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어쩐지 그와 메르실라를 보는 시선들이 많아졌다.
처음엔 기분 탓이라고 느꼈지만 그 눈빛이 점점 묘해지는 것 같다며 카이엔은 뺨을 긁적였다.
그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져서 그런가보다, 싶었다.
보통 남녀가 나란히 서서 이야기 나누는 것만 봐도 다른 이들은 혹시 그 둘 사이에 무언가가 있을지 모른다고 추측하지 않던가.
메르실라가 에밀로 돌아가고 나면 없어질 소문이라며 카이엔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꿈에 익숙한 얼굴들이 등장했다.
앙그라와 루키푸게 두 악마만 있었다면 좀 덜 당황했을 텐데 벨레드까지 옆에 있었다.
도대체 얘네가 왜 여기 있는지 몰라 카이엔은 멀뚱히 세 악마를 쳐다보았다.
“뭐야? 무슨 일 있어요? 왜 셋이 같이 온 겁니까?”
“으음…”
앙그라 마이뉴는 살짝 인상을 썼다.
그러더니 긴 한숨을 쉬곤 입을 열었다.
“…너, 결혼할 생각이 있나?”
“네?”
“푸헙…!”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람?
카이엔이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갑자기 풉 하는 소리와 함께 벨레드가 웃음을 터뜨렸다.
등장할 때만 해도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던 녀석이 갑자기 자지러지게 웃기 시작하더니만 끅끅거리다가 아예 바닥을 굴러다니면서 웃기 시작했다.
고요한 공간에 그가 웃는 소리만 울려 퍼지자 앙그라는 인상을 찌푸렸고 루키푸게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래서 안 데려오려고 한 건데…”
“뜬금없이 무슨 소리랍니까?”
“결혼 말이야, 결혼.”
“생각 없는데요.”
그가 알지도 못한 사이에 시작했다가 끝난 첫사랑이 아직 옆에 있었는데.
여전히 뚱한 그의 얼굴을 보고 앙그라는 이마를 짚었다.
“옆에, 괜찮은 사람이 있어 보여서 하는 말이다.”
“…혹시 메르실라 님이요? 무슨 말이에요. 성녀인데.”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앙그라는 말끝을 흐렸다.
골치가 아픈지 연신 관자놀이 부근을 꾹꾹 누르던 그녀는 결국 입을 열었다.
“마신께서는 괜찮다고 여기는 모양이라.”
“…네?”
그게 무슨 소리람?
카이엔은 황당한 나머지 입을 딱 벌리고 앙그라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이미 위쪽에선 이야기 끝난거 같고.”
“네? 이야기요? 뭐가요?!”
“둘이 만난다고 한다면 방해할 생각 없다고.”
“뭔 소리예요 그게!!”
당황한 나머지 카이엔이 소리를 질렀다.
그는 맹세코 메르실라에게 아무 감정 없었다!
아무 생각도 없는데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더 난리라니.
벨레드가 왜 저렇게 바닥을 굴러다니면서 처웃고 있는지 알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빠졌다.
아마 저 악마는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일 줄 알고 놀리고 싶어서 온 게 분명했다.
“댁은 왜 와서 웃고만 있어!”
“푸하하핫!!”
“악!”
“뭐… 힘내보거라.”
“아니, 결혼할 생각 없거든요?”
게다가 바이스가 된다고 할 리도 없고.
아마 그는 그놈이 곁에 있는 한 사람도 맘대로 못 만날 거다.
메르실라가 싫은 건 아니지만 일단 그들의 위치도 문제일뿐더러 반대되는 신을 모시는 입장이란 게 있는데 신들은 그런 건 하나도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마 마신 쪽에서 먼저 말을 꺼낸 거겠지? 왠지 예상이 갔다.
“큭큭. 그러게 내가 말했잖아… 쟤는 싫어할 거라고.”
벨레드가 고개를 들더니 말했다.
