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프라우디에는 뼈들을 회수했고 글러티나와 함께 이노스의 궁으로 향했다.
그런데 도착하니 이노스는 기절해서 바닥에 누워 방치되어있었고 티아마티스는 자네인과 비셰, 사샤를 챙기고 있었다.
이노스는 뒷전인 광경에 프라우디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방금 마법, 이노스 님이 쓴 거 아닌가요?”
“맞다.”
“그런데 왜 저렇게 누워있어요? 뭐라도 덮어줘야…”
“저대로 둬도 된다. 괜히 뭐 덮어줘봤자 시체로밖에 안 보일 테니.”
“그, 그런가요?”
티아마티스의 냉정한 말에 프라우디에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거나 말거나 티아마티스는 사샤와 함께 이번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적당한 거짓말을 짜내는 데 집중했다.
이노스보다 영리한 사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에게 협조해주었다.
“그렇게 돼서, 역사와 전통의 빌헬름 후작가의 당주 웨이버 빌헬름은 이번 사태로 죽은 거로 치기로 했다.”
“그래도 되는 거에요?”
“어쩌겠어. 1인 2역도 그만둘 때가 되었지.”
푸념하듯 티아마티스가 말했다.
이제 제국에선 손 떼고 가르간트에만 집중하겠다고도 덧붙였다.
“그리고 이노스 황자가 목숨이 경각에 달한 순간 엄청난 마법을 써서 괴물들을 몽땅 죽여버렸다고 말하기로 하지.”
“에… 네.”
“어쩔 수 없지.”
“아마 릴리트가 끼어든 덕분에 황성 사람들 모두 잠들거나 환상 속에서 허우적거렸을 테니 변명하긴 쉬울 거다.”
“그러네요.”
“난 먼저 가볼 테니 너희가 이 녀석 챙겨라. 곧 날이 밝을 테니까.”
변명으로 쓸 말들을 미리 맞춰보고 어떻게 해야 할지 정해준 다음에 티아마티스는 돌아갔다.
텔레포트로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그를 보고 사샤가 중얼거렸다.
“…아직도 얼떨떨해요. 빌헬름 후작이 인간이 아니었다니…”
“아하하…”
“그래도, 덕분에 살았네요. 오라버니도 그렇고요.”
찬 바닥에 쓰러져있는 이노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이대로 계속 이노스를 눕혀놓을 수는 없으니 멀쩡한 침구가 있으면 바닥에 깔아주고 싶었지만, 한번 불 난리가 났던 궁에는 쓸만한 게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다른 이들이 벗어준 겉옷을 덮고 누워있게 된 이노스였다.
***
황성에서의 사고는 잘 마무리 지어졌다.
모의 전쟁 이후로 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에 한바탕 들썩이긴 했지만 황자가 괴물들을 해치웠다는 좋은 소식이 있었기에 황실은 그것을 널리 알렸다.
릴리트가 개입하기 전에 괴물들을 목격한 이들도 있었기에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건 쉬웠다.
제국의 기둥 중 하나였던 빌헬름 후작의 사망이라는 안타까운 사건도 있었지만 그들은 모든 괴물을 해치운, 뛰어난 마법 실력을 가진 둘째 황자에 대한 소식으로 제국 사람들의 슬픔을 달래려고 했다.
그리고.
제국민의 앞에 서서 황성에서 일어난 불온한 사건의 해결을 입에 담으며 이노스가 외쳤다.
“이번 습격으로 수많은 부상자와 사망자가 생겼으며, 제국의 훌륭한 귀족 중 한 명인 웨이버 빌헬름 후작이 사망하였습니다. 또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저희는 좀 더 힘을 기르고 자신을 지킬 수 있게끔 하겠습니다. 그리고 저 이노스 아센시오 아이칸트라는! 훌륭한 마법사가 되기 위해 황자 자리에서 내려와 마법 공부에 매진하겠습니다! 꼭 훌륭한 마법사가. 아니, 마법사를 넘어 대마법사가 되어서 제가 나고 자란 이 제국을 지키겠습니다!!”
황자가 스스로 그 자리에서 내려와서 마법 공부를 하여 마법사가 되겠다.
마법사가 되어서 제국을 지키겠다.
그 말에 백성들은 환호했다.
황자가 이노스 한 명만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후계자 문제에는 상관도 없을뿐더러 한번 황성을 위험에서 구해낸 뛰어난 마법사인 황자가 제국 수호를 위해 공부하겠다는데 싫다고 할 멍청이가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모두의 앞에서 황자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외친 이노스는 행사 직후 반파된 궁으로 향해 얼마 남지 않은 그의 짐을 챙기고 떠날 준비를 했다.
“오라버니, 정말로 가실 거에요?”
“응. 아마, 그 사람도 이걸 바라고 있었을걸?”
여전히 염려하는 사샤에게 웃으며 대답하고 이노스는 다른 형제들과도 작별 인사를 했다.
