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카이엔이 휘두른 검은 크라일라에게 위협적이었다.
다른 이들의 공격은 그저 받아넘기면 그만이었지만 ‘안식’은 철저히 그의 몸을 망가뜨렸다.
덕분에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소극적으로 공격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카이엔에게 조금 놀란 상태였다.
지금까지 그는 이 정도로 그에게 달려드는 상대를 만난 적이 없었다.
물론 그가 벌인 사건들로 인해 분노로 핏대를 세우며 달려드는 놈들은 꽤 많았지만 그의 주먹 한 방에 나동그라졌으니까.
쉽게 굴복하지 않던 놈들도 제가 죽어가는 걸 알면 언제 그랬냐는 듯 태도를 바꾸며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했다. 하지만 카이엔은, 처음엔 눈부터 죽어가나 했더니만 실낱같은 희망 하나 발견했다고 미친 것처럼 그를 죽이려 달려들었다.
발이 붙잡혀서 못 움직인다고 제 발을 잘라내려고 했던 놈이 좋다고 따르는 주인다웠다.
그는 압도적인 강자였다.
힘을 얻기 전에도 신분은 비천했을지언정 무언가를 잡아먹는 쪽이었지 먹히는 쪽은 아니었다.
궁지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를 문다고 했던가. 그는 카이엔을 딱 그 정도로 보고 있었다.
“헉… 헉…”
“이쯤에서 포기하지 그래? 편하게 죽여줄게.”
“그럴 수 있을 리가, 있냐!!”
카이엔은 검을 두고 주먹을 휘둘렀지만 크라일라는 손쉽게 막아냈다.
그 손을 뿌리치고 카이엔은 계속 주먹을 날리고 공격은 턱턱 쉽게도 막혔다.
하지만 점점, 그 주먹을 막아낸 크라일라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가 의아함을 느낄 틈도 주지 않고, 카이엔이 날린 주먹이 그의 턱에 꽂혔다.
“컥!”
- 그래. 그것이 신성력으로 인한 신체 강화다.
“허억… 헉…”
- 나는 네게, 네가 여러모로 쓸 수 있는 힘을 주었으니 해 보거라.
알아. 안다고. 그런데 몸이 안 따라주는 걸 어떻게 하냐.
카이엔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운동 좀 하라는 바이스의 말을 좀 더 귀담아들을 걸 그랬다. 카이엔은 다시 검을 잡았고 크라일라도 맞서려고 했지만 힘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젠장!’
얼굴을 맞고 말았다.
카이엔이 받은 힘, ‘안식’ 때문에 파멸의 힘이 온몸에 들어차 있는 머리가 말을 듣지 않는 것이다.
안식이 파멸의 힘을 파먹고 있었다.
입안을 깨물어 씹으면서 크라일라는 그의 목을 노리고 날아오는 검을 손으로 막았다. 검에 일렁이는 신성력이 또다시 그의 신체에 피해를 주었다.
조금만 더.
카이엔은 그렇게 생각했다.
금방이라도 손에 힘이 풀려서 검을 놓칠 것 같았다. 하지만 검을 놓치면 어떻게 신성력을 써야 할지 몰라서 그는 억지로 검을 붙잡고 놓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자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크라일라에게서 풍기는 살기가 점점 살벌해져서 저절로 목이 탔다.
그는, 멈추지 않았다.
단둘 만이 남아있었다. 둘 중 하나의 숨이 끊어지는 거로 이 망할 대리전이 종료된다.
쓰러진 이들을 치료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카이엔은 검을 휘둘렀다. 서툰 손놀림에 이미 손바닥이 까질 대로 까지고 물집이 잡혔지만 신성력이 제멋대로 치료해서 몇 번이고 상처가 났다가 치료되는 게 반복되었다.
그가 휘두른 검이 크라일라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검을 피해 몸을 숙이면서 크라일라가 카이엔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밀려나면서도 카이엔은 넘어지지 않고 버티고 섰고 그대로 아래로 향해 검을 찔러넣었다.
제 등을 향해 내리찍어지는 검 끝을 손으로 밀어내며 크라일라가 다른 팔로 카이엔의 팔을 붙잡으려고 했다. 그것을 피하며 카이엔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파멸’로 스러지는 것과 ‘안식’으로 부서지는 것이 한데 섞인 가루가 바람에 흩날렸다.
