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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왕자는 조용히 살고싶다-153화 (154/219)

153화

가미긴의 요청에 카이엔은 급하게 티아마티스와 연락을 취했다. 다행히 즉시 닿은 연락에 티아마티스는 간신히 짬을 내어 세자르로 왔다.

이노스는 집을 보게 두고 왔다. 괜히 데려왔다가 시간 낭비를 할 게 뻔하다며 혀를 차는 그를 보고 카이엔은 마른 침을 삼켰다.

아직도 이노스는 티아마티스에게 굉장한 스트레스를 안겨주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카이엔의 안내를 받으며 회의실로 간 그는 그곳에 가미긴이 있는 것을 보고 인상을 썼다.

“…악마 후작씩이나 되는 놈이 왜 여기 있는 거지? 어디서 불쾌한 냄새가 나나 했더니 네놈이었던 건가.”

“하하 보자마자 하는 말이 고작 그거인가?”

어쩐지 사이가 나빠 보였다.

그러고 보니 티아마티스에게 연락할 때 가미긴이 있고 말하는걸 깜빡했던지라 카이엔은 조심스럽게 티아마티스에게 물었다.

“…초면 아니세요?”

“초면…이라. 어찌 보면 그럴 만도 하지.”

“질서를 지키는 자가 드래곤인데 사고 치는 확률은 압도적으로 악마가 높으니 경계할 수밖에 없지.”

“사고 쳤냐?”

“난 아니다. 난 단순히 할 말이 있어서 오라고 한 것뿐이지.”

“바쁜 사람 부르지 말고 다음부턴 네놈이 찾아오던가.”

“어… 죄송합니다.”

“…너한테 한 말은 아니다.”

카이엔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사과하자 티아마티스는 한숨을 쉬면서 회의실 안으로 걸어들어와 빈자리에 앉았다.

넓은 회의실에 자리를 잡고 앉은 건 카이엔, 바이스, 프라우디에, 가미긴, 티아마티스 다섯 명뿐이었다.

회의의 주제로 삼을만한 건 단 한 가지뿐이었다.

가미긴은 티아마티스가 던져준 마검을 부수고 안에 있는 것을 확인해본 결과, 먼 과거 리치왕이 썼던 힘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알렸다. 그 말에 티아마티스가 인상을 썼다.

“리치왕?”

“당신도 알고 있지 않았던가?”

“흠…”

“부숴보고 나서 확신할 수 있었지만. 하지만 단순히 흉내 낸 것이라고 하기엔, 거의 완성품에 근접해가고 있었고.”

리치왕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가미긴은 그 심장… 라이프 베슬이 과거 그가 도굴해내 창고에 넣어뒀던 것임을 밝혔다. 도둑맞았다고 말하자 티아마티스가 혀를 찼다.

“칠칠치 못하게 창고나 털리다니.”

“…….”

가미긴은 그 말에 티아마티스의 시선을 외면했다.

자기들끼리 보물창고를 털어대는 미친 행동을 하는 악마들의 행실에 티아마티스는 어이가 없었지만 회의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그 이상 가미긴에게 뭐라고 하지 않았다.

“…아무튼, 그렇게 도둑맞은 라이프 베슬이 인간계에서 호문쿨루스 안에 들어있었죠.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입니다.”

“쯧. 그렇겠지. 이거나 확인해라.”

티아마티스는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회의실 책상에 던졌다.

툭 하고 떨어진 종이 뭉치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그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독스 백작가가 당시 교류하던 자들의 목록이다. 그리고 거래해온 품목들이지. 연구 보고서의 필사본도 끼어있다.”

“에엑?!”

“그런 것도 찾아낸 거예요?”

“그 집안에 조력자가 있으니까.”

힐끗 프라우디에를 쳐다보고 그가 말했다.

“…여동생이 걱정을 많이 하더구나.”

“아…”

“너에게 항상 미안해하고 있고.”

“그럴 필요는 없는데…”

“덕분에 자료가 상세해졌지. 에이바토스 독스는 현재 백작가의 소가주니까.”

“이거 읽어봐도 됩니까?”

“읽으라고 가져온 거다.”

가장 먼저 자료에 손을 뻗은 건 가미긴이었다.

한번 쓱 훑어보면서 그는 손가락 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연관 있는 자들을, 당신이 털어보지 않았을 리도 없고… 역시 지옥에서 도둑놈부터 찾는 게 나으려나.”

“그 도둑놈은 아직도 못 찾았냐?”

“저 같은 악마 눈을 피해서 창고 터는 것도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네놈이야 연구실에 처박혀있으면 누가 들어오는지도 모르겠지.”

“끄응.”

티아마티스는 손쉽게 가미긴을 이겼다.

그의 말에 따르면 에이바토스는 정기적으로 그에게 가문 내의 정보를 보내주고 있다고 한다.

그녀는 연금술에 뜻이 없지만 관심 있는 척이라도 한다면 아버지인 백작에게 정보를 뜯어낼 수 있을 거라고 여겼고 그녀의 예상은 정답이었다.

