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예스티카가 신전 건축을 맡겨주라고 했기에 카이엔은 시간이 날 때, 어쩌다가 한 번씩만 멀찍이 서서 공사 현장을 구경하다가 돌아오곤 했다.
자주 보러 가면 부담될까 봐 말없이 지켜보다가 영주성으로 돌아왔는데 바이스는 별말 하지 않고 카이엔의 뒤를 따랐다.
신전을 지으러 온 이들은 엄청난 열정으로 쉬지 않고 일을 해서 카이엔이 구경을 하러 오던 말던 신경 쓰지 않았다.
한편 신전을 만든다는 소식은 영지 내에도 퍼졌고 영지민들은 신기해하면서 공사 현장을 구경하러 갔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다들 소식을 듣고 궁금해하면서 근처를 어슬렁거렸으며 일하느라 바쁜 인부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려고 이것저것 먹거리를 싸 들고 가는 상인들도 있었다.
검은 숲으로 사냥을 가기 위해 용병들이 사제를 고용해서 동행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하지만 신전이라니!
이런 구석진 곳에도 신전을 세울 수 있다는 사실에 그들은 굉장히 놀랐다.
혹시라도 그런 마을 사람들이 오해할까 봐 카이엔은 신전에 대해 설명을 해야 했다.
근처에 사는 사람들을 다들 불러모으니 광장이 꽉 찼다. 모두의 앞에 서서 카이엔이 입을 열었다.
“너희도 바쁠 테니 중요한 것만 말하고 가겠다. 지금 짓고 있는 신전은 너희가 아는 일반 신전이 아니야. 마신전이라고 하는 거다.”
“마신전이 뭔데요?”
“다 똑같은 신전 아닙니까?”
“어… 신전은 맞지만 다른 신을 모시고 기리는 곳이다. 광장 게시판에 따로 공고도 하도록 하지. 천신이 돌봐주지 못하는 이들을 감싸는 신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종족요?”
“아, 하긴.”
“알겠습니다!”
반응을 보니 못 알아들은 것 같았다.
다들 별거 아니라는 태도이자 카이엔은 이마를 짚었다.
이들에게는 좀 더 자세히 설명을 해줄 필요가 있었다.
영주성으로 돌아온 카이엔은 광장에 게시해둘 신전에 대한 설명서를 만드느라 머리를 싸매야만 했다.
마신전은 마신을 모시는 신전이라는 뜻이며, 천신이 보살피지 못하는 자들을 거두는 마신을 기리는 곳이다.
인간들이 천신을 주로 믿으니 인간 외의 이종족이 마신을 믿으면 좋을 것 같다, 신앙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
사제는 딱 한 명, 카이엔 본인.
다른 신전의 사제나 고위 신관들처럼 신성력을 쓸 수 있지만 효과는 영 없다고도 써놨다.
옆에 서 있던 바이스가 그 내용을 힐끗 보고 물었다.
“신성력 효과는 왜 적으십니까?”
“아니… 나한테 치료해달라고 왔는데 내가 아무것도 못 하면 미안하잖아. 미리 이렇게 써놔야 기대를 안 하지.”
“흠. 그럼 그때 제 상처를 낫게 했던 건 기적이었습니까?”
“왜 그렇게 말하냐…”
“제 입으로 할 말은 아니지만 꽤 아슬아슬한 위치를 다쳐서 출혈이 꽤 있었거든요. 하지만 전 멀쩡하지 않았습니까. 그날 저녁 왕자님 생존 기념 파티도 했고요.”
“그건 너라서 그랬던 거 아냐? 너 튼튼하잖아.”
“왕자님의 신성력도 계속 쓰다 보면 익숙해져서 실력이 늘 겁니다. 하지만 영주직을 내팽개 치고 치유에만 집중할 수 없으니 그게 아쉽군요.”
“일단 영주 일 하는 게 최우선이지.”
“공고문은 이걸로 됐다고 치고, 다른 계획은 있으십니까? 성서 같은 거요.”
“그런 걸 내가 왜 만들어…”
카이엔은 질색을 했다.
현존하는 성서도 읽어본 적이 없는 그인데 마신전을 세운 걸로도 모자라서 거기서 쓸 성서까지 만들라니. 분명 그의 머리가 터져버릴 게 분명하다.
“악마들 걸 그대로 쓰기엔… 인간이랑 악마가 달라서 안 되겠지. 단순하고 모두가 알아듣기 쉬운 규칙이나 법 같은 것도 괜찮으려나?”
“왕자님이 도움을 요청하면 악마들도 도와 주겠죠.”
“글쎄.”
