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그 뒤로도 카이엔은 신성력에 관해서는 메르실라에게 집중 교육을 받았다.
성서를 읽어보기도 하고 어떤 식으로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는지, 신성력 치료와 일반 의료의 병행 등등.
외부 활동을 주로 하는 건지 메르실라는 신도며 환자를 상대하는 방법에도 꽤 능숙했다.
낮에는 봉사활동을 하느라 해가 저문 뒤에야 쉴 수 있었건만 그녀는 카이엔의 신성력 훈련을 여러모로 도와주었다.
공부며 훈련을 하다가 막히면 잠깐 산책을 하기도 했고 메르실라와 만나는 일이 많기에 카이엔은 그녀에게 소금이도 소개해주었다.
당시 가장 큰 부상을 입어 목숨이 경각에 달했지만 신성력으로 치유된 소금이에게 무슨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는데 손안에 쏙 들어오는 햄스터 몬스터인 소금이를 보고 메르실라는 귀엽다며 손가락으로 소금이의 머리를 쓰다듬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저택 식구들은 카이엔이 연애를 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왕자님이 연애라니, 난 이 만남 반댈세!!”
다들 모인 회의실에서 테이블을 내려 치며 그리델라가 외쳤다.
카이엔 몰래 모인지라 소란을 피우면 안 되기에 방음 마법을 몇 겹이나 설치한 뒤에야 그들은 모여서 떠들 수 있었다.
그리델라의 말에 라스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냈다.
“뭐… 좋다고 하면 어쩔 수 없지 않아?”
“하지만 상대가 성녀라는 게 조금 걸려요…”
“나도! 나도 반대!!!”
“넌 좀 가만히 있어라.”
“으르릉-”
그 자리에는 어쩌다 보니 사트로누스도 끼어있었는데 카이엔 말고 다른 이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지라 으르렁거리는 소리만 냈다.
덕분에 페이리는 이마를 짚었다.
“하아… 왕자님이 안 계시니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긴 한데, 사람들 의견 모으기가 어렵네요.”
일단 몬스터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페이리야 인간의 언어를 익혔지만 사트로누스는 짖기만 했고 소금이는 찍찍대고 릴리시아는 촉수만 흔들 수 있으니까.
릴리시아는 몸집이 너무 커서 아쉽지만 회의에 끼워줄 수는 없었다.
과연 카이엔이 연애를 하는 건지 아닌 건지, 만약 하고 있다면 응원을 해줘야 하는 건지 말려야 하는 건지. 각자의 의견이 오갔다. 물론 중립도 있었다.
어둠의 신을 모시는 최초이자 유일한 사제가 빛의 신을 모시는 성녀와 연애한다니!!
정말이라면 나중에 큰일이 날지도 모른다며 우려의 목소리도 나왔다.
그들이 괜히 설레발을 치는 거라면 좋을 텐데 정말이라면? 저택의 안주인이 생기는 건가? 조카가 생길 수도 있다는 건가?
상상은 점점 부풀어 올랐고 잠시 후, 굳게 닫혀있던 회의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흠, 다들 어디 계신가 했더니 여기 모여있었군요.”
“악!”
“바이스 씨!”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별채가 조용하더군요. 또 이상한 회의 같은걸 하고 있었나요? 저만 빼놓고.”
“으으음…”
“그게…”
다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 바이스의 시선을 피했다.
카이엔의 연애 같은 말을 바이스의 앞에서 하기는 좀 그래서 몰래 모였던 건데 금방 들키고 말았다.
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바이스는 웃는 얼굴로 물었다.
“흠, 다들 왕자님이 연애할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일단은…요.”
“같이 붙어있는 시간이 많으니까요.”
“왕자님은 무슨 생각을 하는건지 모르겠는데 성녀님 쪽은 그래도 꽤 호감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 않나요?”
“제 생각도 같습니다. 참고로 신관 일행들은 성녀님이 좋다고 한다면야, 반대할 생각은 없다고 하더군요.”
