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카이엔은 조용히 움직였다.
이따금 영주성이 있는 지역에 도착해도 못 본 척 넘기고 여관에서 묵곤 했다.
이센 자작이 영지 안으로 들어오는 귀족에 민감했던 것과는 달리 다른 지역을 맡은 귀족들은 카이엔이 수도로 가기 위해 자기가 관리하는 땅을 지나가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가는 길에 쓸데없는 사고에도 휘말리지 않았고 도적조차 없는 쾌적한 여정이었다.
마침내 왕성 바로 앞까지 도착했을 때도 무사히 검문을 통과했다.
페이리가 있는 마차는 그녀가 심하게 마차 멀미를 하는 탓에 내부를 개조했다고 대충 넘겼다.
작년, 탄신연 때도 썼었던 리만테스 궁에서 그들은 짐을 풀었다.
여전히 비어있는 궁이었지만 그가 온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청소는 깨끗하게 해둔 상태였다.
“일찍 도착했네요.”
“그러게.”
쌍둥이의 생일파티 이틀 전에 도착하고 말았다.
바이스가 이런저런 변수를 계산하면서 출발 날짜를 정했지만 아무 탈 없이 도착한 탓이었다.
일단 도착했으니 국왕에게 얼굴을 비출 필요가 있었다. 카이엔은 가기 싫은 눈치였지만 바이스의 눈짓에 몸을 일으켰다.
“시종과 호위만 데리고 가시죠.”
“제가 같이 가겠습니다.”
이번에 호위로 동행한 건 자네인이라 그녀가 바이스와 함께 하기로 했다.
다른 이들은 짐을 풀기로 하고 카이엔은 두 명과 함께 국왕을 만나러 갔다.
국왕인 작은 아버지와는 독대를 하게 되었다.
직접 왕의 집무실까지 찾아간 카이엔은 문밖에 자네인과 바이스를 세워두고 혼자 그 안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입니다. 그간 강녕하셨는지.”
“별일 없었단다. 이렇게 와준 걸 보니, 너도 잘 지내고 있는 모양이구나.”
“사실 멀기도 하고 시간도 오래 걸려서 오고 싶진 않았습니다만, 에이들러가 편지를 보냈으니 어쩔 수 없죠.”
같은 왕족이라고 해도 예의를 차려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카이엔은 조금 삐딱하게 나왔다.
국왕, 바르바스 이디에우스는 그런 조카의 행동에도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왔다고 인사를 드리러 온 겁니다. 예상보다 일찍 도착해버리기도 했고요.”
“그렇구나. 세자르는, 좀 어떻지? 전달되는 서류상으론 문제없어 보이는데.”
“잘 지내고 있습니다.”
영지며 백작 칭호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마왕 대리전의 이야기를 할 수도 없고 마신전 세운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카이엔은 대충 대꾸했다.
그걸 알면서도 바르바스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요즘 구혼이 많이 온다던데.”
“…누가 보낸 지도 모릅니다. 워낙 많기도 하고, 알리지도 않고 처분해버리는 녀석이 있는지라.”
다행히 바르바스는 레이지와 약혼이든 결혼이든 하는 게 어떻냐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대화가 이어졌다.
일이 바쁘지 않았던 걸까? 카이엔의 시선이 책상을 향했다. 일하다가 도중에 손을 놓고 있었던 것 같은 상태였다.
슬슬 그만두고 나갈까.
밖에서 바이스와 자네인이 기다리고 있으니 오래 세워두기가 미안했다.
그가 대화를 끊으려고 마음먹었을 때, 바르바스가 그에게 물었다.
“…너는, 나를 많이 싫어하겠지. 나 때문에 네가 바깥으로 쫓겨났으니.”
“별생각 없습니다.”
카이엔은 단호하게 대꾸했다.
솔직히 어렸을 땐 굉장히 우울하기도 했고 수많은 암살 시도에 덜덜 떨었지만 지금은 괜찮았다. 누가 그를 해치려고 한다면 그보다도 먼저 움직여서 불안 요소를 없애줄 사람들도 있었고 가족 같은 이들도 많이 생겼다.
