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그가 말리기도 전에 루비아의 손이 제 심장을 찔렀다.
헤집고 드러내어 친구들의 심장에 들어있던 것과 같은 보석을 빼냈다.
왈칵왈칵 피가 흘러나왔다. 진짜 인간도 아닌데 참으로 잘 흉내 낸 몸뚱이였다.
텅 빈 눈이 심장에 들어있던 것들을 향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 안에 담긴 강한 마음의 힘이 악마에게 이용당한 것뿐이었다.
쥔 손에 힘을 주자 그것들에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루비아… 안 돼. 죽지 마.”
“죽지 않으면, 당신이 죽어요, 왕자님.”
“즐거웠어요. 고마웠어요. 행복했어요.”
“안녕.”
보석 브로치가 산산이 부서지고 루비아가 쓰러졌다. 연결되어있던, 살아있던 남은 하나마저 숨이 끊어지자 나머지 두 명 또한 그대로 힘없이 쓰러졌다.
이 아이들을 만들어낸 악마가 그를 죽이라고 했고 이 아이들은 그것을 거부했다.
창조주의 명령을 계속 거부할 수는 없었기에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카이엔은 고개를 숙였다.
왜 이 아이들이 죽었어야 했을까. 그 악마가 죽었다면 이 아이들은 살 수 있지 않았을까.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런 그를 죽이지 못해 루비아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런 걸 바라고 그 아이들을 곁에 둔 게 아니었다.
그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비틀거린 게 아니었다. 누군가가 그를 뒤로 집어 던진 탓이었다.
“왕자님, 정신 차리세요!”
뒤늦게 도착한 라스와 엔베인이었다.
다른 이들보다 저택에 늦게 도착한 네 명 중 그리델라와 슬로세이는 저택에 남은 불을 끄기로 하고 두 사람만 먼저 온 것이다.
참담한 카이엔의 얼굴과 쓰러진 마법 소녀들을 보고 엔베인은 고개를 숙였다.
“저 애들은…”
“…죽어버렸어. 악마가, 자기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저 애들에게 마구 강요해댔을 테니까.”
계속 보고 있기 괴로워 카이엔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기에 엔베인은 마검을 손에 들었고 라스는 수인화를 했다.
현재 적과 맞서 싸우고 있는 것은 바이스였다. 프라우디에는 뒤에서 마법으로 적의 발밑을 견제하고 있었지만 잘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자네인에게 기대있는 그 상태가 나빠 보였기에 두 사람은 그들이 오기 전에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했다.
“걱정 마세요. 저희가 해결할게요.”
“멍하니 한눈팔고 계시지 마시고 피해있으세요.”
“…나는, 언제까지 너희에게 보호만 받아야 하는 걸까.”
내가 너희를 그늘에 두고 잘 보살펴줘야 하는데. 잘 지내도록 도와줘야 하는데.
정작 중요한 순간이 되면, 그는 늘 방해만 되었다.
라스와 엔베인이 도착했고 싸움에 끼어들 타이밍을 기다리는 것을 눈치챈 바이스가 뒤로 빠지고 두 사람이 청년을 향해 달려갔다. 카이엔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고 프라우디에와 자네인에게 다가갔다.
마법 소녀들을 향해 날아가던 창을 다 막아낸 자네인은 용의 모습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바꾸고 바이스가 싸우는데 방해되지 않게 물러난 상태였다.
프라우디에와 마찬가지로 피부에 검은 얼룩 같은 것이 생긴 그녀는 카이엔을 보고 힘없이 웃었다.
“무리하지 마.”
“괜찮아요.”
“검을, 바이스가 가져가 버렸나. 미안하다.”
“아뇨. 대신 다른걸 주고 갔어요.”
일반 철검이었다.
자네인은 차분히 카이엔에게 적의 공격에 대해 말해주었다.
직접 맞아봤기에, 하나도 아니고 수십 개나 되는 창을 맞았기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그녀는 버티고 있었다. 보통 인간이었다면 즉사했겠지만 그녀는 인간이 아닌, 티아마티스의 피를 받은 독룡이었으니까.
“창에 찔렸지만 상처는 없습니다. 다만, 창이 꽂힌 자리에서부터 죽음의 기운이 밀려오는군요.”
“제 능력과도 다른 힘이에요, 왕자님.”
“그러니 부디 조심하세요.”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너희 몸 걱정이나 해.”
프라우디에는 어느새 정신을 차린 모양이지만 몸을 움직이는 게 힘들어 보였다.
모두, 그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적은 손쉽게 해치울 수 있었지만 이번 녀석은 달랐다. 여러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어도 승패를 가릴 수가 없었다.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거대한 늑대로 변신한 라스가 내는 소리였다.
