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저녁 식사를 하고 나서 가미긴은 카이엔을 찾아갔다.
다행히 카이엔은 아직 집무실에 있었기에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약속을 따로 잡진 않았지만 카이엔은 하던 일을 잠시 멈추었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자마자 가미긴이 입을 열었다.
“프라우디에의 라이프 베슬을 확인해봤다.”
“무슨 문제라도 있었나요?”
“그래. 거기에 누군가가 손을 댄 흔적이 있었어.”
“저번에 가슴이 완전히 뜯어져서 고칠 때만 해도 그런 건 없던 것 같은데…”
“너희는 마법사가 아니잖아. 그래서겠지. 일단 그 흔적은 지웠으니 안심해라.”
가미긴은 팔짱을 끼며 말을 이어나갔다.
“의아한 건, 그 아이처럼 능력이 있는 흑마법사가 존재하는데 왜 아무도 대리전에 이용하려고 접근하지 않았냐는 거야. 듣자 하니, 너희가 만난 놈들은 죄다 얼간이들 뿐이던데.”
“그야 제가 있어서 그런 거 아닐까요?”
그가 있는데 그의 옆에 있는 프라우디에에게 접근할 리가 없지 않나.
그런데 카이엔의 말에 가만히 서 있던 바이스가 첨언했다.
“아뇨. 저한테도 누군가가 힘을 준답시고 접근했던 걸로 봐선 그건 아닌 모양입니다. …왜 그렇게 놀라시나요?”
“너 지금까지 그런 말 한 번도 한 적 없잖아!!”
“흠. 그랬나요?”
“‘그랬나요’가 아니지!!”
바이스의 말에 카이엔은 기겁했다.
이 녀석은 왜 지금까지 그런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다가 갑자기 하는 건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면 평생 숨기려고 했던 걸까?
“그렇게 놀랄만한 일입니까?”
“당연하지!”
“흠.”
고개를 갸웃거리는 게, 정말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다급하게 카이엔이 물었다.
“너 그런 말은 언제 들은 거야? 누가 그런 거야?!”
“누군지는 모릅니다. 거절하니 금세 사라지더군요.”
“왜 나한테는 말 안 해준 건데!”
“그야 말씀드릴만한 일이 아니잖습니까.”
카이엔이 놀라든 말든 바이스는 무덤덤하기 그지없었다.
그 광경에 가미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카이엔의 바로 옆에 있는, 최측근인 바이스까지도 저런 말을 들었는데 프라우디에에겐 접촉한 악마가 없었다.
생각해보니 겔로스에서 만난 사령 기사의 주인이었던 악마 벨레드 또한 프라우디에를 직접 눈으로 보고 나서야 리치왕의 라이프 베슬을 알아차리지 않았던가.
‘벨레드가 말했던 악마가 설마…’
리치왕의 라이프 베슬에 관심이 있는 악마는 가미긴이 아니었을까?
합리적인 의심의 시선이 가미긴을 향했다.
그 시선에 담긴 뜻을 모르는 눈앞의 악마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만 말했다.
“…난 일단 지옥으로 돌아간다. 거기서 다른 악마들을 좀 털어봐야겠어.”
“네?”
“내 집 창고를 털 정도면 어느 정도 실력이 있는 놈일 테니까. 너무 오래전에 털린 거라 증거 잡아내긴 힘들 테지만 이곳저곳 찔러봐야지.”
알아낼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는 한숨을 푹 쉬었다.
“아, 그전에 마검도 좀 더 자세히 봐야겠군. 프라우디에와 같다면 새겨진 마법을 조작해야 하니까. 같이 갈래?”
“네.”
카이엔이 간다고 하니 바이스는 자동으로 뒤따랐다.
다행히 엔베인은 외출하지 않고 별채 근처에서 걷고 있었다.
마검의 이야기를 하니 그는 선뜻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내밀었다.
이전엔 시끄럽게 떠들어댔던 마검은, 지금은 평범한 일반 검처럼 조용했다.
마검을 꼼꼼히 살피면서 가미긴이 말했다.
“일단 마법 하나 걸어 둘게. 또다시 이 검에 네 이성이 먹히면 안 되고 마검 또한, 제작자에게 조종당하는 일이 있다면 곤란하니까.”
“네. 감사합니다.”
“마녀들이 공격당했다고 했지? 마녀들도 몸 사리라고 하고 또…”
가미긴의 눈이 카이엔을 향했다.
눈이 마주치자 카이엔은 괜히 움찔거렸고 가미긴은 살짝 인상을 쓰며 입을 열었다.
