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낮에도 마주치는 일이 가끔 있었기에 카이엔과 메르실라는 인사를 나누곤 했다.
카이엔은 다른 사제들과 만나도 그와 똑같이 인사를 건넸지만 다른 이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느새 비셰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은 모두는 메르실라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신도 인정한 왕자님의 짝이란 거지?”
“어째 많이 왜곡된 것 같긴 하지만…”
“우린 어떻게 하면 좋을까?”
“괜찮은 사람인 것 같으니 카이엔이 알아서 하라고 해야지. 옆에서 부추긴다고 해서 잘될 일도 없고.”
“복잡하네요.”
비밀 이야기를 하듯 다들 잔뜩 목소리를 낮추고 대화했다.
저 둘은 지금까지 신성력 공부에 대한 대화 말고는 거의 하지 않았다. 일상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지만 연애를 하는 분위기는 전혀 풍기지 않아서 두 사람의 관계에 멋대로 상상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들이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을 때,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으으음…”
성국에서 온 급한 연락에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서 떨리는 마음으로 전보를 건네받은 신관, 제논 마르코스는 깊은 시름에 잠겼다.
긴 고민 끝에 그는 메르실라를 불러왔다.
“성녀님, 요즘 어떠십니까? 이곳의 백작님과는 어떤가요?”
“네? 어, 그게 그러니까… 백작님이 굉장히 배움에 임하시는 태도가 좋으셔서 수업은 잘 진행되고 있어요. 신전 규칙 같은 것만 좀 더 잘 가다듬으시면 혼자서 일하시는데에도 문제 없을 거예요.”
“인간적으로는 어떱니까?”
“어어…”
“같이 있는 시간이 늘어나니 친해진 것 같던데.”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메르실라는 말끝을 흐렸다.
뜬금없이 카이엔 이야기가 나오니 놀란 모양이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고 제논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성녀님도 아직 젊고 한창 이성에 관심이 많으실 연령이시니 마음이 있으시면 확실히 움직이셔야 합니다.”
“네??”
“뭘 그리 놀라십니까?”
“다른 분도 아니고 제논 사제님이 그렇게 말씀하실 줄은 몰랐어요.”
“끙…”
일리는 있지만, 고위 사제인 그에게도 계시가 전달된 탓이 컸다.
내용은 정리하자면, 마신의 단 하나뿐인 사제는 소중하니까 절대 위협하거나 건들지 말고 혹시라도 그 아이와 친하게 지내려는 사람이 있으면 얼른 붙여놓으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 전보의 내용을 믿지 못해 허둥지둥하던 그였지만 그래서일까, 그날 밤 그에게도 계시가 내려왔다.
신의 음성은 그분을 믿는 사제들이 어둠의 신의 단 하나뿐인 사제를 적대하지 말고 원만하게 지내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 꿈에서 깨고 나서 그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었다.
지금까지 그 존재를 알지 못했던 마신이 갑자기 등장한 것도 놀라운데 유일한 인간 사제를 한 명 택했다.
꼭 두 신이 말을 맞춘 것처럼 딱딱 맞게 계시가 내려오질 않나, 이상한 일들투성이었다.
물론 정말로 두 신이 머리를 맞댄 끝에 나온 결론이었지만 인간인 그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도 다 신의 뜻이겠지.’
결국 제논은 이런 결론을 내렸다. 그제야 마음이 편해졌다.
자세한 건 나중에 에밀로 돌아가서 교황과 이야기할 필요가 있었다.
어쩌다 보니 두 사람은 별생각이 없는데 옆에서 밀어주는 꼴이 되어버렸다.
성녀라고 연애를 하지 말란 법은 없었고 일행 중에서 가장 높은 위치의 사제인 제논이 대놓고 말을 꺼내진 않았지만 메르실라 라면 괜찮다며 용인해주었다. 물론 메르실라 본인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사절단이 떠날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애초에 조사만 하고 가려던 걸 카이엔의 훈련과 신전의 규칙을 만드는 걸 도와주고 봐주느라 점점 늦추던 귀환 일정을 더는 늦출 수 없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그들이 떠날 날짜가 정해지자 사제들은 천천히 진료소의 문을 닫았고 마을 사람들도 가시는 길 인사하러 나오겠다며 입 모아 말했다.
