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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왕자는 조용히 살고싶다-127화 (128/219)

127화

‘어디로 가야 하지?’

저녁밥 먹을 시간이니까 식당으로 가야 하나.

곁에 아무도 두지 않고 잠옷 차림 그대로 카이엔은 식당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소란의 중심이 식당인걸 알게 되었다. 문은 꼭 닫혀있었지만 저 안에서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뭐야?”

의아해하며 그는 식당 문을 열었다. 그리고, 식당 안쪽 벽에 붙어있는 「왕자님 생존 기념 파티」라는 문구를 보고 뒷목을 잡았다.

“생존…기념…”

“제가 깨우러 가기도 전에 일어나셨군요.”

“으악!”

“놀라시긴.”

어느새 그의 뒤에는 바이스가 서 있었다.

귀신도 아니고 인기척도 내지 않고 다니는 시종 때문에 심장이 떨어질 뻔한 카이엔은 가슴 위에 손을 올리고 헐떡거렸다.

요즘 놀랄 일이 많아서 쉽게 진정이 되지 않았다.

“…너 멀쩡해?”

“멀쩡하지 않으시길 바라십니까?”

“그건 아닌데…”

“왕자님 덕분이에요.”

“네. 치료해주셨잖아요.”

카이엔이 악마에게 받은 힘이 ‘신성력’이라는 말에는 모두 크게 놀랐다.

그것도 천신을 믿는 일반 사제들과 같이 치유력이 있다는 말에는 더 놀랐다. 그래도 덕분에 크라일라와 싸우면서 입은 부상을 회복할 수 있었기에 다들 긍정적으로 여겼다.

다만, 프라우디에는 가장 심하게 맞아서 아직도 좀 아픈 모양이었다. 파멸이 몸을 침식한 시간이 다른 이들보다 길어서였다.

“아무튼 다들 무사해서 다행이야.”

“그래서 파티하려고!”

“…누가 의견 낸 거야?”

모두의 손가락이 각기 다른 이를 가리켰다. 다 같이 생각한 모양이다.

화낼 기운도 없다며 카이엔은 고개를 저었고 그런 그의 손을 잡아끌며 슬로세이가 그를 의자 앞까지 데려갔다.

언제 요리사한테까지 말해둔 모양인지 그가 자리에 앉자 식탁 위로 음식들이 하나둘 올라왔다.

“맞다. 지금 축제 기간인데 그 외의 문제는 없었나?”

“네. 다행히 문제없다고 합니다.”

“잘됐네.”

민간에 피해가 있었다면, 고개를 들 수가 없었을 테니까.

이걸로 대리전은 무사히 끝났고 다시 그가 이상한 사건에 엮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들 그렇게 믿었기에 생존 기념이라는… 조금 이상한 문구긴 하지만 아무튼 축하하자는 의미로 파티를 하자고 한 것일 테고.

술잔에 술 대신 주스나 다른 음료를 채운 채로 작은 파티가 시작되었다.

바깥은 아직도 엉망이었지만 내일부터 청소하면 된다며 애써 무시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들은 즐겁게 저녁 식사를 했다.

“왕자님, 잠옷 차림이신데 춥지 않으세요?”

“응? 모르겠던데.”

“저녁에 그렇게 돌아다니면 안 돼요.”

“으음…”

“감기 걸리겠다.”

“제가 모시고 들어갈 테니 괜찮습니다.”

다들 고생을 많이 했기에 파티는 일찍 마무리 지어졌다.

더 놀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카이엔이 더 늦기 전에 돌아가라며 엄포를 놓았다.

방으로 돌아가는 길. 아까보다 조금 추워진 것 같아 그가 몸을 떨자 바이스가 제 겉옷을 벗어서 건넸다.

“시종의 옷 따위를 걸치게 해서 죄송합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왕자님.”

“응?”

“그 아이들의 흔적을 주워서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카이엔이 걷는 것을 멈췄다.

잠시 그 자리에서 굳어있다가 그는 걸음을 떼었다.

“…그래.”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거죠?”

“글쎄. 달라진 건 딱히 없지. 난 조용히 살 테니까. 아니, 조용히 살긴 글렀나?”

이 힘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었다.

앙그라는, 그에게서 이 힘을 거둬갈 생각이 없었다.

