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으음… 여기 있지말고 마검은 직접 좀 봐주세요. 가요.”
결국 프라우디에가 가미긴의 손을 잡아끌었다. 계속 눈물을 닦는 그를 데리고 프라우디에가 나가자 카이엔이 그 뒤를 따라갔다.
다행히 엔베인은 별채 뒤뜰에 있어서 바로 만날 수 있었다. 가미긴은 언제 울었냐는 듯 바로 표정을 바꾸고 엔베인을 보았다.
“무슨 일 있으신가요?”
“엔베인 씨, 마검 좀 보여주세요.”
“응? 여기.”
프라우디에의 말에 엔베인은 바로 마검을 건네주었다. 프라우디에는 마검을 가미긴에게 건넸고 그는 마검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 모습에 엔베인은 카이엔을 바라보았다. 카이엔은 입 모양으로 '악마'라고 전달했고 엔베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흠. 이걸 어쩌다가 발견했는지 말해봐라.”
”다크 엘프의 땅에서 어느 날 갑자기 발견되었습니다. 주변에 닿는 동물의 몸을 흡수해 이용했고 더스크라이즈엔 몬스터도 꽤 많아서 점점 위협적인 모습이 되었죠.”
“이 마검이 너와 연결돼있는 이유는?”
“저와 함께 봉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넌 지금 멀쩡히 돌아다니는구나.”
“이성을 잃어가는 도중에, 왕자님이 저를 발견하셨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마검에게 먹혀가던 정신이 일깨워졌습니다.”
그 말에 가미긴은 검을 한번 쓱 보더니 엔베인에게 시선을 옮겼다.
”지금은 검과 반쯤 합쳐진 상태라는 거군. 이 검 자체가 죽음의 기운을 풍기고 있어서 몸도 영향을 받아 반쯤 언데드… 지금까지 안 썩은 게 용하다.”
“헉…”
“그만큼 네 몸에 남아있는 생명의 기운이 강하다는 거겠지만.”
가미긴은 마검을 훑어보곤 다시 엔베인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내가 여기서 좀 더 머물러야 할 것 같은데.”
“네?!”
카이엔은 진심으로 놀랐다.
기분이 상할 법도 한 반응이었지만 가미긴은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다.
”연구실을 빌려줄 수 있나? 이 작은 아이가 추측한걸 좀 더 확인해보고 싶어졌다. 리치왕의 라이프 베슬은 고작 인간 따위가 손댈 수 있는 게 아니야. 분명 이 아이의 탄생에도 누군가가 손을 댔을 게 뻔하고 그자가 마검을 만들어 다크 엘프의 땅에 둔 자와 동일 인물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가 뿌득 하고 이를 갈았다.
“내 창고를 뒤진 도둑놈과 연관되어있을 확률도 높고.”
잡히면 곱게 죽진 않을 거다.
그가 열의를 보이자 카이엔은 고민 끝에 대답했다.
“일단 앙그라한테 허락부터 받고요.”
“아, 그게 있었지.”
“통신구는 제 방에 있어요.”
바로 카이엔은 방으로 향해 통신구를 통해 앙그라의 의견을 구했다.
가미긴이 조사를 위해 인간계에 남아야 한다는 말을 했다고 그대로 전하니 앙그라는 생각보다 흔쾌히 허락해주었다.
- ”그럼 가미긴에게는 휴가를 주지. 다만, 할 것만 하고 바로 오게 해.”
“네.”
- ”그 녀석이 괴롭히면 말하고.”
“어… 네.”
가만히 둬도 혼자서 괴로워하다가 회복하지 않을까?
가미긴이 혼자 고통스러워할지언정 그를 괴롭힐 것 같진 않아서 카이엔은 대충 대답했다.
앙그라가 말한 대로 전달하니 가미긴은 충분하다면서 감사 인사를 했다.
“그런데 연구실은 프라우디에의 것밖에 없는데 괜찮으신가요?”
“그 애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많으니 허락을 구해야지.”
악마가 허락을 구한다니! 아까 그 모습만 없었어도 굉장히 정상적이고 개념 있는 악마라고 생각했을 텐데.
연구실에서 프라우디에랑 같이 연구하다가 뜬금없이 울 것만 같았다.