카이엔 역시 그들이 떠나기 전날, 파티를 열어 후하게 대접을 해주었다.
여전히 사제복 차림인 메르실라는 카이엔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백작님이라면 혼자서도 수련하실 수 있으실 거예요.”
“많이 배웠습니다.”
물론 가벼운 인사였지만 파티장에 있던 모두의 시선은 두 사람에게 쏠려있었다.
“괜찮으시다면 다들 다음에 또 방문해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아직 여러모로 모자라니까요.”
“인연이 닿는다면야, 언제든지.”
다음날, 사절단은 에밀로 돌아갔다.
그동안 도움을 많이 받았던 세자르의 영지민들은 사절단이 돌아가는 길에 박수를 치거나 꽃을 뿌리면서 그들의 귀환길이 평안하기를 기도했다.
그들이 영주성에서 어느 정도 멀어진 뒤에야 비셰는 다락방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제야 자유로워진 비셰는 슬쩍 카이엔에게 다가가 물었다.
“왕자님, 저분들이 가서 서운하진 않으세요?”
“글쎄. 서운해하기엔… 영주성은 원래 시끌벅적했잖아.”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한 뒤, 카이엔은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너희,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어디서 헛소문 같은 걸 퍼뜨리고 있던 거야-!!”
“으악!”
“들켰다!”
“잘못했어요-!!”
다들 조심한다고 했지만 말하는 입이 많다 보니 카이엔의 귀에도 들어간 것이었다.
지금까지 내색하지 않고 있던 그는 사절단이 돌아가자마자 소리를 질렀고 그가 화를 내자 다들 바로 납작 엎드려 사과했다.
비셰 역시 함부로 말을 흘린 죄로 혼났다. 카이엔에게 귀를 잡힌 채로 비셰가 연신 죄송하다는 말을 내뱉었다.
“하여간… 이상하다고 하는 녀석이 한 명도 없었던 거야?”
“그게…”
“으으음…”
“내 연애담 같은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어. 비셰 너, 뒷부분은 하나도 안 들었구나.”
“다, 다른 악마한테 들킬 것 같아서-”
“어휴.”
카이엔은 짧게 한숨을 쉬고 비셰의 귀를 놓아주었다.
“마신전의 탄생이 이제 곳곳에 퍼질 테고, 나는 이제 단 한 명의 사제로서 이종족들을 돌봐야 해.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건, 마신전의 이미지다! 괜히 이상한 놈들이 오면 안 되니까!”
앙그라 마이뉴는 이걸 경고하기 위해 꿈에 나타난 것이었다. 루키푸게는 보조자 역으로, 벨레드는 그냥 처웃으러 왔고.
그의 말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너희가 생각하기에도, 마신 하면 딱 떠오르는 이미지가 그리 좋진 않을 거 아냐. 그것 때문에 온갖 사이비며 이단 종교가 나를 자기네 종교와 엮으려 들 수도 있고 이곳으로 올 수도 있다. 그러니 확실히 대처해야 해. 이전 대리전 때 봤던 흑마법사 같은 놈들이 나타나면 안 되니까.”
“성국 에밀이 인정한 새 종교의 탄생… 이라 그럴까요.”
“하긴 왕자님 끌어들여서 자기네가 사이비가 아니라고 광고할지도 모르겠네요.”
“준비할 필요가 있겠어요.”
“그래. 그러니까, 이상한 종교인들이 보이면 바로 쫓아내. 이야기 들어보지 말고.”
“네.”
“…진짜 괜찮으려나.”
카이엔은 혀를 찼다.
단 하나뿐인 마신의 사제인 그를 노리고 어떤 놈들이 올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성국 에밀이라는 강력한 종교 국가가 있음에도 이곳저곳에서 온갖 잡신을 내세우는 사이비 종교가 나타나곤 했다. 그런 이들을 용서 없이 처단하는 게 바로 에밀의 사제와 성기사단이었다.