“헉…!!”
“우리보다 단합이 빠르잖아!”
“자 빨리 결정해! 밀어줄 거야 아니면 갈라놓을 거야?!”
“나중에 종교 문제 생기는 거 아니에요?!”
회의실 안이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그들이 느낀 것을 에밀의 사절단도 똑같이 느끼고 있었는데 반응은 정반대였다.
그들은 성녀님이 연애를 한다고 한다면 말리지 않는다고 한다!
반면 그들은 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뉜 데다가 의견의 일치까진 멀고도 험할 게 뻔했다.
그 혼란 속에서 차분한 사람은 오직 바이스 뿐이었다. 그것을 눈치채고 페이리가 물었다.
“바이스 씨? 왜 그렇게 웃으세요?”
“아뇨, 저는 왕자님이 그분과 잘 되실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지라.”
“에?”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건데요?”
“그야 왕자님 이상형과는 좀 다르니까요.”
“왕자님 이상형이 어떤 사람이네요?”
“흐음-”
“말해줘요!!”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해 쏠렸다.
부담스러울 텐데도 바이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열었다.
“강한 사람입니다.”
“네?”
“뭐라고요?”
그게 무슨 말이냐는 얼굴.
다들 비슷한 표정을 지었지만 바이스는 꿋꿋이 제 생각을 이야기했다.
“강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요. 그래야만 끝까지 왕자님 곁에 있을 수 있고요.”
“뭐에요 그게.”
“그건 네 희망 사항 아니야?”
“맘대로 생각하십시오. 자, 그럼 이제 다들 해산하세요. 너무 안 보이면 왕자님도 이상하게 생각할 겁니다.”
“네에-”
“에이, 재미없어.”
“결국 연애하는 건 아니라는 거지?”
“그건 왕자님 생각도 들어봐야 하지 않을까…”
***
다른 이들이 그가 연애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한 카이엔은 그날 밤 끙끙거리며 악몽을 꿨다.
어째서인지 그의 꿈속에서는 항상 발랄하게 뛰어노는 마신이 나와서는 이러쿵저러쿵 마신전 운영에 대한 희망 사항을 읊어댔던 것이다.
난생처음 생긴 인간 신자 때문에 들뜬 건 알겠는데 이래라저래라 요구하는 사항이 너무 많아서 카이엔은 꿈인 것을 알면서도 벗어날 수 없는 처지에 한숨을 푹 쉬었다.
“하아아…”
“내 말 듣고 있어?!”
“네.”
듣고는 있었다.
어렴풋한 윤곽으로만 보이는 신은 한바탕 잔소리를 퍼부을 것처럼 그를 응시하다가 홱 뒤돌아섰다.
“네가 알아서 잘하겠지?”
“으음…”
“대답 똑바로 해!”
“기대는 안 하시는 게…”
“뭐?”
얼굴도 모르는 신은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곤 했다.
마신전 관리를 좀 더 잘해주라는 것, 성서까진 안 바라니까 제발 그럴듯한 뭔가라도 좀 만들어두라는 것.
카이엔도 하고 싶은 일들이었지만 어떻게 하는 건지 몰라서 못 하는 것들뿐이었다.
잔뜩 시달린 끝에 카이엔은 꿈에서 깼다. 기분이 뒤숭숭했다.
‘신관 늘릴 생각은 없는데.’
마신전은 이대로 조용히 운영하는 게 나았다.
현 교황은 신의 계시를 받았기에 마신전을 동맹 정도로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세대교체가 된 다음에도 그럴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본래 인간은 어둠을 두려워하니까. 누가 미쳤다고 세자르가 아닌 다른 땅에서 마신을 믿는다고 말하고 다니겠는가.
천신을 믿는 인간들에게 배척당하는 이종족을 구제하기 위해 마신전을 세웠다, 라는건 핑계일 뿐이었다.
