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프라우디에는 자네인과 함께 축제를 구경하고 있었다.
저녁이 되었음에도 오히려 낮보다 활기찬 느낌이 들었고 곳곳에서 악단이 연주하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물론 악단이며 공연을 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각자 구역을 정하고 일정 거리 떨어져서 제 솜씨를 뽐내고 있었기에 서로의 음악이 섞이면서 괴상한 불협화음을 만들어내진 않았다.
곳곳에 띄워놓은 등불이며 적은 빛을 반사해 주위를 밝히는 광물들을 보며 프라우디에는 웃었다.
“구경할 게 참 많네요.”
“그러게.”
인파에 휩쓸리지 않게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있었다.
상점가의 물건을 구경하기도 하고 간단한 간식거리를 사서 나눠 먹기도 했다.
이런 축제를 구경하는 건 처음이라며 프라우디에가 즐거워했기에 자네인 또한 즐거웠다.
그러던 중 축제라는 말을 듣고 멀리서 왔다는, 열성적으로 손님을 끌어모아 장사를 하는 솜사탕 장수의 기계를 유심히 살피면서 작동 원리를 알아내려고 끙끙거리던 프라우디에가 갑자기 흠칫 몸을 떨며 뒤를 돌아보았다.
“왜 그래?”
“이상한 기운이 느껴져서…”
차분히 프라우디에는 심호흡을 했다.
솜사탕 장수는 양손에 솜사탕을 하나씩 들고 유심히 기계를 살피던 어린아이가 갑자기 주변을 두리번거리니 의아해하며 프라우디에를 바라보았지만 이내 부모님 손을 잡고 온 아이들의 주문에 열심히 솜사탕을 만들었다.
그 사이에 자네인과 함께 뒤로 물러난 프라우디에는 부러운 눈으로 솜사탕을 바라보던 아이에게 솜사탕을 하나 건네주었다.
“잔느.”
“응.”
“저희, 돌아가요. 얼른 저택으로 가야겠어요.”
“그래.”
자네인은 프라우디에게 자세한 사정을 묻지 않았다.
그 즉시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프라우디에의 손을 잡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달려갈 수도 없었고 이대로 걸어간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근처에 있는 적당한 여관을 하나 찾은 그녀는 프라우디에와 함께 여관으로 들어갔다. 시끌벅적한 내부의, 카운터로 향해 그녀가 물었다.
“혹시 지붕 위에 올라갈 수 있을까요?”
“네?”
“급한 일입니다.”
“영주성 분이시죠?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올라가시는 거야 가능하죠. 얘, 세라! 다락방으로 안내 좀 해드릴래?”
“네!”
열심히 주문을 받던 여주인은 딸을 시켜 두 사람을 다락방으로 안내해주었다.
다락방 창문을 통해서 지붕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말에 자네인은 감사 인사를 하고, 옆구리에 프라우디에를 낀 채 창문을 통과해 지붕 위에 올라갔다.
그녀가 왜 건물의 지붕 위에 올라갔는지 눈치채고 프라우디에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겠어요?”
“물론. 급한 거지? 그러니까 빨리 가자.”
여관의 지붕을 밟고 자네인은 높이 뛰어올랐다.
건물들의 지붕을 밟으면서 뛰어가려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단숨에 인간에서 용으로 모습을 변화했고 프라우디에가 그녀의 등 위에 올라탔다.
난데없이 나타난 거대한 용은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누군가가 외친 ‘용이다-!!’ 라는 함성에 모두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우와-”
“용이다!”
“진짜야?”
“와 세상에. 세자르가 특이한 곳이라는 말은 많이 들었는데 용이라니!”
“이벤트인가?”
“이런 축제 처음이야!”
다들 새로운 이벤트 같은 건가 하고 즐거워했다.
웅성거림이, 소란이 퍼졌고 밤하늘을 나는 황금빛 몸체의 용은 모두의 눈에 띄었다.
다른 장소에 있던 이들도 그녀를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마법 소녀들과 슬로세이의 보호자로 축제에 따라간 세 사람도 영주성을 향해 날아가는 자네인을 발견했다.