“일단 저도 대충 목록은 짜보겠습니다. 신전이 다 만들어지면 석판에 새기도록 하죠. 예스티카 님과 함께 오신 분 중에 뛰어난 석공이 계십니다.”
“추가금 주고 부탁 좀 해야겠다.”
의견 자체는 나쁜 게 아니었다.
지금은 마신전에 대해 별생각이 없는 영지민들도 막상 신전이 건설되고 주변에서 이상한 이야기가 많이 들린다면 마신전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으니 이 신전은 정말로 무해한 곳이라는 걸 알리기 위해, 성서까진 아니더라도 규칙 정돈 생각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마신전을 어떻게 해야 하나 잔뜩 고민하면서 하루를 마친 카이엔은, 그날 밤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누가 자꾸 말을 걸었다.
- …라.
- 핍박받는 이종족들을 거두고 성지로 나아가라…
무슨 말을 웅얼거려서 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저 한마디만은 들을 수 있었다.
꿈에서 깨어난 카이엔 멍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다가 제 뺨을 때렸다.
“…뭐야.”
개꿈인가.
그런데 개꿈이라고 하기엔, 굉장히 찝찝했다. 하필 마신전에 관한 일을 한 뒤에 꾼 꿈이라 더욱 그랬다.
한참 동안 고민한 끝에 카이엔은 오후에 시간을 내서 비셰를 만나러 갔다.
여전히 주방에서 일을 배우고 있는 비셰는 카이엔이 찾아오자 의아해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세요?”
“…내가 이상한 꿈을 좀 꿔서.”
“네?”
“무시하기엔 좀, 찝찝한데 봐줄 수 있어?”
“물론이죠. 오늘도 같은 꿈을 꾸실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확인해볼게요.”
비셰는 흔쾌히 대답해주었다. 물론 카이엔의 방 안에 밤새 같이 있어야만 했으므로 사전에 바이스의 동의를 받아야만 했다.
비셰에 대한 안전성 검증은 끝난 모양인지 바이스도 쉽게 허락해주었다.
“개꿈이면 좋을 텐데. 저도 같이 있을까요?”
“아니. 비셰만 있으면 될 것 같아.”
“그렇군요.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불러주십시오.”
“나 때문에 밤 새지 말고 자.”
“하하.”
바이스는 웃기만 했다.
그날 밤 카이엔은 불안해하면서도 잠들었고 비셰가 곁을 지켰다.
그는 어젯밤과 비슷한 꿈을 꾸었지만 들려오는 목소리는 여전히 웅얼거림이 심해 무슨 말인지는 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카이엔은 침울한 얼굴의 비셰를 보게 되었다.
“…왜 그래?”
“어… 왕자님…”
“무슨 일 있었어?”
“오늘도 꿈꾸셨죠?”
“응.”
“그게… 진짜 신인데 이거 어쩌죠…?”
“…뭐?”
울상을 짓는 비셰를 보고 카이엔은 그의 귀를 의심했다.
신? 신?
마신은 굉장히 할 일이 없는 존재인 모양이다.
왜 그의 꿈에 이틀 내내 나타나서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을 하고 돌아가는 건가!
그가 황당해하며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자 비셰가 열심히 말을 이어나갔다.
“그, 신인건 확실해요. 왕자님 꿈에 접근하니까 저한테도 미약하게나마 음성이 들렸거든요. 해 끼칠 생각은 없고 미안하대요. 왕자님한테 목소리가 잘 전달되지 않는다고 말하니까 앞으론 안 오겠대요.”
“…안 오면 다행이고.”
비셰는 그의 꿈에 나타난 존재가 신이라고 말했다.
현실 도피를 하고 싶은 나머지 카이엔은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프라우디에를 찾아갔다.
혹시라도 신인 척하는 귀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프라우디에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귀신 아니에요.”
“…정말?”
“네. 비셰 씨 말대로 신이 왔다 가신 게 아닐까 싶어요. 조금이지만 왕자님에게서 느껴지는 신성력의 기운이 평소보다 짙거든요.”
“…하아.”
“흠, 왜 저한테는 말 안 하셨습니까?”
“말해도 달라질 게 없을 것 같아서…”
“하긴, 신을 베어버릴 수는 없을 테니까요. 보이지도 않고.”
저래서 바이스에게는 말하지 않은 것이었다.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신한테도 덤비겠다는 말을 하는 녀석이었으니까.
카이엔은 힘없이 한숨을 푹 쉬었고 따라온 비셰 또한 마찬가지였다.
“…난 선지자가 될 생각도 없고 이이상 일할 생각도 없어! 신전만으로 만족하라고!!”
