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탄신연을 맞아 축하연이며 귀족들 모임이 끊이지 않아 다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카이엔은 여유가 있었다.
애초에 다 참석하지 않는다고 못 박아놓고 온갖 권유를 무시해서였다.
파티 시작보다 이틀 일찍 도착한 그가 페이리를 데리고 성안을 활보하는 걸 본 이들이 꽤 많았다.
그들은 그 모습을 보고 저마다 다른 생각을 하고 궁금증을 품었지만 대답해줄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조금 특이한 드레스를 입은 여성과 함께 다니는 쫓겨난 왕자이자 현 백작.
그들 중 일부는 어째서 카이엔이 지금까지 수많은 구혼을 거절했는지 알 것 같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바이스는 그들의 오해를 알면서도 내버려 두었다. 대신, 그는 프라우디에게 물었다.
“독스 백작과는 연을 끊을 생각이 있습니까?”
“네?”
“어차피 가문은 에이바토스 님께서 이으실 테니까요.”
“그 말도 맞네요.”
프라우디에 본인은 연금술로 만들어낸 호문쿨루스였다.
이제 그 형질이 바뀌어서 검은 마나를 축적한 몸은 쉽게 약화되지도 늙어 죽지도 않겠지만 인간이 아니란 점은 변함이 없었다.
좋은 일이라곤 없었던 독스 백작가를 떠올리며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프라우디에가 바이스를 바라보았다.
“연, 끊을 수 있을까요?”
“티아마티스 님께 말씀드리면 도와주시겠죠. 저야 대놓고 집안을 뒤엎고 나왔지만 프라우디에 님은 불가능하실 테니까요.”
카이엔을 지지해주는 힘이 있다면 좋겠지만 바이올로스는 오히려 카이엔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일찌감치 가문과 연을 끊었다.
아직 후작이 후계자를 발표하지 않았으니 여차하면 그 자리를 빼앗을 수도 있지만 모든 것은 카이엔이 하기 나름이었다.
남동생은 모자라지만 여동생 쪽은, 충분히 후작가를 이끌 수 있는 인재였으니까.
그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나서 프라우디에가 입을 열었다.
“바이스 씨의 목적은 무엇인가요?”
“카이엔 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는 겁니다만… 가장 좋은 건 가르간트 내에 존재하지만 독립적인 성향을 띄고 영지를 꾸려나가는 거겠죠. 왕족이지만 왕위에는 관심이 없으신 분이니, 왕실의 견제 혹은 조력자쯤의 위치로 남는다면 좋을 테지만 오래가지는 못하겠죠.”
차기 국왕감은 왕자가 아니라 공주 쪽이다. 바이스의 생각은 변함없었다.
레이지 공주가 왕위에 오르고 바이올로스 후작가 쪽은 그의 여동생인 아이클라타가 후작위를 잇는다면 그 두 사람은 굉장히 좋은 파트너가 될 것이다.
그들도 바보는 아니니 카이엔을 건드리지 않는 게 나을 거라는 것쯤은 알 테고.
좀 더 카이엔에게 힘이 될 수 있는 이들이 있다면 좋겠지만…
“애초에, 왕자님께서는 결혼하실 생각도 없으신 것 같고요.”
“어… 그건 바이스 씨가 방해해서 그런 게 아닐까요?”
“그건 아닙니다만.”
조심스럽게 프라우디에가 의견을 냈지만 바이스는 고개를 저었다.
“충분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나타나면 저 역시 두 손 들고 환영할 겁니다.”
“네에…”
“정말입니다.”
하지만 바이스의 진지한 얼굴에도 불구하고 프라우디에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대신 프라우디에는 대화의 주제를 바꾸었다.
쌍둥이 왕자, 공주의 생일 파티에 들어갈 수 있는 건 귀족과 그 파트너 뿐이기에 시종과 호위들은 전부 밖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카이엔과 페이리만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조금 걱정이 돼요. 괜찮을지…”
“아, 그것도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다른 수를 써볼까 해서요.”
