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릴리트는 제 모습을 드러내면서 티아마티스와 비셰의 앞을 막았다.
난전에 끼어들어 경쟁자를 제거할 속셈이었지만, 그녀는 카이엔을 노리고 세자르로 간 몽마들이 실패했다는 보고에 당황했다.
감정이 표정으로 드러나자 비셰는 자신도 모르게 안도했고 티아마티스는 릴리트를 비웃었다.
“뜻대로 안 됐나 보지?”
“큿…”
“이만 환상에서 풀어주면 좋겠는데.”
“설마 드래곤이 인간을 걱정할 줄이야…”
“내가 신경 쓰는 건 내 자식뿐이다. 그리고-”
짧은 한숨을 쉬고 그가 말을 이어나갔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이 더 오는군.”
오늘이 무슨 날인가.
티아마티스는 혀를 찼다.
하룻밤 사이에 참 많은 것이 바뀔 것이다. 이 자리에만 해도 벌써 계약자가 둘이 아닌가.
이젠 몇 남지 않았을 테니, 다른 계약자들이 어디에 있을지 눈에 불을 켜고 있겠지.
그러니 대리전을 시켜놓고 신나게 구경이나 하고 있을 악마들이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쐐애액-
거센소리와 함께 바람의 화살이 릴리트를 향해 날아왔다.
릴리트는 아슬아슬하게 그것을 피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보다 위의 상공에, 찬란한 달빛을 받으며 서 있는 세 명의 소녀가 있었다.
원래 달빛이 저렇게도 환한가? 티아마티스는 살짝 인상을 썼고 릴리트또한 표정을 구겼다.
달을 등지고 선 세 명의, 마법 소녀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어둠을 틈타 사악한 음모를 꾸미는 자가 있다더니…!!”
“하.”
티아마티스는 실소를 흘렸다.
저놈들도 냄새를 맡고 온 건가, 싶었다. 타깃은… 계약자들 뿐이면 좋으련만.
저들에게 풍기는 마력은 천 년 전의 마법 소녀들과 같았다. 외모는 달랐지만 근원은 비슷한 것이리라.
마법 소녀들은 릴리트를 주시하고 있었다. 잠깐의 침묵, 그리고 양 측이 맞붙었다.
상황 파악을 끝낸 릴리트는 몸을 빼려고 했지만 마법 소녀들의 마법이 그녀를 붙잡았다.
정신 조작밖에 못 하는 비셰와는 달리 릴리트는 몽마의 왕답게, 그것 말고도 쓸 수 있는 마법이 많았다.
“어이, 정신 차려라. 얼른.”
한쪽에서 전투가 시작되자 티아마티스는 그쪽을 경계하면서 쓰러진 이노스를 흔들어 깨웠다.
일단 준비한 마법부터 마무리 짓는 게 우선이었다.
릴리트가 마법 소녀들에게 신경 쓰면서 이쪽에 건 마법은 거둔 건지 이노스는 금세 깨어났다. 어리둥절해 하는 녀석에게 다시 검을 쥐여주면서 마법진을 그리게 시키고 티아마티스는 마법 소녀들을 보았다.
그가 끼어든다면 손쉽게 정리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하나…
‘내가 끼면 난감해지지.’
그가 카이엔과 안면이 있고 약간의 친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드래곤이 한 악마의 계약자의 편에 선다는 것에 반발하는 이들이 많을 테니까.
릴리트는 육체를 실체화시켰다가, 유체화 시키는 등으로 마법 소녀들의 공격을 피했다. 마법으로 된 공격만은 유효타를 먹었기에 마법 소녀들은 무기를 휘두르는 대신 마법을 쓰거나 무기에 마법을 두르고 싸웠다.
아무리 수완이 좋다고 해도 3명과 싸우는 건 힘에 부쳤다.
티아마티스는 알면서 그것을 무시했다. 비셰가 당황한 걸로 봐선 릴리트가 고위 악마의 하수인으로 들어간 걸 모든 몽마가 알고 있는 건 아닐 테고, 릴리트는 카이엔을 노리다가 실패했다.
여기서 죽지 않아도 카이엔의 시종으로 붙어있는 그놈이 가만히 두지 않을 터. 릴리트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다.
“큭…!”
“죽어라, 이 악마야!”
