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찌익-!!”
- 크헉!!
“응?”
난데없이 카이엔의 외투 주머니에서 쥐가 튀어나오자 크라일라의 눈이 동그래졌다.
게다가 그 쥐가 튀어나오기만 한 게 아니라 정확히, 그의 공격을 맞고 바닥에 톡 떨어지자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놀랐다.
멍하니 정면을 바라보고 있던 카이엔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바닥에, 소금이가 있었다.
바닥에 쓰러진 소금이의 몸에는 큰 상처가 있었다.
거의 몸이 두 동강 날 정도로 깊은 상처. 소금이의 목소리가 그의 귀에 울려 퍼졌다.
- 멍청한 놈… 뭘 가만히 보고만 있는 거야! 도망을 치던! 맞서 싸우든 해야지!!
“소금이 너…”
- 이 정도쯤은… 상처 축에도 못 낀다. 이 몸을 뭐로 보고!
다른 이의 귀에는 찍찍하는 소리나 들리면 다행일 정도였다.
하나 카이엔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큰 목소리였다.
카이엔은 덜덜 떨면서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심한 상처를 입은 소금이는, 그대로 들어 올렸다간 죽어버릴 것만 같아서 쉽게 손을 댈 수 없었다.
소금이는 계속 찍찍거리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 나도 다 보고 들었다. 저놈들이 뭔 말을 하는지는 몰라! 그렇지만 눈을 보면 안다!
- 네가 대장이잖아! 약하고 힘도 없는 주제에 왕자니 뭐니 하지만 그래도! 모두의 노력을 헛되게 하지 마!
- 너도 할 수 있어. 난 알고 있다…
동그랗고 작은 눈을 굴리면서 햄스터 몬스터는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다.
카이엔의 어린 시절부터 그가 성장해 지금에 다다른 모습을.
혼자 갈 수 없는 곳은 다른 몬스터 동료들에게 부탁해서 보러 가기도 했다. 주로 페이리가 많이 도와줬었다.
비록 그들 사이에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마음은 통했다. 소금이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작은 고개를 들어 카이엔을 바라보며 소금이는 말을 이어나갔다.
- 넌,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대단한 놈이야… 그리고 그건, 위대한 이 몸 말고 다른 녀석들도 모두 알고 있고…
“찌이이이…”
- 그러니까 마음 약해지지 말란 거야…
“뭐래, 쥐새끼가. 시끄럽게 계속 찍찍대고.”
저벅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크라일라가 소금이를 밟으려는 듯 발을 들어 올리자 카이엔은 다급히 엎드려서 소금이를 보호했다.
고개를 숙이고, 양팔로 앞을 감싸고 몸을 숙였다.
등이며 머리가 쉴 새 없이 밟혔지만 카이엔은 계속 그대로 버텼다. 소금이는 계속 그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그 목소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카이엔은 억지로 눈물을 참았다.
“허? 그 쥐새끼가 뭐길래? 뭐, 그놈 덕분에 네가 좀 더 살아있을 수 있게 되기는 했다. 그치?”
“찌이이…”
- 울지마라, 연약한 놈아…
“으…”
카이엔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소금이가.
이 작은 소금이가 그를 지키기 위해 몸을 던졌다.
그 결과로 몸이 두 동강 날 정도로 깊은 상처를 입었는데 기절하기는커녕 그를 격려해주고 있었다.
‘나는…’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어떻게 해야 널 구할 수 있을까. 모두를 지킬 수 있을까.
카이엔은 이를 악물었다. 잘 열리지 않는 입술을 열어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줘.”
“…도와줘. 힘이 필요해.”
“응?”
“앙그라 마이뉴-!! 약속을, 약속을 지켜!!”
힘이 필요하면 내 이름을 부르거라.
그 외침은 비명도 같았다. 그리고…
“드디어 나를 찾는구나.”
화려한 의자에 앉아서 다리를 꼬고 앉아,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긴 흑발과 몸을 감싼 얇은 천 자락이 그녀의 움직임에 맞춰 팔랑거렸다.
“내가 너에게 줄 힘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같지만 음, 지금 이 상황에선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힘이로다.”
날이 저문 지 오래였다. 오히려, 곧 해가 뜰 시간이었다.
그런 밤의 어둠을 가르고, 하얀 번개가 내리쳤다.
쿠르릉-!!
굉음과 함께 번쩍이는 빛.
크라일라는 벼락에 맞지 않게 뒤로 물러났고 카이엔은 번쩍이는 하얀 빛 속에서 앙그라 마이뉴의 목소리를 들었다.
- 겨우, 나를 불렀구나.
“…힘이, 필요해.”
- 안다.
“하지만 어떻게…”
- 그야, 넌 아직 아무 힘도 받지 않았으니 괜찮단다.
“응?”
그 말에 카이엔이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그런 그에게 앙그라 마이뉴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 루키푸게가 너에게 준 건 단순히 선물, 그런 너를 눈여겨보고 내 계약자로 삼기로 한 것이 나다. 너는 내게 아무것도 받지 못했어.
- 나는 마계에 단 하나뿐인, 마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최고 사제, 마교황 앙그라 마이뉴. 그런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힘은 단 한 가지.