“…더 걱정되는데요?”
“문제없을 겁니다.”
바이스가 웃고 있으니 더 걱정이 되는 프라우디에였다.
마침내 말 많고 탈 많은 쌍둥이의 생일 파티 당일이 되었다. 두 사람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귀족들은 파티가 열리는 궁에서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궁 밖에는 마차가 즐비해 있었다. 그런데 바이스는 잠시 비셰에게 카이엔의 시중을 맡기고 자리를 비웠다.
파티 갈 준비까진 도와줬지만 함께 마차를 타고 궁 입구에서 배웅하는 역할은 비셰에게 맡긴 거였다.
“…걔는 대체 어딜 간 거야?”
“글쎄요. 저한테 맡기고 가셨어요.”
혹시라도 카이엔과 페이리의 의복에 흐트러짐이 있나 주의 깊게 살핀 다음에, 비셰는 안도할 수 있었다.
함께 온건 프라우디에와 자네인, 고양이로 변신한 그리델라였는데 네 사람은 궁 바로 앞에서 카이엔과 페이리를 배웅했다.
카이엔의 파트너로서 참석하게 된 페이리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외출용 드레스가 아니라 파티 참석용 드레스 차림인 그녀는 잔뜩 긴장해서 손이 덜덜 떨렸다.
“제, 제가 같이 가도 되는 걸까요…? 역시 왕자님 혼자 가시는데…”
“어차피 내 옆에만 있을 거잖아. 딴 놈들이 뭐라고 하던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파티, 궁금해했잖아.”
“그렇긴 해도요…”
“누가 너한테 무례하게 군다면 내가 없애버릴 테니까.”
“왕자님의 그런 면은 바이스 씨를 닮아가는 것 같아요.”
“아예 목숨을 끊어버린다는 말은 안 했는데.”
투덜거리는 카이엔을 보고 그제야 페이리는 미소를 지었다.
“정체를 들킬까 봐, 그게 제일 걱정이에요.”
“괜찮아. 내가 몬스터에 이종족과 가까이 지낸단 건 이미 소문이 다 났는걸. 그리고 네 신체가 드러난다고 해도 바로 너한테 무슨 짓을 할 놈들은 없을 거야. 내가 계속 옆에 있을 테니까.”
눈치 빠른 놈들은, 아마 특이한 모양의 드레스를 보고 대충 알아차렸을 거다.
그 말에 페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갈색 머리카락에 진주핀을 꽂아 정돈했고 크림색과 연두색이 섞인 긴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다른 귀족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목에 걸린 에메랄드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페이리는 카이엔을 보았다.
카이엔은, 여전히 검은색 일색의 옷에 붉은 보석 장식만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옷은 그와는 대조되는 밝은색이었다.
“이제 들어갈까?”
“…네!”
바로 앞에서 다시 한번 서로 손을 꼭 잡고, 카이엔은 페이리와 함께 파티가 열리는 궁의, 홀 안으로 입장했다.
이미 북적이고 있는 파티장 안에서 초대장을 확인한 시종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카이엔 이디에우스 아베르나 백작님과 파트너분이 입장하십니다!!”
그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페이리가 제 이름을 밝히고 싶지 않아했기에 카이엔은 파트너와 함께 참석한다는 말만을 남겼었다.
수십 쌍의 눈동자에 흠칫 놀라면서 페이리는 카이엔의 팔을 꼭 붙잡았고 카이엔은 눈짓으로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카이엔이 처음 보는 여인과 함께 등장한 것에 다들 놀라면서도 눈을 떼지 못했다.
드레스가 굉장히 특이하긴 했지만 다들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저, 장식도 많고 리본이 많아서 뒤쪽이 부풀어있다고 여겼다.
그 시선들을 죄다 무시하면서 카이엔은 페이리와 보폭을 맞춰 걸었다.