신성력을 받게 되었기에 신전을 세워서 감사를 표하는 것일 뿐. 그리고 신자는 아직 그 혼자뿐이었다.
별채의 이들은 마신에 대해서 별생각이 없었다.
신전을 세우게 된다면 치료를 해주는 것뿐만이 아니라 신전에 의지할 이들도 생각해야 했다.
핍박받고 떠도는 이종족이 의탁하려고 한다면, 그는 그들을 돌봐야 했다.
‘그렇게 된다면 더스크라이즈로 이주를 하게 해야 할까?’
땅이 넓으니 괜찮을지도 몰랐다. 게다가 다크 엘프들은 겔로스에서 사령기사와 언데드를 피해 온 피난민도 받아준 적이 있었다.
더스크라이즈는 아직 개발되지 않은 미개척지나 마찬가지였지만 깊숙한 곳이 아닌 외곽이라면 충분히 사람이 살 수 있었다.
다만 그렇게 된다면 다크 엘프들에게도 마신의 존재에 대해 알려야 할 텐데 잘 되려나 걱정이 되었다.
‘나중에 있을 일은 생각하지 말자.’
카이엔은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일을 생각해서 골머리 썩는 것보단 현재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에밀에서 온 사절단이 떠나기 전에 신성력을 다루는 방법을 완벽하게 익히는 것.
지금은 그것이 가장 중요했다.
자연스럽게 메르실라와 함께 있는 시간은 점점 늘어갔다.
카이엔이 열성적으로 배움에 임했기에 메르실라도 자투리 시간을 모조리 카이엔의 교육에 투자했다.
어렸을 적부터 정규 교육을 받은 일반 사제에 비하면 느리긴 하지만 카이엔은 착실히 메르실라의 가르침에 따라왔다. 그 착실함에 메르실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지만 카이엔은 조바심을 느꼈다.
언제 떠날지 모르는 이들이라 조금이라도 더 많이 배워야 하는데, 그의 눈에는 아직 자신의 실력이 미숙한 탓이었다.
저녁 식사 이후, 정원의 파고라에서 마주 보고 앉은 채로 두 사람은 수업을 이어나갔다.
자신이 가진 신성력의 한계를 확인하기 위해 오전 업무 중에도 내내 신성력을 몸에 두른 채로 움직이던 카이엔은 저녁이 되니 부쩍 지쳐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휘청거리기 시작하는 그를 보고 깜짝 놀란 메르실라가 부축했다.
“괜찮으세요?”
“으… 괜찮습니다. 조금 어지러워서.”
“무리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닙니다. 배울 수 있을 때 제대로 배워둬야죠.”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카이엔은 한숨을 쉬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었지만 카이엔이 쓰러질 것만 같아서 자리에서 일어나 안전하게 그를 받아낸 메르실라는 그 옆자리로 자리를 옮겼다.
신성력 고갈로 인해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신성력을 불어넣어 주면 조금이나마 회복이 가능하지만 그녀와 카이엔의 힘의 바탕이 되는 신이 다르기에, 그래도 될지 의문이 들었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카이엔의 어깨를 붙잡고 있던 그녀가 무어라 말을 하려고 입술을 뗄 때, 저만치에서부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왕자님!”
굉장히 해맑은 목소리였다.
그 소리에 메르실라와 카이엔은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서부터 프라우디에가 활짝 웃으면서 달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프라우디에는 파고라에 가까워질수록 웃음을 거두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어… 제가 괜히 온 건 아니죠?”
“응?”
“네?”
그 물음에 카이엔도 메르실라도 무슨 말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을 보고 프라우디에는 방긋 웃더니 손에 들고 있던 병을 내밀었다.
노란색 물약이 담긴 병을 받은 카이엔이 프라우디에를 바라보자 프라우디에는 뿌듯해하며 입을 열었다.
“기력 회복 물약이에요. 드디어 완성했어요.”
“그래? 마침 잘됐네. 피곤했는데.”
