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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왕자는 조용히 살고싶다-135화 (136/219)

135화

카이엔은 한쪽에서 그런 소란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파티장이 워낙 시끄러운 탓에 레이지의 목소리가 묻히기도 했고 두 사람 사이에 거리가 꽤 있었기 때문이다.

“너도 나하고만 있지 말고 다른 귀족들 얼굴이라도 익히러 다녀. 혼자가 싫으면 레이지랑 같이… 없네.”

“에?”

“네가 혼자 다니니까 레이지도 혼자 다니나 보다.”

에이들러에게 충고를 하는 카이엔이었지만 에이들러는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짧게 한숨을 쉬며 그가 말했다.

“난 여기 오래 있다가 가지 않을 거야. 네 얼굴 봤으니 이만 돌아가야겠다. 페이리도 그렇고.”

“벌써 가려고요?”

“가야지. 페이리 좀 봐봐. 긴장해서 얼굴이 새하얘졌잖아.”

“저, 전 괜찮아요…!”

“괜찮긴.”

괜히 데려 왔나. 카이엔은 혀를 찼다.

궁전 구경, 사람 구경 좀 하라고 데려온 건데 상태가 안좋아 보였다.

하긴, 다들 그녀의 정체를 궁금해하면서 탐색하려고 하고 있으니 그 시선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에이들러는 아쉬워했지만 카이엔은 홀에서 나가는 것을 택했다.

“생일 축하한다. 파티 잘해라.”

“네에… 페이리도 잘 가요.”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다음에 또 만날 일이 있을 거예요.”

“저, 꼭 시간 내서 찾아갈 테니까 성에서 오래 머물다 가주세요.”

“상황 봐서.”

페이리가 넘어지지 않게 카이엔은 그녀와 팔짱을 낀 채 움직였다.

에이들러는 그 자리에 서서 두 사람이 홀에서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페이리는 지친 건지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조금씩 휘청거렸다. 그 탓에 카이엔은 보폭을 줄이고 천천히 걸어갔다.

움직이는 그들에게 귀족들이 다가왔지만 카이엔은 대충 인사만 하고 넘겼다.

“안녕하십니까, 백작님. 이 호칭이 입에 붙지를 않는군요.”

“나도 익숙하지 않으니 괜찮다.”

“벌써 돌아가십니까?”

“조금 피곤해서. 에이들러는 심심해 보이니 그대들이 말 상대를 해주는 것도 좋겠군.”

레이지는 혼자서도 제 몫을 잘 해내고 있지만 에이들러는 아직 멀었다.

그에게 말을 거는 귀족들을 에이들러에게 떠넘기며 카이엔은 조금씩 입구 쪽으로 움직였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페이리의 드레스 자락을 밟아 그녀가 비틀거렸고 카이엔은 즉시 입을 열었다.

“발 떼.”

“죄, 죄송합니다!”

“…괜찮다. 밟고 싶어서 밟은 것도 아닐 테니.”

주변에 사람들이 몰리다 보니 밟게 돼버린 모양이었다.

카이엔은 페이리의 상태를 살피며 더욱 단단히 그녀를 붙잡았다.

“참 특이한 드레스군요. 북부에서 유행하는 건가요?”

“굉장히 잘 어울리십니다.”

아무래도 좋을 법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사이에 누군가의 빈정거림이 끼어들었다.

“아무리 시선을 끌려고 했어도 너무 과한 차림이 아닌지…”

“하긴 좀…”

무슨 의도로 저런 말을 하는 건지 알 수는 없었다. 다만, 명백한 시비로 들렸기에 카이엔은 살짝 인상을 썼지만 이내 표정을 풀고 정확히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 하긴 그 말도 맞군. 맘 같아선 더 좋은 옷을 주고 싶었는데, 그렇게 하면 저 높은 곳에 앉아계신 분과 비교될 것 같아서.”

긴 망토를 질질 끌면서 나타난 왕과 왕비를 가리킨 말이었다.

왕족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분위기를 어수선하게 만들고 카이엔은 페이리를 데리고 즉시 퇴장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사람이 있었다.

‘흐음.’

‘다행히 무슨 일이 생기진 않았군. 괜히 온 건가.’

후작을 반 협박해서 초대장을 뜯어낸 건데.

페르세이지… 바이스는 자기도 제자리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카이엔이 걱정돼서 파티장에 왔는데 카이엔이 알아서 잘 대처하고있지 않나. 다만, 카이엔에게 무례하게 말을 던진 저놈 얼굴은 꼭 기억해놨다가 처리해야겠다며 그는 미소를 지었다.

홀에서 빠져나온 카이엔은 마차로 향했다.

그의 이른 퇴장에 밖에서 기다리던 이들은 의아해했지만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가자.”

“네.”