분명히 이유가 있어서 가져가지 않은 걸 텐데 앞으로 무슨 일이 또 일어나는 걸까?

괜히 불안한 마음에 카이엔은 몸을 움츠렸다.

***

앙그라 마이뉴는 자신이 선사한 힘을 거둬가지 않았다.

원래 신성력이란 걸 아무한테나 나눠줘도 되는 건지, 쓰게 해도 되는 건지 마신과 합의는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없는 것보단 나았다.

그러나, 여전히 쓰는 법은 잘 몰라서 카이엔은 그나마 쓸만한 치유력을 시험해보았다.

천신과는 달리 마신의 신성력은 인간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가장 어둠에 가까운 프라우디에와 엔베인이 일부러 손이며 팔에 작은 상처를 내고 카이엔에게 내밀면 그가 치유해보는 식이었다.

상처 근처에 손을 대거나 손을 뻗고 힘을 사용하니 밝고 따뜻한 빛이 일렁이며 상처를 아물게 했다.

“으음…”

이 힘, 정말 계속 있는 건가?

일단 계속 써봐야 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들 다칠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다치는 일 있으면 오라고도 일렀다.

다칠 일이라곤 망치질하다가 잘못해서 손을 찍거나 생채기 정도뿐인 모두였지만 그의 말에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바이스는,

“신성력이라면 성기사들이 쓰는 것처럼 끌어모아서 오러처럼 휘두를 수도 있겠군요. 제가 상대해드리겠습니다. 오시죠.”

“…너 소드마스터라면서.”

“네.”

“이번에야말로 날 죽일 셈이냐?”

“설마요.”

“너한텐 절대 안 배워.”

“흠?”

바이스는 진심이냐며 고개를 기울였지만 카이엔은 인상을 썼다.

신성력=치유와 일맥상통하니 진검으로 싸우다가 다쳐도 치유하면 그만 아니냐고 바이스가 칼질 해대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말해봤자 발뺌할 게 뻔하므로 카이엔은 열심히 고개를 저으며 거부했다.

“그럼 누구한테 배우시려고요?”

“너보다 정상적인 놈으로. 여차하면, 간단한 검술같은 건 에빌한테 배워도 되잖아.”

“에빌 씨는 누구 가르치시는 데에 소질이 없어 보이던데요.”

“일단 해봐야지. 하… 난 진짜 조용히 살고 싶었는데.”

“그래도 주변에서 왕 되란 소리는 좀 줄지 않았습니까?”

“대신 이제 결혼하라고 난리잖아.”

“안 하시면 되는 겁니다. 열심히 버텨보죠.”

“너야말로 편지 오면 읽지도 않고 태워버리는 것 좀 그만해. 계속 무시하다가 단체로 시비 걸면 어쩌려고.”

“전 바이올로스 입니다만. 일방적으로 절연하긴 했지만 그래도 미운 정이 있으니 제 가문에서도 저 죽는 꼴은 못 볼 겁니다.”

“미운 정…”

“왕자님께서 원하신다면야 제가 바이올로스 후작 자리를 꿰차고 반란을 일으켜 당신을 왕으로 만들어드리죠.”

“필요 없어.”

아무렇지도 않게 제 부친을 죽이고 현 왕의 모가지도 따버리겠다고 말하는 바이스를 보며 카이엔은 질색했다. 이 녀석은 시간이 지나도 바뀔 생각을 안 하는 건지, 툭 하면 저런 말을 해서 그를 식겁하게 했다.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고개만 젓는 카이엔을 보고도 바이스는 별말 하지 않았다.

익숙하기도 했고, 카이엔이 아무리 싫다고 해도 그가 계속 검술을 입에 담다 보면 하는 수 없이 하게 되리라는걸 알아서였다.

그의 생각대로 나흘 정도 지나자 카이엔은 죽을상을 하고도 그에게 검을 배우기로 했다.

“좀 더 빠르게 휘두르십시오. 왕자님은 기초 체력이 모자라서 제가 걱정이 많습니다.”

“헉… 허억…”

“휘두르기 다 채우고 나서는 다시 달릴까요? 배워야 할게 산더미인데 이런 식이라면 체력 훈련만 십 년쯤은 해야겠습니다.”

“시…십 년은 너무하잖아…”

“자세 틀어졌습니다. 다시 하세요.”