한 줄기 바람이 그대로 그들을 스쳐 지나간 순간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움직였다.
각자의 손에 들린 검이 움직였다.
크라일라의 검은 카이엔의 옆구리를 찔렀고 카이엔의 검은, 크라일라의 심장을 관통했다.
“크헉…!”
카이엔의 검의 경로는 충분히 읽어낼 수 있었다. 피할 수 있고 피해서 공격하려고 했었다.
크라일라가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바닥에 엎드린 채 이곳을 응시하고 있는 자가 있었다.
헝클어진 푸른색 머리카락 틈으로 잔잔한 푸른 눈동자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친놈…”
바이스는 손에 돌멩이를 쥐고 있었다. 바닥에 널리고 깔린 자갈이며 돌멩이였다.
그런데 저놈이, 저 소드마스터 놈이.
돌을 던져서 그의 검이 빗나가게 했다.
한탄하듯 중얼거리고 크라일라는 무릎을 꺾었다.
몸을 움직이기도 힘들 텐데 정확히 조준해서 돌을 던진 저놈의 행동은 감탄을 넘어서 경악을 불러왔다.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은 채 그는 힘없이 쓰러졌다.
카이엔이 알고 검을 휘두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안식의 힘을 담은 검은 정확히, 그의 심장을 찌르고 말았다.
터지진 않았지만 곧 안식의 힘으로 인해 멈출 게 뻔했다.
바닥에 쓰러져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검은색 머리카락의 왕자를 보고 그가 입을 열었다.
“하…하하, 잘됐네. 이겨서.”
“너는, 왜 파멸 따위의 힘을 받은 거지?”
“모든 것을 없애버리고 싶어서.”
마지막 기운을 짜내어 그가 대답했다. 눈동자에는, 여전히 광기가 서려 있었다.
아무 감정 없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카이엔이 다시 한 번 물었다.
“모두 부수고 없애고 나면, 뭐가 남지?”
“아무것도.”
크라일라는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나 자신마저도, 없어지는 거지.”
“…편하게 가라.”
두 힘이 상충하면서 고통스러울테니까.
카이엔은 그대로 크라일라의 몸에 박혀있는 검의 손잡이를 잡고 안식의 힘을 쏟아부었다. 그것이 파멸을 모조리 몰아내어 씻겨나갈 수 있도록.
그 모습에 크라일라는 헛웃음을 지었다.
“한심한, 짓을… 어차피 부질없는 짓인데.”
이상하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안식이라더니 평온한 죽음을 안겨주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굉장히 잔잔하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떨리던 눈동자가 서서히 감겨들었다. 숨이 끊어진 순간, 그의 몸에 불꽃이 일어났고 순식간에 그의 몸을 뒤덮은 불꽃이 사라졌을 때, 그곳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수고했다. 이 뒤는 내가 할 일, 너는 돌아가거라.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카이엔도 비틀거렸지만 검에 몸을 지탱해서 버텼다. 검을 지팡이 삼아 짚어가면서 비틀비틀 바이스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고 일으켜주었다.
“어떻게, 해낸 모양이군요.”
“어쩌다 보니까. 다리는 좀 어때?”
“재활 훈련을 하면 낫겠죠.”
“어휴.”
지금 괜찮냐고 물어본 건데. 한숨을 쉬면서 카이엔은 바이스의 상처를 살폈다.
피는 굳어있었지만 눈에 띄는 상처였다. 손가락을 찔러넣으면 그대로 들어갈 것 같다면서 몸을 떨고 카이엔은 그 위를 얼른 손으로 덮었다.
소금이를 치유했을 때를 떠올리면서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그 감각을 느낀 건지 바이스가 움찔거리며 카이엔을 바라보았다.
“…왕자님?”
“가만히 있어. 얼마 못 갈 힘이야. 그래서, 다 낫게 하진 못해…”
구멍 뚫린 허벅지랑 발은 어떻게 해줘야 할 것 같긴 한데. 카이엔은 말끝을 흐렸다.
바이스 말고도 낫게 해줘야 할 사람은 많았다.
몸에 달라붙은 파멸의 힘은 사라지겠지만 그로 인해 망가진 부분은 사라지지 않았으니, 일단 남은 잔재부터 없애고 그 뒤 상처 치료를 하기로 했다.