“저거 자네인 아냐?”
“갑자기 왜…”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우리도 일단 가자.”
자네인이 아무 이유 없이 저럴 리 없다는 걸 알기에, 그들 역시 저택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급한 상황이란 걸 알기에 슬로세이도 구경하다 말고 얼른 가자면서 고개를 끄덕였고 마법 소녀들도 동의했다.
그러나 워낙 사람이 많아 북적이는 통에 속도를 내기가 어려웠다. 그리델라의 경우엔 빗자루를 타고 날 수 있었지만 기껏해야 한 명 밖에 뒤에 태울 수 없었다.
“일단 내가 먼저 날아가서 확인해볼까?”
“혼자 가다가 위험한 일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해. 같이 가자.”
“끄응- 역시 그런가.”
“저기, 좀 지나갈게요!”
다들 용에 한눈이 팔려서 용이 지나가고 난 다음에도 그 자리에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답답함을 느끼면서도 혹시라도 사람들이 다칠까 봐 그들은 조심스럽게 앞을 향해 나갔다. 그 와중에 그들이 영주성 식구들인 걸 알아본 마을 사람들 몇 명이 길을 터주자고 외쳤기에 걸음이 아주 조금 수월해졌다.
그런데 그들이 저택을 향해 가던 도중에, 저 멀리서부터 불기둥이 확 치솟아 올랐다.
깜짝 놀라 그리델라가 외쳤다.
“저게 뭐야! 불이잖아!”
“가봐야겠어요.”
“네, 저희는 날 수 있으니까 먼저 갈게요.”
“무슨 일이 생기면 도와줄 수 있으니까요.”
비행이 가능한 마법 소녀들이 먼저 나섰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두둥실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영주성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남은 건 넷뿐이었는데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어느 정도 사람이 줄어든 길까지 나오자 라스가 말했다.
“한 명씩 업고 가든지 해야겠다. 그리델라, 괜찮지?”
“어? 나 업을 수 있겠어?”
“당연하지. 엔베인, 슬로세이를 부탁할게.”
“…괜찮을지 모르겠네.”
“당연히 괜찮지. 얼른 가자! 얼른 몸 숙여, 업히게!”
슬로세이의 재촉에 엔베인은 얼른 슬로세이를 업었다.
그리델라도 단단히 라스를 붙잡고 업히자 두 사람은 영주성을 향해 땅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하늘을 날아가는 것 보단 느리겠지만 앞을 막을 것들이 없어진 이상 넷이서 달려가는 것 보단 두 명이 각자 한 명씩 업고 뛰는 게 훨씬 빨랐다.
***
카이엔은 바이스의 호위를 받으며 저택 밖으로 나왔다.
그래도 이야기를 듣자마자 급하게 달려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저택 밖은 엉망이었다.
사방에 일렁이는 검은 불꽃을 보고 카이엔은 인상을 썼다. 검은 불꽃은 색은 검은데 그래도 불이어서인지, 빛을 내고 있긴 했다.
군데군데 타오르는 불길 사이에서 누군가와 싸우고 있는 글러티나를 발견하고 카이엔이 외쳤다.
“글러티나!!”
“…카이엔?”
그의 목소리에 글러티나가 다급히 목소리를 높였다.
“피해! 이 자식이 마지막이다!”
“과연 그렇군요.”
“…면목이 없다.”
옆에서 에빌이 한마디 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친구의 모습에 카이엔은 한숨을 쉬었다.
악마 계약자인 놈에게 평범한 인간이 힘을 쓸 수 있을 리 없으니 에빌이 뭘 할 수 있을 리 없었지만 어떤 위로를 해줘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바이스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에빌 씨와 기사단은 저택을 지켜주십시오. 싸워서 이겨도 저택이 무너지면 노숙자 신세입니다.”
“아 네…”
“왕자님, 저도 가세하겠습니다.”
“괜찮겠어?”
“다치지 않겠습니다.”