바닥을 굴러다니면서 웃던 주제에 이제 와서 무게 잡아봤자다. 어쩐지 말투도 저번에 만났던 것에 비해 가벼워졌다.
싸늘한 카이엔의 시선에 벨레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뭣보다, 연애조차 제대로 해본 적 없는 녀석인데 다짜고짜 결혼하라고 하면 당연히 싫어하지.”
“인간들 사이에선 정략결혼이 흔하다고 들었다만.”
“받아들이는 데에는 개인차가 있을 테고.”
이제 와서 멀쩡한 척 해봤자 벨레드를 보는 카이엔의 눈빛은 여전히 싸늘했다.
그런 카이엔을 보고 앙그라는 변명하듯 말을 쏟아냈다.
“다른 곳에는 음양 합일이니 뭐니 하는 것도 있고, 빛과 어둠은 공존하는 법이니 천신의 사제와 마신의 사제가 호감을 느낄 수도 있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너도 생각이 있으면 바로 말해줘.”
…물론 그녀는 카이엔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겨우 그런 말을 해주려고 악마가 셋이나 온 건가?
카이엔은 한숨을 푹 쉬었다.
“꿈속까지 찾아와서 하는 말이 겨우 그것만 있을 것 같진 않은데, 다른 이유 있죠?”
“으음, 눈치 빠르네.”
“셋이 나란히 왔으니까요.”
“네가 걱정돼서다.”
“네?”
“그야, 마신전까지 세웠으니 이상한 놈들이 네게 접근할까 봐 염려돼서지.”
“자세히 좀 말해주세요.”
“그게 말야, 예전에 대리전 할 때 기억나? 악마랑 계약한 놈들은 대부분 괴이하고 끔찍한 힘 같은 걸 썼잖아.”
슬쩍 끼어든 루키푸게가 보충 설명을 덧붙였다. 그의 말에 카이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로 흑마법사나 네크로맨서였고 키메라를 만드는 놈이며 유령 군단을 이끌던 놈이며… 죄다 겉으로 보기에 끔찍한 것들뿐이었다.
자연스럽게 카이엔의 시선이 벨레드에게 향했다. 눈이 마주치자 본인이 몸소 사령 기사의 육체를 휘두르면서 한 나라를 반쯤 쑥대밭으로 만든 악마는 어깨를 으쓱했다.
“흠흠, 기본적으로 인간들은 천신을 믿는다. 다만, 어딜 가던 정신 나간 놈들은 있으니 악마 숭배자도 있지.”
“아, 네…”
“마신전을 노릴지도 모른다.”
“뭐요? 뭘요??”
신전밖에 없는 곳을?
앙그라 마이뉴의 말에 카이엔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그가 크게 놀라자 벨레드는 또다시 웃음이 터진 건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고 앙그라는 미간을 짚었다.
“마신전을 미끼 삼아, 세력을 넓히고 천신을 믿는 사제들과 척을 지려고 할지도 모르지. 이용당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건 천신의 사제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과 강인한 유대, 결속이다.”
“아… 그래서 결혼 이야기가…”
마신이 아무 생각 없이 설레발을 치는 줄 알았는데 깊은 생각과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나보다. 그걸 수락한 천신도 웃기는 놈이지만.
확실히 그가 생각해도 어둠의 신은 부정적인 느낌을 주기 쉬웠다. 인간은 어둠을, 죽음을 두려워하니까.
아마 이 신을 아무 생각 없이 믿을 수 있는 건 몬스터며 이종족에 익숙해진 세자르 영지민들 뿐일 거다.
“하지만 의심할 놈들은 꾸준히 의심할 테고 그럼 성녀한테 민폐입니다만…”
“그 말도 맞지.”
“친하게는 지낼 건데 그 이상 가까워지진 않을 것 같아요.”
“그래.”
“그러겠지.”
“조심해라.”
마신이 강하게 결혼을 밀어붙인 것은 아니었는지 세 악마는 작별 인사만 건네고 얌전히 돌아갔다.