- ‘안식’. 신의 품 안에서 모든 생명이 안식을 얻을 것이며, 또한 그 힘으로 천신이 보듬지 못한 모든 생명이 치유 받을 수 있다.
- 너라면, 분명히 잘 쓸 수 있겠지. 오러에도 마나에도 눈을 뜨지 않은 너이기에, 신성력이 보다 잘 스며들 것이다.
그런 거였나. 그래서, 다른 놈들에 비하면 내가 형편없이 약했던 걸까.
루키푸게도 앙그라도 그저 그를 이용한 것뿐이었지만 지금은 그들을 원망할 때가 아니었다.
어찌 됐든 그는 힘이 필요한 순간 힘을 받았고 드디어 싸울 수 있게 되었다.
카이엔은 서서히 눈을 떴다. 어느새 서서히 밝아오려는 하늘을 응시하고 발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소금이.
작게 몸을 떨고 있지만 곧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런 소금이를, 그는 조심스럽게 양손으로 들어 올렸다.
앙그라 마이뉴가 그에게 준 힘이 있었다.
마신의 사제가 하사한 능력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따스하고 밝은 빛이 그의 손에 맴돌았다.
소금이의 벌어진 상처가 점점 아물더니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직 핏자국이 조금 남아있긴 했지만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깊은 상처가 순식간에 치유되었다.
카이엔은 고개를 숙이고 귀를 기울였다.
새액- 색-
콩- 콩-
작은 숨소리와 함께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그는 안도했다.
“…뭐야. 이제야 각성했다던가, 그런 거야? 쥐새끼의 희생같은 걸로?”
크라일라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런 그를 무시하고 카이엔은 조심스럽게 외투를 벗어서 접어두고 그 위에 소금이를 올려두었다.
정신을 잃은 소금이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주고 그가 말했다.
“각성, 까진 아니지. 이제야 힘을 받은 거니까.”
“하?”
“따지고 싶은 게 많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니 나중에 하도록 하고… 일단, 너를 치워둬야겠지.”
“할 수 있으면 해보던가.”
명백한 도발이었다.
하나 먼저 움직인 건 카이엔이 아니라 크라일라였다.
그는 제힘으로 만든 검을 휘둘렀다. 앙그라 마이뉴에게 힘을 전해 받은 카이엔은, 그 본질을 알 수 있었다.
굉장히 파괴적인 힘이었다. 그러나 그는 가만히 그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검은 불꽃이 사그라들고 불꽃으로 만들어진 검이 순식간에 녹아 없어졌다.
처음 겪은 일에 크라일라의 표정이 당혹으로 물들었고 반대로 카이엔은 입술을 비틀었다.
“아무래도.”
“너랑 나는 상성이 안 맞나보네?”
***
카이엔은 약했다.
어렸을 적에 검을 배우긴 했지만 그저 제 몸을 지키는 용도 이상이 되진 못했다.
그마저도 바이스가 나중에 호위 기사를 구하면 되니까 너무 몰두하지 말라고 말렸었다. 검을 배우다가 팔이 부러진 탓이었다.
그의 팔을 부러뜨린 기사는 어느새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는데 아마 바이스가 치워버리지 않았을까, 싶었다.
마법에도 재능이 없었다.
마력을 느끼지도 못하고 마법사와 연도 없었다.
만약 그가 재능이 있었다면 티아마티스는 이노스를 데려간 것처럼 그에게도 한 마디 조언 정도는 해줬겠지.
신앙심도 없었다.
신전에 다닌 적도 없고 오히려 사람들이 죽이려 들고 혐오하는 몬스터와 이종족과 교류하는데 무슨 신앙심이 있겠는가.
그런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된 거람.’
그를 선택한 악마는 마신의 사제였고 그에게 전해준 힘은 신성력이었다.
크라일라의 힘인 파멸이 모든 것을 파괴하고 없애버리고 죽여버리는 것과는 달리 신성력은 치유를 했으며 파멸을 상쇄했다.
상성을 따지면 안식 쪽이 우위였다.
하나 그와는 별개로 그의 체력이 따라주지 않을 것만 같아서 속전속결로 해치워야 했다.
‘그런데 이 힘을 어떻게 쓰지? 안식이라면서?’
- 응용력이 형편없구나.
“엥?”
- 네가 자비를 베풀어야 할 대상에게는 평온함을, 너의 적에겐 죽음을 안겨주거라.
“아니 그게 무슨 안식이야…”
죽음이 네놈에게 베풀 수 있는 최고의 자비이자 안식이 될 것이다, 뭐 이런 건가.
역시 마신 사제라 살벌한 면이 있다며 카이엔은 몸을 떨었다.
‘그런데 이거 직접적으로 사용법을 알려줘도 돼? 규칙은 안 정해놓은 거야?’
- 너와 내 관계가 다른 악마들에게 들킬까 봐 너무 거리를 뒀던 거야. 이젠 괜찮다.
‘으음… 내가 엄청 치사해지는데.’
저놈은 한 명인데 그들은 떼거리로 덤볐고.