하늘에 삿대질을 하며 카이엔이 외쳤다.
그런다고 마신이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이었다.
별채 앞에 서서 외치는 그 모습을 목격한 별채의 식구들은 저마다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왕자님 딱 걸렸네.”
“운도 없지.”
“도와드리고는 싶지만 방법이 없네요.”
바이스는 말없이 카이엔이 닿을 리 없는 마신을 향해 삿대질 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신의 눈에는 저 모습이, 하나뿐인 인간 사제가 자기한테 하는 욕마저도 예뻐 보이기를 바랄 뿐이었다.
“왕자님, 신전이 개방되고 관리가 시작되면 일이 배로 늘어날 겁니다. 마교황이라는 앙그라 마이뉴에게 인정받은 분은 왕자님뿐이시고 신성력을 쓸 수 있는 것도 왕자님 혼자시니까요.”
“나도 알아… 그래서 걱정돼.”
“제가 그리델라 씨랑 같이 회복 물약을 개발할게요. 그게 생기면 좀 더 효율이 늘어나지 않을까요?”
“회복 물약이라면, 어떤 식입니까?”
“어, 피로 회복?”
“왕자님의 과로는 확정된 사안이시군요. 밤낮없이 일만 하시겠군요.”
“…좀 봐주라.”
“상황 봐서요.”
치유를 할 수 있는 건 사제의 신성력 뿐이었다.
성수는 삿된 것을 몰아낼 뿐 치유 효과는 없었다.
신전의 공사가 끝나면 하루가 멀다 하고 과로할 예정인 카이엔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그가 사제가 되고 싶어서 된 것도 아니고, 앙그라 마이뉴가 마교황인 탓에 그 힘을 받은 그가 신성력을 가진 것뿐이었다.
도로 가져가라고 해도 가져갈 리가 없으니 이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더 바빠지겠구나.’
마지막 싸움에서 피해를 입은 게 영주성 앞마당과 검은 숲이라서 다행이었다. 영지에 피해를 입었다면 지금도 복구하느라 정신이 없었을 테니까.
‘성서든 뭐든 신전이 완공돼서 나서 해도 되겠지?’
이 땅에 홀로 선 마신 사제는 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게다가 조언을 요청할 곳도 없었다.
그가 마신전을 관리하기 위한 법이며 규칙 같은걸 만들기 전에 신전이 먼저 완성될 거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사실이었다.
예스티카의 작업 속도는 보통이 아니었다.
땅을 보고 돌아와서 수정한 신전의 스케치와 예상 설계도부터 빠르게 그려서 보여준 그녀는 신전의 디자인과 내부 구조가 확정되자 빠르게 세부 사항을 정해나가면서 공사에 손을 댔다.
다들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하라고 해도 의욕이 장난 아니었다.
지금까지 집만 만들어봤지 신전 같은 예술 감각을 총동원한 작업은 처음이라면서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예스티카 뿐만이 아니라 그녀가 데려온 사람들 모두 열정을 불태우고 있으니, 공사는 하루가 지날수록 속도가 느려지기는커녕 속도가 붙었다.
“이걸 옮겨드리면 됩니까?”
“아. 그럼 부탁드릴게요.”
“고마워요-”
게다가 여러 명이서 끙끙거리면서 들어야 할 무거운 석재들도 라스와 엔베인이 한 번씩 도움을 주러 가서 번쩍번쩍 들어 올리니, 시간이 배로 단축되었다.
세자르에 이종족이 많다는 걸 미리 듣고 온 인부들은 덕분에 더 빨리 완성할 수 있을 거라면서 손뼉을 쳤다.
품삯을 쳐줘야 하는 거 아니냐며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도 신전을 공사하러 온 그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가진 기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교류를 하기도 했다.
어린아이들은 힐끔거리면서 구경하러 갔다가 그곳의 목수며 석공 같은 장인들에게 돌이나 나무로 만든 조각품을 받고 자랑하러 다니기 바빴다.
평화로운 날이 이어지면서 날은 화창하게 밝았다.
갑자기 쏟아지는 비도 없었으며 항상 날씨가 흐려지며 한 방울씩 똑똑 떨어지는 거로 비가 오는 것을 알려 그들이 비에 대비하게 만든 뒤에야 한바탕 쏟아지곤 했다.
그런 일이 여러 번 반복되자 이것도 마신의 친절인 걸까, 라며 카이엔은 고개를 기울였다.
자신을 기리는 신전이 생긴다니 잔뜩 들떠서 그의 꿈에 나타나 말까지 걸었던 신이니, 이런 방법으로 거들어주려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