바이스는 바로 그 자리에서 검을 빼 들었다.
적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검풍이, 불꽃을 흐트러지게 하며 글러티나와 싸우고 있는 청년에게까지 닿았다. 데미지는 없었다.
“쯧.”
그것에 바이스는 혀를 찼고, 불꽃을 뚫고 오느라 위력이 약해져서 살랑거리는 바람 수준이 되었던 검풍을 느낀 청년의 시선이 바이스를 향했다.
“뭐야, 이상한 녀석이 또 있네?”
“저 혼자 상대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군요. 누군가와 함께 싸워본 적이 없는지라.”
그대로 바이스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눈짓에 글러티나가 뒤로 물러났다. 뺨의 상처 하나뿐인 적과는 달리 머리카락이 그을리고 옷에 탄 부분이 드문드문 보였다. 게다가 검도 상해있었다.
버텨줘서 고맙다며 짧은 묵례를 하고 바이스가 글러티나의 뒤를 이어 청년에게 달려들었다.
연이어 달려드는 이들을 보고 청년이 투덜거렸다.
“난 혼잔데, 친구 많은 녀석은 좋겠어.”
“친구라니, 무슨 불경한 말씀을.”
“그래? 아까 저쪽은 동료라던데?”
“저랑은 사정이 조금, 다른지라!”
바이스는 검을 휘둘렀다.
글러티나 조차 뺨의 생채기밖에 내지 못한 몸이었다. 바이스는 인상을 썼다.
닿긴 했다.
벤 감촉이 있었지만 피가 나지 않았다.
적은 맨손이었지만 겁도 없이 그의 검을 잡으려고 들었고 그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보통 인간이었다면 검을 잡으려는 그 겁 없는 손가락이 수십번은 잘리고도 남았을 텐데.
“불사라도 되는 겁니까? 그게 아니라면 단순히 몸이 단단해진 거라던가.”
“하핫, 하긴 악마가 주는 힘이니 별의별 게 다 있긴 했지. 단순히 신체 강화만 되는 놈들도 있었고. 뭐, 그놈은 목을 졸라 죽였지만.”
“별로 알고 싶지 않은 내용이네요.”
“네 주인에게선 특별한 힘이 느껴지지 않네. 혹시 사기라도 당한 건가?”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지금까지 거쳐 간 자들의 능력들이 워낙 괴상했어서.”
서로 주고받는 대화는 굉장히 가벼웠지만 공격은 매서웠다.
청년의 손에서 불길이 치솟아 오르고 주변의 불들이 걸음을 방해했지만 바이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말을 주고받으면서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글러티나의 검보다도 빠르고 날카로운 공격. 그녀의 움직임이 눈에 익은 청년은 더욱 빠르게 움직이는 바이스에게 적응하는 데에 조금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미처 다 피하지 못한 공격에 타격을 입었지만 상처하나 나지 않았다.
충분히 막을 수 있는 공격.
막지 않아도 위험하지 않은 공격이라는 인식이 생겼을 무렵.
바이스의 검이 변화했다. 그의 검 끝에 무언가가 일렁였고 그것을 눈치챈 청년이 급하게 팔을 엑스자로 들어서 심장 쪽을 방어했다.
빠르게 쏘아지듯 내질러진 검이 청년의 팔을 찔렸다.
툭, 투둑.
붉은 피가 떨어졌다.
지금까지 단 하나의 상처밖에 허용하지 않았던 이에게서 피가 흐른 것이다.
상처 입은 본인조차 의외였던 건지 그가 황당해하며 입을 열었다.
“…와.”
“무슨, 소드마스터가 시골구석에 박혀있어?”
“…엥?”
“소드마스터?”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뒤쪽까지 그 목소리가 들린 건지 카이엔은 멍한 표정으로 에빌을 바라보았다.
둘 다 얼떨떨해서 저놈이 미쳐서 잘못 말한 건지 정말인 건지 몰라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힐끗 뒤를 돌아본 바이스와 눈이 마주쳤다. 어쩐지… 그 시선이 굉장히 싸늘했다.