적인 청년 역시 어느 틈에 검을 만들어낸 건지, 라스의 가슴팍에서 긴 상처와 함께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청년은 머리가 산발이 되어서 웃고, 외치고 있었다. 즐거워하고 있었다.
“자기가 죽을 줄도 모르고 덤비는 꼴이라니! 그래, 너희만 없으면 좀 더 수월하게 모든 것을 없앨 수 있겠구나!!”
피가 흩뿌려진다. 아군의, 동료의 피다.
적은 건재하고 치명타조차 입힐 수 없었다.
나는, 가만히 보고만 있어야 하는 건가?
카이엔은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일순간 청년이 비틀거렸다. 한쪽 눈을 손으로 가리고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카이엔은 황급히 비셰를 찾았다. 비셰는 살짝 인상을 쓴 채로 청년을 노려보고 있었다. 엔베인과 라스를 도우려고 나선 것이었다.
하나, 소용없었다.
“…환상 따위.”
“이익…”
“허상이니, 두렵지도 슬프지도 않구나.”
손쉽게 환상을 깨버린 그는 검을 휘둘렀다. 엔베인이 마검으로 가로막았다. 마검은, 평범한 검과는 달리 죽음의 기운이 얽힌 검에도 잘 저항하고 있었다.
청년이 환상에서 벗어나자 비셰는 머리를 붙잡고 뒤로 나동그라졌다.
“으으, 바이스 씨 이후로 이렇게 안 통하는 사람은 처음이야…”
“괜찮으세요?”
“저 인간 이상해요!”
프라우디에의 걱정스러운 말에 비셰가 외쳤다.
비셰는, 다른 몽마들이 하는 것처럼 적의 약점을 찾아내기 위해 상대가 두려워하는 것을 보여줬을 것이다.
그것이 오히려 역린을 건드리기라도 한 건지 청년의 공격이 더욱 거세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맨손에 불꽃을 두르고 쏘아 보내고 공격하던 자가 제힘으로 구성한 검을 들고 휘둘렀다. 예리한 검 끝에 베어 하나둘 상처가 늘어났다. 반면 라스의 손톱도 엔베인의 마검도 청년에게는 별다른 피해를 주지 못했다.
도대체 어떤 힘이길래 상처조차 입힐 수 없는 걸까.
그들로서는, 도저히 막아낼 수 없었다.
바이스의 빈자리를 두 사람이 함께 막아내고 있었지만 한계가 다가왔다. 마검에 금이 가고 있었다. 카이엔이 다급히 외쳤다.
“엔베인, 너도 그만 후퇴해!!”
마검과 엔베인은 한 몸이었기에, 마검이 부서지면 엔베인 역시 죽고 만다.
알면서도 검을 휘둘렀을 미련한 녀석에게 외치자 엔베인은 입술을 깨물면서도 쉽게 뒤로 물러서지 못했다. 그를 대신해 잠시 숨을 돌리고 있던 바이스가 걸어 나왔다.
“다시 교대군요. 이런 적은 처음입니다.”
“질리지도 않나 보네.”
“그래야만 살 수 있는지라.”
지친 기색조차 없는 청년을 향해 바이스는 미소를 지었다.
“저 말고 다른 사람 손에 죽게 둘 수도 없고요.”
“푸하핫!”
“진심입니다만.”
그의 대답에 청년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나 바이스가 진심으로 저런 말을 한다는 건,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미 카이엔 앞에서도 고백했던 사실인지라 카이엔도 떨떠름해 하며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잘 아는 사실이긴 한데 꼭 여기서 저런 말을 해야 하나, 싶어서였다.
“나는 파멸이지만, 네 주인은 무슨 힘을 받았지? 도대체 얼마나 대단하고 하찮은 힘이길래, 아직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하는 거야?”
“그저 돌보는 것뿐입니다.”
“응?”
“왕자님은, 타인과 소통하고 그들을 받아들일 뿐입니다.”
“되게 쓸모없는 힘이네.”
“그렇죠. 하지만-”
바이스의 검과 청년의 검이 맞부딪쳤다. 검은 불꽃과 푸른 오러가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휘감으며 용솟음쳤다.
아직도 힘을 숨기고 있던 소드마스터의 실력에 청년은 혀를 내둘렀다. 온갖 이종족보다 이 인간 하나 상대하는 게 제일 힘들 거란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청년의 검술 실력은 소드마스터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그러나 그 ‘힘’이 문제였다.
아무리 베어도 찔러도 상처도 나지 않으며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으니. 통한다는 걸 눈으로 확인할 길이 없으니 더욱 조급해지고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다.
바이스는, 차분히 적을 상대하기로 했다. 여기서 그가 죽거나 심하게 다치기라도 한다면 카이엔이 분명히 죽고 말테니까.
강한 적.
