 채워지는 모습에 카이엔이 경악했다.
“이게 뭐야?!”
“아…”
“흠, 왕자님이 쓰시기 나름이라는 거군요.”
아군에게는 안식을, 적에게는 죽음을.
앙그라 마이뉴가 한 말이 떠올라서 카이엔은 이마를 짚었다.
언데드를 없앨 수도, 다시 복구시킬 수도 있는 힘.
과연 마신이 자기를 믿는 사제에게 하사할법한 힘이었다.
“쓸 일은 없겠지? 없어야 하는데…”
“없을 겁니다.”
“성국에서 이거 보면 진짜… 계시가 있었지만 적대하는 이들이 생길 거야.”
“안 들키게 조심해야겠군요.”
“하아…”
“좀 쉬십시오.”
정신적 충격이 클 카이엔을 앉혀두고 바이스는 다른 이들에게 다가갔다.
시험은 계속되었다.
개인의 전투 능력을 파악하고 위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움직임을 알기 위해.
바이스는 조를 짜게 하거나 한 명씩 대련을 시키기로 했다.
이전부터 가끔 했던 훈련이지만 이번에는 슬로세이가 추가되었기에 슬로세이는 하기 싫은 걸 꾹 참고 열심히 대련을 해야만 했다.
라스가 공격을 피하고 엔베인이 검을 휘둘러서 맞부딪치던 것과 달리 글러티나는 물로 된 공격에 닿지 않게 피하거나 허상을 만들어내거나 순간적으로 인간 모습의 변신을 풀고 박쥐 등으로 변신, 배후를 노리고 다시 인간형을 취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리델라는 바람으로 날려버리거나 준비해온 물약들을 소모해 폭파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리고 비셰는…
“저는… 전투 능력이 없어요…!”
혼자서 땅바닥에 주저앉아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몽마도 악마의 일종이라 마법을 쓸 수 있긴 하지만 전문적인 마법사에 비하면 약한 편이었고 정신 조종에 특화되어있었다.
이젠 슬로세이보다 약골 취급을 받게 된 그는 고개를 숙이고 훌쩍였다.
“힘도 없고 스피드도 없고 마법도 잘 못 쓰고…”
슬로세이도 저렇게 성장했는데. 이제 그 혼자만 뒤떨어졌다면서 비셰는 슬퍼했다.
옆에서 카이엔이 비셰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해주었다.
“음… 힘내.”
“흑…”
“비셰 씨는 늘 하던 대로만 하시면 됩니다.”
“아무런 기대도 안 한다는 말이잖아요, 그거!”
“그 말도 맞군요.”
“야…”
바이스의 냉정한 평가에 카이엔은 한숨을 푹 쉬었다.
졸지에 최약체가 되어버린 비셰는 눈물을 닦으면서도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다들 강대한 적을 상대할 것을 대비해 자신의 실력을 점검하고 힘을 쌓는데 혼자서 이게 뭐람.
흑마법사가 몽마의 정신조작과 환상에 당할 리도 없고 이성 없는 언데드에게 그런 기술이 통할 리도 없었다.
어쩌다 보니 아스모데우스한데 찍혀서 릴리트가 되라고 요구받았고 그건 안 하기로 넘어간 줄 알았는데, 나중에 전해진 소식에 따르면 아스모데우스가 그 말고 다른 몽마가 릴리트의 이름을 잇게 하지 않아서 엉망이 돼버렸다.
덕분에 정식으로 릴리트의 이름을 잇는 건 비셰 본인이고 현재 마계에서 몽마들을 열심히 지도하고 있는 건 저번에 봤던 셋 중 한 명이라고 한다.
그렇게 됐기에 아스모데우스도 급한 일은 자기가 해줄 테니 실력 좀 기르고 힘을 좀 쌓아 릴리트의 옛 명성에 걸맞게 강해지라며 잔소리를 했다.
‘어쩌지…’
솔직히 기댈만한 사람도 없고 도움 요청할 만한 사람도 없는 와중에, 그나마 도와주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스모데우스였다.
‘…연락해 볼까?’
그때 이후로는 뭘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니까.
일단 그를 ‘릴리트’자리에 앉혀놓은 게 아스모데우스니까, 계속 척지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뭣보다 그는 그자가 알고 있는 ‘릴리트’가 아니기도 하고.
조만간 연락이라도 해봐야겠다며 비셰는 생각을 정리했다.
이대로 혼자 멈춰서 있는 것보단, 뭐라도 하고 싶었다.
***
바다 괴물의 안에 있던 라이프 베슬.
그것을 앞에 두고 프라우디에는 생각에 잠겼다.
조사는 이미 마쳤다.
마법진을 그리고 단단히 방비를 한 뒤, 그는 라이프 베슬 안에 있던 영혼을 해방했다.
작지만 견고한 광석의 안에 있던 영혼은 하나가 아니었다.
여러 개의 영혼을 섞어놓은 것만 같은 형태.
그러나 그 영혼에는,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이전에 그것이 무슨 존재였던 건지 전혀 알아볼 수가 없었다.
라이프 베슬 안에 있던 영혼이 짐승의 것인지, 인간의 것인지, 몬스터의 것인지. 그것을 알 수 있는 흔적이 없었다.
그것에 프라우디에는 몸을 떨며 스산한 기운만을 내뿜는 영혼을 그대로 풀어주었다.
텅 빈 영혼이 올바른 길을 찾아갈 수 있게끔 이끌어주고 난 뒤, 프라우디에는 바닥에 주저앉아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조금, 짐작 가는 구석이 있긴 했다.
호문쿨루스는 인공 생명체다.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생명이었다.
그렇다면 호문쿨루스에게도 영혼이 있을까? 그것은 연금술사들이 오랫동안 고민해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의문을 해소할 정도로 잘 만들어진 호문쿨루스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마 프라우디에 본인이 최초일 터였다.
하지만 프라우디에의 영혼은, 그의 정신은 심장 대신 심어진 리치왕의 라이프 베슬로 인해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 안에 담긴 영혼은, 리치왕의 것이다.
반면 바다 괴물의 라이프 베슬에서 뽑아낸 영혼은…
‘대체… 누가 이런걸 만들어낸 거지?’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대체, 뭘 위해서 이런걸 만든 건지 알 수가 없어 두렵기까지 했다.
하나 정말로 두려운 것은 따로 있었다.
‘그 자가 나를 만들어낸 건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그의 창조주는 대체 누구인가.
프라우디에는 한참 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