바이스의 치료를 우선시한 다음 카이엔은 비틀거리면서 다른 이들에게 갔다.
비셰는 괜찮다고 했기에 프라우디에, 자네인, 라스, 엔베인의 치료를 해주고 마지막으로 소금이에게 다가갔다. 그의 외투 위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소금이를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톡톡 건드리니 잠꼬대를 했다.
그제야, 카이엔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모두를 향해 몸을 돌리며 그가 말했다.
“…돌아가자.”
“이제 끝났어.”
***
저택에 돌아온 카이엔이 보게된 건, 물로 엉망진창이 된 저택 정원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건지 물어보니 검은 불꽃을 끄려고 슬로세이와 이노스가 합심해서 물을 끌어다가 퍼부은 결과라고 했다.
이노스는 다른 이들보다 늦게 상황에 대해 알게 되 영주성으로 향했지만 이미 다른 이들은 다 가버린 뒤였고 슬로세이랑 그리델라가 불부터 끄자고 해서 그쪽으로 투입된 것이었다.
물론, 물을 붓는다고 해서 불이 꺼지진 않았다.
이것저것 시도를 해보느라 땅도 파헤쳐지고 바닥은 진흙투성이가 되었다는 말에 카이엔은 말없이 슬로세이와 이노스를 보았다.
밤새 불을 껐을 두 사람은 굉장히 초췌했고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안 다쳤으면 됐어.”
“왕자님…”
“카이엔~”
우는 소리를 내면서 두 사람은 카이엔에게 달라붙었다.
떼어낼 힘도 없다며 카이엔은 연신 한숨을 쉬었다.
그가 크라일라를 쓰러뜨리면서 그가 남겨놓고 간 파멸의 불꽃 역시 사라져서 이 문제는 대충 일단락된 것 같았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글러티나.”
“걱정했어.”
“너 쉬긴 한 거야? 이쪽으로 와봐.”
글러티나 역시 파멸에 파먹힌 흔적이 있었기에 카이엔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짚고 신성력을 조금 흘려보냈다.
이질적인 힘에 글러티나의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설명할 힘도 없었으므로 카이엔은 웃음으로 얼버무리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너나 할 것 없이 엉망이 된 이들을 보고 영주성 사람들은 급하게 저택의 문을 열어주었다.
“다들 돌아가서 쉬십시오.”
“으음…”
“네.”
“너도 가서 쉬어.”
“왕자님 곁을 지켜야죠.”
“너도 가.”
“안 갑니다.”
너도 다쳤으니 가서 쉬라고 말해도 바이스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다만 그 역시 지친 건 마찬가지인지라 카이엔이 갈아입을 옷과 목욕 시중을 글라스에게 부탁했고 카이엔이 침대에 눕는 것까지 보고 돌아가려고 했다.
“…가서 쉴 거지?”
“네. 쉴 테니까 왕자님도 안심하고 주무세요.”
“진짜 쉴 거지?”
“네.”
“…진짜?”
“하하.”
카이엔의 끝없는 질문에 바이스는 카이엔이 덮고 있는 이불을 끌어 올려 그의 머리끝까지 덮어주고 방에서 나갔다. 카이엔의 앞에선 웃고 있는 그였지만 문밖으로 나오는 순간 표정이 바뀌었다.
싸늘한 눈으로 제 손을 바라보며 그는 긴 숨을 내쉬었다.
‘한심한 꼴을 보였군.’
더 강해져야 한다.
하지만 카이엔이 당부한 대로 일단은 휴식을 취하기로 하고 바이스는 방으로 향했다.
상처도 확인해야 했고 그로 인해 차질이 있을지 모를 일정 또한 정비해야 했다.
그러고 보면 밤새 적과 싸우고 해가 뜬 뒤에야 돌아왔다.
멍한 눈으로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다가 카이엔은 잠들었다.
몸이 피곤하니 눈을 감으니까 저절로 잠이 든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꿈속에서 익숙한 얼굴들을 보았다.
앙그라 마이뉴와 루키푸게. 검은 머리카락에 키도 비슷해서 잘못 보면 남매로 오해할 수도 있는 두 명을 보고 카이엔은 인상부터 찌푸렸다.
“또 무슨 일-”
“미안! 진짜 미안해!”
