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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왕자는 조용히 살고싶다-121화 (122/219)

121화

날이 어둑해지자 슬로세이는 인공 호수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번에도 카이엔에게 같이 구경을 하러 가자고 졸라댔지만 다른 이들이 슬로세이를 말렸다.

“왕자님은 쉬게 두자~”

안 그래도 힘들었을 거라며 그리델라가 슬로세이를 떼어냈고 대신 그녀와 라스, 엔베인이 보호자로 따라가기로 했다.

엔베인은 사람 많은 곳에 가기를 꺼렸지만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나가겠냐며 그리델라가 붙잡았다.

프라우디에와 자네인도 외출을 하기로 했는데 두 사람은 다른 이들과 따로 움직이기로 했다.

물론 그 이야기를 들은 그리델라가 데이트 하는 거냐며 신나게 놀려댔다. 이노스는 혼자서도 잘 놀 수 있다면서 독립 행동을 하겠다며 나섰고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저택에 남는 사람은 카이엔과 바이스, 에빌, 글러티나, 글라스, 비셰였다.

“왕자님은 안 나가셔도 돼요?”

“보호자들 무력은 충분해. 그리고 영주가 막 돌아다니면 다들 놀 수 없을 거 아냐.”

“그렇다고 변장을 해서 나가기엔 왕자님이 너무 유명하죠.”

“하긴.”

평소에도 자주 마을을 둘러보러 나가는 카이엔이었으니 세자르의 영지민들은 다들 카이엔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글라스는 고개를 끄덕이곤 시종 대리로서 빠진 사람들의 자리를 채우기 위해 일하겠다며 가버렸다.

에빌에게도 휴식 시간을 줘서 집무실 밖으로 보내버리니 남은 건 카이엔과 바이스 둘뿐이었다.

가만히 에빌이 정리한 서류를 확인하다가 카이엔이 입을 열었다.

“…이 싸움은 언제 끝날련지 모르겠다.”

정말로 죽어야 하는 건지 죽여야 하는 건지

그리고, 아직도 행방이 모호한 놈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여기까지 찾아오지는 않으련지.

턱을 괸 채 그가 말했다.

“이곳이 파괴되게 둘 수는 없으니까 차라리 대대적으로 광고를 해볼까? 검은 숲에서 싸우면 그나마 인명피해는 적을 것 같은데.”

“왕자님이야 워낙 유명하니 알아서 올 확률이 높군요.”

“으음…”

“왕자님. 정말로, 받은 힘이라곤 고작 그것뿐인가요? 이 상황을 당신에게 유리하게 바꿀만한 힘은 없나요?”

“애초에 난 계약한 기억도 없어. 그때 몬스터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 것도 루키푸게가 선물이라고 말했던 것 같고.”

“당사자가 원치 않은 선물을 안겨줘 놓고 이제 와서 싸우라니, 다음에 보게 되면 대화를 해봐야 하겠군요.”

“그렇게 말해놓고는 썰어버릴 생각이지?”

“이상한 부분이 많으니 어쩔 수 없죠. 물론, 최우선은 왕자님의 목숨 보존이지만.”

“그래. 넌 집안이랑 절연까지 했으니 나 죽으면 갈 데가 없긴 하겠다.”

“그것만은 아닙니다만.”

아무렇지도 않게 바이스가 대답했다.

“바이올로스 후작가는 제가 돌아가겠다고 한다면 언제든지 대문을 열어줄 겁니다. 그 말인즉슨, 전 왕자님이 없어도 그럭저럭 잘 살 수 있다는 말이죠.”

“하여간 한 마디를 안 진다니까…”

“말을 끝까지 들으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당신의 곁에 있는 거니까. 이미 한번 바뀐 왕위를 다시 바꾸는 게 어려울 리가 없잖아요?”

“…네가 후작이 되면 엎으려고?”

“안될 것도 없죠. 후작이 되진 않을 거지만.”

“놀라게 좀 하지 마.”

아무렇지도 않게 반란을 일으켜 왕을 바꿔버린다고 말하는 시종을 보고 카이엔은 한숨을 푹 쉬었다.

