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쌍둥이 왕자, 공주의 생일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카이엔은 일행과 함께 세자르를 떠났다.
시종과 그 보조 역할로 바이스와 비셰가, 호위 역으로 프라우디에와 자네인, 동행인으로 페이리와 그리델라가 함께 가기로 했다.
그리델라는 고양이로 변신해서 카이엔의 무릎 위에 앉았다.
원래 플루토도 함께 가려고 했지만 마차를 오래 타고 가야 한다고 하니 플루토가 싫다고 떼를 써서 두고 갈 수밖에 없었다.
이전에 검은 숲으로 갈 때도 오랫동안 마차를 타고 움직이니 좀이 쑤셔 하던 플루토였다. 에이들러한테는 미안하지만 플루토는 두고 가기로 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플루토의 산책은 라스가 맡아주기로 했다.
“그리델라. 무거워, 내려와.”
“싫어요-”
그때와 똑같은, 크림색 털에 귀와 네 발만 양말 낀 것처럼 까만 털을 한 고양이로 변신한 그리델라는 웃으면서 카이엔의 무릎 위에서 뒹굴거렸다.
마차 하나에 모두 탈 수 없어서 한 마차에는 그와 바이스, 그리델라, 비셰가 함께 탔고 다른 마차에는 페이리와 프라우디에, 자네인이 타게 되었다.
페이리의 신체 특성상 의자에 앉기가 힘들어서 마차의 내부를 개조, 한쪽 벽과 바닥을 아주 푹신하게 만들어놨다. 같은 마차에 탄 사람도 자네인과 프라우디에니 괜찮을 거라며 카이엔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으으, 전 왕성에는 처음 가봐요.”
“제국 황성에는 가본 적이 있잖습니까? 거기보단 덜 화려할 겁니다.”
“그래도요.”
“아. 그러고 보니 저한테도 사촌 동생인데 저는 선물을 준비하지 않았군요.”
“어쩔 수 없지. 넌 지금은 내 시종으로 일하고 있는 거니까.”
참 복잡한 관계라며 카이엔은 한숨을 쉬었다.
건너건너 사촌이라는 이 관계는 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파져서 카이엔은 생각하는 걸 그만뒀다.
세자르에서 왕성까지 가는 길은 멀었다. 중간중간 쉬었다가 가면서도 카이엔은 다른 귀족의 저택에서 머물지 않았다.
이전, 국왕의 탄신연에 참석하기 위해 세자르 남작과 함께 갔을 땐 남작의 기사단이 함께 했지만 지금 그는 기사단을 따로 대동하지 않았다.
어차피 동행들의 전투력이 높으니 무슨 일이 생겨봤자 별일 없을 거라고 여겼다. 기사단을 데리고 와도 수도에 도착한다면 둘 데가 없기도 했고.
그렇게 조용히 수도를 향해 전진하던 일행은 이번에 도착한 영지에서도 여관을 잡고 그곳에서 쉬려고 했다. 그런데 카이엔이 탄 마차를 향해 누군가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자…잠깐만요! 카이엔 왕자님…이 아니라 아베르나 백작님!!”
“응?”
“어, 어휴! 왜 저택으로 오시지 않고 누추한 여관에…”
“넌 누구지?”
모르는 얼굴이라 카이엔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러자 남성은 고개 숙여 인사를 하며 설명을 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설명부터 해드렸어야 했는데…! 저는 이곳 노바스의 영주이신 이센 자작님의 시종입니다. 귀한 분을 여관에서 묵게 할 수는 없으니 영주성으로 와주세요. 영주성은 수도로 향하는 모든 귀족분께 항상 대문을 열어두고 있습니다!”
“흠…”
“어떻게 할까요?”
“네 생각은 어때?”
바이스가 조심스럽게 카이엔에게 소곤거렸다. 그 물음에 대답해주지 않고 오히려 카이엔은 바이스에게 되물었다.
그 반응에 바이스는 살짝 설명을 덧붙였다.
“이곳은 포츠긴 후작의 영지입니다. 이센 자작은 영지를 다스리는, 이름뿐인 귀족 작위를 받은 사람이고요. 나쁘진 않습니다.”
“그런가.”
알아서 모시고 가겠다는데 거절하면 저 시종만 혼날 테니, 카이엔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나에 대한 걸 알고 말하는 거겠지? 그리고, 내 일행은 조금 특별하다만.”
“알고 계십니다.”
“그럼 가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자작의 시종은 허리 숙여 인사를 했고 일행이 탄 마차는 말머리를 돌려 영주성으로 향했다.
그는 바로 앞까지는 말을 타고 왔다가 마차를 발견하고는 말에서 내려 뛰어왔던 건지, 그들이 마차를 돌릴 준비를 하고 있자 근처에 세워놨던 말을 타고 허겁지겁 영주성으로 향했다.
카이엔 일행보다 먼저 영주성으로 가서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과연 카이엔이 영주성에 도착하니 이센 자작이 바로 앞까지 나와 있다가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왕자… 아니 백작님!”