“너에게는 힘든 일이 될 거다. 앙그라 마이뉴가 너를 마신 사제로 만들지만 않았어도 좀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힘을 철저히 이용해라. 이왕 받게 된 거 어쩔 수 없지.”
“…무슨 일이 또 생기는 겁니까?”
“확실하진 않지만 아무튼… 천신의 사제에게 당하지 않게 조심하고. 흑마법에 강령술 같은 것에 손대는 놈들이 교묘하게 너희와 그쪽을 싸움 붙일 수도 있으니까.”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있어요. 잘 처신해야죠.”
“그래. 지옥에서 단서를 발견하면 연락하겠다.”
말을 마치고 가미긴은 바로 모습을 감췄다.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그가 조금전까지 서 있었던 장소를 바라보며 카이엔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악마가 저렇게 말할 정도면 정말 큰 일이 벌어질 모양이다.
리치왕. 리치왕의 라이프 베슬.
마법 소녀들조차 알아내지 못했던 리치왕을, 누군가가 노리고 있다는 걸까.
이제 또 무슨 일이 생길지 상상도 안 간다며 카이엔은 고개를 저었다.
“저번엔 세상을 멸망시킨다는 놈이 나왔는데 이번엔 어떤 놈일까.”
“글쎄요.”
“…그때 내가 졌으면 정말로 멸망했을까? 앙그라 마이뉴 말로는 그것도 반쯤 사기였을 거라던데…”
“그러게요.”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의문이 들긴 하네요.”
카이엔의 말에 대충 대답하던 바이스는 바람이 차다며 카이엔을 데리고 다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고민하지 마시고 일찍 주무세요. 안 그래도 피곤하실 텐데. 뭐가 나오든 간에, 세계 멸망보다 위험하겠습니까?”
“하긴.”
가미긴이 뭔가를 알아내면 좋겠다며 카이엔은 일찍 잠을 청했다.
비슷한 시각, 잠 못 이루는 사람은 더 있었다.
엔베인이 가미긴이 떠났음을 프라우디에에게 알려주었다. 두 사람은 멀뚱히 잔디밭에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번에 가미긴이 확인하고 간 건 그들 뿐이었다.
호문쿨루스와 반쯤 언데드인 다크 엘프.
양손으로 턱을 괸 채 프라우디에가 말했다.
“저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생명이에요. 대체 누가 저를 만든 걸까요? 가미긴 님은 꽤 고위급 악마라고 하셨는데, 그런 악마의 창고를 뒤지면서까지 라이프 베슬을 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글쎄.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번 적은 상당히 강할 것 같아…”
저번에도 도움이 못 됐는데. 엔베인은 한숨을 푹 쉬었다.
“나는 이 마검 같은 게 다른 곳에 더 있을까 봐 그것이 걱정돼. 난 내 목숨을 내던졌지만 왕자님이 나를 부를 때까진 정신이 먹히고 있었으니까.”
마검은 대답이 없었다.
예전엔 꽤 자주 소통했는데 요즘은 말도 잘 안 나누었다. 정말로, 진짜 검이 된 것처럼.
가만히 마검을 들여다보며 엔베인이 중얼거렸다.
“혼이 묶였다고 했지. 내 쪽이 우위를 차지해서 마검의 의식이 없어지고 있는 걸지도 몰라. 아니, 이미 없어진 걸지도.”
완전히 합쳐진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나 반쯤 죽었다는데 나중에 썩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게 된다고 해도 제가 모습을 유지할 수 있게끔 도울게요.”
“고마워.”
“말 나온 김에 지금 한번 봐볼까요? 숨은 쉬고 계세요?”
“숨? 어…”
엔베인은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잠시 후, 머뭇거리면서 대답했다.
“…잘 모르겠는데.”
“어.”
“으음…”
“심장! 심장 뛰는 소리요! 아니, 이럴 게 아니라 연구실로!!”
장난으로 한 말이었지만 엔베인의 반응이 영 시원치 않았다.
프라우디에는 화들짝 놀라서 엔베인의 손을 붙잡고 연구실로 끌고 갔다.
지금까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는데 마검의 의식이 사라지고 엔베인이 완전히 마검과 한 몸이 되었다면, 엔베인의 몸이 멀쩡할 리 없다.
어쩐지 잡고 있는 손이 묘하게 서늘한 것 같다며 프라우디에는 진땀을 흘렸다.
