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싸우는데 끼워주지 않는다며 화를 내고 간 슬로세이는 여전히 씩씩거리면서 성안을 돌아다녔다.
모두가 걱정하는 이유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카이엔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마왕 대리전에서도 아무 힘이 되어줄 수 없었는데. 좀 더 강해지기 위해 인어 왕국에 왔지만 뜬금없이 나타난 괴물 때문에 성인식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다들 애 취급 하고 있어.’
어리광을 부릴 수 있다는 건 좋았다. 그녀가 좀 더 성장하면 카이엔에게 달라붙지 못하게 바이스가 대놓고 막아설 것이란 것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도움이 되려면 강해져야 했고 강해지려면 좀 더 자라야 했다.
어느새 자기 방까지 도착한 슬로세이는 방 안에 들어가서 거대한 조개 껍데기로 만든 어린이용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그녀가 방에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문 앞이 시끌벅적해지더니 누군가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물이 흔들리는 것으로 눈치를 챈 슬로세이가 고개를 드니 세 언니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
“슬로세이!!”
“얼마나 걱정했는데!”
“우악!”
눈이 마주치자 세 명 다 너나 할 것 없이 달려들어 막냇동생인 그녀를 끌어안았다.
막내인 그녀보다 훨씬 어른스럽고 예쁜 언니들의 품에서 슬로세이는 뚱한 표정을 지었다. 동시에,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세 언니를 절대로 카이엔에게 보여주지 않겠다!…라고.
“무슨 생각해?”
“여전히 작네. 귀여워-”
“물 밖은 어땠어? 뭐 하고 지냈어?”
자주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던 그녀와는 달리 언니들은 부모님 말씀을 잘 듣는 착한 인어들이었다.
물 밖에 무엇이 있는지, 인간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했다.
궁금해하는 언니들을 밀어내면서 슬로세이는 허리춤에 손을 올리며 고개를 홱 돌렸다.
“쳇!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지금뿐일걸? 나 성인식 하러 왔으니까!”
“에? 그치만 거기서 괴물 나왔다던데.”
“안 됐다. 기껏 왔는데 못하겠네.”
“온 김에 더 있다가. 오랜만이라 반갑다.”
“아니거든?! 괴물 없애고 성인식 치를 거야!”
“시험이 뭔지는 알고?”
“윽…”
“힌트 좀 줄까?”
이미 어른인 언니들이 슬쩍 말을 꺼냈다. 그 말에 언니들을 보지 않고 고개를 돌리고 있던 슬로세이의 시선이 천천히 언니들을 향했다.
눈이 마주치자 세 언니는 까르르 웃으면서 손을 저었다.
“안 가르쳐주지롱~”
“그치만 슬로세이라면 할 수 있을지도?”
“맞아. 별거 아니니까!”
“이익…”
바다를 닮은 푸른 머리카락이 웃음소리에 따라 물속에서 너울너울 퍼졌다.
인어 중에서도 미인에 속하는 셋이었다. 분명 그녀도 좀 더 자란다면 저런 미인이 될 수 있을 테지.
깔깔 웃는 언니들을 노려보면서 슬로세이가 외쳤다.
“놀리지 좀 마!”
“에휴, 이제 막내까지 크면 어쩌지? 안 귀여워지면 어떻게 해.”
“그러게. 성인식 하지 말고 좀 더 오래오래 같이 있자-”
“맞아. 아직 이르지 않아?”
“이익… 나도 어른 될 거거든?! 될 거야!!”
“꺄, 막내 화낸다!”
“이따 보자!”
그녀가 벌컥 화를 내자 언니들은 끝까지 장난을 치면서 방에서 나갔다.
다들 나가자 조용해진 방에서 슬로세이는 잔뜩 인상을 쓰며 한숨을 푹 쉬었다.
성인식만 치르고 나면 쑥 클 수 있다! 본격적으로 성장에 가속화가 붙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물을 조종하는 힘이 강해지면 물 밖에서도 훨씬 강한 능력을 쓸 수 있을 터, 그렇게 된다면 일행이 싸울 일이 생겼을 때 그녀가 나설 수도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인어 왕족이었다. 분명히 도움이 될 테니까…
‘두고 가지 마.’
마왕 대리전 때도, 다들 심각하게 다쳤는데 한발 늦게 도착해서 저택의 불을 끄기 바빴던 그녀와 그리델라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리델라는 원래 전투 체질도 아니었고 정보 수집 면에서는 바이스를 도와주고 있었으니 아무 도움도 되지 않고 식객으로 눌러앉아 있는건 그녀뿐이었다.