그리고 마신은, 그 실존하는 신은 천신과 어떻게 담판을 지은 건지 이 땅에 자신의 신전을 세우고 에밀이 공격하지 않게끔 제대로 일 처리를 마쳤다. 이제 남은 건 그의 유일한 사제인 그가 신이 해놓은 일에 먹칠하지 않게 잘해나가는 것뿐이었다.
***
“그… 바이스 씨, 저 뭔가 잘못한 거라도 있나요?”
“찔리는 부분이라도 있으십니까?”
“그, 그건 아닌데에…”
마른침을 삼키며 비셰는 바이스의 눈치를 보았다.
일대일, 면대면으로 마주하는 자리는 언제나 어려웠다. 특히나 바이스는 더욱 그랬다.
그와 눈도 못 마주치는 비셰를 보고 바이스는 피식 웃었다. 그가 비셰를 부를 때마다 혼내거나 닦달하곤 해서 비셰가 지레 겁을 먹은 것임을 눈치챈 것이었다.
하나 그가 비셰를 부른 이유는 그를 혼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바이스는 테이블 위에 올려뒀던 상자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줄 게 있어서 불렀습니다.”
“네?”
“저번에 제가 말한 게 있지 않습니까. 기억 안 나시나요?”
“자, 잘 모르겠는데요…”
“인성 검사.”
“네?”
”불성실한 정신 상태를 가진 이를 왕자님 곁에 둘 수 없다고 말했었죠. 이제 비셰 씨가 어떤 인물인지는 파악했으니 시녀든 시종이든 맘대로 하셔도 됩니다.”
활짝 웃으며 바이스가 말했다.
그 말과 웃는 얼굴을 보고 한참 동안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던 비셰는 몇 초가 지난 뒤에야 반응했다.
깜짝 놀라서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비셰가 외쳤다.
“네에-?!”
“여기 있는 건 옷입니다. 시종으로 일하고 싶은 날에는 이쪽, 시녀로 일하고 싶은 날에는 이쪽. 뭐, 맘대로 선택해서 입어도 됩니다. 어차피 여기 분들은 비셰 씨가 몽마라서 성별을 바꿀 수 있다는 걸 대충은 알고 있을 테니까요.”
“저, 정말 제가 시녀로 들어가도 되는 거예요?”
“지금까지 왕자님 곁에는 시녀를 두지 않았습니다. 어렸을 적에야 페이리 씨가 힘써주셨지만 왕자님이 자라실수록 저 혼자 관리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거든요. 저도 없고 글라스 씨도 없을 땐 비셰 씨가 왕자님을 보필하게 될 겁니다.”
“아…”
그땐 몰랐지만, 지금은 그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 자리인지 알 수 있었다.
바이스가 없을 땐 글라스, 글라스가 없으면 그가 하는 일이라니.
바이스의 신뢰를 얻지 못한다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 바로 카이엔의 곁에서 그를 보필하고 보좌하는 일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비셰는 상자를 열어보았다. 곱게 접어진 정장과 단정한 메이드복이 들어있었다.
“내일부터 바로 실습을 시작하겠습니다. 맘에 드는 옷으로 입고 아침 7시까지 오시면 됩니다.”
“네…네!!”
힘차게 비셰가 대답했다.
그리고, 비셰는 드디어 주방을 탈출해 카이엔의 옆에 설 수 있게 되었다.
다음 날 아침. 시종인가 시녀인가 한참 동안 고민한 끝에 비셰는 여성체로 변해 메이드복을 입고 출근했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검은 원피스와 단정한 앞치마가 마음에 들었다. 긴 곱슬머리는 높게 올려묶으니 훨씬 차분해 보였다.
시녀로서 첫 출근을 한 날. 카이엔에게 전달된 사항은 없었는지 잠이 덜 깬 카이엔은 눈을 비비면서 비셰를 보았다.
“…무슨 일 있었어?”