제때 몸을 빼지 못하고 휘말린 릴리트는 속절없이 크고 작은 상처를 허용했다.
어떻게든 도망치려고 했지만 상대는 세 명이었다. 두 명이 그녀를 공격하고 한 명이 퇴로를 차단하고 있기만 해도 충분했다.
그러나 릴리스가 위험에 처한 순간, 비셰가 끼어들었다.
자네인과 사샤를 깨워서 티아마티스와 이노스를 지켜보고 있게 한 그는 내내 릴리트를 주시하다가 그녀가 위험해지자 바로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난장판에 난입했다.
갑자기 끼어든 그를 보고 마법 소녀들은 휘두르던 무기를 급하게 멈추었다.
그 잠깐의 머뭇거림에 비셰가 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 이 사람은 안 죽이면 안 될까요? 그래도 일족의 왕인데.”
“응?”
“넌 또 누구야?”
“으음- 자세히 설명해보자면 이쪽은 저희 종족의 왕쯤 되고 저는 민간인인 백성쯤 됩니다.”
“그럼 너도 나쁜 녀석인 건가?”
“무슨 그런 무서운 말씀을! 전 그냥 평범한 소시민입니다! 그… 이 사람도 여기 끼어있긴 하지만 딱히 뭘 한 건 아니고, 좀 봐주시면 안 될지…”
“…이 녀석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우리는 부름을 받고 왔어. 이곳에 나쁜 녀석이 있다는 말을!”
“번지수를 잘못 잡으신 것 같은데요. 많은 인간을 공격한 나쁜 놈은 저쪽에 있어요.”
“하지만 여기도 있는데.”
역시 계약자인 게 문제인 건가.
마법 소녀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다만 민간인이라고 여겨지는 비셰가 끼어들어서인지 온순한 모습을 보였다. 조금 전까지 피 튀기며 싸우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그걸 알기에 비셰도 꿋꿋하게 한 마디씩 말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마법 소녀들은 물러나지 않았고 비셰는 힐끔거리며 릴리트에게 소곤거렸다.
“…이거 어떻게 못 물러요? 계약자건…”
릴리트는 고개를 저었다.
직급 높은 악마와의 계약인데 그렇게 쉽게 끝날 리가 없었다.
“으으, 정말 목숨 걸었던 거에요? 으와악…”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안절부절못하면서 비셰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하나 타개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릴리트는 없어서는 안 된다. 가장 강한 몽마가 그 이름을 이어받으면서 몽마들을 지휘하고 있긴 하지만 이런 데서 지도자가 죽어버리면 남은 몽마들은 혼란에 빠질 게 뻔했다.
“그… 이쯤에서 물러나 주심이 어떠신지. 저쪽이 더 난리라니깐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은 악을 그냥 넘길 수는 없는데.”
“악은 멸해야 해.”
“그게 우리의 존재 이유.”
“신이 내리신 사명.”
그들은 같은 말을 반복했다.
물러설 기색이 없는 모습에 비셰는 속으로 혀를 찼다.
‘아, 이거 글렀구나. 이제 어쩌지…’
그가 그렇게 생각함과 동시에, 그의 뒤에 있던 릴리트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그대로 그를 아래로 밀어버렸다.
추락하는 비셰의 귀에 릴리트의 전음이 들렸다.
- …바보 같으니.
- 괜히 말려들지 말고 네 사람 곁에 있어.
벗어날 수 없음을 릴리트 역시 직감했기에, 그녀는 수를 썼다.
그녀가 갑자기 비셰를 밀어버리자 마법 소녀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고 그 순간, 릴리트는 환상으로 마법 소녀들의 눈을 가리고 도망쳤다.
그 잠깐의 틈을 타서 그녀가 사라지자 마법 소녀들은 비명을 질렀다.
“도망쳤어!”
“으악!”
“안 돼!!”
다행히 비셰는 방심해서 추락한 것인지라 금세 중심을 잡았고 안정적으로 착지했다.
릴리트는 무사히 도망쳤을까. 실패했으니 그 뒤에는 어떻게 되는 걸까.
상대하던 적이 사라지자 혼란에 빠진 마법 소녀들이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이미 릴리트는 떠난 뒤였다.
심판해야 할 대상을 놓친 그들의 시선이 저절로 아래로 향했다.