만약 마검이 누군가의 실험으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더스크라이즈는 다크 엘프의 땅. 몬스터들이 서식하는 장소이기에 실험하기엔 최적의 장소일지도 몰랐다.
다가오는 생명체의 몸을 빼앗고 영혼을 흡수하면서 점점 힘을 불려갔을 테니까.
다크 엘프는 인간보다도 찾기 힘든 존재니 검 하나 딱 던져두고 나중에 수십 수백의 영혼을 잡아먹은 그 귀검을 가지러 왔을 수도 있겠지.
마검과 동화되어 이성을 잃은 영혼들은 한데 녹아버릴 테고 그중 가장 강한 것이 살아남았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엔베인은 프라우디에를 따라 연구실까지 들어왔고 프라우디에는 수술대를 가리키며 외쳤다.
“얼른 누워보세요!”
“으음… 꼭 해야 할까?”
“귀를 대보는 것도 좋지만 갈라서 확인하는 게 제일 좋으니까요!”
“어어…”
그냥 귀만 대어보면 안 될까. 맥을 짚어보는 거로는 부족한 걸까.
프라우디에가 채근하자 엔베인은 하는 수 없이 수술대 위에 누웠다.
그런 그를 향해 프라우디에가 무시무시한 소리를 했다.
“통각은 있으세요? 없으면 바로 하려는데.”
“…마취 정도는 해줄래?”
아무리 그래도 통각은 느끼지 않을까?
다칠 일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일단 촉감은 느낄 수 있었다.
오감에는 문제가 없다는 말에 프라우디에는 미심쩍어하면서도 마취제를 준비했다.
“그런데 마취제가 안 통하면 어쩌죠?”
“그럼 어쩔 수 없지…”
이것저것 약이며 수술 도구를 준비하는 프라우디에의 손이 점점 분주해졌다.
엔베인은 멍하니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았다.
프라우디에는 본인이 호문쿨루스여서인지 연금술이며 흑마법 같은 걸 배워서인지 아무렇지도 않게 그에게 ‘가슴을 갈라서 심장이 뛰는지 확인해보자’는 무서운 말을 했다.
다른 사람들에겐 아마 그런 말을 하지 못하겠지.
그런데 거의 준비를 마칠 즈음에 프라우디에가 물었다.
“그런데 엔베인 씨, 지난번에요. 왕자님이랑 다 같이 밥 먹었을 때 기억나세요?”
“하도 자주 먹어서 잘 모르겠는데.”
“딸기술 먹었을 때요.”
“아. 기억나.”
“그때 엔베인 씨, 술 꽤 많이 먹지 않았어요? 그런데 멀쩡했죠?”
“응.”
“단순히 술이 센 게 아니라 알코올이 작용하지 않았던 거면 어쩌죠? 그럼 약물 같은 게 통하지 않는다는 말일 텐데.”
걱정스러운 얼굴로 프라우디에가 뒤를 돌아보았다.
장갑을 끼고 주사기를 들고 있는 모습이 무시무시했다.
그 말에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해서 엔베인이 입을 열었다.
“안 통하면 어쩌지?”
“그럼 생살을 가르는 수밖에요.”
“으으음…”
“직접 보는 게 정확해요.”
“청진기는 안 될까?”
“일단 해보고요.”
프라우디에는 물러서지 않았다.
주사기를 들이밀자 엔베인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안 되겠는데요.”
“그러게.”
그들의 걱정은 사실로 밝혀졌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취제 말고도 수면제, 근이완제 등도 사용해봤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
이제 남은 건 정말로 생살을 가르는 것뿐이라 엔베인은 겁을 먹었고 프라우디에는 진지한 얼굴로 온갖 약병을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생살을 가르면 아프겠죠?”
“그렇지…”
“살만 가르는 게 아니라 갈비뼈도 톱으로 잘라야 하는데.”
“으으음…”
“언데드지만 통각이 살아있다는 거죠? 다른 감각도 그렇고.”
“아마도…?”
자신감 없는 목소리에 프라우디에는 결국 약병을 손에서 내려놓았다.
“직접 보는 건 무리일 것 같고 다른 검사만 해볼게요.”
“응.”
“살이 썩으면 안 되니까 그 방법에 대해서도 같이 생각해봐요. 그렇다고 아예 안 씻을 수는 없으니까요.”
미관상의 문제도 있고 썩으면서 나는 악취 또한 문제다.
게다가 살이 모두 없어지면 해골밖에 남지 않는다는 뜻이다.
아직 엔베인은 멀쩡했지만 이게 평생 지속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언데드의 경우엔, 굉장히 오래 살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