자료가 가미긴의 손에 있었기에 카이엔은 그것을 한번 쳐다보고 티아마티스에게 물었다.

“그런데 리치왕은 어쩌다가 재해가 된 겁니까? 태어났을 때부터 리치였을 리는 없을 텐데요.”

“그렇지.”

“처음엔 흑마법사였을 거다. 죽음을 피하려고 갖은 수를 쓰다가 리치가 된 거겠지.”

“자세한 사정은 나도 몰라.”

“…제가 잘못했어요. 기억은 없지만… 아니, 기억이라도 있었다면 좀 더 나았을 텐데…”

시무룩해져서 프라우디에가 고개를 숙였다.

옆에 앉아있는 프라우디에게 풀이 죽자 가미긴이 급하게 손을 저었다.

“네 잘못이 아니다. 애초에 도둑질해간 놈이 잘못이고-”

“그 전에 도굴한 놈이 더 잘못했지.”

“으으으.”

맞는 말이므로 가미긴은 찍소리도 못하고 원망 어린 눈으로 티아마티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런 눈빛 따위에 티아마티스가 질 리 없었다. 그는 턱을 괸 채 가미긴에게 물었다.

“그 외에 더 털린 건 없나?”

“리치왕의 라이프 베슬 말고는 없었어. 보물 창고에 뒀는데 어떻게 알고 그것만 쏙 빼갔는지도 신기하다니깐.”

“허어…”

탄식이 뒤를 이었다.

가미긴은 자신의 흑역사를 제 입으로 말하려니 속이 쓰린 듯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러던 중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라이프 베슬과 다크 엘프의 마검을 조사했을 때 그 안에 덧새겨진 마법이 있었다. 조종의 마법이라 지워버렸지. 누가 건건지는 모르겠지만…”

“흐음. 그런 게 있었군.”

“교묘하게 잘 가려놔서 겉만 봐선 몰랐을 거야. 나도 자세히 관찰하다 알았으니까.”

“그거 하나는 잘했군.”

“티아마티스 님, 리치왕에 대해 알려주세요. 티아마티스 님밖에 모르는 일입니다.”

티아마티스가 가미긴을 더 괴롭게 만들기 전에, 카이엔이 끼어들었다.

리치왕의 라이프 베슬이 이번에 일어나는 사건의 중심이라면 그는 리치왕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프라우디에의 내면에서 그 아이와 교류하는 인격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 마법은 곧잘 기억해내는 것 같으면서도 제 과거에 대해서는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믿을 수 있는 건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리치왕의 시절 또한 겪은 티아마티스 뿐이었다.

쯧하고 혀를 차곤 그가 말했다.

“아주 오래된 일이다. 나도 정확히 언제 일어난 건지는 기억이 안 나. 지금은 고룡인 내가 성룡의 문턱에 들어섰을 즈음에 있었던 일이니까.”

“그래도요. 아시는 것만이라도 알려주세요.”

“리치왕이 어떻게, 어쩌다가 생긴 건지는 나도 모른다. 다만 이전에도 꼭 하나씩 사건이 터지곤 했던 인간계가 그땐 정말로 멸망 직전까지 치달았지. 그런 리치왕을 죽이기 위해 각지에서 내로라하는 용사들이 나타났다.”

“용사라는 게 아무 데서나 툭툭 튀어나오는 모양입니다.”

“난세에서 영웅이 나온다는 말도 있으니. 뭐, 그건 신경 쓸 일이 아니지.”

티아마티스는 손을 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솔직히 말하면 리치왕에게 덤벼든 놈들의 태반이 죽어 나갔으니까. 죽기만 했으면 다행이지. 리치왕이 부리는 언데드가 되어서 얼마나 난동을 부렸는지.”

“…….”

“게다가 일부는 다른 세계에서 리치왕을 해치울 존재를 데려와야 한다고 했다. 물론, 리치왕보다 더한 괴물을 불러올 뻔해서 내가 막았다.”

“어…”

“그러다가 꽤 심하게 다쳐서 마지막 결전은 내 눈으로 보지 못했지.”

“…….”

“왜 그런 눈으로 보고 있는 거지?”

“아뇨, 아무것도…”

“나도 그땐 참… 무슨 객기로 나섰는지 모르겠군. 기껏 몸 던져서 구해놓으니 미친놈들이 내 심장을 노리고 내 유지를 잇겠느니 어쩌니 하면서 뒤통수를 치려고 하기도 했고.”

심각한 부상을 당한 티아마티스의 심장을 노리고 공격을 감행한 머저리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카이엔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런 일을 겪었음에도 인간에게 적대적이지 않은 티아마티스가 놀라울 뿐이었다.

구해놓으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것도 아니고, 자기들을 구하려다 다친 이가 가진 힘을 노리고 달려들다니.

리치왕 봉인 후 삐딱선을 타던 티아마티스의 과거와 그런 그와 엮이는 바람에 고초를 겪은 자네인의 사정을 모르는지라 카이엔은 티아마티스가 인내심도 많고 마음이 넓은 드래곤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무튼, 그때 그 괴물이 나타났다면 리치왕뿐만이 아니라 세계가 박살 나버렸을 테지.”