검 끝으로 바닥을 긁으며 마법진을 그리는 사람과 그런 그를 감시하는 듯 서 있는 드래곤. 마법 소녀들이 사뿐히 날아서 그들의 앞까지 다가갔다.
“너희는 뭘 하고 있는 거야?”
“방해하지 말고 가라. 황성을 지킬 대규모의 마법을 펼치려고 하는 거니까.”
“마법?”
“넌 누군데?”
“난 마법사고 이쪽은 황자.”
“와.”
“황자래.”
“…저 팔아먹는 거에요?”
“어쩔 수 없잖아.”
황당해하는 이노스의 머릿속으로 티아마티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최대한 선량한 사람을 연기하라는 말에 이노스는 한숨을 쉬었다.
연기하란 말이 없어도 그는 착하고 올바른 사람이니 문제없었다.
지금 이 상황을 따라가기가 굉장히 어려웠지만 카이엔과 함께 있던 이들이나 티아마티스가 나쁜 사람일 것 같지는 않아서 이노스가 입을 열었다.
“여동생이 괴물의 타깃이 되어버렸어요. 그래서 도움을 줄 사람을 불러왔는데 일이 커져서 제가 쓰는 궁은 반쯤 무너지고 난리가 났네요. 하지만 피해를 더 키울 수 없으니, 제 한 몸 불사르면서 사람들을 지킬 생각입니다.”
“헤에.”
“무슨 마법이길래?”
“음… 대규모 방어랑 공격? 좌표 설정하기 힘드니까 그만 가주세요.”
집중해야 한다면서 이노스는 손을 휘휘 저었다.
다시 검을 잡고 마법진을 그리는 그를 보고 마법 소녀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독기가 빠진 그들은 서로 소곤거리며 대화를 나누는 듯하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마, 계약한 악마와 통신을 하는 것일 터였다.
악마도 바보가 아닌 이상 여기서 드래곤인 티아마티스와 척을 지려고 하지 않을 테고 역시나, 마법 소녀들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물러났다.
“갔나?”
“간 것 같아요.”
“덕분에 살았어요.”
“고마우면 열심히 일해라.”
“아하하.”
“너희 왕, 오늘은 도망쳤지만 결국은 죽게 될 테니까.”
“윽.”
하긴 가르간트로 돌아가면 바이스가 캐물어 댈 테고 바이스 성격이면 홀로 쳐들어가서라도 릴리트의 목을 따버릴지도 몰랐다.
마른 침을 삼키는 비셰를 두고 티아마티스는 이노스의 마법진을 확인했다.
쓸데없는 녀석들의 난입으로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았다.
***
일순간 덮쳐온 암흑.
그리고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뒤따라온 빛.
글러티나는 환상 속에서 과거의 행복한 순간을 보게 되었다.
가족들이 모두 살아있었을 때. 그와 글라스가 어렸을 적의 풍경이었다.
항상 칙칙하고 어두운 모스피아의 성이건만, 어째서 그때의 기억은 이리도 밝아보이는 걸까.
작아진 손을 쥐었다 펴는 것을 반복한 끝에 글러티나는 부모님을 향해 다가갔다.
예전이라면, 이런 환상에 홀렸을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어린 딸을 향해 양팔을 벌리는 그들을 보고 그녀는 입을 열었다.
“…세르포그를 조사해주세요.”
“응?”
“그 아이를 도와주세요.”
어차피 환상이란 걸 알면서도 그녀는 한번,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리고, 그녀는 눈을 지그시 감고 환상에서 벗어났다.
거짓인 것이 너무나도 뚜렷하게 느껴졌기에 오히려 벗어나기가 쉬웠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여전히 시커먼 밤하늘 위에서 유영하고 있었다.
“허튼수작이었군. 누구 짓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러게 말이야.”
이베리카도 멀쩡히 하늘을 날고 있었다. 그 역시 환상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녀는 행복한 꿈을 보았지만 과연 그는 무엇을 봤을까.
일그러진 얼굴을 봐선 좋은 꿈을 꾼 것 같지는 않았다.
뜻하지 않은 방해가 들어와서 주춤거렸지만 다시 자세를 가다듬고 두 사람은 맞붙었다.
글러티나의 전투에 끼어들지 않고 프라우디에는 이베리카가 불러낸 뱀파이어들을 붙잡는 것에 열중했다.