카이엔에게 자신의 이미지가 어떻게 정착된 건지 알지 못하는 가미긴은 추적을 어떤 방법으로 해야 할지 궁리할 뿐이었다.
'티아마티스 님한테도 알릴까?'
악마가 인간계에 남아있으면 걱정할 테니까.
카이엔이 그 이야기를 하자 가미긴도 동의했다. 드래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쯤이야, 아무렇지도 않다면서.
티아마티스와 연락하는 건 자네인에게 맡기기로 했다.
가미긴은 주로 프라우디에의 옆에 있을 테니 자네인에게도 제대로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다른 이들에게도 악마인 가미긴을 제대로 소개해야만 했다.
“도움 요청을 받고 지옥에서 온 가미긴이라는 악마야. 얼굴 볼 일이 많을 테니까 잘 알아둬.”
가미긴이 얼마 동안 영주성에 머물다 갈 것이기에 카이엔을 모두에게 그를 소개했다.
영주성의 일반인들에게는 손님이라고만 했지만 가까운 이들, 특히 별채의 이들에게는 그가 악마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악마?”
“와아, 나 악마 처음 봐!”
“슬로세이, 비셰도 악마다.”
“이런 말을 해도 될진 모르겠지만, 겉모습만 봐선 악마 같지 않군요.”
악마가 온다는 말은 들었지만 실제로 보니 굉장히 멀쩡하게 잘생겼다는 말이 나왔다.
그러나 이미 가미긴이 울면서 비명을 지르는 모습을 봤던 카이엔과 프라우디에는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가미긴은 카이엔이 정원에서 기르고 있는 알라우네인 릴리시아를 보고는 굉장히 흥미로워했다.
“이렇게 크게 자란 놈은 오랜만에 보는군. 그런데 왜 진화를 안 하지?”
“원래 진화하는 겁니까?”
“그래. 하지만 진화하지 않는 걸 보니 네가 밥을 아주 잘 챙겨주나 보군. 진화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밥을 주니까 이대로 점점 크기만 커지지.”
“더 커지진 않나요?”
“더 커지진 않을 거다.”
“다행이다…”
카이엔은 진심으로 안도했다.
당분간은 식객으로 머물게 된 가미긴은 바로 프라우디에의 연구실에 틀어박히게 되었다.
식사도 그쪽에서 해결하는 모양이었다.
알아서 잘하겠지, 라며 카이엔은 프라우디에에게 가미긴에 대한 것을 맡겼다.
“호문쿨루스라고? 하긴, 그래야 라이프 베슬을 심을 수 있었을 테지. 내가 좀 더 자세히, 그 심장을 볼 수 있을까?”
가미긴의 물음에 프라우디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쓰지 않아 먼지만 쌓여가던 수술대 위에 그가 눕게 되었다.
차분히 마취며 수술의 준비를 하며 가미긴이 입을 열었다.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들한테 몸 상태를 보게 한 적은 있어?”
“아뇨. 흑마법에 대해 아는 건 저뿐이었거든요.”
“너무 순순히 허락하길래.”
“가미긴 님은 저보다도 전문가잖아요. 저도 제 몸이 궁금하긴 해요.”
프라우디에는 손가락으로 제 심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예전에 티아마티스 님과 싸웠을 때 심장 쪽이 이렇게 열렸던 적이 있거든요. 라이프 베슬이 그대로 드러났었어요. 그 상처를 봉합하고 치료하기 위해 왕자님이 다른 분들과 같이 다크 엘프의 도움을 받으러 가셨고 거기서 엔베인 씨와 만났었고요.”
“아, 사정이 있었군.”
“네. 그땐 막 리치왕의 존재를 인식했을 터라 흑마법에 대해서는 하나도 몰랐지만요.”
“일단 내가 있으니 치유는 걱정하지 말거라.”
금속으로 된 수술대가 차가워서 프라우디에가 놀랄까 봐 살짝 마법을 걸어 온기까지 심어준 악마였다.
그 말에 프라우디에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마취 준비를 끝낸 가미긴이 프라우디에의 혈관에 천천히 마취제를 주입했다. 똑, 똑 떨어지는 수액 형태로 느리게 마취제가 혈관으로 들어갔고 호흡을 보조할 수 있는 기구까지 입에 물려준 뒤, 가미긴은 수술용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살아서 버둥거리는 몸도 수십 수백 번 절개하고 해부해본 적이 있는 그였다. 가만히 움직이지 않는 호문쿨루스 정도는, 간단히 칼을 댈 수 있었다.