그저, 카이엔의 돌아가자는 말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리만테스 궁에 도착한 뒤 카이엔은 자네인에게 페이리를 맡겼다. 바이스가 부재중인지라 그의 시중은 비셰가 들어주었다.

새로 맞춘 의복이 상하지 않게 조심히 옷을 벗는 것을 도와주면서 비셰가 물었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아니. 페이리가 많이 긴장한 것 같아서.”

“하긴 그럴 만도 하네요. 페이리 씨는 많은 사람 앞에 서본 적이 드무니까요.”

“괜히 데려갔나 싶기도 하고. 파티장은 구경도 제대로 못 한 것 같아.”

다음에 왕성에 방문하게 되면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몰리는 곳에는 데려오지 말아야겠다며, 카이엔은 속으로 생각했다.

“목욕하실래요?”

“이따가. 지금은 다들 식사나 같이할까.”

“바로 준비할게요.”

바이스가 없어서 조금 긴장한 것 같은 비셰지만 그래도 바이스에게 배운 게 있었기에 열심히 일했다.

이후 식사 자리에서 페이리는 씻은 건지 머리카락이 약간 젖어있었다.

식사 준비를 좀 더 늦게 할 걸 그랬나. 카이엔은 조금 후회했다.

“…그런데 바이스는 아직도 안 온 거야?”

“어디 다녀오신다고 하셨는데 이상하긴 하네요.”

‘또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거야…’

물어봐도 웃기만 할 테니 일단 바이스는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두기로 했다.

바이스가 위험에 빠지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랜만에 왕성에 왔으니 후작이랑 대판 싸우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며 카이엔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식사를 마친 후, 방으로 돌아가는 그를 페이리가 따라왔다.

“왕자님,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같이 가도 되나요?”

“응.”

밖에서 이야기하다 혹시 누군가가 들을까 봐, 카이엔은 페이리를 데리고 그의 방으로 갔다.

페이리가 무슨 말을 할지는, 그 역시 조금은 짐작 가는 구석이 있었지만 모르는 척하고 그가 물었다.

“할 이야기가 뭐야?”

“그게… 오늘 일 때문에요.”

“괜찮은데. 오히려 내가 너한테 미안해. 괜히 데려간 것 같아서.”

“제가 왕자님께 폐를 끼쳤어요.”

“아니야. 네가 없었어도 난 그 자리에 오래 있진 않았을 거야. 그런 자리 별로 안 좋아하니까.”

하지만 페이리는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몸의 절반인 거미의 형상을 가리느라 복잡한 보형물을 장착한 드레스 차림인 그녀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제가 아라크네가 아니었어도. 몸의 절반이 거미이지만 않았어도… 좀 더 왕자님께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었을 거예요.”

“넌 충분히 나를 도와줬어. 옛날 일 기억 안 나? 나한테 의탁을 부탁하면서도, 너는 나를 지켜주려고 애를 썼잖아.”

아라크네. 거미 몬스터.

하반신이 거미인 그녀는 소리 없이 움직일 수 있고 벽과 천장을 올라갈 수도 있었다.

숨죽이고 있는 그녀가 있기에 조용히 다가온 암살자조차 그녀가 처리할 수 있었다.

인간보다 월등한 근력, 민첩성. 고작 어린애 한 명을 해치려고 고용된 암살자가 이길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이였다.

그러나 페이리는 연신 고개를 저었다.

“지금 왕자님께 필요한 건 거미 몸통을 가진 몬스터가 아니에요. 이런 모습의 저는 계속 당신의 곁에 있을 수 없어요…”

“페이리.”

“인간이 되고 싶었어요. 쭉, 그랬어요. 그곳 사람들은 이제 더이상 저를 무서워하지 않지만 그 외는 그렇지 않을 테니까…”

그녀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검은 숲.

그 깊숙한 곳. 아라크네인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탄생한 건지도 모르는 채 그곳에서 태어나 자라고 살아갔다.

우연히 그곳까지 온 인간들을 관찰하고, 구경하면서 그들의 언어를 습득했다. 인간을 잡아먹고 지능과 이성을 얻은 식인식물 몬스터들은 그녀를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말 상대가 되어주기도 했다.

언어를 습득하니 인간들은 그녀에게 반쯤 경계를 풀었다.

인간 세상을 궁금해하는 그녀에게 그들이 사는 마을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검은 숲. 위험천만한 곳에서, 절반이나마 사람의 형상을 취하고 있고 말이 통하는 상대를 만나자 오랫동안 여행을 하면서 지치고 힘들었던 이들은 쉽게 경계를 풀었다.

그런 이들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대신 근처에 다가오는 몬스터를 쫓아내 주는 거래가 몇 번이고 이루어졌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터전을 떠나 이동했다.