무슨 일 있으면 도와주러 가겠다는 말에 카이엔은 대답하지 않고 손만 흔들었다.
“으으…”
그가 눈을 떴을 때, 방안은 어두웠다.
새벽에 깨버린 것이었다. 졸린 눈을 비비면서 카이엔은 몸을 뒤척이며 한숨을 쉬었다. 그때 옆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으세요?”
“엥?”
익숙한 목소리에 카이엔이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그 탓에 그의 머리맡에 있던 비셰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뺨을 긁적였다.
네가 왜 여기 있어?
허둥지둥 카이엔이 입을 열었다.
“비셰? 너 여기 있어도 되는 거야?”
“네. 아직 새벽인걸요? 기분이 좀 이상해서 여기까지 온 건데, 왕자님께 무슨 일 있으셨나요?”
“어… 별거 아냐. 넌 좀 어때?”
“괜찮아요. 다른 분들이 식사도 제때 챙겨주시고 있고요.”
“답답하겠지만 조금만 더 버텨줘.”
아무래도 비셰의 존재를 드러내기가 꺼려져서 성국의 사절단에게 숨길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아무리 그가 걱정 되도 그렇지, 위험할지도 모르는 이 와중에 침실까지 찾아오다니.
혹시 필요한 것이 있을까 싶어서 카이엔은 비셰에게 손을 내밀었다. 식사는 하고 있어도 정기 수급은 잘 되는 건지 걱정이 되어서였다. 그가 손을 내밀자 비셰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정말?”
“네!”
“그럼 됐고…”
비셰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리고 몇 번 토닥여준 뒤 카이엔은 다시 침대에 누웠다. 새벽에 깨서 그런지 다시 졸음이 밀려왔다.
하품을 한 번 하고 그가 말했다.
“꿈자리가 뒤숭숭했을 뿐이니까 너도 가서 자.”
“네. 안녕히 주무세요.”
비셰의 모습이 점점 흐릿해지더니 그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마 몽마의 마법이리라.
예전에 그의 침실에 쳐들어왔던 몽마들도 저런 식으로 사라졌었던지라 카이엔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잠든 그와는 달리 비셰는 다락방으로 돌아간 뒤 그가 본 것이 정말인지, 믿어도 되는 건지 몰라 몇 번이고 되짚어봐야 했다. 카이엔의 꿈에 접촉하면서 엿본 것이 있는 탓이었다.
‘신들 입장에선 왕자님이 그 성녀님이랑 결혼해야 하는구나…!!’
이상한 부분만 들어서 문제였지만.
더 듣고 싶었는데 거기 있던 악마 중 한 명과 눈이 마주쳐서 얼른 꿈에서 빠져나오는 바람에 뒷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그래도 가장 중요한 부분은 들어버렸다.
끙끙거리면서 결국 날이 밝을 때까지 한숨도 자지 못한 비셰는 아침 해가 뜨자마자 바이스를 찾아갔다.
“바이스 씨!!”
“비셰 씨, 무슨 일 있으십니까?”
“그게…!!”
비셰는 바이스에게 그가 보고 들은 내용을 모조리 전달했다.
말없이 그 이야기를 경청한 바이스는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 성녀랑 엮어주려고 했단 말인 거군요.”
“네!!”
“흐음- 알겠습니다. 저도 꼼꼼히 살펴봐야겠군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비셰가 알려준 뜻밖의 정보에 바이스는 살짝 놀랐다.
신이 나서서 중매를 서려고 하다니. 아마 성국 사제들도 들으면 깜짝 놀라서 뒤로 넘어질지도 몰랐다. 물론 그도 놀라긴 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다.
성국 사제들이 들었다면 바로 두 사람을 엮어주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겠지만 그는 아니었다.
잠잠했던 눈동자에 결의가 깃들었다.
‘신이 허락해도 나는 못 하지.’
그리고 그는 바로 행동에 나섰다.
