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세자르에서 이틀을 머문 뒤 이노스는 티아마티스가 있는 에빌라이 공작가로 향했다.
마차만 빌려주란 말에 카이엔은 정말로 마차와 마부만 내어주었고 이노스는 훌륭한 마법사가 되어서 돌아오겠다면서 활기찬 얼굴로 떠났다.
과연 티아마티스에게 가서 마법을 배우면서도 저렇게 해맑은 표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
조금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도 되었지만 이노스를 제자로 받아들이겠다는 말한 건 티아마티스였다.
티아마티스가 스스로 제 무덤을 판 격이니 카이엔은 그 이상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릴리트가 다른 악마의 대리인으로 나섰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이후, 비셰는 아르젠 실루이타의 소식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고 마법 소녀와 마주친 이상 빨리 피신하지 않으면 위험에 처할 테고 왕이 위기에 처한다면 다른 몽마들도 난감해진다.
어떻게 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던 중 아르젠 실루이타에 화재가 나서 근처 건물까지 몽땅 불타버렸다는 이야기가 전달되었다.
직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타다 남은 옷가지며 흔적은 있지만 유골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다행히 다들 잘 피했구나. 가슴을 쓸어내리는 한편, 찜찜한 구석이 있어서 비셰는 그 일을 카이엔에게 보고하면서 덧붙였다.
“화재는, 거기 있던 몽마들이 낸 게 아닐 것 같아요.”
“그럼 다른 사람이 불을 지른 모양이군요. 취객이 많이 돌아다니는 곳이니 그럴 만도 합니다.”
“릴리트는 죽었을 거에요.”
그때 릴리트는 마법 소녀들과 만났지만 도망쳤다.
하나, 대리인은 그 아이들 말고도 더 있을 게 뻔했다.
얼마 남지 않은 대리인 중에서 뒤에 서 있는 악마들끼리 동맹을 맺거나 손을 잡아서 힘을 합칠 수도 있고 동맹을 맺을지도 몰랐다.
“흠. 지도자가 죽었는데 비셰 씨는 괜찮습니까?”
“어… 아마 릴리트가 안배를 해뒀을 거에요. 이인자도 있으니까 괜찮겠죠.”
“그들이 왕자님께 복수하겠답시고 몰려오진 않을까요?”
“이미 바이스 씨한테 혼쭐이 났을 텐데… 안 올 거에요. 릴리트를 직접 공격한 게 왕자님도 아니고… 그리고 몽마는 힘이 없어요. 저만 봐도 아시잖아요.”
“그럼 문제는 마법 소녀인가.”
골치가 아파 왔다.
악마가 무슨 수를 써서 과거의 인물들을 현신시킨 건지도 모르겠고 그 아이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게 뻔했다.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루키푸게가 뭐라도 알려주면 한결 나을 텐데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 후보도 몇 명 안 남았으니 몸을 사리는 모양이었다.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만날 수 있어야 멱살이라도 잡고 흔들면서 아는 거 전부 이야기하라고 협박이라도 할 수 있지, 그쪽에서 먼저 접근하지 않으면 소통을 할 수 없다는 게 굉장히 불공평했다.
투덜거리면서 카이엔이 말했다.
“일단 세자르가 화를 피해가기를 바랄 수밖에. 가게에 불 질렀던 놈이 이쪽에도 불을 지른다면 굉장히… 일이 커질 거야.”
“대비책을 마련하기도 어렵겠습니다.”
“얼마나 남았는지 정돈 알려줘도 되잖아…”
남은 사람이 적을수록 찾기가 쉽지 않을 텐데.
앓는 소리를 내면서 카이엔은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루키푸게나 앙그라가 찾아와서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설명이라도 해주면 좋을 텐데, 둘 다 뭘 하고 있는지 통 보이지 않았다.
저번에 힘이 필요할 때 부르랬는데 지금이야말로 좀 도와줘야 할 때가 아닐까?
비셰에게는 몽마쪽을 좀 더 주시해주라고 부탁하고 카이엔은 온종일 어떻게 하면 악마들과 연락을 할 수 있을까 생각에 잠겼다.
자기 전까지도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었던 덕분일까.
깊게 잠들지 못한 그는 어렴풋이 잠에서 깼다.