그가 왕성에만 있었다면 만날 수 없었던 이들, 구할 수 없었던 사람들도 있었다.
“어쨌든 전 지금 이 자리에 살아서 버티고 있으니까요. 왕위에도 관심 없고요. 그러니 신경 쓰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에이들러에게도 레이지에게도 해를 끼칠 생각 없고 둘 중 누가 당신의 뒤를 이어 왕이 된다고 해도 발목 잡을 생각 없습니다. 세자르 영지에서, 검은 숲을 끼고 살면서 내 주변인들과 행복하게 잘 살 테니까요.”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카이엔은 집무실에서 나갔다.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바이스와 자네인이 빠르게 그에게 다가왔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셨네요.”
“계속 말을 걸길래. 가자.”
“표정이 안 좋으신데요.”
“가서 이야기할게.”
그는 진심으로, 왕위 따윈 바라지 않았다.
세자르에만 있을 수 있는 이들이 있었고 그 땅을, 그를 보살펴준 사람이 그에게 남긴 그 땅을 남기고 다른 곳으로 가고 싶지도 않았다.
내내 침묵을 유지하던 카이엔은 리만테스 궁의, 그가 쓰는 방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긴 한숨이 먼저 흘러나왔다.
카이엔이 벗은 외투를 정리하던 바이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일 있으셨군요.”
“…만약에, 내가 쫓겨난 게 아니라 다른 귀족들 손에 휘둘리면서 꼭두각시 왕이 됐다면, 지금쯤 죽었겠지?”
“왕자님 성격이 만만치 않으니 아마 그랬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만약 그랬다고 할지라도 당신의 곁에는 제가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이 죽는 꼴을 보고만 있지 않았을 거고요.”
바이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마치 그것이 당연하다는 것처럼. 자신이 카이엔의 곁에 있는 건 지극히 자연스럽고 옳은 일이라고 말했다.
그 당당함에 카이엔은 피식 웃었다.
“네가 제일 위험했을 것 같은데.”
“흠, 그 말도 맞군요. 왕자님이 그대로 쭉, 왕세자로서 계셨다면 전 페르세이지로서 곁을 지켰을 테니까요. 바이올로스 후작가의 완벽한 권력 독점이었겠군요.”
“지금은 아닌가?”
“현 후작님께선 제가 갑자기 반역이라도 일으키면 어쩌나 걱정하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왕자님을 왕으로 세우겠답시고 왕성으로 쳐들어와서요. 저라면 순식간에 끝낼 수 있으니까요.”
“으음…”
바이스가 소드마스터란걸 알긴 하지만 왕성에 그렇게 인재가 없나?
카이엔은 침음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럼 남은 이틀 동안은 뭘 할까요?”
“일단 쉬고, 내일부터 페이리랑 같이 성이나 구경하러 다닐까 싶어. 에이들러에게도 늦기 전에 선물을 줘야겠고.”
“아마 지금쯤이면 여전히, 탄신연 행사 순서를 외우느라 바쁘겠지만요.”
“내일 가는 게 낫겠다.”
빠르게 카이엔은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다음 날, 카이엔은 페이리와 함께 왕실 도서관으로 향했다.
물론 안전 문제가 있었기에 바이스도 함께했다.
쌍둥이 왕자와 공주의 탄신연 준비 때문에 왕성 곳곳이 단장되어있는지라 평소보다도 화려했다.
페이리가 한눈을 팔다가 그와 떨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기에, 카이엔은 그녀와 팔짱을 끼고 걸음을 옮겼다.
왕실 도서관은 건물 하나가 통째로 큰 도서관이었으며 평소에는 도서 열람을 허락받은 학자나 귀족 등이 찾아오는 곳이었다.
깊숙한 곳은 왕족만이 출입할 수 있지만 그에게도 출입할 권한이 있는지 모르기에, 카이엔은 개방된 구역만을 가보기로 했다.
“와, 엄청 넓어요.”
페이리가 깜짝 놀라 감탄사를 내뱉었다.
세자르에는 이렇게 큰 도서관이 없었고 있다고 해도, 영주성 사람들이 쓸 수 있게 만들어놓은 거라 규모가 작았다.