분명 저기에 반쯤은 본심이 섞여 있을게 뻔한데 본인은 절대 그런 건 아니라고 발뺌을 할 테지.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건진 모르겠다. 물론, 바이스라면 그러고도 남을 인물일 테지만…

두 사람은 조용히 집무실에서 대화를 나눴다. 다들 잘 놀고 있으려나, 궁금해져서 카이엔이 말을 꺼내자 바이스가 갑자기 눈물 닦는 시늉을 하더니만 이렇게 말했다.

“불쌍한 우리 왕자님. 연인이라도 있으셨다면 변장이라도 하고 나들이를 가셨을 텐데.”

“너 진짜…”

놀리는 말에 카이엔이 투덜거렸다.

혼삿길을 막고 있는 건 바이스 본인이면서 그의 처지에 우는 시늉을 하고 있으니 기가 찼다.

청혼에 대한 편지가 오는 족족 그에게 읽어보라고 주지도 않고 태워버리는 주제에 말이다.

연애든 결혼이든 관심이 없는 카이엔이었지만 옆에서 바이스가 그러고 있으니 괜히 반발심이 들었다.

물론 하지 말라고 대꾸하진 않았다. 그랬다간 다음부턴 어디 한번 고생 좀 해보라는 심보로 무더기처럼 쌓인 구혼을 떠넘길 테니까.

두 사람은 시덥지 않은 대화를 나누면서 시간을 보냈다. 물론 자유롭게 이어지던 이야기는 점점 영지에 관한 것으로 바뀌었다.

축제 이후의 정리에 대한 것도 좀 더 좋은 방법이 없는지 생각해봐야 했고 올해의 경험을 토대로 내년에는 어떤 식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할지도 미리 정해두는 게 좋았다.

카이엔에게 있어선, 모든 것이 다 처음이었던 올해였으니까.

정찰과 토벌의 시기 조절, 용병단의 출입에 대한 보다 자세한 기록, 있을지 없을지 모를 이종족이나 몬스터 거래 등.

이 세자르에서만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검은 숲을 인접해준 영지 모두에 적용할 수 있는 법을 만들고 싶었다.

아직도 정체를 알아내지 못한 늑대인간을 습격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문밖에서 급한 발소리와 함께 쿵쿵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바이스가 문을 여니 복도에 서 있던 하인이 숨을 헐떡이며 외쳤다.

“죄, 죄송합니다! 정문에… 저택 정문에 수상한 자가 나타나 에빌 씨와 다른 기사들이 갔습니다! 그런데… 괴, 굉장히 위험해 보입니다!”

“습격인가… 가봐야겠다.”

“왕…아니, 영주님?!”

“일단 저택 분들은 모두 안전한 장소에 피해 있으세요. 위치는 알고 계시죠?”

“하, 하지만-”

“괜찮습니다. 일단 다른 분들부터 피신시켜주세요.”

“알겠습니다.”

바이스가 하인을 돌려보냈고 그는 집무실 안을 두리번거리다가 한쪽에 몰래 숨겨두었던 검을 챙겼다.

그 모습을 보고 카이엔이 황당해하며 물었다.

“그건 또 언제 숨겨둔 거야?”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서입니다. 쓸 일이 생겼군요. 갑시다.”

“그래.”

“소란이 일어났다면 다른 이들도 그쪽으로 갔을 수 있습니다. 서두르죠.”

그들 손에서 정리된다면 좋겠지만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한편 정문 쪽, 수상한 사람이 등장했다는 보고를 들은 에빌이 가장 먼저 정문으로 향했다.

다짜고짜 거대한 철문을 부수고 들어와서 다른 기사들을 뒤로 물려놓고 그가 앞장섰다. 하나, 그로서는 막는 것이 고작이었다.

상대도 검을 들고 있긴 했지만 힘에서부터 밀리는 데다가 스치는 상처조차 내지 못했다.

게다가 요즘 들어선 기사 일 대신 카이엔 옆에서 서류 정리하는 데에 익숙해진 그였다. 게을렀던 과거를 후회하며 에빌은 있는 힘껏 적과 싸웠다.