아마 상대편 악마는 분해서 죽으려고 하지 않을까, 싶은데 앙그라는 담담히 말했다.
- 아마, 바알도 지금쯤 저 녀석과 소통하고 있을 거다. 이게 마지막이니까.
- 네가 진다면 네가 죽은 뒤 여기 있는 녀석들도 모두 죽는다. 그리고 저놈이 이 세계를 멸망시킬 거다.
절대 질 수 없었다.
앙그라의 말대로 크라일라 역시 바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쇳소리 같은 목소리가 크라일라의 머릿속으로 직접적으로 전달되었다.
- 저 녀석, 용케도 지금까지 감추고 있었군.
“어? 내가 불리한 거?”
- 마신의 사제가 줄 수 있는 힘이니 한정적이지만 네게는 불리하지. 완전히 상극이야.
“와.”
- 감탄할 때가 아니다!
“죽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크라일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어차피, 이게 마지막 일 거 아냐?”
먼저 움직인 건 크라일라였다.
카이엔은 앙그라 마이뉴가 알려주는 대로 힘을 움직여보다가 크라일라가 움직이자 깜짝 놀라서 일단 앞을 막아섰다.
검은 불꽃이 창의 형상으로 변해 카이엔을 향해 달려들었다.
피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가 피했다간 다른 이들이 휘말릴까 봐 카이엔은 얼른 두 팔을 앞으로 뻗어서 막으려고 했다. 그때, 그의 발밑에 검이 한 자루 날아와 박혔다.
쓰러져있던 바이스가 몸을 반쯤 들고 자기가 갖고 있던 검을 던진 것이다.
“없는 것보단 나으실 겁니다.”
“충직한 부하네.”
“부하는 무슨… 저놈은 남의 아래에 있을 인물이 아니야.”
카이엔은 검을 집어 들었다.
검술에 재능은 없지만 아예 못하는 건 아니었다. 이전에 제국에 갔을 때도, 바이스가 조금 알려주기도 했고.
무기를 들지 않은 것보단 잘 못 쓰더라도 드는 게 낫다며 카이엔은 바이스가 검에 오러를 덧입혔던 것처럼 신성력을 일으켰다.
채앵!
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크라일라는 파멸의 힘으로 만든 검을 휘둘렀고 카이엔은 일반 철검에 오러처럼 신성력을 둘렀다.
서로 반대되는 힘이다 보니 상쇄가 된다고 해도 타격을 아예 입지 않는 건 아니었다.
크라일라의 검에 닿는 카이엔의 몸이 검게 그을리고 죽어갔다. 반면 카이엔의 검에 닿은 크라일라의 몸은 산산이 부서져 갔다.
서툰 검술로 맞서는 카이엔은 아슬아슬하게 크라일라의 공격을 방어했다. 그럴 때마다 귓가에 앙그라 마이뉴가 한숨을 쉬는 소리가 생생했다.
좀 더 신성력을 두르라는 조언에 카이엔은 좀 더 힘을 끌어냈다. 소금이를 치유했을 때를 떠올리니 보다 수월하게 신성력을 끌어낼 수 있었다.
크라일라의 검이 카이엔의 어깨를 찔렀다. 팔이 잘려도 순간이면 붙일 수 있다는 앙그라의 외침에 카이엔은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어깨에 검이 박혀있건 말건, 치유하면 나을 수 있으니 억지로 손을 움직였다.
내내 위축돼있던 카이엔이 그런 행동을 할 거라고 여기지 않았기에 크라일라는 손쉽게 복부를 내주었다.
카이엔의 검이 그의 복부를 관통했지만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뭐야, 왜 안 죽어?”
그 눈이 점점 광기에 물들어갔다.
지금까지 그의 손에 닿는 모든 것이 모조리 바스러지고 아무리 강한 자도 쉽게 쓰러졌건만, 카이엔은 뒤늦게 힘을 얻어서 적응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그에게 맞서고 있었다.
쉽게 안 죽으니 좀 더 재미가 있긴 했지만 계속 그러는 것도 슬슬 질린다며 그는 손을 털었다.
“빨리 끝내지? 네 부하들, 계속 놔두면 죽을 텐데 이대로 시간 끌어도 괜찮겠어?”
“나도… 알아!”
파멸은 검은 불꽃이었고 안식은 밝은 빛이었다.
저 불꽃을 뚫어야만 놈의 심장에 닿을 수 있었다.
차분히 그가 쓸 수 있는 신성력의 양을 가늠하며 카이엔은 힘을 모았다.
바이스가 그에게 보여줬던 괴물 같은 움직임을 떠올리며 어설프게나마 따라 하려고 애를 썼다.
치열하게 두 사람이 맞붙었다.
검은 불꽃을 부수는 하얀 빛은 마치 번개처럼 번쩍였다.
힘도 몸의 민첩성도 카이엔이 뒤떨어졌지만 그는 악착같이 달라붙었다. 다들 그를 위해 목숨을 걸었는데, 그가 그의 목숨을 아낄 수 있을 리가 없다.
절대로 죽게 하지 않을 것이고, 얼른 이놈을 쓰러뜨리고 앙그라가 이 힘을 거둬가기 전에 모두를 치료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