“비셰 씨한테 시녀, 시종 일을 교육하기로 했습니다.”
“난 못 들었는데.”
“상관없지 않습니까.”
“어휴…”
카이엔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바이스를 혼내지 않았다.
그저, 글라스에 이어 비셰한테도 시종 대리 교육을 하는걸 봐선 그가 또 무슨 일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만을 예상할 수 있었다.
글라스는 혹독하게 훈련시켰던 바이스였지만 비셰는 전투 능력이 전무하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에 기본적인 것만 가르쳐주었다.
그런데 사흘 내내 비셰가 메이드복만 입고 출근하자 카이엔이 물었다.
“그 옷이 마음에 들어?”
“네!”
“특이하네…”
“그야 왕자님 시종으론 바이스 씨도 있고 글라스 씨도 있잖아요. 시녀는 제가 유일하고요.”
“아, 그런가.”
그렇게 해석하면 왜 비셰가 시녀로 있는걸 더 원하는지 알 것 같았다. 자기는 대체할 인력이 없다는 뜻이겠지. 물론 하는 일은 다른 두 사람과 비슷하겠지만 말이다.
반면 바이스는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목욕 시중도 들어야 할 텐데, 왕자님은 괜찮으신가요?”
“나야 뭐… 상관없는데.”
“그럼 괜찮겠군요.”
다른 이라면 모를까 비셰라면 상관없을 것 같았다.
여성체로 변해서 시녀가 되어 카이엔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비셰는 많은 이들에게 목격되었다.
어떤 모습이어도 미인이라는 변하지 않아서일까. 어느 날 저택에서 일하는 하인 한 명이 그에게 고백하는 일이 생겼다. 바이스가 한 심부름을 하던 도중이었던 비셰는 그 고백에 깜짝 놀라 물었다.
“좋아한다고? 진짜? 나 몽마인데?”
“상관없어요!!”
“에에.”
이건 또 뭘까. 상대는 진심인 모양이었지만 비셰는 관심이 없었다. 애초에 잘 아는 사이도 아니었고.
그녀의 대답은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미안. 몽마는 다른 종족이랑 안 사귀어.”
“그, 그러면 정기는요? 그건 먹는다면서요. 그것만으로도 좋으니까-”
“나 가려먹거든?!”
뽑아낸 정기에도 급이 있었다. 마력이 높은 사람일수록 가벼운 접촉만으로도 뽑아낼 수 있는 정기의 순도가 달랐다.
정기 이야기가 나오니 비셰는 기겁을 하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쫓아오지 마! 계속 그러면 왕자님한테 이를 거야!!”
혹시라도 하인이 붙잡을까 봐 비셰는 쏜살같이 카이엔의 집무실로 달려갔다.
바이스가 시킨 심부름으로 가져온 책도 잊지 않았다.
집무실에 도착한 그녀는 책상 위에 들고 온 책을 내려놓고 얼른 카이엔에게 조금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허?”
“어떻게 할까요?”
카이엔은 인상을 구겼고 바이스는 카이엔의 의견을 물었다. 여차하면 누군지 알아내서 처리할 모습에 카이엔이 비셰에게 물었다.
“글쎄다. 넌 어떻게 하면 좋겠어?”
“어린 녀석이고 잘 말했으니 뜬금없는 소리는 안 하겠죠. 만약 다음에 또 그러면 다시 말씀드릴게요.”
“그럼 그땐 감옥에 가두겠습니다.”
“엑…”
“그때 생각하자, 그런 건.”
“비셰 씨도 고생이 많군요”
“바이스 씨에 비하면 고생은 아니죠.”
“여성체로 돌아다니는 일이 늘어나자마자 이런 일이 생기다니. 몽마란 걸 알고 누가 함부로 대하거나 배척하면 바로 알려주십시오.”
“그럴게요.”
꼭 그렇게 하겠다면서 비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젠 실루이타에 있었을 적에도 미인인 그녀에게 추근대는 사람은 굉장히 많았다.