“다들 똑같구나.”
다들 그를 부르는 호칭에 입에 붙지 않은 모양이다.
잔뜩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던 이센 자작은 잘못된 호칭을 입에 담는 순간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지만 카이엔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작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신경 안 쓴다.”
“가, 감사합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이센 자작은 카이엔과 그 일행을 영주성 내로 안내했다.
이미 몇 번 다른 귀족들이 지나간 적이 있고 지금은 카이엔 말고는 다른 손님이 없다는 말에 카이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백작님께서도 쌍둥이 왕자, 공주님의 탄신 축하 파티에 참석하러 가시는 길이시죠?”
“그래. 이전엔 바빠서 못 갔지만 이번에는 시간이 났다.”
게다가 에이들러가 꼭 와달라며 편지까지 보냈으니, 안 갈 수가 없었다.
‘악마들 대리전에 대한 건 다행히 소문나지 않았나 보네.’
이센 자작은 몇 번이고 이런 누추한 곳까지 와주셔서 감사 인사를 했다.
보는 이로 하여금 부담스러울 정도로 고개를 숙여대니 카이엔은 떨떠름해 했다.
“지나가는 길에 온 것 가지고, 호들갑 떨지 마라.”
“네, 네! 이쪽이 저희 영주성의 별채입니다. 왕자님과 일행분께서 쓰실 방은 넉넉히 있습니다.”
“직접 안내하는 건가? 하인을 시켜도 될 텐데.”
“아뇨, 괜찮습니다!”
하인을 시켜도 된다는 말에 이센 자작은 펄쩍 뛸 정도로 놀랐다. 내내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걸로 봐선 잘못해서 책이라도 잡힐까 봐 겁내는 것 같았다.
안내를 마친 다음에야 자작은 돌아갔고 카이엔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한숨을 푹 쉬며 바이스에게 물었다.
“이센 자작이 따르는 포츠긴 후작 측에서, 혹시 나한테 구혼서를 보냈었나?”
“포츠긴 후작에게 딸이 있긴 합니다만 자세히는 모르겠군요. 구혼서는 누가 보냈는지도 안 보고 다 태워버렸던지라.”
“너 진짜…”
다른 이들의 눈에는 카이엔이 알면서도 무시했다고 보일게 뻔했다.
어디 사는 어떤 귀족이 누가 구혼서를 보냈는지 말해주지도 않고 구혼서처럼 보이면 발신인도 보지 않고 태워버리는 미친 시종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겠는가.
귀족들 사이에서 그의 성격이 개차반이라고 소문이 났다면 분명히 그건 바이스 탓이라면서 카이엔은 이마를 짚었다.
저녁에는 자작이 함께 식사하자고 제안하려나, 싶었지만 그는 카이엔 일행을 불편하게 할 수 없다면서 그들 일행만 따로 식사를 할 수 있게 준비해주었다.
그러면서, 자기가 실수를 할지도 모르니 부디 너그럽게 용서해달라고 말했다. 카이엔은 별생각 없었으므로 괜찮다며 넘어갔다.
호위로 따라온 프라우디에와 자네인은 낯선 귀족의 저택을 경계했지만 아무 문제 없이 날이 저물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떠날 때도 이센 자작 본인이 직접 나와서 배웅까지 해주었다.
“며칠 더 쉬다 가셔도 되시는데…”
“일찍 가는 게 낫지.”
“왕성까지 즐거운 여행이 되길 바랍니다.”
“그대는 가지 않나?”
“네? 아, 저는 아쉽게도 참석하지 않습니다. 대신 왕성으로 향하는 분들을 맞이하고 있죠.”
“그렇군. 덕분에 잘 쉬었다 간다.”
일행이 모두 마차에 탔고, 그들은 영주성을 떠났다.
같은 마차에 탄 비셰에게 카이엔은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비셰, 저택 안은 어땠지?”
“넵! 별거 없는 영지였고 암살 시도나 숨어서 지켜보는 자는 없었습니다!”
“다행이네.”
“밤에 자작의 꿈속에 침투했지만 별거 없던걸요. 음, 하나 건진 게 있긴 한데.”
“뭐지?”
“그냥, 영지를 지나치는 사람들을 영주성에 묵게 하면서 언제 누가 왔다 갔는지만 상관에게 전달하던걸요? 게다가 엄청 긴장하고 있더라구요. 완전 끙끙거리면서 나중엔 악몽도 꿨어요.”
“흠.”
“저희가 지나갈 길에 도적이 출몰한다는 말은 없으니 괜찮을 겁니다.”
“도적이 나온다고 해도 말이야… 그놈들이 불쌍한 거 같은데.”
“우리 왕자님은 착하기도 하셔라.”
“아니… 너희랑 싸울 도적놈들 목숨이 불쌍하다고. 죽을 게 뻔한데.”