나이프가 심장 부근의 피부를 갈랐다. 흐르는 피를 마법으로 지혈하고 닦아내면서, 그는 그 안을 확인했다.
선명한 검보라색의, 불길한 마력을 흐르는 라이프 베슬이 그 안에 있었다.
“…흠?”
무언가가 더 있는데.
그는 상처 부위를 좀 더 크게 절개했다.
그리고 짧게 혀를 찼다.
“하.”
“내가 와서 다행이네. 큰일 날뻔했어.”
심장 근처에 주문이 걸려있었다. 아마 그땐, 아무도 눈치 못 챘겠지.
프라우디에의 추측은 거의 사실에 근접해있었다.
리치왕의 심장으로 호문쿨루스를 만들어낸 것도, 다크 엘프의 땅에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마검을 버려놓은 것도, 이번에 마녀들을 습격한 것도 동일 인물이리라.
그런 놈이 악마의 눈에 띄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대리전에 대한 제안을 받지 못했으려나?
그는 그 마법에 손을 대 교묘하게 바꾸었다. 술자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정교하게 다듬었다.
예전에 그가 도난당한 물건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가미긴은 상처를 봉합했다.
꿰맨 흔적 하나 남지 않게 말끔히 낫게 한 그는 주변을 정리했다. 주입하던 마취제를 제거했고 호흡 보조 장치는 주변을 정리한 뒤 제거했다.
인간과는 다른, 호문쿨루스의 몸이지만 걱정이 되어서 준비해놓은 것들을 치운 뒤 그는 프라우디에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정신 들어? 이제 다시 옷 입자.”
“아, 네…”
중간에 마취제의 양을 조절했기에 프라우디에는 금세 눈을 뜰 수 있었다.
멍하니 누워있던 프라우디에는 가미긴이 일으켜주자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건네받은 셔츠를 입으며 프라우디에가 물었다.
“어떠셨어요?”
“네 추측이 거의 사실에 근접했다는 건 알겠다. 다만 누군지는 좀 더 조사가 필요해. 오래전에 도둑질해간 리치왕의 라이프 베슬을 왜, 이제 와서 호문쿨루스에 집어넣은 건지도 알아야겠고.”
마왕 대리전에 맞춰서 저질렀다? 그건 아니다. 이번 일은 왕이었던 사탄 놈이 뜬금없이 꺼낸 말이었으니까.
무언가 있다. 사탄을 찾아가서 물어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는 대리전이 끝나자마자 앙그라 마이뉴에게 마왕 직을 넘기고 모습을 감춰버렸다. 마치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 빠른 움직임이었다.
“단추 잘못 잠갔다.”
“아.”
“아직 약 기운이 덜 갔나 보네.”
잠시 딴생각에 잠긴 그였지만 프라우디에가 단추를 두 개씩 밀려서 잠근 것을 보고 다시 풀어서 채워주었다.
역시 깨우고 나서도 두 시간은 눕혀놓고 상태를 봤어야 했나. 인간과 다른 몸이니 마취제 효과도 금방 가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상태를 보니 좀 더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어…”
프라우디에는 수술대에 걸터앉은 채 가만히 있었고 그는 옷을 입혀주는 상황.
인기척은 느꼈지만 괜찮을 거라 생각해 그대로 있었는데 어째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고개를 돌렸고 프라우디에를 찾느라 연구실 안쪽까지 들어온 자네인과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당황한 듯 눈을 깜빡이더니만 급한 일은 아니라며 횡설수설하며 가버렸다.
그 모습에 프라우디에와 가미긴은 짧게 탄식을 흘렸다.
“아.”
“이런.”
오해받았으려나. 마저 단추를 채워준 뒤 가미긴이 말했다.
“나중에, 별일 아니었다고 말 좀 해줄래?”
“그럴게요.”
“다음엔 마검도 좀 확인해봐야겠다. 누구의 손이 닿았는지 마력의 흔적이라도 찾아봐야겠어. 넌 마취도 깰 겸 좀 누워있거라.”