“큽…”

카이엔이 낑낑거리면서 바이스의 감시를 받으며 목검을 휘두르고 있을 때.

볕이 좋아서 풀밭에 누워있던 플루토와 사트로누스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카이엔이 자기랑 놀아주지 않을 거란 걸 깨달은 플루토가 사트로누스에게 치대다가 지쳐 낮잠을 자기 시작한 거였다.

금세 잠이 든 플루토는 세 개의 머리로 각기 잠꼬대를 했다. 그 소리에 카이엔은 지친 와중에도 피식 웃고 말았다.

“하여간 저 녀석들…”

“계속 휘두르세요.”

“…나 내일 몸살 나는 거 아냐?”

“열심히 간호해드리겠습니다.”

“너 진짜…”

무슨 말을 못 하겠네.

바이스가 숫자 세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카이엔은 휘두르기 이백 번을 끝냈다. 물론 그 전에 기초 훈련이랍시고 뜀뛰기며 달리기, 근력 운동과 체조 등을 했었고 훈련은 이제 시작이었건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대로 바닥과 한 몸이 되려는 그를 붙잡고 앉게 한 다음 바이스는 몸이 식기 전에 체조라도 한 번 더 하라며, 못 일어나겠으면 앉아서라도 하라며 그를 닦달했다.

‘흠…’

카이엔이 느릿느릿 몸을 움직이는 걸 보고 바이스는 생각에 잠겼다.

악마에게 힘을 받았어도, 카이엔은 그대로였다. 예전과 달라진 점이 없었다.

그때, 카이엔이 크라일라를 쓰러뜨릴 수 있었던 이유는 각성한 힘이 서로 상극이었기 때문이었다.

파멸과 안식이라니.

파멸은 그보다 좀 더 격이 높은 안식을 갉아먹지 못했고 그랬기에, 카이엔이 이길 수 있었겠지.

안식 하나만 두고 본다면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힘이었다.

‘사제의 힘과 같지.’

모시는 신은 다르지만.

이 모든 것이 정말 우연인 걸까. 우연으로 치부해도 되는 걸까.

머리 위로 팔을 못 들어 올리는 카이엔을 빤히 쳐다보다가 팔을 붙잡고 위로 들어 올리며 그가 말했다.

“다음에 악마가 찾아오면 저도 만나고 싶군요.”

“으아아악!”

“이 정도 가지고 엄살 부리지 마세요.”

“나 진짜 아픈데?!”

“괜찮습니다. 앞으로 더 아플 일이 많을 거예요.”

“으…”

“흠, 힘들면 오늘은 이쯤 할까요? 외투 입고, 달리러 갑시다.”

“궁금한 게 있는데… 넌 항상 내 옆에 붙어 다니면서 대체 언제 훈련을 했던 거야?”

“다른 이들보다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면 됩니다.”

뭘 그리 당연한 걸 묻느냐는 반응에 카이엔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 공부 잘하려면 열심히 하면 되고 편식 안 하고 골고루 먹으면 건강해지고 병도 안 걸리고 그러겠지.’

바이스의 닦달에 기사들이 뛰는 운동장까지 네 바퀴를 다 돌고 나서야 카이엔은 방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땀에 젖은 옷을 벗고 욕조 안에 들어가니 그대로 힘이 풀려서 머리까지 물속으로 담글뻔한 걸 바이스가 건져냈다.

이렇게 몸을 움직여본 적도 없었고 운동을 해본 적도 없어서 죽을 것만 같았다. 물론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다 씻고 난 그가 침대에 엎드리자 바이스가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대며 고개를 기울였다.

굉장히 불길한 느낌이 들어 카이엔이 물었다.

“…또 왜?”

“왕자님이 아까 몸을 푸실 때 보니까, 제대로 팔이 안 올라가시더군요.”

“…그랬지.”

“제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근육통이 더 심해집니다만.”

“진짜 안 움직인다고…”

“그럼 억지로라도 해야죠. 운동 후엔 바로 쉬는 것보단 가볍게 전신을 풀어준 다음에 쉬는 게 훨씬 낫습니다.

“뭘 어쩌려고-”

“따뜻한 물로 씻었으니 뭐, 그래도 조금은 풀렸겠죠. 그래도 모자랍니다.”

바이스는 침대 쪽으로 다가와 카이엔의 팔을 붙잡고 뒤로 당겼다.