성장만 할 수 있다면. 좀 더 강해진다면.
‘괴물… 이길 수 있을까?’
물 속이라서 인간인 일행이 싸우는 데 방해가 될 것이다.
다들 먼 발치에서 구경만 하면 다행이고 아마 프라우디에가 나서서 싸우겠지.
물 밖으로 그 괴물을 끌어내서 싸우려고 해도 괴물이 따라오지 않는다면 방법이 없었다.
‘내일 가보자.’
유적지에 가서 괴물을 확인하자.
어떻게 생긴 놈인지 확인하고 나서 바로 싸우던지, 준비를 해서 다시 오던지. 가만히 서서 시간 낭비를 할 수는 없었다.
한편 손님방에 있는 이들은 슬로세이가 바로 올 것 같진 않으니 잠시 쉬기로 했다.
프라우디에가 바닥에 열심히 마법진을 그려서 완성했다.
마력을 불어넣으니 마치 물 밖처럼 바닥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반투명한 구체가 눈에 보여서 마법진 밖과 안을 구분하기는 쉬웠다.
진이 어긋나면 안 되므로 바닥에 모포만 깔고 앉거나 누운 채로 간단히 식사를 했다. 방수 마법을 걸어둬서 육포도 빵도 멀쩡했다.
“바닷속이라 밤낮을 알 수가 없군요. 시간 상으론 저녁입니다.”
“대충 먹고 자자.”
“숨 쉬는 것만으로도 용하지. 그런데 이 공간은 진짜 신기하다. 어떻게 한 거야?”
“좀 복잡해요. 숨도 쉴 수 있으니까 자다가 숨 막혀 죽을 일은 없을 거예요.”
“다행이네.”
“내일 유적지로 가보도록 하죠.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습니다.”
“내 예상인데, 바다뱀이랑 말이 통할 것 같진 않아… 그리고 말이 통한대도 순순히 물러날 것 같지도 않고.”
한숨을 푹 쉬며 카이엔이 말했다.
그 말에 일행의 반응은 담담했다.
“그럼 어쩔 수 없죠.”
“싸워서 없애야지.”
“맡겨만 주세요.”
“해내겠습니다.”
악마의 대리인과도 싸운 적이 있는 그들이었다. 고작 바다 괴물 따위에게 질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카이엔은 피식 웃었다. 그의 생각 또한, 그들과 비슷했다.
***
그날 밤.
바이스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프라우디에가 그려놓은 마법진 안에선 숨을 쉴 수 있었지만 밖으로 나가면 그렇게 되진 않을 터.
반투명한 막 너머를 바라보던 바이스는 프라우디에에게 따로 받은 물약을 마시고 마법진 밖으로 빠져나왔다.
방 밖으로 나가고 복도를 지나면 바로 성 밖이었다.
보초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그는 조용히 검을 휘둘러보았다. 물이 방해가 돼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래선 도움이 안 되겠군.’
인상을 쓰며 그는 검에 오러를 흘려보냈다. 그것 또한, 잘되지 않았다.
검에 오러를 씌우는 것은 가능했지만 물 밖에서처럼 마음대로 휘두를 수 없었다.
오러를 쏘아 보내는 것도 나아가는 속도가 형편없었다.
바닷속에서도 마법사, 특히 흑마법사인 프라우디에는 어느 정도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겠지만 프라우디에에게만 부담을 주기도 미안했다.
그런데 이 꼴을 봐선 나서는 게 오히려 프라우디에에게 방해였다.
한참을 고민하던 중 물이 흔들리는 느낌에 바이스는 뒤를 돌아보았다. 저만치에서부터 자네인이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바이스 씨?”
“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뇨. 바이스 씨가 나간 걸 알고 프라우디에가 걱정하길래 나온 것 뿐이에요. 무슨 생각 하고 계셨나요?”
“전투입니다. 프라우디에 님에게만 맡길 수는 없는데 생각만큼 몸이 잘 안 따라주네요.”
“일이 어려워질 것 같으면 저도 드래곤 화를 해서 싸울게요. 바다 괴물이면 분명히 거대할 테니 사이즈는 맞겠죠.”
바닷속에서 거대한 드래곤과 바다뱀이 싸우는 모습이라.
잠시 상상하다가 바이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 외에 다른 방법이 있을까도 고민했습니다. 뱃속에 들어가서 안에서 공격해보면 어떨까 싶기도 하고요.”