그의 뜬금없는 출가 선언에 형제자매들 모두 놀라서 그를 뜯어말렸지만 이노스는 괜찮다면서 손사래를 쳤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제대로 된 마법사가 되어서 돌아올게요!”
“…오긴 하는 거지?”
“물론이죠! 그러니까 제 방 공사 좀 부탁드릴게요!”
“하긴… 넌 원래 이런 녀석이었으니까…”
“왜 그런 눈으로 보시는 거에요?”
“좋은 스승은 제국에도 많잖아. 왜 굳이 외국으로 가려는 거야?”
“지금 옆에서 가르쳐주는 스승보다 훨씬 능숙하고 황자라는 저에게 꿇리지 않을 사람이 있거든요!”
그 뜻을 몰라 형제자매들은 고개를 기울였고 이노스는 활짝 웃었다.
아버지인 황제는 그의 의견을 적극 수용해 그가 여행하는 것에 찬성했다.
다만, 호위나 시종을 데리고 가라고 해서 이노스는 그것을 거절했다. 티아마티스의 정체를 다른 이에게 들키는 게 달갑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얼른 형제자매들과 인사를 나누고 황제에겐 편지 하나만 남겨놓고 떠날 예정이었다.
“사샤도 더이상 황성에 있지 못하게 된다면 제가 있는 곳으로 오면 될 거에요.”
“오라버니도 참.”
“그럼 전 갈게요! 저 찾지 마세요~”
“그래, 잘 가라-”
“몸조심하고.”
“그런데 이노스 형님, 폐하께서 호위 기사 데려가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제 몸은 제가 잘 지킬 수 있어요. 그럼 이만!”
“엥??”
누가 따라올까 봐 이노스는 바로 달려 나갔고 어이없어하는 클로디우스의 어깨에 손을 짚으며 베르나르가 고개를 저었다.
이노스가 원하는 대로 두자는 뜻이었다.
“저 녀석이 바보도 아니고, 목적지까지 함께 갈 사람은 이미 구해놨을 거야. 스승으로 삼을만한 사람이 있으니까 출가 선언을 했을 테고.”
“…괜찮을까요?”
“괜찮겠지. 어렸을 적부터 운 하나는 좋았던 녀석이잖아?”
황성 밖으로 나온 이노스는 바로 일행과 만났다.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프라우디에와 자네인, 글러티나, 비셰는 이노스를 데리고 빠르게 수도에서 벗어났다.
이번에는 아르젠 실루이타를 거치지 않았다. 그쪽도 난리일 게 뻔해서 비셰는 일부러 그곳을 지나쳤다.
그렇게 무사히 국경을 넘어서 가르간트에 도착, 세자르에 오게 되니 카이엔은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 인사를 하는 이노스를 보고 뒷목을 잡았다.
“네가 왜 여기 있어?!”
“비슷한 말을 저번에도 들은 것 같네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답니다!”
“하아…”
“일단 들어오시죠. 그리고 비셰 씨, 할 말이 있습니다만.”
“히익!”
“왜 그렇게 놀라시죠? 안 잡아먹습니다.”
“그, 그게…”
“잘못한 거라도 있습니까?”
“우으…”
비셰는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이스는 잠시 실례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비셰를 끌고 가버렸다.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처럼 힘없이 질질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 카이엔이 외쳤다.
“바이스! 비셰 잘못은 없으니까 너무 혼내지는 마!”
“저도 압니다.”
“와, 끌려가는데 가만히 두는 거에요?”
“물어보고 싶은 게 많은데 내 앞에서 물어보기는 좀 그런가 봐. 우리도 안으로 들어가자.”
“네에-”
“제국에 관련해서 말씀드릴 게 있으니 저희도 같이 갈게요.”
바이스가 비셰를 데리고 가버렸으므로 카이엔이 나서서 돌아온 일행들을 안내했다.
방금 도착했지만 피곤하지도 않은 건지 다들 소파에 앉자마자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국에서 실혈증에 대해 조사하던 중 이노스와 만났고, 이노스의 여동생인 사샤에게서 실혈증 증상이 보이는걸 알게 되어 황성으로 향한 뒤 본격적인 조사를 시작했으며 뱀파이어의 흔적을 확인한 것. 함정에 빠지긴 했지만 그래도 무사히 격퇴했다는 것.
그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카이엔이 입을 열었다.
“다들 고생했네. 이노스 너도.”
“당연하죠. 저 죽는 줄 알았어요.”
“엄살은. 티아마티스 님이 옆에 계셨잖아.”
“쳇. 어쨌든, 전 그분한테 마법 배우러 갈 건데 하루만 신세 질게요. 힘들어요.”
“그래. 쉬었다 가라.”
“비셰 씨는 아직도 안 오시네요…”
“바이스가 할 말이 많은가 보지.”
비셰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던데 설마 불쌍한 애를 때리는 건 아니겠지?
슬슬 걱정이 들어서 카이엔은 바이스를 보러 가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응접실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들어왔는데 비셰는 핼쑥해져서는 비틀거리면서 소파에 주저앉았다.