사전에 파트너의 참석을 알린지라 그의 몫으로 마련되어있는 테이블에는 의자가 두 개 있었다.
페이리는 신체 구조상 의자에 앉을 수 없었기에 그는 서 있는 것을 택했고 주변을 힐끗 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다들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흐음.’
일부러 아슬아슬하게 시간을 맞춰서 온 건데.
혀를 차면서 카이엔은 페이리를 보았다. 어느새 다시 굳어있었다.
“…긴장 풀어도 돼.”
“다들 쳐다보잖아요…!”
“내가 누굴 데려온 건 처음이라 그런 거겠지.”
그 누구도 함부로 카이엔에게 다가오지 못하는 사이에 왕과 왕비, 왕자와 공주가 입장했다.
시종이 목이 터져라 입장을 알렸고 네 사람은 홀 맨 안쪽의, 상석에 앉았다.
그다음에 왕이 쌍둥이 왕자와 공주의 생일에 대해 알리고 파티가 시작되었다.
무도회가 아니라 간단히 식사도 하고 대화를 나누는 자리였다.
에이들러는 왕과 왕비에게 무어라 말하는 듯하더니 쪼르르 카이엔에게 달려왔다.
“형-!!”
가슴에 달린 브로치를 보고 카이엔은 혀를 찼다.
“정말 차고 온거야?”
“응! 레이지도 같이 하고 왔어.”
“안 해도 된다니깐…”
분명히 에이들러가 같이 하고 가자고 고집을 부려서 레이지가 들어줬겠지. 눈에 훤했다.
에이들러는 페이리에게도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다른 드레스를 입은 그녀를 보고 잘 어울린다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선물을 못 드려서 죄송해요.”
“여기 와준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구경은 많이 했어요?”
“왕자님 덕분에요.”
그 광경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입을 딱 벌릴 정도로 놀랐다.
카이엔이 데려온 여인과 왕자인 에이들러는 아는 사이였고 게다가 그 두 사람은 꽤 친해 보였다.
혹시 미래의 백작 부인인 건가 싶어서 떠드는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개중에는 왜 카이엔이 그간 구혼을 싹 거절했는지 알 것 같다는 목소리도 끼어있었다.
“굉장히 정숙하고 아름다운 아가씨군요.”
“왜 그간 구혼이 거절당했는지도 알법해요.”
“혹시 저 여인은 평민인 건지…”
“이름을 밝히지 않았으니 그렇지 않을까 합니다만.”
그 이야기는 카이엔의 귀에도 들렸다. 인간보다 청력이 뛰어난 페이리에게도 들렸을 거다.
카이엔은 말없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페이리는 그에게 있어서는 가족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누나, 정도였지만 저들에게 알릴 필요는 없었다.
한편, 레이지는 파티가 시작하자마자 카이엔에게 달려간 에이들러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체 카이엔의 어디가 그리 좋은 건지, 그녀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 사람이 그들 남매를 보는 마음이 참으로 복잡할 텐데.
‘나도 싫은 건 아니지만…’
굉장히 미묘한 관계지 않나.
에이들러처럼 무작정 친한 척 하면서 들러붙을 수도 없었다. 게다가, 양친인 국왕 부부가 약혼을 언급한 것도 있어서 더욱 어색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사촌 오빠는 신기한 존재였다.
바이올로스 후작가에도 있긴 하지만 장남인 페르세이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인간이었고 장녀인 아이클라타는 영리한 사람이어서 의지할 수 있는 좋은 언니였다.
그리고 차남인 베스펠은… 재능있는 두 사람 때문에 일찍 기가 죽어 조용하고 어둡고 우울한 성격이라 훨씬 나이가 어린 사촌 동생인 그녀와 같은 공간에 있을 때조차 흠칫흠칫 놀라곤 해서 말을 거는 것조차 미안했다.
페르세이지와 베스펠에 비하면 카이엔은 굉장히 정상적인 사람이 아닌가.