게다가 왕실의 도서관이다.
책을 꽂아놓은 서가부터 시작해서 내부가 굉장히 화려했다.
빽빽이 꽂혀있는 책들을 보고 페이리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우리 성에도 이런 게 있으면 좋겠다…”
“돈 많이 벌면 만들게.”
“아하하.”
페이리는 긴 거미의 몸통을 가리기 위해 특수 제작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뒷부분이 굉장히 펑퍼짐했는데, 혹시 누가 드레스를 만져보기라도 하면 안 돼서 둥글게 돔 형태로 제작한 크리놀린을 착용했다.
덕분에 주변에서 봤을 땐 드레스가 과해 보일 정도로 부풀어있었지만 화려한 장식을 해놔서 조금 특이한 드레스, 라고 볼 수 있었다.
대관식 같은 행사에서 주인공이 긴 망토를 늘어뜨리고 걸으면 망토가 바닥에 질질 끌리듯이. 조금 어색한 부분이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파티장이든 어디든 그에게 감히 드레스에 대해 물어볼 사람은 없었기에 카이엔은 과감한 수를 두었다.
덕분에 안에 껴입은 보형물이며 드레스 장식 때문에 옷이 꽤 무거워졌지만 페이리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녀 역시 몬스터, 이종족인지라 인간보다 힘이 셌다.
“으음, 사람이 꽤 있네요…”
“탄신연 행사 때문이겠지. 내가 같이 있을 테니까 문제없어.”
여전히 카이엔과 팔짱을 낀 채로 페이리는 머뭇거리다가 한쪽 서가를 가리켰다.
성에 머무르는 동안 곳곳을 다 둘러볼 셈인지 가장 가까운 서가부터 가리키는 게 페이리다웠다.
의자에 앉을 수 없기에 페이리는 책의 표지며 제목부터 살펴보고 마음에 드는 책을 꺼내 그 자리에서 몇 줄 읽어보고 하나씩 챙겼다.
리만테스 궁으로 돌아가서 읽을 생각이었다.
동행한 바이스는 카이엔이 페이리와 이야기를 나누며 책을 보고 있는 것과는 달리 주변을 살폈다.
이곳을 보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혹시 위험한 일은 없는지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카이엔을 알아본 이들은 그의 곁에 곱게 보닛을 쓰고 드레스를 입고 있는 아가씨를 보고 굉장히 놀란 것 같았다.
‘이걸로 구혼이 줄어들면 좋을 텐데.
카이엔은 에이들러가 페이리를 보고 싶다고 해서 데려온 거지만 바이스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사촌 형제인 쌍둥이 왕자와 공주의 생일파티. 그런 장소에 카이엔이 이성 파트너와 참석한다면 다들 알아서 오해해주리라.
끊임없이 밀려오는 구혼서를 불태우는 것도 이젠 질렸다. 그런 그의 생각도 모르고 카이엔과 페이리는 평온했다.
“왕실 도서관이라 별의별 책이 다 있네요.”
“보존 목적 같은 것도 있겠지.”
“으음.”
페이리는 몇 권의 책을 빌려 가기로 했다. 장르는 소설, 역사서, 종교, 미술 등 다양한 분야였다.
그녀가 고른 책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바이스가 건네받았다.
“아, 제가 들어도 돼요.”
“이런 건 시종이 하는 일이랍니다. 페이리 씨는 맘껏 골라주세요.”
도서관의 수많은 책과 화려한 내부를 구경하고 나서, 페이리는 아쉬워하면서도 리만테스 궁으로 돌아갔다.
여러 권의 책을 빌린 페이리와는 달리 카이엔은 단 한 권의 책도 빌려오지 않았다.
그날 오후, 저녁 시간이 되기 전 카이엔은 개인적으로 에이들러를 만나러 갔다. 파티를 앞두고 에이들러는 굉장히 바빠서 저녁 식사를 하기 전에 간신히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비셰와 그리델라는 리만테스 궁에 있기로 하고 그 외의 일행은 모두 카이엔을 따라갔다.
찾아온 이들의 얼굴을 보고 에이들러는 굉장히 기뻐했다.
“어서 오세요! 기다렸어요!”