성녀 메르실라에 대해 성국의 사절단은 물론이고 영주성의 하인들에게 묻고 다니기 시작했다. 카이엔의 시중을 드는 건 글라스에게 맡긴 뒤라 그의 행동은 거침없었다.
한편, 바이스 대신 글라스가 그의 곁에 서 있으니 카이엔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바이스는 어디 가고 네가 있어?”
“아, 저한테 맡기신다고 하셨어요.”
“으음…”
“별일이죠?”
“그러게.”
이상한 일을 하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
바이스의 의중을 알 리가 없는 카이엔은 가만히 앉아있었다.
***
바이스는 사제들에게 여러 질문을 했다.
사제들이 결혼을 해도 되는지, 자식은 보통 몇 명이나 두는지, 대대로 사제직 혹은 성기사 직을 잇기 위해 공부를 하는 건지, 같은 사제끼리만 결혼해야 하는 건지 등등.
사제와 성기사들은 카이엔의 시종인 그가 마신전에 세울 규칙을 만들기 위해 이것저것 꼼꼼히 물어보는 건 줄 알고 착실히 대답해주었다.
“혹시 성자와 성녀분들이 더 많이 계십니까?”
“네. 메르실라 님 말고도 몇 분 더 계십니다. 메르실라 님보다 어린 성자님도 계시고요.”
성녀, 성자의 경우는 어느 날 갑자기 폭발적으로 신성력이 늘어나거나 계시를 받은 타입이라고 한다.
신의 목소리를 똑바로 들을 수 있는 성녀는 지금 성국에 있었고 메르실라는 치유력이 뛰어난 경우라는 말에 바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녀와 성자 중에는 신성력이 치유보다는 오러와 같은 식으로 피어올라서 성기사를 이끄는 직책을 맡은 경우도 있었다.
카이엔은 혼자니까 아마 이것저것 다 하느라 힘들지 않을까. 사제들의 말에 바이스는 동의하면서 대화를 이끌어나갔다.
그렇게 며칠 동안 꾸준히 조사를 하고 메르실라의 뒤를 밟으며 어떤 사람인지 알아본 끝에, 결론을 내린 그는 카이엔을 찾아갔다.
나흘 만에 찾아온 바이스의 얼굴을 보고 카이엔은 기가 찼다. 대체 어딜 다녀왔길래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았던 건지. 혀를 차며 그가 물었다.
“너 어디 다녀온 거야?”
“여기 계속 있었습니다만.”
“그림자도 안 보이던데.”
“잘 피해 다녔습니다.”
“왜 피해 다녔는데?”
“그야, 절 보면 뭘 하고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그만두라고 하셨을 테니까요.”
“잘 아네.”
그걸 아는 놈이 대체 뭘 하다 온 건지.
삐딱하게 그를 바라보는 카이엔과 달리, 바이스는 카이엔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왕자님, 결혼하시고 싶으십니까?”
“너까지 왜 그래?”
“진지하게 묻는 거니까 대답해주세요.”
“…아직 생각 없는데.”
“한쪽에선 성녀님과 연애하는 걸로 오해하는 모양입니다만.”
“그런 거 아냐. 배울 게 많아서 그런 거지. 그리고, 끌어들이는 건 내가 미안하고.”
“아무튼, 그분이 취향이 아니시란 거죠?”
“그 말도 얼추 맞긴 하지만… 아니, 성녀인데 나랑 같은 취급 받게 만드는 건 미안하지.”
“네. 잘 알겠습니다.”
“모르는 것 같은데.”
실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카이엔은 별 생각 없이 바이스의 물음에 대답했고 바이스는 카이엔의 대답을 똑바로 새겨들었다.
그래서일까, 대화가 조금 엇나간 부분도 있었다.
“왕자님의 아내 되실 분은 제가 꼭 골라드리겠습니다.”
“평생 안 나타나는 거 아냐?”
“그럼 어쩔 수 없는 거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