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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왕자는 조용히 살고싶다-159화 (160/219)

159화

인어의 성인식은, 한 사람의 몫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시험이었다.

유적지로 향하는 길목에 다른 인어들이 숨어있으면서 발동시키는 함정을 피하고 막아내면서 전진하고 유적지 안에서는 대인 전투 능력을 시험받는다. 그 후 증표를 가지고 나오면 되는, 어찌 보면 간단한 시험이었다.

하나 그들이 평가하는 것은 개인의 전투 능력뿐만이 아니라 물길을 다루는 능력 또한 있었다.

물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면 바닷속에서 얼마든지 전투의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물길을 조종해 상대방의 움직임을 방해하거나 공격을 막고 맞받아치는 것.

같은 인어들끼리 물을 다루는 능력은 대부분 상이했기에 그 안에서 돌파구를 찾아내거나 보다 강한 힘으로 이겨내는 것이 승리의 조건이었다.

인어는 성인식을 치르면서 내재된 힘을 깨우려고 노력하며 시험이 끝난 후엔 대개 하루 이틀 정도의 성장통 끝에 훌쩍 성장하곤 했다.

다만, 슬로세이는 한 가지 시험을 더 요청했다.

물 위에서의 전투.

그녀는 성인식을 마친 뒤 물 밖에서 다른 친구들과 함께 살아가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세자르에서는 바다는커녕 호수조차 구경하기 어려웠다. 근처에 강이 하나 흐르긴 했지만 전투에 이용하기엔 턱없이 작았다.

물속에서 물을 조종하는 건 쉽지만 물 밖에서 물을 조종하는 건 어떨까?

그 능력을 기르고 싶다는 말에 인어왕 페레우스는 한참 동안 고민한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을까요?”

“그 애가 하고 싶다는데 어쩔 수 없지. 그리고 슬로세이는 물 밖에서 살아가겠다고 했으니까.”

슬로세이는 막내딸이었다.

응석받이에 개구쟁이였던 아이가 바깥세상에 다녀오고 나선, 꽤 의젓해졌다.

게다가 인간 왕자도 데려오지 않았나.

솔직히 말하면 그 왕자는 슬로세이에게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았지만 슬로세이는 아니었다.

앞일은 어찌 될지 모르니 그 역시 최선을 다해 막내딸을 도울 것이다.

결혼할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 언니들에 비하면 슬로세이는 이미 신랑감을 점찍어놓았고.

다른 인어들의 도움을 받아서 슬로세이는 바다 위에서의 전투 역시 시험해보았다.

파도조차 치지 않는 잔잔한 바다.

푸른 물결 위에 슬로세이가 서 있었다.

물을 조종하는 힘으로 발밑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물기둥이 치솟아 올랐다.

바닷속에 있는 인어들이 조종하는 물이 가지각색의 형태를 이루어 슬로세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제자리에서 뛰어올라 공격을 피하면서, 슬로세이는 다른 인어들이 조종하는 물의 지배권을 빼앗아오기 위해 집중했다.

물이 있으면 강해질 수 있다는 건, 물이 없으면 강하지 못하다는 말과 같았다.

푸른 곱슬머리가 바람에 나부꼈다.

어느새 그녀의 등 뒤에 거대한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소용돌이는 점점 그 크기를 키워갔다.

‘강해진다면.’

모두를 도울 수 있을 텐데.

그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한계까지 크기를 키운 소용돌이가 바다를 휘저었다.

슬로세이의 손에서 빠져나간 소용돌이는 그녀를 지나쳐 저만치 앞까지 나아가다가 펑, 터졌다.

다른 인어들의 주목 하에 슬로세이는 바다를 조종했다.

시험은 무사통과였다.

어리기만 했던 막내딸이 괄목할만한 성장을 보인 것에 부모님은 물론이고 언니들마저도 칭찬을 퍼부었다.

물론 슬로세이는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보다 강해질 수 있는 방법에 주목하며 왕궁 보물 창고에서 아티팩트마저 하나 꺼내왔다.

푸른 보석이 박힌 목걸이었는데, 이것이 있다면 언제 어디서든 물을 가져올 수 있었다.

강대한 물의 힘을 담고 있는 고대의 유물이라, 이것만 있다면 사막에서도 잠깐은 비를 내릴 수 있으리라.

“그거 가져가려고?”

“응! 쓸모가 있을진 모르겠지만.”