성공했다는 말에 카이엔은 다른 건 묻지 않고 물약 병을 열고 그대로 들이켰다.
입에 들어가는 순간 약 냄새가 훅 올라왔지만 맛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단맛에 옅은 씁쓸함이 묻어나왔다.
그가 바로 물약을 마시자 프라우디에가 잔뜩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어떠세요?”
“으음… 먹기 전보단 확실히 힘이 나는 것 같긴 한데.”
힘이 빠져서 어지러운 건 나아졌다.
그러나, 카이엔은 미묘한 표정이었다.
“…이거 많이 먹으면 안 좋을 것 같은데.”
몸에는 힘이 돌았지만 정신적인 피로는 깎이지 않았다.
그가 느낀 점을 말해주자 프라우디에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급할 때 먹으면 좋겠네. 고생했어.”
“에헤헤.”
“무리한 건 아니지?”
“괜찮아요. 맞는 배합을 찾아내느라 힘들긴 했지만요. 잘못해서 독이 되면 큰일이니까요.”
“실험은 어떻게 했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가 먹을 것이니 바이스가 이것저것 참견해댔을 텐데.
카이엔의 물음에 프라우디에는 고개를 기울이더니만 무슨 당연한 말을 하냐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먼저 먹어봤죠. 그래도 큰 탈은 없었어요.”
“…무슨 일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랬어?”
“몸은 튼튼한걸요. 바이스 씨도 도와주셨어요.”
“응??”
“바이스 씨도 그렇구 잔느도 그렇구요.”
그가 먹기 전에 이미 다른 사람들도 먹어서 안전성을 시험해봤다는 말이었다.
카이엔은 한숨을 푹 쉬었다.
프라우디에나 자네인의 경우에는 어느 정도 독에 면역이 돼 있을 텐데 바이스는 무슨 생각으로 안정성 실험에 동참한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아니지… 자기가 먹어본 게 아니라 실험체 공급을 한걸 수도 있어.’
바이스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으리라.
카이엔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는 프라우디에는 연신 방긋거리며 웃을 뿐이었다. 지난날 수많은 밤샘과 노력의 결과물이 빛을 발한 결과였다.
들고 있던 병을 돌려주면서 카이엔이 말했다.
“너희도 너무 무리하지는 마. 몸 걱정 좀 하라고 말해야겠네.”
“하지만 요즘 가장 무리하고 있는 건 왕자님이시잖아요.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빨리 완성하고 싶었어요.”
“너도 피곤했을 텐데. 이제 가서 쉬어.”
“네.”
살포시 웃고 프라우디에는 돌아갔다.
일종의 피로회복제를 복용한 다음이어선지 조금은 기운이 났다. 카이엔은 조심스럽게 메르실라에게 말했다.
“좀 더 가르쳐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죠.”
두 사람은 계속 신성력 훈련을 이어나갔다.
밤에도 선명하게 빛나는 신성력으로 인해 두 사람의 주변은 굉장히 밝았다.
어두운 밤이라고 해도 몸 전체에 신성력을 두르면 말그대도 인간 전구가 되는 것이었다. 물론 눈에 보일 정도로 신성력을 두르는 건 굉장한 낭비일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눈에 보여야 이해하기가 한결 쉬울 테니 어쩔 수 없었다.
신성력을 끌어올리고 신체를 강화, 그것을 유지한다.
카이엔이 전투 훈련을 바랐기에 메르실라는 기초적인 강화부터 그에게 가르쳐주었다.
중요한 것이 유지이기에 메르실라는 카이엔이 얼마나 그것을 유지할 수 있는지 옆에서 지켜보았다. 대화를 하거나 움직이거나 싸우면서도 항상 신성력 강화를 유지하고 벽을 만드는 것.
그것이 이 수업의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익숙해지면 다음부턴 대련을 하면서 유지할 수 있게 하시면 돼요.”
“잘 될지 모르겠어요.”
“잘하시고 계셔요.”