“…뭐지?”
인기척이 느껴졌다.
어두운 방 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왠지 누군가가 있는 것만 같았다.
바이스는 아니었다.
녀석이라면 촛불을 가지고 대놓고 들어왔을 테니까.
하나, 적이라고 하기엔 살기라던가 소름이 돋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살짝 인상을 쓴 채 카이엔이 말했다.
“누구야?”
“아, 이런. 불부터 켰어야 했군.”
낯선 목소리가 들렸고 그 뒤, 침대 근처의 탁자 위에 놓여있던 양초에 불이 붙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방 안의 촛불에 하나둘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방 안에 들어온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본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피부는 굉장히 창백했고 눈가는 화장이라도 한 것처럼 푸르스름한빛을 띠고 있었다. 게다가 입은 옷도 괴상했다.
갑옷이라고 하기엔 몸에 딱 달라붙어 있었고 가슴 부분이 그대로 노출되어있었다. 의복 자체는 가죽 같은걸로 만든 건지 광택이 있었지만 어깨며 팔다리 쪽은 금속제 장식들 때문에 방어구를 착용한 것 같기도 했다.
낯선 이의 모습에 카이엔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다른 사람을 부르진 않는 건가?”
“해치려면 진작에 뭐라도 했겠지. 너, 누구야?”
담담한 어조로 카이엔이 물었다.
그 반응이 마음에 드는지 기척도 없이 그의 방에 나타난 남성은 웃으며 말했다.
“하긴,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지. 내가 직접 모습을 드러낸 적도 없고. 하지만 짐작 가는 구석이라도 없는 건가?”
“…악마인 것 같긴 한데.”
“그렇지.”
“루키푸게도 아니고 앙그라도 아니고.”
“애칭으로 부를 정도라니 많이 친해진 모양이군.”
“친한 건 아닌데…”
떨떠름해 하며 카이엔은 그의 말에 대답해주었다.
정말 누굴까. 그가 아는 악마가 더 있던가?
남성은 차분히 카이엔이 답을 낼 때까지 기다려주었고 카이엔은 차분히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반응을 보니 적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그에게 호의적인 악마가 그 둘 말고 더 있던가, 고개가 저절로 기울어졌다.
악마와 만난 적은…
“…어.”
한 번 있긴 했다.
묘하게 친절하게 묻는 말에 대답해주었던 녀석이 있긴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카이엔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그 사령 기사…”
“맞다.”
“왜 여기 있는 건데!?”
복수냐!
아무리 생각해도 사령 기사를 뒤에서 조종하던 악마가 그를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
대체 루키푸게와 앙그라는 뭘 하고 있길래 이런 녀석이 그에게 접근하는데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건지. 카이엔이 인상을 찌푸리자 과거, 사령 기사를 대리인으로 내세워 겔로스를 짓밟은 전적이 있는 악마 벨레드는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할 말이 그것 뿐인 건가. 뭐, 그 두 사람이 바빠서 그런 거라고 해두지. 루키푸게 혼자라면 다른 악마들도 신경 쓰지 않겠지만 그녀가 옆에 있으니 다들 주시하고 있는 모양이고.”
“무슨 문제가 있는 모양입니다.”
“지옥도 나름대로 바쁘니까.”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자기들이 직접 안 오고 다른 악마를 시키다니.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며 카이엔은 한숨을 쉬었다. 벨레드는 가만히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꿈에 접촉하는 귀여운 행동은 해본 적이 없어 서툴기에 직접 나타나는 방법을 선택했지. 뭐, 이 모습도 본체는 아니지만.”
“그러면서 사령 기사는 어떻게 만들었는데요? 계약하려면 직접 나타났어야 했을 텐데.”
“그야 상징물이나 짐승 같은걸 이용했지.”
“그럼 저한테도 그러는 게 낫지 않나요?”
“저번에도 사령 기사의 몸을 이용해 만나지 않았던가. 역시 대화를 나누려면 얼굴을 보면서 해야지. 흠, 시간을 너무 오래 끄는 것도 좋지 않으니 본론으로 넘어가지. 난 네게 지금 남아있는 후보들에 대해 말해주러 온 거니까. 알고 싶었던 거겠지?”
“네.”