준비를 다 마친 그녀는 인어 왕국을 떠났다. 이틀간의 성장통이 있었지만 겉보기엔 그리 달라지지 않은 채였다.

처음부터 다시 물 밖으로 나갈 거라며 귀에 못이 박이도록 말했던지라 가족들은 걱정하면서도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물 밖으로 고개를 내민 슬로세이는 근처를 날아다니던 그리델라를 발견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빗자루를 타고 어두운 바다 위를 날던 친구를 본 슬로세이는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주었다.

이전이라면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손을 뻗어 그리델라에게 매달렸을 테지만 지금은 달랐다.

슬로세이의 몸이 천천히 물 밖으로 나왔다.

바다 위에 발을 디디고 서니 일렁이는 파도 때문에 휘청거리긴 해도 물에 풍덩 빠지진 않았다. 부단히 노력한 결과였다.

“헉, 뭐야? 물 위에 서 있는 거야?”

“어때? 신기하지?”

“대단하네. 다들 깜짝 놀라겠어.”

“그러려나?”

바람으로 젖은 몸을 말려주며 그리델라는 빗자루 뒤에 슬로세이를 태워주었다.

성인식을 마쳤음에도 슬로세이는 달라진 점이 거의 없었다. 키도 별로 크지 않았고.

‘뭐, 이제 점점 커지겠지만.’

그래도 무사히 성인식을 마치고 돌아온 것을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사람들 눈을 피해 밤하늘을 날아 부두 근처에 착지한 그들은 다른 일행이 기다리고 있을 여관으로 향했다.

슬로세이가 언제쯤 올지 몰라 기다리고 있던 일행은 그리델라와 함께 온 슬로세이를 보고 깜짝 놀라며 물었다.

“정말 키가 컸네?”

“앞으로 더 클 거야!”

“바로 쑥 커버리진 않는구나.”

“이제 곧 프라우디에보다 커질걸? 금방 따라잡을 거야.”

“그럴 수도 있겠네.”

“프라우디에 님은 도통 크질 않으시는군요.”

“호문쿨루스라 그런가 봐요…”

더이상 키가 자라지 않을 프라우디에는 시무룩해졌다.

동력원이 리치왕의 라이프 베슬이긴해도 성장에는 별 관계가 없는 모양이었다.

다들 그녀를 보고 깜짝 놀라자 슬로세이는 가슴을 내밀며 뿌듯해했다.

“이제 좀 더 강해졌으니까 나도 도움이 될 거야! 키도 쑥쑥 클 거고.”

“그럼 저랑 싸워보면 되겠네요.”

“…응?”

바이스의 말에 카이엔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바이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다른 분들과는 한 번씩은 맞붙어봤거든요. 제 실력이 어디까지 통할지도 확인할 겸.”

“언제 그랬어?”

“한 번씩 제가 자리를 비웠을 때가 있었잖습니까. 그때 잠깐씩.”

“허…”

“슬로세이 님의 경우엔 물을 다루는 능력이 있으니 싸워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뭐, 저는 몸도 튼튼하니 몇 대 맞는다고 죽진 않을 테고요. 많이 다친다고 해도 왕자님이 치료해주시면 되겠죠.”

“…날 너무 믿지는 마.”

“하하.”

바이스는 카이엔을 보며 웃곤 슬로세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슬로세이는 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

“날이 밝으면 바다로 나가서 싸워보죠.”

“시, 싫어요!”

그 말에 슬로세이가 사색이 되어서 고개를 저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강해졌으니 도움이 될 거라며 자랑하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정말로 겁먹은 듯한 모습에 바이스가 말했다.

“저랑 싸우는 것도 무서워하면서 적이랑은 어떻게 싸우려고 그러십니까?”

“그치만 적은 대부분 해골이나 괴물 같은 걸 만들어냈잖아요!”

“아아 그럼 프라우디에 님께서 상대해주시면 되겠네요.”

“아, 그럴까요?”

전력을 파악하는 건 좋으니까.

프라우디에는 거절하지 않았다.

바이스랑 싸우지 않아도 돼서 안도해야 하는 건지 언데드랑 싸워야 하니 걱정해야 하는 건지, 슬로세이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그걸로 멈추지 않고 바이스는 다른 이들을 보면서 덧붙였다.

“돌아가서 한 번씩 더 실력을 점검해봐야겠습니다.”

“으음…”

“알겠어요.”

다들 떨떠름해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카이엔은…

“왕자님은 치유에 전념하시길.”

“나만 무시당하는 것 같은데?”