처음에는 이야기를 하다 보면 집중력이 금세 흐트러지던 카이엔이였지만 지금은 꽤 익숙해진 상태였다.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함께 있던 시간이 길어져서인지 그들은 서로 편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고 보니 전 이렇게 많은 이종족 분들을 보는 게 처음이에요. 게다가 다들 사이가 좋아 보이고요. 신기했어요.”
본디 각자 다른 곳에 터전을 두고 있는 이들이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서로 교류하고 있었다. 심지어 이곳의 몬스터들마저도 그러했다.
메르실라의 감상은 지극히 당연했고 많이 들어본 것이기에 카이엔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국 사제들은 다들 굉장히 깐깐한 줄 알았는데 이전에 더스크라이즈에서 봤던 사제도 그렇고 메르실라와 이번에 온 사절단도 그렇고, 성국에서 타지로 사람을 보낼 때 꽤나 신중히 선정하는 모양이었다.
신을 믿지 않는 이를 배척하거나, 무조건 포교하려고 하거나 이종족을 적대하는 사제가 이곳에 발을 들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혹시 그런 이들이 얼마나 있는지는 메르실라와 좀 더 친해진 다음에 물어보기로 하고 카이엔은 입을 열었다.
“다들 외로우니까요. 가족을 잃었거나 터전을 잃었거나, 혹은 처음부터 떠돌이였거나. 제 발로 고향을 떠난 자도 있고 그곳에 있을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떠난 자도 있습니다. 처음부터 그곳에 섞일 수 없는 자도 있었으며 책임을 다하지 못해 도망친 이도 있죠.”
카이엔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의 곁에 있는 이들은, 다들 사연을 품고 있었다.
카이엔은 고개를 들어 메르실라를 보았다. 다시 수업을 재개하자 그의 옆에서 다시 맞은편으로 자리를 옮긴 성녀는 여느 때나 다름없이 차분한 눈으로 그의 신성력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천히 그의 입이 열렸다.
“제가 숨기는 것이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네?”
“늑대 인간에 뱀파이어, 다크 엘프. 그들 말고도 제가 감춰놓은 자가 있을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보신 적이 없으십니까?”
그 물음이 의외였던 걸까.
메르실라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살짝 내리깔린 눈동자는 고요했다. 잠시 후 그녀가 입을 열었다.
“숨길만 한 일이 있으신가요?”
“한번 해본 말입니다.”
“확실히 저희는 천신을, 빛의 신을 믿고 있으니 반대되는 존재는 모두 적이죠. 인간을 악에 빠뜨리려는 악마라던가 그를 따르는 추종자 격인 존재도 있을 테고요. 저희만 해도 어디선가 불쑥불쑥 나타나는 사이비며 이단들과 싸우는 일도 많고요.”
메르실라는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당신은 그러지 않을 것 같아요.”
“…그런가요.”
잠시 뜸을 들인 뒤 카이엔이 대답했다.
그의 심정은 굉장히 복잡했다.
‘프라우디에의 힘이랑 비셰는 절대로 보여주면 안 되겠다.’
성국의 역사에도 리치왕에 대한 기록이 전해 내려오는 걸까? 없다고 해도 리치란 존재 자체가 굉장히 악한 것처럼 들리니까 밝힐 수가 없었다.
몽마의 경우 인간의 정기를 먹으면서 살고 있으며 간단한 신체 접촉으로 소량을 가져올 수 있지만 별채에 거주하는 비셰 말고 다른 몽마들은 전문적으로 먹잇감을 끌어모으는 일까지 하지 않는가.
물론 그런 곳에 간 놈들이 머저리긴 하지만 인간계에서 버젓이 악마가 돌아다닌다는 걸 사제들이 알아서 좋을 건 없었다.
카이엔의 속내를 모르는 메르실라는 부드러운 눈으로 카이엔을 보며 그가 집중력이 흐트러 질 때마다 일렁이는 신성력을 보고 이따금 주의를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