***
에이들러는 하루하루 생일이 다가오는 것에 잔뜩 들뜬 채였다.
작년 같았으면 이곳저곳에서 온 선물들을 뜯어보느라 정신이 없었을 쌍둥이 오빠가 허구한 날 창밖만 쳐다보면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걸 보고 레이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번엔 카이엔 형도 꼭 와달라고 나도 편지를 썼는데, 잘 도착했겠지?”
“꿈 깨. 올해도 못 올지 어떻게 알아? 백작이니 할 일도 많을 테고.”
“이잉…”
“저번에 놀러 갔다 왔으면서 또 보고 싶어?”
“또 가고 싶은데?”
레이지는 한숨을 쉬었다.
에이들러는 그들 쌍둥이와 카이엔이 굉장히 미묘한 관계라는 것을 알면서도 카이엔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 했다. 그녀는, 카이엔을 대하기가 미안하고 불편했는데.
“몬스터들이 그렇게 좋아? 그것도 다 그 사람이 길들여서 말을 잘 듣는 거지, 괴물 같은 놈들이 더 많을 게 뻔하잖아.”
“형이랑 같이 있던 애들은 다 착했으니깐. 아, 빨리 오면 좋겠다. 선물 필요 없으니까.”
“엥? 너 당연히 선물도 기대할 줄 알았는데.”
“선물은 다른 사람들도 많이 주잖아.”
“되게 의외네.”
“뭐가?”
“아무것도 아냐.”
에이들러라면 카이엔이 뭘 주던 기뻐할 테지만 그래도 선물을 기대할 줄 알았다.
생일 파티에 와주는 것 자체가 선물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알 수가 없었다.
‘…그 인간도 오려나?’
카이엔이 가는 곳마다 페르세이지는 졸졸 따라다닐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분명 왕성에 방문할 테고, 모르는 척 하겠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에휴…”
“왜 그래?”
“그냥.”
“맞다, 이번엔 카이엔 형도 오고 거기서 만났던 다른 사람들도 와주라고 부탁했어.”
“다른 사람?”
“응. 거기서 만났던 사람.”
“그럼 이종족일거 아냐. 시녀?”
“어… 비슷하려나?”
에이들러는 조금 얼버무렸다. 페이리는 과거 카이엔을 돌봐주는 역할을 했지만 카이엔이 다 자란 지금은 따로 맡은 일 없이 지내고 있었으니까.
그 반응에 레이지는 인상을 썼다.
“두 분께 허락은 받은 거지?”
“에… 별일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데.”
“뭐?”
“그치만 성을 구경시켜주고 싶었던 말야! 게다가 이종족이라고 해도, 다른 점도 없고.”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려고? 그 사람이랑 같이 온다는 것만으로도 엄청 시선을 끌 텐데.”
“내 생일이라 내가 초대했다고 하면 돼.”
“하여간… 다음부턴 나한테도 미리 말을 좀 해놔. 그래야 도와주던 말던 할 거 아냐.”
“도와줄 거야?”
“괜찮겠지.”
“고마워.”
활짝 웃으면 에이들러는 레이지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다른 이들도 왕성에 와주면 좋겠다고 바랐지만 제일 만나고 싶은 건 페이리였다.
카이엔이 묵을 궁은 카이엔이 구경시켜줄 테지만 성안의 넓디넓은 정원과 회랑, 왕실 도서관, 역대 왕의 초상화며 예술 작품이 있는 궁 등등. 성안에는 볼 게 참 많았다.
페이리는 취미도 독서고 글을 쓰고 있다고 하니까, 성을 구경하는 게 그녀의 안목을 넓혀주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터.
에이들러는 하루라도 빨리 카이엔과 페이리가 왔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보면 깜짝 놀랄지도 몰라. 그치만 너무 놀라면 안 돼!”
“뭐래는 거야…”
“빨리 생일이 되면 좋겠다.”
“외워야 할 것도 많고 해야 할 것도 많아서 싫어할 땐 언제고.”
“지금은 괜찮으니까!”
“그래. 의욕 없는 것보단 낫지.”
피식 웃으면서 레이지는 읽던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난번엔 세자르에 놀러갔다가 기이한 사건과 엮였다면서 에이들러는 달라진 점이 없었다.
이제 그 역시 카이엔과 그들 남매의 미묘하고 복잡한 관계에 대해 알 텐데도.
페르세이지가 직접 말해줬다고 했다.
다행히 에이들러도 엄청난 바보는 아니기에 그 사실을 어머니와 아버지에겐 말하지 않고 여동생인 그녀에게만 말해주었다.
‘하여간 페르세이지, 성격 하고는.’
자신보다 나이가 세 배 가까이 많은 사촌 오빠의 이름을 멋대로 부르면서 레이지는 한숨을 포옥 쉬었다.
페르세이지가 어렸을 때 사고를 쳤다면 벌써 그녀만 한 자식이 있었겠지만 그렇지 않으니까 부르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