고백을 거절당한 뒤에 깔끔하게 마음을 접는 이도 있었지만 오히려 더 집착하고 쫓아다니는 사람 수가 훨씬 많았기에 비셰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녀는 남성체로 다니는 것도 여성체로 다니는 것도 모두 좋아했지만 카이엔한테는 여성체 쪽이 더 예뻐 보이지 않을까, 싶어서 선택한 건데 시녀가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이런 일이 생기다니!
제대로 일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혹시라도 카이엔에게 해가 될지도 모른다면서 바이스가 다시 주방으로 돌려보내면 어쩌나 비셰는 잔뜩 긴장했다.
다행히 바이스는 그를 자를 생각은 없는 듯했다.
“글라스 씨는 지금 다른 일을 하고 있으니 제가 맡던 잡다한 일들은 비셰 씨에게 맡기겠습니다.”
“네!”
“왕자님이 아침 식사를 하러 나가시면 침구를 정리하고 방 정리 하는 것부터라고 생각하시면 편할 겁니다. 세탁물을 가져다주고, 또 받아와서 정리하고 왕자님이 지나가신 자리를 정리하는 일입니다. 그날 마실 차와 디저트를 선택하는 것도 맡겨도 되겠습니까?”
“그, 그것도 제가 해도 되는 건가요?”
“비셰 씨도 공부 많이 한 걸로 압니다. 그래서 몇 번 맡겨보고 괜찮으면 비셰 씨 전담으로 넘기죠.”
“열심히 하겠습니다!!”
군기가 바짝 잡힌 모습에 바이스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봐온 것이 있었는지 비셰는 군더더기 없이 일을 해냈다. 바이스와 함께 카이엔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것만으로도 즐거워 보였다.
그걸 카이엔도 눈치챘는지 비셰에게 물었다.
“예전부터 시녀 일을 하고 싶었던 거야?”
“네. 왠지 멋져 보였거든요.”
“시녀가?”
“귀하신 분을 모시는 거잖아요. 그리고 바이스 씨가 하시는 일만 봐도 엄청 대단해 보이고요.”
“그건 이 녀석이 시종이라 그런 게 아닌데.”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제국에 있을 때도 그렇고, 귀부인을 모시는 시녀분들이 굉장히 절도 있고 유능했거든요. 제가 예전에는 좀 덜렁거리기도 하고 의도치 않게 사고 치는 일이 많아서 더 멋있어 보였나 봐요.”
“잘하고 있는데.”
“감사합니다.”
카이엔의 평가에 비셰가 활짝 웃었다.
그가 시녀로서 카이엔을 따라다니게 되면서 소원 성취한 것을 별채 식구들도 축하해주었다.
특히 글라스는 바이스의 부하나 마찬가지인 일손이 한 명 더 늘었다는 것에 굉장히 기뻐했다.
주방에서 벗어나니 별채 식구들과 얼굴 보는 일도 잦아졌다. 덕분에 마주칠 때마다 내밀어지는 손에 비셰는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꿈을 통해 접근해 정기는 빼내는 일반적인 방식이 아니라 가벼운 신체 접촉으로 소량의 정기를 얻어가는 그녀를 생각해서 다들 볼 때마다 악수를 청하는 것이었다.
그런 식으로 겨우겨우 최소한의 정기만 흡수해서 지내고 있던 비셰에게 다른 몽마로부터의 연락이 도착했다.
몽마의 왕이었던 릴리트가 사망했고 거처였던 아르젠 실루이타가 소실되었으므로 몽마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새 마왕의 자비로 이전 거처보다 조금 더 나은 지옥의 땅 한쪽을 받았지만 지도자가 없기에 왕을 뽑아야 했다.
가장 강한 몽마가 왕이 되지만 힘보다 어려운 상황을 헤쳐나갈 용기와 지휘력 또한 필요하기에 흩어졌던 몽마들이 모두 마계로 모여 누가 가장 지도자에 걸맞은지 정할 필요가 있었다.
“으으, 안 가고 싶은데.”
하지만 연락을 받은 이상 가야만 했다.
한숨을 푹 쉬고 비셰는 카이엔에게 자초지종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