이 자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짚이는 구석이 있었다.

‘어떻게 하지? 내가 못 이길 것 같은데…’

대리전의 참가자. 악마의 계약자.

평범한 인간인 그로서는 앞을 막아서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에빌!”

“어… 글러티나 씨!”

“교대하자. 네가 다른 기사들을 이끌어.”

“아하하… 그래도 나름 왕자의 호위 기사로 온 건데 면목이 없네요.”

“넌 다른 기사들에게 지시를 내려라. 적은 단 한 명뿐인 모양이지만 언제 어디서 어떤 놈들이 더 나타날지 모르니 주변의 경계를.”

“네.”

에빌이 뒤로 빠졌고 글러티나가 앞으로 달려 나왔다.

한 손으로 에빌을 상대하던 침입자는 글러티나가 달려들자 그제야 두 손으로 검을 잡고 휘둘렀다.

쩡-!

검끼리 맞부딪치는 것이라고 하기엔, 굉장히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쇠가 부딪치면서 내는 굉음에 뒤쪽에 있던 이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글러티나는 뱀파이어였고 그녀의 힘은 인간보다 월등히 강했다.

그런 그녀의 검격을 막아설 정도라면, 저자 역시 인간을 뛰어넘는 힘을 가졌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몇 번을 부딪쳐도 멀쩡한 글러티나의 검과는 달리 남자의 검은 계속된 공격에 점점 이가 빠지더니 부러져버렸다.

“응? 아, 부러졌네. 역시 난 검은 잘 못 쓰겠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이가 입을 열었다.

그는 부러진 검을 던져버리고 글러티나가 휘두른 검을 맨손으로 잡아냈다.

봐줄 생각으로 휘두른 검도 아니었고 상대의 힘을 가늠하기 위해 한 공격도 아니었다. 그것이 맨손에 잡히자 글러티나가 살짝 인상을 썼다. 공격이 이렇게 막히는 건, 굉장히 기분 나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손에 검은 기운이 스물스물 생겨나더니 글러티나의 검 끝이 서서히 부서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빠르게 검을 거두었지만 부스스, 가루가 되어 떨어졌다.

뭉툭해진 날을 보고 그녀가 얼굴을 찌푸렸다.

‘무슨 능력이지?’

부식은 아닌 것 같았다.

저런 식으로 무언가를 부수는 힘이 있는 건, 처음 봤다. 지금까지 봐왔던 놈들은 주로 악마들에게 힘을 받은 흑마법사였지만 눈앞의 남자는 흑마법사가 아니었다.

마법사가 아닌 인간은, 대체 악마에게 무슨 힘을 받은 걸까.

그녀의 시선에도 침입자인 남자는 빙긋 웃을 뿐이었다.

혀를 차며 글러티나가 물었다.

“네가, 마지막인 건가?”

“응? 마지막은 아니지 않을까 싶은데. 아직 그 삼인조도 남아있고 저 안에도 한 명 있을 거 아냐?”

정확했다.

마법 소녀 셋과 저택 안에 있을 카이엔.

그 말인즉슨, 저자까지 합치면 남은 이가 셋이라는 뜻이었다.

바다며 사막이며 이곳저곳 돌아다닌 끝에 결국에는 세자르에 도달한 가장 위험한 적.

언젠간 올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하필 세자르에 도착한 날이 이 영지의 축제 날이었다.

정작 당사자는 모르는 모양이었기에 글러티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제 발로 찾아오다니, 제 무덤을 고를 기회였군.”

“그건 내가 할 말인데.”

그의 시선이 저택을 향했다.

멀쩡하게 우뚝 서 있는 영주성은 꽤 오래된 건물이었지만 부서진 곳 하나 없이 멀쩡했다.

그곳을 향해, 가장 높은 지붕을 향해 손을 뻗으며 그가 입을 열었다.

“저거 부수면, 저 안에 있는 녀석도 죽으려나?”

그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글러티나가 다시 달려들었다.

검 끝은 부서져 뭉툭해졌지만 아직 날은 살아있었기에 그녀는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반면, 청년은 허공에 손을 그었다. 검은 화염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불살랐다.