인간들이 사는 방벽 근처에서, 방벽을 넘어 몬스터를 사냥하러 가는 이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괴물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어린 왕자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방벽을 넘어갔다.

동경하던 세계는 그녀의 상상만큼 아름답진 않았지만 방벽을 넘어 그가 만나게 된 사람은, 괴물의 말을 알아듣는 어린 왕자는, 그녀가 터전을 떠나 얻게 된 것 중 가장 귀한 존재가 되었다.

“페이리. 울지마. 너는 지금 이대로도 충분한데…”

“오늘 그 시선들 속에서 깨달았어요. 왕자님을 곁에서 지탱해주려면 보다 강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걸요. 절대 가벼운 마음으로 따라가서는 안 됐는데, 제가 멍청했어요.”

“아니… 나도 생각이 없었던 거야. 페이리, 우린 그냥 에이들러를 보러 간 거야. 그 애가 생일 축하를 받고 싶다고 해서 축하해주러 간 거고. 그러니까-”

“제가 거미 모습을 들키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아요. 들켰다면 분명히 왕자님께서도 해를 입으셨을테니까요.”

“그런 일은 없었을 겁니다.”

대화에 끼어든 목소리에 카이엔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어느새 바이스는 방문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언제 문을 열고 들어온 건지 모를 정도로 기척을 죽이고 온거다. 카이엔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만 같아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 대체 언제 온 거야?”

“혹시 모를 비상 상황에 대비해 파티장에는 저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비셰한테 잠시 자리를 넘긴 거였어?”

“그렇죠.”

웃는 얼굴로 바이스가 대답했다.

왕자의 시종으로 파티장에 있을 수는 없었을 테니 페르세이지 바이올로스의 신분으로 들어갔을 거다. 바이올로스 후작이 뒷목 잡았을 광경이 눈에 선했다.

카이엔의 표정이 구겨지자 바이스는 미소를 지으며 페이리에게 다가갔다.

“자, 페이리 씨. 울지 마세요. 당신이 잘못한 건 없으니까요. 설령 당신의 정체가 드러났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당신을 욕하고 비웃는 이들이 있었다면 저와 왕자님이 다 처리했을 테니까요. 다시는 입을 놀리지 못하게 혀를 뽑아버렸을 겁니다..”

“살벌한 소릴…”

“그 정돈 당연한 겁니다. 자, 일어나세요. 데운 우유와 간식을 가져다드리죠. 그거라도 드시면서 마음을 가라앉히세요.”

“…죄송해요 왕자님.”

“사과하지 마. 네가 잘못한 거 없으니까.”

“가시죠.”

바이스는 페이리를 데리고 카이엔의 방에서 나왔다.

그녀에게 손수건을 건네는 그의 눈빛은 따스했다.

변심, 변절을 밥 먹듯 하는 인간들에 비하면 몬스터인 그녀는 순수하기 그지없었다. 그가 카이엔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이들 중 하나였다.

그가 페이리를 미덥지 못하게 여겼다면 왕성에 오는 것을 반대했을 거라는걸, 왜 그녀만 알지 못하는 걸까.

함께 복도를 걸어가던 중, 페이리가 입을 열었다.

“…바이스 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뭘 말입니까?”

“왕자님의 곁에 설 사람요.”

“이미 제가 곁에 서 있지 않습니까.”

태연한 말에 페이리는 피식 웃었다.

힘없는 웃음이었다. 그녀는 바이스를 보며 말했다.

“반려자 말이에요. 아시면서 농담은.”

“아아, 하긴 복잡한 문제이긴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나선다고 될 일이 아니죠. 애초에 지금 왕자님이 연애에 관심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요.”

“그런가요?”

“때 되면 생기겠죠. 아니면 어쩔 수 없고요.”

“그렇죠…”

“페이리 씨 덕분에 구혼이 줄어들 겁니다.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저렇게 말하긴 하지만 카이엔의 혼삿길을 가장 적극적으로 막고 있는 게 바이스였다.

구혼서 불태우기에 이어서 이번엔 카이엔이 이성과 함께 돌아다니는 것을 많은 이가 볼 수 있게 했으니까.

“파티장에 가니, 이런 생각도 들더군요.”

“네?”

“페르세이지 바이올로스로서 그 자리에 있던 제가 왕자님 곁에 있었다면 꽤 재밌는 일이 벌어질 것 같았거든요.”

이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은 장난을 치고 싶어 어쩔 줄 모르는 아이 같았다.

카이엔은 물론이고 바이스의 십 대 시절 모습마저 알고 있는 페이리는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아하하. 그랬다면, 정말, 그랬겠네요.”

“아쉽지만 다음 기회로 미뤄야겠습니다.”

“네? 하실 거예요?”

“상황을 봐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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