“너무 위험할 것 같은데요.”
“으음 역시 그렇죠?”
카이엔이 허락해줄 것 같지도 않고 말없이 시도했다간 불쌍한 왕자님은 정말 그가 큰일이 난 줄 알고 뒤로 넘어가 버릴지도 몰랐다.
“왕자님이 위험에 빠지면 어쩌나 솔직히 걱정되는군요. 그걸 방지하려고 따라온 건데 바닷속에서는 평상시의 반의 힘도 낼 수 없습니다.”
“바이스 씨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될 거예요. 보초들이 저희를 발견하면 곤란해지지 돌아갈까요?”
“네. 그럽시다.”
시험해볼 것은 다 시험해봤기에 바이스는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다음 날 아침, 슬로세이가 손님방에 찾아왔다.
빼꼼 고개를 내민 그녀를 발견하고 카이엔이 손짓했다.
“슬로세이, 이리 와.”
“…화났어?”
“응? 내가 왜 화를 내? 유적지에 대해 할 말이 있어서 그래.”
“정말?”
“정말.”
“그럴줄 알았지! 내가 밥도 가져왔어.”
“밥?”
“인어는 뭘 먹는지 궁금하긴 했는데…”
슬로세이는 커다란 조개껍질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 안을 열자 담긴 것은 생선과 조개류, 해초. 물론 날 것이었다.
바닷속에 사는 인어들이 불을 쓸 리가 없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메뉴였다.
내용물을 보고 바이스가 한 마디 감상평을 입에 담았다.
“흠, 인어가 생선도 먹는 게 맞군요. 솔직히 말하자면, 슬로세이 님의 식성이 독특한 줄 알았습니다.”
“엥? 뭐가요??”
“인어는 반신이 물고기 같아서 안 먹을 줄 알았습니다.”
“다들 먹거든요?”
주식이 어패류라며 슬로세이는 툴툴댔다.
아무튼 날생선을 먹고 배탈이 날 수 있으니 미안하지만 슬로세이가 가져온 음식은 먹을 수 없었다.
아침 또한 가방에서 꺼낸 육포와 비스킷, 마른 과일로 해결한 뒤 그들은 회의를 시작했다.
슬로세이가 페레우스에게서 괴물에 대한 정보를 좀 더 알아 와서 그 내용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색은 일단 거무죽죽, 유적지 자체가 심해에 속한 구역에 있어서 잘 안 보인 모양이군요.”
“주변에 뿌옇게 흩어지는 무언가로 봐서는 독이라고 추정할 수도 있지만 가까이 접근하지 않아서 자세한 건 모르고요.”
“길이는… 똬리를 틀고 있어서 추측할 수밖에 없지만 십미터는 넘으려나.”
바다 괴물이 유적지에 자리를 잡고 있으니 인어들은 견제하면서 지켜보기만 한 모양이다. 괜히 건드려서 화를 입을 필요는 없으니까.
프라우디에는 가방을 열고 가져온 것들을 점검했다.
심해에 묻힌 뼈가 있다면 조종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가져온 것으로 대신하려고 했다.
몬스터의 뼈를 쏟아내더니 대충 조립해보면서 바다에서도 움직일만한 모습으로 바꿔보았다. 수백 개의 뼈가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더니만 그럴듯한 모습을 만들었다. 겉으로 봐서는 물고기, 상어와 비슷했다.
“실전에서는 좀 더 촘촘하게 짜 맞추고 강도를 높일 거예요. 음, 그리고… 바다 괴물이 갑자기 나타났다는 건 유적지에 무언가가 있어서일지도 몰라요. 그래서 제가 바다 괴물을 상대하고 있을 동안, 다른 분들께는 조사를 요청하고 싶어요.”
“조사?”
“네. 괴물은 저 혼자서 상대할 테니까 나머지 분들은 모두 유적지를 조사해주세요. 슬로세이에게도 그게 나을 것 같고요.”
“에? 나?”
“슬로세이는 인어니까요. 헤엄도 잘 치고 물도 조종할 수 있으면 유적지에서 느껴지는 기운에도 다른 분들보다 훨씬 민감할 거예요. 물의 흐름이 이상하거나, 하는 식으로요.”
“혼자는 위험하지 않겠어?”
걱정하는 카이엔의 말에 프라우디에는 방긋 웃었다.
“괜찮아요. 쉽게 해치우지 못할 것 같으면 열심히 시간이라도 끌고 있을게요.”