“나 참, 들키지 않으려고 했건만.”
한숨을 쉬며 바이스는 거둬들인 검을 털었다. 묻은 피를 대충 털어버리고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이왕 들켰으니 뭐, 타격도 있겠다. 아끼지 않아도 되겠네요.”
“어두워서 내 얼굴도 안 보일 테고…”
마지막은 중얼거림에 가까웠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리는 그의 눈은 아까보다 매서워진 채였다.
지금까지 카이엔에게도 그가 어떤 경지까지 올랐는지 말하지 않았던 바이스는 이젠 대놓고 오러를 사용했다.
오러가 덧입혀진 검은 푸르스름한 빛을 내며 검은 불꽃을 갈라버리며 적을 향해 쇄도했다.
과연, 일반 검은 통하지 않았지만 오러는 통했다. 크고 작은 상처를 확인한 바이스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졌다.
여기서 그 목을 따버리겠다는 일념으로 바이스는 청년을 몰아붙였다.
맨손과 검이라는 차이가 있긴 했지만 청년 역시 몸에 검은 불꽃을 더욱 단단하게 두르며 방어하고 바이스의 검을 맞받아쳤다.
글러티나의 검 끝을 부서지게 했던 불꽃이지만 한번 오러로 두른 검마저 쉽게 망가뜨리진 못했다.
바닥에서 치솟는 불길을 피하며 바이스는 끈질기게 그에게 달라붙었다.
그러던 중, 뒤에서 구경만 하고 있던 카이엔을 향해서 불길이 달려들었다. 일직선으로 빠르게 뻗어 나가는 불꽃이 카이엔에게 닿기 직전, 저택 밖으로 나왔던 비셰가 몸을 던져 카이엔을 밀쳤다.
확 치솟아 올랐던 불길은 그대로 사라졌다.
“헉…”
“괘, 괜찮으세요?”
“덕분에 살았다.”
“다행이다아…”
비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 소란이라면 마을 사람들도 의아하게 여기고 오는 거 아닐까, 카이엔은 걱정이 됐다.
다행히 불은 그 이상 번지지 않아 저택에는 이상이 없으니 안의 사람들에겐 문제가 없을 테고, 남은 건 이곳뿐이었다.
마지막 대리인으로 추정되는 놈에게는 불길한 기운이 풍겨서 그도 내심 긴장했다.
‘괜찮을까.’
지금까지 싸워온 상대들은 대부분, 그의 곁에 있던 이들 손에서 정리되었다.
하지만 저 녀석은 조금 달랐다. 이기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아무 힘도 없는 거지?’
몬스터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긴 하다. 소통할 수 있다.
하나 그들을 저런 놈과 싸우게 내던질 수는 없었다.
지금은 바이스가 밀어붙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저게 얼마나 유지될까. 다른 이들에게 피해가 옮겨가기 전에 장소를 옮기는 게 낫지 않을까. 유인하면, 저 녀석이 유인하는 대로 따라오기는 하는 걸까.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갔다.
그때, 한창 싸우고 있던 두 사람 사이로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두꺼운 마력의 실이 청년을 붙잡았다. 그 틈에 바이스는 심장을 노리고 검을 휘둘렀지만 그 순간 청년의 몸 전체를 감싸고 불길이 치솟아 올라 바이스는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못 쓰겠군요.”
혀를 차며 그는 반쯤 녹아버린 검을 던져버렸다.
오러로 겉을 둘러쌌지만 검 자체가 그 기운을 감당하지 못해 부서져버렸고 부서지니 불꽃에 상해 완전 망가져 버린 탓이었다.
청년이 일으킨 불꽃에 그를 구속하던 실들도 모조리 불타 없어졌다.
자신을 묶던 것들을 없애버린 청년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을 날고 있는 세 명의 소녀를 보고 그가 웃었다.
“오, 이제 다 모였네.”
남은 세 명이 다 모였다.
이제, 끝이 다가온다.
그걸 알리려는 듯 그가 양팔을 벌리며 말했다.