“나는 파멸이다.”

“모든 것을 짓이기고 부수며 녹슬게 하고 불태워 없앨 것이니.”

“이 세상이라고 해서, 다를 바가 있으랴.”

그는 환하게 웃으면서 불길을 일으켰다. 그 화염에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기사들이 급하게 물러났다.

날이 저물고 있는, 저물어가고 있는 와중에 검은 화염이 빛을 내뿜었다.

“아하하핫-!!”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지막 대리인을 미친놈 보듯 쳐다보며 글러티나는 그의 시선이 저택 쪽을 향하게 하지 않기 위해 그 앞을 막았다.

저 불꽃은 마법과도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것 같으니 저택 쪽으로 가서 건물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저 안에 있을 사람들이 위험했다.

그 앞을 가리면서 글러티나가 공격을 했지만 그 공격을 잘도 피하면서 청년이 외쳤다.

“그래서, 너희 주인은 어디에 있는 거야? 설마 도망친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없잖아! 그리고, 말은 똑바로 하시지!”

뭉툭해진 검 끝이 빠르게 쏘아지면서 청년의 뺨에 긴 상처를 남겼다.

“주인 같은 게 아니라 동료다!”

축제의 첫날이었다.

카이엔이 저택의 사용인들에게도 자유 시간을 주면서 다들 놀러 나가라고 내보냈던지라 저택 안에 남은 이들은 얼마 없었다.

카이엔에게 비상사태를 알린 하인이 바쁘게 뛰어다니면서 다른 이들에게도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라는 말을 전달했다.

얌전히 주방에서 뒷정리를 하고 있던 비셰는 그 말을 듣자마자 다른 사용인들을 데리고 안전한 곳으로 향했다.

그들을 은신처로 옮기고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몸을 지킬 수단까지 챙기도록 했다.

그리고, 환상으로 은신처 안에 있는 그들의 모습을 가려놓았다.

“제가 죽기 전까진 풀리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다들 여기 있으면서 다른 분들이 이쪽으로 오면 같이 숨어있으세요.”

“비셰 씨는요?”

“그… 전 일단 왕자님께 가보려고요.”

“괜찮으시겠어요?”

비셰가 약하다는 건 다들 알고 있었기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다른 이종족들은 단련하고 수련하는 걸 자주 봐왔었지만 비셰가 하는 일이라곤 잡일, 요리, 청소뿐이었으니까.

그 시선에 담긴 염려와 걱정을 알기에 비셰는 뺨을 긁적였다.

“그래도 저도 도움이 되고 싶은걸요. 정찰도 할 겸, 다녀오려고요. 제 걱정은 마시고 잘 숨어있으세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환상을 점검하고 비셰는 저택 밖을 향해 달려 나갔다.

아무도 없는 어두운 복도를 혼자서 달리고 있으니 괜히 오싹해졌다.

‘내가 약하긴 하지.’

몽마고, 할 줄 아는 거라곤 꿈에 침투하거나 환상을 보여주는 것 정도였다.

그것마저도 정신력이 강한 사람에게는 잘 통하지 않았다. 그러니, 전투에선 별 쓸모가 없을 테지.

바이스는 애초부터 그런 능력이 통하지 않았고 글러티나의 경우엔 이전에 제국에서 흑마법사에게 당한 게 치욕적이라면서 정신계 마법에 당해도 풀려나기 위해 그에게 부탁해 훈련한 적이 있었다.

덕분에 제국에서 이베리카 세르포그와 싸우던 도중 릴리트가 끼어들었을 때도 쉽게 그것이 환상임을 알고 풀려날 수 있었다며 감사 인사를 전한 적이 있었다.

그는, 약했다. 그의 힘은 너무나도 약했다. 하지만…

‘잠깐의 환상이라도 시선을 돌리는 데에는 충분할 테니까. 위험한 상황에 조금쯤은 도움이 되겠지.’

부정적인 생각을 떨치기 위해 고개를 젓고 비셰는 바삐 움직였다.

늘 위험을 피하고 도망치고 숨기 바빴던 몽마인 그는, 이번에는 적극적으로 위험을 향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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