“생일 축하한다.”
“아직 하루 남았는걸요. 페이리도 반가워요! 오는 길에 힘들지 않았어요?”
“괜찮아요. 어제 도착해서 하루 쉬었더니 멀쩡해요.”
“다행이다. 제가 와달라고 하긴 했지만, 제 생일 파티인 것 때문에 같이 있을 시간은 엄청 모자랄 거예요. 그치만, 페이리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갔으면 좋겠어요. 드레스도 엄청 잘 어울려요!”
“감사합니다.”
“아, 맞다. 선물.”
“네? 우와! 주는 거예요?”
에이들러를 만나러 온 목적이 선물을 건네는 것이었기에 카이엔은 얼른 외투 주머니에서 두 개의 작은 상자를 꺼냈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에이들러는 굉장히 기뻐했다.
겉을 벨벳으로 두른 상자 안에 있는 건 보석 브로치였다.
“…비싼 건 아니야. 그냥, 부적 삼아 가지고 다녀. 꼭 차고 다니지는 않아도 되고 주머니에 넣고 다녀도 될 거야.”
“차고 다녀야죠! 와, 저 파티 때 이거 차고 갈래요.”
“이미 옷이랑 다 정해진 거 아냐?”
“이거 하나 더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는걸요. 하나는 레이지 거예요?”
“내가 직접 전해주기가 좀… 그 애도 별로 안 좋아할 것 같고.”
“그럴 만도 하네요. 이게 다 쓸데없이 결혼 이야기나 꺼낸 부모님 탓인데.”
투덜거리면서 에이들러는 레이지 몫의 선물까지 챙겼다.
브로치를 바로 착용하고 싶어서 만지작거리는 걸 바이스가 도와주었다. 방실방실 웃으면서 에이들러는 즐겁게 이야기를 했다.
“저번에는 일찍 돌아가서 아쉬웠어요. 나중에 또 놀러 가도 되죠?”
“허락받고 온다면야.”
“플루토는 어때요?”
“데리고 오려고 했는데 마차를 오래 타야 하니까 답답하다고 싫대.”
“식구가 더 늘어나진 않았어요?”
“안 늘어났어.”
“아하하.”
에이들러는 세자르에 대해 궁금해했다.
카이엔이 어떻게 지냈는지, 이종족 식구들이 잘 지내고 있는지, 몬스터들은 또 어떤지.
지난번에 놀러 갔다가 사고가 난 적이 있는지라 부모님이 다음 외출을 쉽게 허락해주지 않을 것 이란 걸 알기에, 더더욱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았다.
저녁 식사는 양친과 다른 귀족들과 함께하기로 한지라 시간을 오래 끌지 못하는 게 단점이었다. 아쉬워하면서 에이들러가 물었다.
“형도 같이 가면 안 돼요?”
“안 돼. 난 네 생일 당일의 파티에만 참석하고 그 이전이나 이후의 귀족 모임에는 얼굴 비추지 않을 거야.”
“힝…”
“그럼 간다. 내일 또 보자.”
“네!”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얼굴을 하면서도 에이들러는 간다는 그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날이 저물면서 기온이 살짝 내려갔다. 춥진 않아서 카이엔은 페이리와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에게 바이스가 조용히 말을 걸었다.
“사제가 되었단 말은 안 하시네요.”
“말해서 뭐 해. 별로 도움도 안 될 테고.”
“흐음.”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아뇨. 아직 신전도 공사 중이니 왕자님이 사제로서 일할만한 배경이 없다고 여길 뿐입니다. 축복이라던가 그런 것도 할 수 있잖아요?”
“악마들이 믿는 신이 축복 같은걸 내려줄 리가…”
말을 잇지 못하고 카이엔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통증에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알 수 없는 음성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딴 이유로 계시 내리지 말라고!!”
축복을 내릴 수 있다는 마신의 음성이었다.
짜증을 내면서 카이엔은 벌컥 화를 냈다. 다행히 주변에 보는 눈이 없었기에 바이스는 웃으면서 걸음을 재촉했다.
“하하. 마신님이 주시하고 계신가 봅니다.”
“끄으응…”
“좋게 생각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