“으음…”
살짝 인상을 쓰고 카이엔은 가방에서 물병을 하나 꺼내 프라우디에에게 건네주었다.
투명한 유리병 안에 들어있는 건 물이었다.
“바다 괴물이라니까 괜히 걱정되네. 이거라도 하나 가지고 있어.”
“물약? 아니… 혹시 성수인가요?”
“응. 내가 신성력을 담아봤자 얼마 안 되겠지만, 혹시라도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비장의 수단으로 쓸게요.”
활짝 웃으며 프라우디에가 대답했다. 자네인은 끝까지 걱정했지만 프라우디에가 걱정말라면서 그녀 또한 조사대에 끼워 넣었다.
바다뱀이 그의 방해를 넘어 유적지로 들어가면 자네인이 막아줘야 한다며, 고집을 부린 결과였다.
유적지를 탐사하기로 마음을 먹었기에 그들은 즉시 페레우스를 찾아갔다.
인어왕인 그는 걱정하면서 호위할 기사를 붙여주려고 했지만 프라우디에가 얼른 카이엔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소곤거렸다.
“말려들 수 있으니 저희끼리 가는 게 나아요. 그리고 제 마법도 있으니까요.”
“아… 음, 그래. 저희끼리 가겠습니다. 안내자만 있으면 충분해요.”
“허어… 정말 괜찮겠는가? 위험할 것 같으면 얼른 오게나. 그 괴물은 유적지를 벗어나려고 하지 않으니 도망쳐도 쫓아오지 않을걸세.”
“알겠습니다.”
결국 안내인 한 명만 일행을 유적지까지 안내해주기로 했다.
유적지는 좀 더 깊은 심해에 존재했기에, 프라우디에는 일행의 몸에 무리가 가지 않게 새로운 마법을 걸어주었다.
깊은 곳으로 내려갈수록 바다는 어두워졌다. 인어들은 앞을 잘 보는 모양이었지만 인간인 그들에겐 무리가 있었다.
“흠.”
“확실히 잘 안 보이네.”
“마법 써볼까요?”
“부탁할게.”
프라우디에의 손에서 동그란 빛의 구체가 퐁퐁 솟아나더니 둥실둥실 아래쪽으로 떠내려갔다.
안내역을 맡은 인어가 가리키는 방향 쪽으로 빛의 구체를 보내니 과연, 유적지가 보였다.
원래 성인식을 하러 갈 땐 길을 잃지 않게 빛을 내는 산호나 돌 등을 뒀다지만 바다 괴물 때문에 파괴된 것 같다며 안내역 인어가 한마디 했다.
“일단 여기가 경계예요.”
“그렇다면 여기서 기다려주세요. 저는 이렇게-”
프라우디에가 빛의 구체를 움직였다. 한 구체가 두둥실 물속을 헤엄치며 유적지로 향했다. 빛의 구체가 일정 지점에 닿은 순간, 심해의 바닥에 웅크리고 있던 바다 괴물이 튀어나와 그것을 물어뜯었다.
보호색 때문인지 바다와 구별이 잘 안 되었는데 모습을 드러내니 금세 거무죽죽한 신체가 눈에 띄었다.
“눈치챘나 보네.”
“준비하자.”
프라우디에는 즉시 주머니를 열어서 뼈를 쏟아냈다.
연습할 땐 생선 모습을 흉내 냈던 뼈를 조립하여 바다뱀의 모습으로 만들어냈다. 바다 괴물도 거대하니 이쪽도 덩치로 맞설 셈이었다.
짙은 색의 바닷속에서 희디흰 뼈는 너무나도 잘 보였다.
“가세요.”
“응.”
뼈로 만든 바다뱀이 형체를 이루며 아래로 향했다. 붉은빛이 번뜩이며 바다 괴물이 프라우디에의 본 스네이크에게 덤벼들었다.
그것을 보고 프라우디에가 인상을 찌푸렸다.
“…평범한 몬스터가 아니에요. 시독을 주의하세요.”
“시독?”
“언데드…인가 보네요. 나 참, 바닷속에 뭐가 있다고 언데드를 풀어논건지.”
바이스는 혀를 차며 모두를 데리고 이동했다. 자네인 또한 머뭇거리다가 그 뒤를 따라갔다.
슬로세이는 열심히 헤엄치면서 그들이 움직이면서 만든 물살이 바다 괴물에게 닿지 않게 주의 깊게 물을 조종했다.
그들의 목적지는, 유적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