‘나까지 가까이하기엔 바이올로스 후작가쪽도 문제고.’
현재 카이엔의 시종으로 붙어있는 사람이 바이올로스 후작가의 장남인 페르세이지 바이올로스라고 했다.
지금은 본명을 숨기고 가명으로 붙어있어서 그 정체를 아는 사람은 극소수… 아마 바이올로스 후작가뿐일 테고.
페르세이지가 판에 끼면 안 된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바보 같은 에이들러를 살살 꼬셔서 끌어들이려고 하는 건가 의심스럽긴 했지만 증거가 없었다.
어머니인 왕비는 카이엔의 옆에 있는 여성이 신경 쓰이는 모양인데 그녀는 에이들러에게 들어서 알고있었다.
아라크네, 라고 했다.
반신은 사람이지만 나머지 반은 거미 모습의. 그러니 저런 특이한 드레스가 이해가 갔다.
검은 숲에서 살다가 모험가와 만나 그들에게 인간의 언어를 배우고 직접 그 벽을 넘어서 카이엔에게 도달해 인간들과 살고 싶다고 요청한 몬스터.
카이엔의 곁에 있는 몬스터 중에서는 유일하게 인간의 언어를 할 줄 안다고 했다.
“레이지.”
“…네.”
“다른 귀족들과 인사치레라도 하고 오렴.”
“네.”
에이들러는 이미 포기한 모양인지 왕비는 그녀에게만 조용히 일렀다.
레이지는 그 말에 따랐다. 의자에서 일어나 다른 귀족들이 모여 떠들고 있는 홀로 내려갔다.
“공주님, 생일 축하드립니다.”
“벌써 11번째 생일이시군요.”
“축하드립니다.”
“감사해요.”
축하 인사에 화답하면서 레이지는 귀족들을 살폈다.
대표적인 친 국왕파 인사들이었다.
그녀가 교류를 하러 내려오자 귀족들은 본인이 나서거나 어린 자식들을 내세워서 말을 건넸다.
점점 몰려오는 이들 덕분에 인파로 인해 주변이 복잡해졌다.
발을 잘 못 디뎌 휘청거리며 넘어질 뻔한 그녀를 누군가가 받아주었다.
“괜찮으십니까?”
“네. 도와주셔서 감사…”
어쩐지 목소리가 익숙했다. 그 생각에 레이지는 그녀가 일어서자 얼른 손을 떼고 물러나려는 사람의 팔을 붙잡고 얼굴을 확인했다. 그리고…
“페르세이지?!”
“어이쿠.”
그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그녀를 부축한 키 큰 청년에게 쏠렸다.
“…페르세이지?”
“그 이름은…”
“바이올로스 후작의 병약한 자제분 이름 아닌가?”
병약은 개뿔. 망나니처럼 휘젓고 다녀서 숨기고 있는 것뿐이었다!
레이지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고 페르세이지는 쏟아지는 시선에 곤란하다는 듯 웃더니만 그대로 슬슬 물러나서 모습을 감췄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너무 놀란 나머지 그를 붙잡지도 못하고 경악해서 제 눈을 의심했다.
병약해서 집 밖은커녕 방 밖으로도 못 나온다고 들었는데!
공주의 말이 사실이라면, 방금 그 청년이 페르세이지라면 굉장히 잘 자란 데다가 건강해 보이지 않은가.
그 혼란 속에서, 페르세이지로 추정되는 청년의 등장으로 인해 곤란해진 사람은 한 명 더 있었다.
‘아이고.’
페르세이지 바이올로스와 그의 둘째 딸 예스티카가 파혼한 건 금세 입소문을 타서 유명해졌다.
멀찍이 뒤에 서 있던 벨라시 공작은 두통이 오는 것을 느끼며 급하게 그 자리를 떠났다.
다른 귀족들이 페르세이지에 대해 물어볼 게 뻔해서 귀찮은 일이 벌어지기 전에 얼른 도망치는 게 신상에 이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