“제가 모시는 주인을 굴릴 정도로 인성이 개차반은 아닙니다.”

“아니… 나도 강해져야 도움이 되든 말든 할 거 아냐.”

“일단 저까지 뚫리면 왕자님 목숨은 없는 걸로 치면 됩니다만.”

“진심이야?”

“네.”

카이엔에 대해서는 항상 한결같은 바이스였다.

물론 이전에 훈련한답시고 카이엔을 열심히 굴리긴 했지만 그건 그의 기준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모양인지 표정 변화 하나 없었다.

덕분에 카이엔은 반박조차 하지 못했다.

“아무튼 슬로세이 님이 얼마나 강해졌는지는 내일 확실히 확인할 겁니다.”

“네에…”

무시무시한 말에 슬로세이는 마른침을 삼켰다.

다음 날 아침, 일행은 일찍 바닷가로 나갔다.

슬로세이가 해안가에서 바닷물을 조종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손짓에 따라 바다는 파도치기도 하고 높게 솟아오르기도 했다.

먼 바다로 나가서 연습하지 않는 이상 전력을 내보이긴 어렵지만 그만큼 위험해질 확률이 높았다.

그들의 모습이 타인의 눈에 띄지 않게 프라우디에가 마법으로 잠시 가림막을 만들어내자 바이스는 그대로 바다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바닷물은 그의 신발을 적시지 못했다. 너무나도 간단하게 그는 물 위로 발을 디뎠다.

오러로 발밑을 지지해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맞추며 서 있는 것. 그 묘기에 다들 경악했다.

“아니, 인간 맞아?!”

“항상 보는 거지만 대단하네요…”

“자, 이제 발밑도 안정됐겠다, 싸워봅시다.”

“으으… 난 바이스 씨 무서운데.”

덜덜 떨면서도 슬로세이도 바다로 나갔다.

얕은 물가가 아닌, 좀 더 깊은 곳까지 걸어갔다.

태연히 물 위를 걷는 두 사람을 보고 모래사장에 남은 이들은 잔뜩 긴장해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슬로세이야 그렇다 쳐도 바이스는 까딱 잘못하면 물에 빠질 텐데, 너무나도 멀쩡했다.

“자, 덤비세요.”

선공을 양보하며 바이스가 손을 까딱였다.

그 신호에 슬로세이는 움찔거리면서도 근처의 물을 조종했다.

그녀의 뒤에서부터 거대한 파도가 몰아치며 바이스를 향해 날아들었다.

무시무시한 해일에도 바이스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거대한 파도가, 해일이 오러에 갈라지면서 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흩어졌다.

물보라가 일며 미세한 물방울이 쏟아져 내렸다.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그를 향해 슬로세이는 다른 공격을 행했다.

그러나 너무 겁을 먹어서일까? 물 채찍도 회오리도 소용돌이도 죄다 바이스의 앞에서는 무너져내렸다.

오러를 실은 검은 물마저도 베어버렸다.

그의 검이 지나간 자리에 거대한 빈틈이 생기면서 물이 흩어졌다.

그 여파로 튄 물들이 하나둘 더해지면서 늘 뒤로 넘기고 있던 머리카락이 물 때문에 젖고 풀어지면서 점점 그의 눈빛이 살벌해졌다.

그 모습에 슬로세이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항복! 항복! 나 못해, 무서워!”

“한참 더 연습이 필요하군요. 연습 많이 하셔야겠습니다.”

“으… 으으으…”

“마법과 비슷하면서도 마법이 아닌 물리력을 행사하고 있으니, 물이 없는 곳에는 효율이 떨어지는군요.”

검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고 그는 모래사장으로 걸어갔다. 그가 뒤돌아서자 슬로세이도 어깨를 축 늘어뜨리면서 따라왔다.

파도를 갈라버린 걸로 봐선 나중엔 바다마저 갈라버리는 게 아닌가 싶은 무서운 시종을 보며 카이엔은 들고 있던 수건을 내밀었다.

“…고생했다.”

“다치지 않아서 왕자님의 수고를 덜었군요. 바다까지 온 덕에 저도 물 위를 걷는 실험을 해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어… 그래.”

“삐끗해서 바다에 빠지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경각심을 가지고 전투에 임하니 집중력도 높아졌고요. 덕분에 제 실력을 내는 건 좀 어려웠지만.”

“그게 약했던 거라고?”

“네.”

“…너 그땐 왜 그렇게 많이 다쳤던 거야?”

“그땐 그때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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