지금까지 만나본 적이 없는 상대.
그가 힘 조절을 하지 않아도 쉽게 죽지 않을 자.
그런 존재가 앞에 있으니 금방이라도 몸이 먼저 달려 나가려고 했다. 본능이, 본성이, 적을 맘껏 하고 싶은 대로 휘두르고 베고 찢어발기고 싶어 몸부림을 쳤다.
싸움에 정신이 팔려서 좋을 게 없었다. 이성을 붙잡기 위해서라도 그는 억지로 입을 열고 말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이성을 놓고 그저, 짐승이 되려고 하는 그를 붙잡아놓는 데에는 카이엔을 언급하는 게 특효약이었다.
“그것 때문에, 저렇게 많은 사람이 곁에 있으니.”
“완전히 나쁜 것만은 아니죠.”
“오직 단 한 사람만이 섬기는 주인도 좋지만, 여러 사람의 사랑을 받는 주인은 더더욱 좋으니까.”
오직 그 혼자 힘으로만 돌보고 키우려고 했다면 처음부터 외딴곳으로 빼돌렸을 거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현재, 카이엔의 곁에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하나같이 카이엔을 아끼고 있었기에, 그는 그들에게라면 잠시 카이엔을 맡길 수 있다고 여길 정도가 되었다.
바이스의 공격을 막으면서 청년은 불길을 일으켰다. 바이스만을 향한 게 아니라 무차별적으로 주변으로 쏟아냈다.
바이스의 말에 화답하듯 그가 입을 열었다.
“나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기에 가진 자를 부러워하였으나.”
“가진 자는, 자신보다 더 많이 가진 자를 시기하고 질투하니, 차라리 없는 게 더 낫더라.”
“나는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가기를 바랐고, 이런 내게 악마가 준 힘은 모든 것에 마지막을 내리는 힘, 파멸. 이 세상에는 죽음마저도 공평하지 않으니 내가 이 세계의 모든 생명을 한날한시에 모조리 멸하겠다.”
“크라일라. 그것이 나의 이름이지. 그리고 내 소망을 들은 악마는 헛된 소망이라도 비웃으면서도 나에게 바니타스라는 이름을 하나 더 지어주더군. 나 혼자 힘으로는 무리라는 걸 알아. 하지만 이 대리전에서 우승한 자의 악마가 마왕이 된다면 그가 나를 도와줄 수 있겠지.”
그는 환하게 웃었다.
지금까지 그가 지었던 그 어떤 표정보다도 밝고 환한 얼굴이었다.
“너희는 좀 더 일찍 죽게 되겠지만 같이 갈 사람이 많을 테니 외롭진 않을 거야.”
파멸의 힘은 검은 불꽃이며 바람이었고 때로는 창이 되기도 했다. 그가 상상하는 대로 구현하고 발휘되는 힘이었다.
그는 상상력이 없었기에 겨우 이 세 종류로만 만들어낼 수 있었다.
모든 것을 부수고 망가뜨리고 목숨을 앗아가는 힘.
생명 있는 것에 침식하여 갉아먹고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하는 힘.
전염병 마냥 몸에 흔적을 남기며 대상을 공포에 이르게 하며 목을 조르는 힘이었다.
처음에는 오러에 막히던 힘이었다.
하나, 충분히 오러와 맞부딪쳤고 점점 그것을 살라 먹었다.
불꽃이, 오러를, 제 것처럼 불살랐다.
“소용없지.”
오러를 뚫고 나면 그 안의 검은 약하기 그지없었다.
소드마스터의 오러라고 할지라도 크라일라의 파멸 앞에서는 그 힘이 약화했다.
검에 더욱 견고한 오러를 두르고 바이스는 그 앞을 막아섰다. 그 순간, 그의 발밑에서 칼날이 솟아올랐다.
바이스가 피하려고 움직였지만 한쪽 발과 다리가 그대로 관통되었다. 비스듬히 솟아나 발등을 뚫고 허벅지까지 그대로, 꼬챙이에 꽂힌 것 마냥 고정되어버렸다.
“안개처럼 스러질 수도 있지만 형체가 그대로 남아있을 수도 있지.”
그것이 바이스의 다리를 붙잡고 있어서 이후의 공격을 피할 수 없었다.
피할 생각을 버린 건지 바이스는 검을 휘둘렀고 크라일라는 자신이 만들어낸 검으로 그것을 막았다. 그러나, 검의 궤도가 굉장히 이상했다. 그것을 확인한 크라일라가 실소했다.
“뭐야? 방금 꼭 자기 발을 자를 것만 같았는데.”
“어차피 못 쓰게 될 거라면 일찍 잘라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미친놈.”
“당신만큼 미쳤을까.”