그것 때문에 루키푸게와 앙그라가 찾아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를 찾아온 건 벨레드였지만 궁금해했던 질문에 답을 해준다고 하니 카이엔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목 없는 기사로 만났던 악마가 지금은 본 모습일지 모르는 형상으로 나타난 게 굉장히 신기하긴 했지만 벨레드를 구경하는 것보단 다른 악마의 계약자들에 대해 외워두는 게 효율적이었다.
하지만 세 번째로 보게 된 악마마저도 인간과 다를 게 없이 생긴 데다가 오히려 웬만한 인간보다 훨씬 미형이라 살짝 충격이었다.
루키푸게와 앙그라를 만났을 때도 생각했던 거지만 악마들이 꽤 정상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게 놀라웠다. 보통 악마라고 하면 괴물같이 생겼다고 상상하곤 하는데 외모만 봐선 절대 악마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악마들은 다 그렇게 생겼나요?”
“응? 무슨 뜻이지?”
“괴물같이 생겼을 줄 알았는데.”
“아, 그런 애들도 있긴 하지. 뿔도 달리고 날개도 달리고. 지금은 뭐라고 해야 하나, 조금 힘을 뺀 상태라 이렇다고 해야 하나. 네 주변에도 몽마가 있으니 이해하긴 쉬울 텐데?”
“비셰는 맨날 자기 입으로 자기가 최약체라고 하는 녀석이라.”
“흠, 하긴 몽마의 위상이 격하된 지 오래지. 아, 잡담하는 것도 즐겁지만 중요한 말을 전달하지 못하면 내가 혼날 테니 그것부터 말해주마.”
이런 방법을 쓰는 것도 힘들었다며 벨레드는 바로 그가 카이엔을 찾아온 이유를 입에 담았다.
“남아있는 후보는 너를 제외하면 넷이다. 일단 너도 잘 알고 있는 마법 소녀들. 이 녀석들은 시트리가 꼼수를 써서 만들어낸 놈들이다. 셋이서 한 몸으로 생각하면 되지. 그리고 그 외엔 사막 쪽에 있는 괴물 소환사와 카르반 해에서 숨죽이고 있는 해양 종족, 그리고 최고로 위험한 미친놈 한 명이지.”
“다섯…”
“그래. 하나 제일 강한 미친놈이 한 명씩 쳐부수고 오는 데 시간이 걸려서 너는 아마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 싶구나.”
“대체 왜 그런 걸 당신이 와서 알려주는 겁니까?”
루키푸게나 앙그라는 그에겐 한마디 말도 없이 대뜸 벨레드를 보내서 남은 후보에 대해 설명하게 했다.
정보를 얻는 건 좋지만 당황스럽기에 카이엔이 물었고 그의 물음에 벨레드가 답했다.
“내가 그대 주인의 뒤에 서기로 했으니.”
“…주인?”
“계약자 말일세.”
“아아.”
“그 둘은 나서기 힘든 모양이니 내가 왔다네.”
한가한가 보구나.
하긴, 탈락했으니 그 둘보다는 한가할지도 몰랐다.
카이엔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벨레드는 친절하게 그에게 조언을 건넸다.
“지금까지 조용했다는 게 용할 정도로 사나운 녀석들이다.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주의할게요.”
“그래. 말을 잘 들으니 좋구나.”
“그런데 당신은 여기까지 와도 되는 겁니까?”
“나야 이미 탈락했고, 지금 그놈들의 눈에 네가 찰리가 없으니. 넌 약하지 않느냐.”
“…….”
할 말이 없는지라 카이엔은 입을 다물었다.
그가 약한 건 그도 잘 알고 있었지만 여기저기서 확인사살을 해대니 마음이 아팠다. 비셰가 이런 기분이었구나. 어쩐지 비셰에게 많이 미안해졌다.
그의 반응이 재밌었던 건지 벨레드는 한술 더 떠서 소금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바알의 계약자는 강하다. 그가, 현재 우승 후보지. 그에 비하면 너는… 흠, 저기 있는 작은 쥐와 같구나.”
“우리 소금이를 무시하시다간 큰코다치실 겁니다.”
“아아 저 애완 쥐 이름이 소금인가. 귀여운 이름이구나. 누가 지었는지 참.”