“비셰?”
“…너 대체 뭘 한 거야?”
“취조와 심문입니다.”
“그래서, 알아낸 거라도 있어?”
“별거 없더군요.”
“그럴 줄 알았어.”
카이엔은 한숨을 푹 쉬었다.
“아무튼, 글러티나 님이 한 명을 잡았으니 이제 몇 명이 남았는지 짐작이 가십니까?”
“몰라. 이번엔 그 이상한 목소리도 안 들리더라.”
“흠.”
“얼마 남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닐까? 한 명씩 줄어들 때마다 알려주는 것도 좀 무섭고.”
“사령 기사가 죽음으로서 8명이 남았던가요?”
“아마도.”
“그럼 뱀파이어가 죽음으로서 7명이 남았고 그중 둘이 릴리트와 마법 소녀겠죠. 마법 소녀들도 하나하나로 칠지는 모르겠지만.”
“계약한 악마가 한 명이니 하나로 치지 않을까, 싶어요.”
“흠. 왕자님까지 더해 셋으로 치면 아직 넷이나 남았군요.”
그것도 정체불명의 적이.
지금도 세자르 영지의 강화를 하고 있긴 하지만 군사를 늘리는 건 눈치 보였다. 자칫 잘못해서, 카이엔이 왕실에 칼을 돌리려는 오해를 사기라도 한다면 곤란하니까.
어떻게 해야 카이엔의 목숨줄을 유지할 수 있을까. 다들 고민에 빠졌다.
카이엔은 힘이 없으니까.
다만 이노스는 마왕 대리전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무슨 이야기 하는 거에요? 목소리? 악마? 카이엔, 뭐 하고 있어요?”
“별거 아냐. 어쩌다 보니 이상한 일에 휘말려서.”
“저도 도와줄까요?”
“넌 가만히 있는 게 돕는 거야.”
“힝.”
“얼른 가서 쉬기나 해. 그리고, 우리는 일단 영지 방어에 집중한다. 또다시 주변인들을 잃을 수는 없잖아.”
“맞아요.”
“그렇지.”
카이엔의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곁에 있는 이들의 대다수는 가족을 잃은 자들이었기에, 그들은 카이엔의 의견에 동의했다.
피곤할 테니 돌아가서 쉬라며 카이엔은 모두 방으로 돌려보냈다. 이노스에겐 별채의 방 하나를 내주고 푹 쉬고 수도로 향하라고 말했다.
“티아마티스 님을 찾아가려면 자네인이 도와줘야 하나? 여기서는 다른 귀족이거든. 에빌라이 공작이라고 하는데.”
“아, 그래요? 공작가는 수도에 있는 거죠?”
“응.”
“마차 하나만 빌려주세요. 그거 타고 수도로 갈게요. 이제 황자 자리도 버리고 와서 일반인이고 제 얼굴 아는 사람도, 제 행방을 아는 사람도 없을 테니 수도까지 가는 데엔 문제 없을 거에요.”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라. 너 마법 쓸 수 있지? 통신 마법같은 거 있어?”
“어려워요. 그리고 제가 그런 섬세한 조종은 아직 잘 못 해요.”
“전서구라도 가지고 가라. 챙겨줄게.”
“고마워요.”
활짝 웃으면서 이노스는 감사 인사를 했다.
다른 이들을 다 내보낸 뒤 바이스만 남게 되자 카이엔은 말없이 바이스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물었다.
“…비셰한테 무슨 말 했어?”
“몽마의 습격에 대해 아는 게 있냐고 물어봤습니다. 모르더군요.”
“그렇겠지.”
“저도 짐작은 했습니다만, 그래도 직접 듣고 싶었습니다. 비셰 씨가 있었기에 몽마의 왕이 그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던 건지, 그게 아니면 왕자님에 대한걸 몽마들의 정보망을 통해 알아낸 건지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어땠어?”
“둘 다 였습니다.”
“하아…”
“걱정하진 마십시오. 제가 릴리트의 목을 따버리겠다고 쳐들어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래. 잘 생각했어. 여기 가만히 있어.”
혹시라도 바이스가 맘을 바꿀까 봐, 카이엔이 급하게 대꾸했다.
그 말에 바이스는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래도… 별일 없이 넘어가서 다행이다.”
“경계를 늦추지 않아야 합니다.”
“알아.”
지금까지 남아있는 녀석들은, 굉장히 위험한 녀석들투성이일테니까.
네 개의 뱀파이어 혈족을 무너뜨린 자도 있고 몽마의 왕까지 대리인으로서 있었을 정도다.
그런 인물들 사이에서 몬스터 말이나 알아듣고 대화하고 있는 그는 최약체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대충은 알 것 같지만 너무 걱정하진 마십시오. 목숨을 걸고 왕자님을 지킬 테니까요.”
“어… 그래.”
“왜 그렇게 떫은 표정을 지으십니까?”
“너희 몸이나 잘 지켜.”
“왕자님보단 잘 지킬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