눈을 마주치며 대꾸하는 바이스를 향해 크라일라는 그대로 바이스의 머리를 향해 그의 머리를 부딪쳤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이스가 살짝 휘청거리자 그대로 발로 걷어찼다. 바이스의 다리를 꿰뚫었던 칼날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그대로 밀려난 바이스는 잔기침을 하며 적은 피를 토했다.
“쳇…”
쉽지는 않구나.
그는 비틀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몸이 잘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건 다들 마찬가지일 거다.
적의, 크라일라의 힘은 싸우면 싸울수록 그들의 몸에 피해를 주며 움직임을 둔하게 만들고 힘을 빠지게 했다.
마지막까지 주인의 앞을 막아서서 지키고 있어야 하는 게 그였기에, 바이스는 다리를 절면서 걸어갔다.
“…바이스.”
“가만히 계세요.”
그가 오러를 이끌어낼 수 있게 된 지는, 꽤 됐다.
그래서 소드마스터로 불릴 정도의 경지에 다다르긴 했지만 맞서 싸워줄 상대가 없으니 실력이 있어도 녹이 슬 수 밖에.
저놈이 검사라면 검을 부딪치며 그도 성장했겠지만 안타깝게도 검사보단 마법사에 가까웠다.
두 손으로 검을 쥐고 바이스는 크라일라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상처에선, 계속 피가 흘렀다.
카이엔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심하게 다쳤음에도 바이스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크라일라를 향해 덤벼들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목숨을 걸고 있는데, 나는 여기서 뭘 하는 거지?’
그를 지나쳐서 프라우디에가 걸어갔다. 자네인이 뒤따랐다. 라스가 상처를 대충 지혈하고 몸을 일으켰고 엔베인은 마검 대신 다른 검을 손에 들었다.
비셰는, 가만히 그의 옆에 서 있었다. 잘 보니 그보다 조금 더 앞으로 나와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빙긋 웃었다.
“저도 잠깐의 시간 벌이쯤은 될 테니까요.”
“…하지 마.”
“도움이 될 거예요.”
“난 너희에게 해준 게 없는데 왜…”
“없긴요.”
카이엔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비셰가 말했다.
“맘 편히 지낼 수 있는 장소와 가족들을 만들어줬잖아요.”
“다들 외로운 사람들이고, 마음 한구석이 비어있는 사람들이었는데 그걸 당신이 채울 수 있게 해줬어요”
“모두 왕자님을 좋아해요.”
“나는 걸림돌이 될 뿐이야.”
“그렇게 생각했다면 다들 진작에 왕자님을 두고 도망갔을걸요?”
검은 불꽃이 치솟았다. 다들 그것에 휩쓸렸다.
상처에서 피를 흘리면서, 검은 연기를 내뱉으면서 잘 움직이지 않는 몸을 던졌다.
카이엔은 주먹을 꽉 쥐었다.
다치지 마, 힘들어하지 마, 고통스러워하지 마, 죽지 마…
그를 대신해 상처 입는 이들을 볼 때마다, 그는 생각했다.
옆에서 억지로 기합을 내며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비셰가 그의 앞을 향해 달려갔다. 힘없는 주먹인지라 금세 잡히고 내동댕이쳐졌다.
어느새 크라일라는 그의 바로 앞까지 와있었다.
“이제 끝인가?”
그가 미소를 지었다.
“너도 참 대단하다. 저렇게 지켜주려는 사람도 많고.”
흙먼지가 휘날리는 주변에, 쓰러진 이들이 가득했다.
바닥에 떨어진 피와 아직도 타오르는 검은 불꽃들.
모두 상처투성이었다.
카이엔은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눈앞에 크라일라가 있음에도, 그 모습이 눈에 담기지 않았다.
“이제 너만 없애버리면 끝이네.”
“음, 아까 재밌는 걸 봐서 나도 해보고 싶어졌는데.”
그는 그대로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손에 검을 들었다.
“잘 가.”
웃으며 그가 검을 휘둘렀다.
저택 앞에서, 바이스가 그를 막아서기 위해 썼건 기술을 흉내 낸 것이었다.
빠르게 휘두른 검이, 바람이, 공격이 카이엔을 향해 쏘아졌다. 카이엔은 그것을 피하지 못하고 가만히, 그 자리에 선 채 보고만 있었다.
그 순간, 그의 외투 주머니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작고 동그랗고, 하얀 털 뭉치.
지금까지 잠자코 숨어있던, 제 존재감을 숨기고 있던, 그래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던.
소금이.
소금이가 카이엔의 앞으로 뛰어들었고 그 작은 몸뚱이로 크라일라가 휘두른 검격을, 눈대중으로 흉내 낸 것뿐이지만 그 작은 몸뚱이를 베어버리기엔 충분히 예리한 검격을 막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