“이제 끝을 봐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계속 싸움을 질질 끌면 마계에서도 난리가 날 테니까. 가령, 끝까지 살아남은 인간과 계약한 악마를 먼저 죽여버리려고 한다던가. 내 쪽은 문제없지만 너희들은 안 그럴 테고.”
“으음…”
확실히 루키푸게는 약해 보였기에 카이엔은 신음을 흘렸다.
그런데 계약한 악마가 먼저 죽으면 계약한 인간인 그는 어떻게 되는거지? 자동 탈락인가? 그러면 안 죽어도 되나?
굉장히 쓸데없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서 카이엔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루키푸게가 죽기를 바라진 않았다.
그런 카이엔의 생각을 눈치챈 건지 청년이 말했다.
“계약한 악마가 먼저 죽어버리면 인간은 자격도 힘도 상실하겠지만 이런 개싸움에 죽지는 않겠지. 난 그런 식으로 탈락할 일이 없으니 상황이 꼬이기 전에 정리해버리고 싶은데… 너희는 그렇지 않겠지?”
몸을 완전히 숨긴 것도 그렇다고 호전적으로 나서면서 싸움을 거는 것도 아닌 녀석.
카이엔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지만 온갖 사건 사고에 말려들었다.
그래서 계약한 악마에게서 대충 이야기를 전해 들은 청년은 직접 세자르로 오는 것을 택했다.
마법 소녀들과 싸우다가 둘 중 하나만 남았다면 더 좋았을 테지만, 오히려 악마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법 소녀들이 카이엔을 따르는 모양새가 되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가 제일 강할 테니까.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
“왠지 얼굴이 익숙한데… 혹시 바닷가에서 봤던 사람?”
“당신이 편지를 남겼구나.”
그들에게 리치왕의 위치를 알린 자.
마법 소녀들의 눈동자가 청년을 향했고 세 사람은 각자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전투 대상이 바뀌었다. 바이스는 다른 무기를 들기 위해 조심스럽게 몸을 빼냈고 그 자리를 마법 소녀들이 대신했다.
그런데 마법 소녀들이 청년을 향해 달려들고 그가 불길을 일으키며 마법 소녀들의 공격을 막으려 할 때, 갑자기 나타난 드래곤의 앞발이 청년을 그대로 낚아채 공중으로 던져버렸다.
“엥?”
난데없이 드래곤의 앞발에 붙잡혀서 던져지게 된 청년은 순식간에 시야의 위아래가 뒤집히는 것을 느꼈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고 있으니 그대로 몸이 아래로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추락하는 그를 향해 작은 체구의 소년이 제 키만 한 낫을 들고 접근했다.
검보랏빛 낫의 칼날에 서린 기운을 보고 그는 불꽃을 둘러 방어했다.
쩡-
공기가 울리는 소리가 크게 들리며 그는 방망이에 맞은 공처럼 그대로 뒤로 밀려났다.
“뭐야, 이대로 쫓아내려는 셈?”
“장소를 바꾸자는 거예요.”
그를 강한 힘으로 날려버리고 그 뒤를 쫓아가며 프라우디에가 말했다.
중간에 힘이 다할까 봐 흑마법으로 만들어낸 사슬로 청년을 꽁꽁 묶어 붙잡은 프라우디에가 눈을 깜빡이자 잔잔했던 눈동자에 약간의 살기가 담겼다.
“네놈만 죽이면, 그놈이 죽을 일은 없을 테니.”
기억 잃은 리치왕이 카이엔을 돕기로 했다.
약한 인간.
무슨 힘을 받았다는데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인간.
제 종족을 불신하면서 곁에 이종족을, 몬스터를 두는 인간.
전성기 힘의 1/10조차도 내지 못하는 영혼이었지만 프라우디에에게 조언 정도는 해줄 수 있었다.
대놓고 죽여버린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청년은 미소를 지었다.
이미, 이 아이에 대해서는 들은 것이 있었기에.
그리고, 다른 방해꾼 없이 일대일로 싸우게 된다면 제압할 자신 또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