물량 공세에 주머니를 열어 뼈를 꺼내 조종했지만 여전히 수적으로는 불리했다.
‘방해하면 안 돼.’
하나 그가 조종하는 해골 병사와 짐승들의 숫자는 뱀파이어의 수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랐다.
항상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눌러서 이겨왔었는데. 장소를 생각하고 적의 수를 생각하니 쉽게 손을 쓸 수 없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건 저 뱀파이어들이 두 사람의 전투에 걸림돌이 되지 않게 막는 것뿐이었다.
그림자에서 불러낸 뱀파이어들을 모조리 프라우디에가 막고있었기에 이베리카는 순전히 본인의 힘으로 글러티나와 맞섰다.
그럴듯한 날붙이를 들고 있지 않은 이베리카는 맨손으로 글러티나와 싸웠지만 그 힘이 굉장했다. 그의 손톱을 검으로 막으면서 글러티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까지 직접적으로 악마 계약자들과 맞서 싸운 건 프라우디에였고 그들은 변변찮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 뱀파이어라는, 인간 마법사에 비하면 강건한 육체와 힘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악마의 힘까지 받게 되니 꽤 버거웠다.
카가각.
검과 손톱이 갈리면서 금속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대치 중에 이베리카가 손으로 검을 감싸 잡고, 그대로 부러뜨리려는 듯 힘을 주었다. 그런 그의 옆구리를 걷어차고 글러티나는 검을 빼냈다.
손에 난 상처는 금세 아물었고 이베리카는 상처에서 난 피조차도 사라진 손을 툭툭 털었다.
아래에선 싸움이 한창이었다. 힐끗 발아래를 내려다본 뒤 이베리카는 다시 손을 들었다.
그의 손끝에서 일렁이면서 나타난 붉은 피가 여러 갈래로 흩어지며 화살처럼 변했다. 살짝 손가락을 움직이자 피 화살들이 글러티나를 향해 빠르게 쏘아졌다.
그것을 피하고, 검으로 쳐내면서 글러티나는 이베리카를 향해 달려갔다.
정면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검을 들어서 막자 피 화살은 형태를 바꾸어서 철퍽, 하는 소리와 함께 검에 달라붙고 글러티나의 얼굴로 튀었다. 그 피가 눈에 들어가지 않게 손으로 막자 타들어가는 통증이 느껴졌다.
치익, 하고 살이 타는 소리를 무시하고 글러티나는 검을 휘둘렀다. 이베리카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의 공격을 피했다.
검과 맨손, 손톱이 부딪쳤지만 두 사람 다 서로의 무기에는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글러티나의 검 끝이 이베리카의 어깨를 스쳤고 이베리카의 손톱이 글러티나의 옷을 찢었다.
뱀파이어인 두 사람은, 상대의 공격에 상처를 입고 그 상처에서 피를 보지 않기 위해 절제하면서 싸우고 있었다.
카각. 카가각.
요란한 소리가 어두운 밤, 하늘에서 울려 퍼졌다.
발밑에 디딜 곳이라고는 없는 공중에서. 그들은 고도를 낮추고 높이면서 서로의 위를, 아래를 노리면서 싸웠다.
쉽사리 결판이 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때, 그들은 강력한 마력의 파동에 흠칫 몸을 떨면서 일제히 한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밤이 밀려 나가고 환한 빛이 사방을 가득 채웠다.
불멸의 태양.
티아마티스가 이노스에게 쓰라고 알려준 마법 공식이었다.
밤을 물러나게 하고 얼마나 많은 빛을 뿜어내는지는 오로지 술사의 능력에 달려있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선 이것이 제일일 거라고, 티아마티스는 판단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기껏해야 황성만을 비출 정도. 빛도 막 전개했을 때나 강렬했지 점점 수그러들고 있고… 그래도, 나름 실력은 있는 건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티아마티스는 이노스를 보았다.
정교한 마법진을 그려서 연산을 보충하고 있다고 해도 이노스는 마력을 쭉쭉 빨리면서 마법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법진 위에 올려놓은 손을 바들바들 떨면서 이노스가 물었다.
“이, 이거 언제까지 하고 있어야…”
“네가 기절하기 전까지.”
“너무해….”
“그러니 얼른 저쪽이 끝을 내기를 빌어.”