“괜찮은데…”
“아직 눈빛이 덜 돌아왔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도로 수술대에 눕히긴 거북했는지 가미긴은 프라우디에를 데리고 나와 근처 소파에 눕혀주었다.
프라우디에를 쉬게 두고 가미긴은 연구실로 돌아왔다.
‘리치왕의 라이프베슬, 흐르는 피는 독룡의 것…’
현재 이 세계에 존재하는 유일한 드래곤 티아마티스.
그는 과거 자신의 피를 뿌려 원래 있던 존재를 변화시켰다.
아까 들어온 여성도 그가 자신의 피를 흘려서 인간에서 다른 존재로 탈바꿈을 시킨 것이었다.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티아마티스는 더이상 ‘독룡’을 만들어내지 않았지만…
‘이전부터 독룡을 사냥해온 놈이 있던 건가.’
지금은 티아마티스도 나이를 먹어서 많이 유순해졌지만 과거엔 자기가 만들어낸 존재를 죽이는 자를 용서하지 않았다고 알고 있는데.
강한 힘을 품고 있는 것들이 프라우디에의 몸을 이루고 있었다. 안에 품은 것이 리치왕의 라이프 베슬이기에 어찌 보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가진 힘만을 따지고 보면 카이엔의 곁에 있는 자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에 안에 들 정도로 강한 아이다. 하지만…
‘이 아이는 마왕 대리전에 참여하지 않았고 왕자를 돕기만 했지.’
‘리치왕은 재해다. 라이프 베슬을 훔친 놈도 그것을 잘 알고 있을 터. 하지만 그 귀한 재료를 고작 인간 귀족에게? 그것도, 자식이 없어서 인공적으로 자식을 만들려고 한 답 없는 인간에게?’
게다가 사용한 건 그 인간의 피와 신체도 아니었다.
독룡의 피를 썼으니 아마 호문쿨루스를 만들 때 쓴 재료도 인간의 것이라곤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겠지.
그게 아니라면,
‘귀족은 제 피를 이용한 호문쿨루스를 만들어내려고 했지만 그 과정에서 도움을 요청했던 자들이 몰래 재료를 바꿔버렸다던가.’
귀족의 실험실이라면 확실히 눈에 띄지 않을 테고 들킨다고 해도 알아서 무마해줄 테니.
이용당한 건가 싶기도 하지만 동정심은 들지 않았다. 들어보니 프라우디에를 만든 뒤 자연스럽게 아이가 생긴 바람에 프라우디에를 내팽개친 모양이고.
하지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 보니 그것 또한 수상해졌다.
아이가 생기지 않게끔 손을 써서 이전부터 연금술에 뜻이 있던 백작이 호문쿨루스로 눈을 돌리게 유도한 것이 아닐까, 하고.
그렇다면 놈인지 놈들인지 모를 그것들이 노리는 건…
‘프라우디에.’
하지만 그렇게 둘까 보냐.
이미 그 라이프 베슬에 덧새겨진 주문은 그가 완벽히 지워냈다. 조종하려고 해도 될 리가 없다는 것에 가미긴은 조금 뿌듯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점은 남아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내 창고를 어떻게 턴 거람?’
리치왕의 심장 말고 도난당한 물건은 없는 거로 기억하는데. 생각하니 또 화가 났다.
그때 옆에서 누가 팔을 톡톡 쳤다. 어느새 옷을 다 입고 정신도 또렷이 차린 프라우디에였다.
“무슨 생각 하고 계세요? 밥이라도 먹으러 갈까요?”
“배고파?”
“조금요.”
“그래, 가자.”
두 사람은 나란히 손을 잡고 연구실에서 나왔다.
이러고 있으니까 왠지 애 아빠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딸 같이 생긴 아들이지만.
또다시 눈물이 앞을 가려서 가미긴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또 우세요?”
“안 울어.”
귀신같이 알아차린 프라우디에의 물음에 가미긴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 딸이든 아들이든 이렇게 귀엽고 예쁜데. 계속 눈물이나 짜고 있는 건 프라우디에에겐 실례였다.
“난 이따가 너희 왕자한테 가봐야겠다. 알아낸 걸 말해줘야지.”
“저도 듣고 싶어요.”
“별거 없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