“미안하다는 건 아나 보네.”
퉁명스럽게 카이엔이 대꾸했다.
그는 사기를 당한 거였다.
몬스터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능력은 루키푸게가 어린 그를 불쌍히 여겨서 그냥 선물로 준거였고 대리전에 참가하게 된 이유는 루키푸게가 접근한 전적이 있기에 앙그라 마이뉴가 대리인으로 선택해서였다.
그들 사이에 무슨 약속이 오간 것도 아닌데 어떻게 대리인으로 선택될 수 있었던 건지. 묻고 싶은 게 산더미였지만 이미 다 끝난 일이었기에 카이엔은 한숨을 쉬었다.
“아 됐고, 그래서 이젠 어떻게 하면 됩니까?”
“넌 그냥 살던 대로 살면 돼.”
“힘은? 이거 언제 사라지는 건데?”
“아아, 그거? 거둬가도 되긴 하는데 필요하면 그대로 둘 수도 있어.”
“맞아. 넌 어떻게 생각하지?”
“없어도 그만인데.”
카이엔의 반응은 뚱했다.
신성력이라는건 겉으로 들어서는 참 좋았다. 문제는 이게 마신의 사제인 마교황 앙그라 마이뉴가 그에게 줬다는 것이었다.
천신의 사제들이 이단이라고 그를 잡아가려고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다시 가져가라고 던져주기엔, 다른 이들의 상처가 걱정되었다.
‘바이스 녀석 정말 괜찮으려나…’
라스도 많이 다치긴 했지만 바이스처럼 관통상을 입진 않아서 치유하니 큰 상처는 금세 아물었다. 바이스의 다리에 났던 구멍을 떠올리며 카이엔은 몸을 떨었다.
바이스의 상처가 다 나은 뒤라면 모를까, 지금 이 신성력을 다시 넘기고 싶진 않았다.
그 모습에 앙그라 마이뉴는 피식 웃었다.
“그냥 가지거라. 성국의 신성 기사들이 힘을 쓰는 걸 참고하면 수련이 될 거다.”
“마신이랑 연관되어있다면서? 사제들이 날 죽이려 들 것 같은데.”
“그렇게 되진 않을 거다.”
묘하게 확신에 찬 어조였다. 카이엔은 고개를 기울였고 앙그라 마이뉴가 보충 설명을 해주었다.
“너를, 최초의 인간 사제로 임명하겠다. 마신을 모시는 거지. 흠, 내가 마계의 마교황이니 너는 인간계의 마교황이 되는 건 어떠느냐?”
“윽, 절대 안 해.”
“맘대로 하거라. 치유 능력 같은 건 있어서 나쁠게 없으니. 다만 인간은 천신의 보살핌을 받으니 그리 뛰어난 효과는 못 볼거다.”
이종족은 괜찮다는 건가?
아무튼 준다니까 거절하지는 않겠다며 카이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당신이 마왕인 건가?”
“그렇지. 제정일치라는 거다. 얼마 못 가겠지만.”
“설마, 몇 년 뒤에 또 이런 정신 나간 짓을 해야 한다는 거?”
“걱정 말거라. 적어도 666년은 내가 버티고 있을 테니.”
“구체적인 숫자라 더 무서운데.”
전 마왕은 왜 그런 미친 짓을 한 걸까. 덕분에 고생만 실컷 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앙그라 마이뉴는 천천히 다가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생했다.”
“…알아.”
“이젠 괜찮을 거다.”
“그래야지.”
“그래, 혹시 소원이 있느냐? 원래 계약을 맺을 땐 소원을 이뤄주기로 되어있으니까.”
“필요 없어. 더이상 휘말리는 건 사양이야.”
“괜찮은데. 혹시라도 생긴다면 말해라.”
“그럼 잘 자-”
꿈속에 나타났던 그들인지라, 카이엔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남기고 사라졌다.
짧은 대화였다.
꿈에서 깨어난 카이엔은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이불 밖으로 나와 창문의 커튼을 열어보았다. 벌써 바깥이 어두운 게, 저녁이 된 모양이었다.
소금이가 잘 자고 있는지 확인한 그는 방 밖으로 나왔다.
그리 늦은 시간은 아니어서인지 아래로 내려갈수록 어쩐지 시끌벅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