물론 소금이의 이름을 지은 건 카이엔 본인이었으므로 카이엔은 대답해주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벨레드의 시선을 피하니 나지막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저절로 얼굴이 달아올라 카이엔이 화제를 돌리기 위해 입을 열었다.
“아무튼, 다섯이나 있으면 제가 신경 쓰지 않아도 자기들끼리 박 터지게 싸우다가 끝날지도 모른 단 거죠?”
“그들 중 단 한 명이라도 그대에게 눈을 돌리지 않는다면야.”
“…여기 리치왕 있는데요.”
“어차피 힘도 기억도 잃었지 않나. 과거엔 강대한 힘을 가졌던 악이었다고 해도 지금은 그렇지 않으니, 마법 소녀들도 감지하지 못할 테고.”
“끄으응…”
해양 종족은 대체 뭐란 말인가.
사막의 괴물 소환사에 마법 소녀, 그리고 최고로 위험한 미친놈.
넷이서 치고받고 싸우다가 다 같이 쓰러지면 좋을 텐데. 카이엔의 생각이 훤히 보인 건지 벨레드는 계속 웃기만 했다.
루키푸게가 직접 올 수는 없으니 앙그라 마이뉴가 그에게 떠넘긴 일이 카이엔에게 이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얼굴을 보고 대화하니 참 좋다며 그는 아직도 낑낑대며 앓는 어린 인간을 보며 말했다.
“그대에겐 강한 아군이 있지 않나. 저들은 다 혼자라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 때문에 위험에 처하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좋은 마음가짐이구나. 아직, 그대의 계약자는 그대에게 변변찮은 힘을 내려주지 않은 것 같은데.”
“힘? 그거 계속 받을 수 있는 겁니까?”
“시트리처럼 꾀를 쓴다면, 가능은 하지.”
“하하…”
세 명이 되는 건 사절이다.
해줄 말은 그것뿐이었는지 벨레드는 그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가보겠다며 손을 흔들었다.
“응원하고 있을 테니 잘해보게.”
짧은 인사를 남기고 그는 사라졌고 일순간, 방 안의 모든 불이 꺼졌다.
마치 처음부터 불이 켜지지 않았던 것처럼 순식간에 어두워진 방에 카이엔은 눈을 깜빡였다.
그가 꿈을 꾼 것 같진 않았다.
악마가 다녀갔음에도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방 안의 공기에 카이엔은 꾸물거리면서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벨레드가 말해준 것 중, 사막의 괴물 소환사나 바다의 해양 종족에 대한 거라면 어떻게든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바로 다음 날, 카이엔은 그리델라에게 그 이야기를 하며 조사를 부탁했다.
방까지 악마가 찾아왔는데 그 악마가 루키푸게도 앙그라 마이뉴도 아닌 저번에 봤던 벨레드라는걸 말하지는 않았다. 말했다간 바이스가 그놈이 언제 또 나타날지 모른다고 하루가 멀다 하고 그의 방에서 잠복하면서 대기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마른 침을 삼키며 카이엔은 바이스의 눈치를 보았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냐…”
“사막이랑 바다라- 거기까지 알아낼 수 있을진 모르겠는데. 그리고 너무 멀어! 사막은 제국 너머에 있잖아. 다른 계약자들 많다니까 그쪽이 해결하겠지.”
“그래도 어느 정도는 알아내고 싶어서. 부탁할게.”
“응. 그치만 알아낼 수 있을지 장담은 못 하겠어.”
다른 마녀들에게 부탁한다고 해도 소식이 전해지고 다시 도착하는 데에 굉장히 긴 시간이 걸렸다.
그리델라에게만 맡기지 않고 그도 나름대로 조사해보기로 하고 카이엔은 남은 두 사람에 대해 생각했다.
마법 소녀들은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나타날 테고 가장 위험한 놈은…
‘…오지 않으면 좋을 텐데.’
가장 위험하다는 건 가장 강하다는 말이 아닐까?
언젠가는 맞붙게 될지도 몰랐다.
그렇게 된다면, 그는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 하나로만 끝나면 다행이지.’
그는 이곳을 다스리는 영주였으며 그를 지키려고 하는 사람도 많았다.
다들 다치지 않으면 좋을 텐데. 저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