무심히 대꾸하면서 티아마티스는 마법이 순식간에 허물어지지 않게 말없이 보조해주었다.
한편, 뿜어져 나오는 빛에 그림자가 사라지면서 이베리카가 소환한 뱀파이어들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이베리카가 멈칫한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글러티나가 검을 휘둘렀다.
밝은 빛에 몸이 괴로웠지만 버틸 수 있었다. 이베리카 역시 마찬가지였던 건지 다시 두 사람은 싸우기 시작했다.
악마의 능력을 쓰지 못한, 뱀파이어로서의 능력뿐이었지만.
글러티나는 이 빛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이란 걸 알고 빠르게 결판을 내려고 했다.
어둠이 물러난 하늘엔, 오로지 빛밖에 없었다.
몸이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평범한 일광이 아니었다.
악마 계약자인 이베리카에겐, 더한 고통일 테지.
과연 이베리카의 움직임이 살짝 느려졌고 글러티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챙! 카각-
이베리카의 손톱이 그녀의 검을 막으려고 했지만 글러티나의 공격에 그의 손톱이 부러졌다.
심장을 노린 찌르기에 이베리카는 양팔로 가슴팍을 가렸다. 찔린 오른팔에서 붉은 피가 번져 나왔다.
그녀가 검을 거둬들이자 오른팔이 힘없이 허물어졌고 글러티나의 검이 다시 그의 심장을 노렸다.
심장을 찌르고 그 피를 멸한다.
그것이 모스피아의 당주인 그녀의 능력. 피를 마르게 하는 힘이었다.
“커헉…!”
“헉… 허억…”
“결…국엔, 이렇게 되는군…”
이베리카는 더이상 저항하지 않았다. 벗어나려고 하지도 않고 조용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의 심장에 꽂힌 검을 바라보고, 그가 입을 열었다.
“마시지 않는 건가?”
“세르포그의 피는 독이니까. 너야말로, 그런 일족의 피를 마셨음에도 멀쩡하다는 게 신기하구나.”
심장에서부터 서서히 피가 말라가기 시작했다.
잠깐의 틈이라도 얻어보고자 내밀었던 오른팔보다 훨씬 빠른 침식이었다.
이베리카는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복수는 허무한 것이군. 그러나, 시작하지 않았다면 느끼지 못했을 귀중한 경험이다.”
복수를 후회하지 않는다.
그는 그렇게 말했다.
모든 뱀파이어를 죽인다. 거의 성공했을 그 계획을 실행한 그는 글러티나를 바라보았다.
“너는, 이제 어떻게 할 거지? 마지막 남은 뱀파이어로서.”
“이대로 조용히 스러져도 나쁘지 않지. 이전부터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살아가고 있었으니.”
“…그렇군.”
피가 말라가는 느낌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러나, 이베리카는 옅은 웃음을 흘렸다.
그가 모조리 죽이기를 원했기에, 멸했기에. 이제 이 땅에 뱀파이어는 몇 남지 않았을 터. 글러티나 말고도 몸을 숨긴 이들도 있을 테고 진작부터 가문을 떠나 살던 녀석들도 목숨을 부지했을 거다.
하지만 그 수가 많이 줄었으니까.
이젠 그들이 인간을 지배하기보단 인간을 두려워하며 몸을 피할 수준이 되었을 테니까.
그와 같은 존재는 생기지 않겠지.
담피르 같은 것도 나타나지 않겠지.
남은 이들은, 몸을 사릴 테니까.
그러니까-
“그것도 나쁘진 않군.”
“안드라스여, 나는 여기까지입니다.”
“…소원을 들어줘서 감사합니다.”
모스피아의 고유 능력인 피를 말리는 힘. 그리고, 누군가가 만들어낸 굉장히 밝은 빛.
이베리카는 눈을 감았고 모든 피가 말라버린 그의 몸은 조용히 무너져내렸다.
흔적도 남김없이,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기가 무섭게 태양이 사라졌다. 저것을 만들어낸 누군가의 힘이 다했다는 뜻이었다.
마찬가지로 빛에 타격을 입었기에 비틀거리는 글러티나를 누군가가 붙잡았다. 프라우디에가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으세요?”
“응. 끼어들지 않아 줘서 고마워.”
이걸로 된 걸까.
글러티나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복수는 끝났지만…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답답함이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