“그런 일도 있었지. 와, 옛날 생각나네. 그땐 지옥도 들썩였는데. 어… 아!!”

“왜 그러세요?”

“그게, 그때 이후로 천계와 인간계, 마계를 나누고 있는 보이지 않는 두꺼운 벽에 조금 흠이 갔다고 알고 있거든. 으음, 그땐 전 마왕 집권 시절이었고 회의 중에 대수롭지 않다는 듯 한 마디 흘려서 그냥 넘어갔었지만.”

“…그거 위험한 거 아닙니까?”

“마왕이 별거 아니라고 했으니 그냥 넘어갔지.”

아마 그래서 이후로 악마들이 사는 마계, 즉 지옥의 존재들이 인간계로 보다 쉽게 넘어갈 수 있었을 거라며 가미긴이 덧붙였다.

그 말에 카이엔이 물었다.

“그래서 몽마들이 인간계에 터를 잡았던 겁니까?”

“아마도. 걔네는 최초의 왕이 죽은 이후 아스모데우스가 떠맡게 되면서 아예 신경을 안 써주게 됐으니까.”

“최초의 왕이요?”

“아, 그런 게 있어.”

저번에 비셰가 왕이 어쩌고, 하는 말을 했었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아서 카이엔은 고개를 기울였지만 그에 대해 물어보는 대신 그는 전 마왕에 대해 물었다.

“전 마왕은 무언가를 알고 있을까요?”

“그 이름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그놈 지금 어딨는지 아무도 몰라.”

“하?”

“그게, 마왕 대리전 선언하고 나서 마계가 엄청 들썩였다는 건 예상이 가지? 일부 악마들은 우리가 사는 그 땅에서만 하는 줄 알고 자기보다 급이 낮은 악마를 대리인으로 세웠었어. 그런데 몇 명이 살짝 머리를 써서 인간들과 계약을 했었거든? 전 마왕은 계약자에 제한을 두지 않았으니까. 물론 기권 따윈 없고 벗어나려면 죽어야 했지만.”

가미긴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마왕 대리전은 카이엔이 끼어있던 일인지라 다들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러나 그 내용은 그들의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마계에서 싸우던 놈들이 고개 들어 인간계를 보니 웬일, 훨씬 약한 놈들이 널려있네.”

“어…”

“그래서 거기 있던 놈들이 인간계로 나오니 딱 그쯤에서 기다리고 있던 바알의 계약자한테 단숨에 썰렸지.”

“그 사람, 강했군요.”

“바알의 계약자인걸? 당연히 강하지.”

악마도 썰어버렸다는 건가.

자신이 대체 어떻게 이긴 건지 모르겠다며 카이엔은 고개를 숙였다.

가미긴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아무튼 대리전 끝나고 전 마왕은 앙그라 마이뉴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어딘가로 가버렸어.”

“갑자기 모습을 감춘게 수상한데.”

“뭐, 어차피 이제 할 일도 없을 테니 잠적해도 상관은 없긴 하지만… 이런 사태니까 찾을 필요는 있겠네.”

“그건 앙그라 마이뉴에게 부탁해볼게요. 마왕이 고작 인간계 하나 멸망시키겠다고 빙 돌아서 움직일 리도 없고.”

“그건 그렇지.”

“하긴.”

다 같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알아낸 건, 이번 사태가 리치왕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뿐이었다.

너무 오래전에 있었던 일이라 기록조차 남아있지 않고 그 역사를 알고 있는 건 긴 시간을 살아온 고룡과 악마뿐이었다.

심지어 둘 다 깊은 사정은 모르고 있었다. 프라우디에에게 리치왕의 기억은 없었고 기억을 잃은 리치왕역시 말이 없었다.

다만, 리치왕은 낮은 목소리로 프라우디에에게 말을 걸었다.

- 뭘까.

“네?”

- 악마의 보물 창고까지 털어서 내 라이프 베슬을 가져간 놈의 목적이, 대체 뭘까.

“그러게요…”

- 나는 대체 뭐하던 놈이었을까.

어쩐지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 그 마검, 숙주의 몸을 집어삼키고 광포화 상태에 빠지게 하는거랬지. 그런 걸 왜 만들었을까.

대답해줄 리 없는 물음만을, 리치왕은 이어나갔다.

- 나는 누구였을까.

그리하여 본질적인 의문에 다가갔다.

- 나의 근원이 네 심장으로서 자리 잡고 있는데 어째서 내 의식은 너와 공존하고 있는 것일까. 이것에도 무언가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현재로선 알 수 없는 의문. 돌아오지 않는 기억.

프라우디에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괜찮아요.”

-…….

“걱정하지 마세요.”

괜찮을 것이라며 프라우디에는 리치왕에게 말했다.

지금까지도 별의별 괴상한 일들이 일어났지만 어떻게든 해결하지 않았던가.

이번에도 분명히 그럴 것이라며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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