근육통 때문에 그가 비명을 질러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깨며 팔을 꾹꾹 눌러 마사지를 했다.

“으악! 악!”

“시끄럽게 하지 마세요. 입을 막아버릴 수도 없고.”

“하, 하지마!”

“제가 가르치기로 한 이상 제 의견에 따라주셔야 합니다. 가만히 있으세요.”

“으악!”

“누가 들으면 제가 드디어 왕자님 암살을 시도하는 줄 알겠습니다.”

그는 아파 죽겠는데 바이스는 담담히 한 마디 한 마디 지지 않고 대꾸하기까지 했다.

안 그래도 쑤신 몸뚱이를 계속 누르고 잡아당기고 주무르니 비명 밖에 나오지 않았다. 계속 소리를 질렀다간 정말로 바이스가 그를 죽이려 드는 줄 알고 다른 사람들이 놀라서 달려올지도 몰라 베개를 붙잡고 얼굴을 파묻었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바이스가 숨 막혀 죽는다며 베개를 치워버렸다.

지옥 같던 마사지가 끝나서 완전히 축 처진 그를 보고 바이스는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약하다니, 제가 왕자님을 잘못 키웠군요.”

“끄으으…”

“진작부터 훈련을 시켰어야 했는데.”

“으…”

“쉬십시오. 저녁 식사는 방으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카이엔의 대답도 듣지 않고 바이스는 방에서 나갔다.

방 밖으로 나가니 카이엔의 비명을 듣고 걱정돼서 올라온 이들이 있었다.

대표로 글러티나가 조심스럽게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 카이엔은?”

“쉬고 계십니다.”

“으음… 별채까지 소리가 들려서 말이다.”

“이제 괜찮습니다.”

“난 바이스 씨가 맨날 말하던 목표 달성을 위해 그러는 줄 알았어.”

“제가 암살을 하려고 했으면 이렇게 시끄럽게 안 하죠.”

“그치~ 그래서 별일 아닐 줄 알았어.”

그리델라가 웃으면서 분위기를 환기하려고 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엔베인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입을 우물거리다가 겨우겨우 한마디 했다.

“그… 아무래도 왕자님은, 연약하시니까… 차근차근 하면 안 될까요?”

“그 생각도 했습니다만 일단 쓴맛부터 보여줘야 할 것 같았기에.”

“쓴맛이 아니라 매운맛인 것 같은데.”

“좋은 훈련법이 있으면 얼마든지 알려주세요. 그리델라 님께는… 체력과 근력을 기르는데 좋은 약 같은 게 있다면 부탁하고 싶습니다.”

“아, 그건 내 쪽에서 사양하고 싶어. 난 왕자님 지금 모습이 좋단 말야. 근육 우락부락한 거 싫어. 안 어울려.”

“그렇게 만들진 않을 겁니다만.”

“그럼 그냥 평소처럼 식사해도 되지 않아? 왕자님이 엄청나게 편식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군요.”

“피로회복제나 자양강장제 같은 거라면 좀 만들어볼게요.”

“그거라도 부탁드리겠습니다.”

할 일이 많은 건지 바이스는 방문 앞까지 찾아온 이들을 돌려보내지 않고 복도를 걸어갔다.

남은 세 사람은 카이엔의 방문을 힐끗거렸다. 들어가도 될까, 들어가면 카이엔이 뭐라고 할까.

한참을 고민한 끝에 셋 다 별채로 돌아가기로 했다.

“왕자님 불쌍해. 이제 별일 없을 텐데.”

“훈련을 하는 건 좋지만 맨날 저런 비명이 들릴 텐데, 좋지 않군.”

“저희가 더 강해지는 것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닌가 봐요.”

“…하긴. 우리는 별 도움이 못 됐으니까.”

“나도.”

세 사람은 거의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지금까지 카이엔에게 검을 들게 하지 않았던 바이스가 훈련을 시키겠다고 굴려대는 거로 봐선, 바이스에게 있어서도 이번 일이 충격이었기 때문일 거다.

그게 아니라면 그가 카이엔이 직접 싸울 것을 염려해 훈련을 시키진 않았을 테니까.

앞으로 계속될 카이엔의 고생길을 염려하며 세 명은 별채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모두에게 이번 일에 대해 어떻게 전해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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