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이베리카 세르포그는 뱀파이어들 사이에선 결함이 있는 존재로 불렸다.
그의 아버지는 세르포그 가의 당주인 리만트 세르포그였지만 어머니는 유스티아라는 이름의, 인간과 뱀파이어의 혼혈인 담피르였다.
순혈과 혼혈의 결합으로 태어난 아이. 아버지인 리만트 세르포그의 둘째 부인에게서 나온 차남이었다.
인간의 피는 따지고 보면 얼마 섞이지도 않았건만 항상 꼬리표처럼 뒤따르는 말이 있었다.
처음 당주가 담피르를 아내로 삼았을 때부터 반대하던 이들은 이베리카가 뱀파이어의 특성을 더 많이 가지고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곱지 않은 눈으로 보았다.
세르포그가 터전을 잡은 곳은 통곡의 원이었다. 검은 숲에 비하면 좁은 그 땅을 향해 인간들은 깊숙한 곳까지 탐색을 오곤 했다.
그들은 뱀파이어들과 우호를 쌓기도 했으며 단순히 먹잇감이 되거나 연구의 희생양이 되기도 했다.
인간들이 통곡의 원 안으로 들어오는 것처럼 뱀파이어들 역시 통곡의 원에 있는 거처에만 있지 않고 그 밖으로 빠져나오기도 했다.
밖으로 나온 뱀파이어 중 누군가가, 인간을 사랑하여 혼혈을 만들었고 당주로서는 일족의 정체를 바깥으로 알릴 수 있는 혼혈의 존재를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래서 본래, 죽였어야 했을 혼혈이었지만 당주는 그녀와 결혼했다.
“…어머니.”
이베리카의 어머니인 유스티아는, 시간이 지날수록 메말라갔다.
인간과 같이 살 적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담피르인 어머니는 뱀파이어들의 틈에서 살기 시작하면서 급속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뱀파이어 자체의 기운에 적응하지 못할뿐더러, 생혈이 없으면 버티지 못했다.
임신 했을 적에는 출산이라는 고비를 앞둔 비효율적인 상황에 놓인 탓에 부족한 영양분을 공급하기 위해서, 라고 여겨졌지만 피에 의존하게 된 몸은 출산 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하나 자식인 이베리카는 그렇지 않았다.
생혈이 없어도 버틸 수 있었다. 마치 순혈들처럼.
그 모습이 다른 순혈 뱀파이어들의 입장에서는 보기 좋지 않았던 걸지도 몰랐다.
당주의 자식임에도. 그를 많이 닮았음에도.
어머니가 당주의 둘째 부인이라는 것. 담피르라는 것.
그것만으로도 다른 이들이 그를 배척하기에는 충분했다.
먹지 않아도 되는, 먹고 싶지 않은 피를 먹기를 강요당했다.
삼킨다면 그 어미에 그 자식이라고 욕할 것들은, 피를 삼키지 못하고 토해내니 인간의 피가 섞여서 그것조차 먹지 못한다며 그를 조롱했다.
그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의 이유에 ‘피’가 붙었다. 꼬리표처럼 항상 따라붙었다.
잦은 괴롭힘에도 그를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배다른 형은 그를 외면했으며 아버지는 무관심했다.
그런데도 그가 버틸 수 있었던 건, 나날이 약해져 가지만 항상 그를 사랑해주던 어머니 덕분이었다. 하나,
괴로운 나날을 보내던 중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생혈에 대한 의존이 점점 심해지는 걸 느끼던 어머니는 스스로 목을 매달아 죽었다.
더는 추한 모습을 보이기 싫다는 유서만이 남아있었다.
그는, 그것조차 누군가의 음모라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그 혼자만 이 끔찍한 곳에 놔두고 죽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실타래처럼 엉킨 생각, 추측, 상상. 그것이 툭 끊어지는 순간 비명처럼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 소리에 방을 기웃거리던 성의 하인들이 목을 매단 이의 시신을 보고 당주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매섭게 비가 오는 날. 안 그래도 초라한 장례식이 더욱 볼품없게 느껴지던 날에.
어머니가 땅에 묻혔다.
온몸으로 비를 맞으며, 진흙투성이가 되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괴로워하는 그를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예의상 장례식에 참석한 이들은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빠르게 흩어졌고 아버지인 당주는 제 할 일이 많아 서재로 돌아갔다.
무덤 곁을 떠나지 못하고 젖은 땅 위에 엎드려 목놓아 울고 있는 그에게 누군가가 다가왔다.
“…아직도 이러고 있느냐.”
“들어가자. 날이 춥다.”
내내 방관만 하고 있던 형님이었다.
그래도 가족이라고 여긴 건지. 그를 불쌍하게 여긴 건지.
제 몸에 진흙과 빗물이 묻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억지로 그를 무덤에서 떼어내 성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를 챙기지 않는 성의 시종이며 하인들을 질책하고 그가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것까지 보고 돌아갔다.
어머니를 잃은 배다른 형제를 딱하게 여기기라도 한 건지. 그 뒤로 조금씩 뒤를 봐주는 게 느껴졌지만 그것뿐이었다. 그 형님 또한 직접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제 편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외딴 성에서 이베리카 세르포그는 성장했다.
혼혈인 그는 후계 경쟁에서 방해물이 되지도 않았다. 혼혈이니까.
그는 그 성에서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존재였다. 그나마 우호적인 성향을 가진 이들이 시종으로 옆에 붙었지만 그는 그마저도 거절했다. 아버지와 형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키가 훌쩍 자라고, 어머니가 자주 이야기해주었던, 아버지와 처음 만났을 적의 나이가 되었을 때.
아버지인 당주가 본인의 죽음을 결정했다.
뱀파이어는 자연적인 제 수명을 살다 죽기도 하지만 제 삶을 더이상 이어나갈 필요를 느끼지 못해 후계자에게 제 모든 것을 물려주고 죽음을 선택하기도 했다.
아버지인 당주는 후자였다. 스스로 제 삶에 마침표를 찍을 날을 정했다.
죽을 때까지 그에게는 아무 말도 해주지 않을 아버지라고 여겼건만. 아버지는 형님에게 유언과 제 피를, 힘을 다스리는 방법을 넘긴 뒤 그를 보기를 원했다.
죽음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침실에는 아버지와 그, 둘 뿐이었다.
권한 의자에 앉지 않고 그는 아버지를 내려다보았다.
“…많이, 컸구나.”
“네.”
“…미안하다.”
절대로 듣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말이었다.
이베리카는 침묵했다.
침묵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왜, 어머니와 결혼하셨나요.”
“왜 데려온 거에요.”
“왜 나를 가지게 해서 그렇게 괴로워하게 만든거에요?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다가 죽을 줄 알았다면, 붙잡지 않았을 건가요?”
“지켜주지도 못할 거면서! 왜 여기서 살게 했던 거에요!”
죽어가는 이의 앞에서 이베리카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동안 묻고 싶었지만 물을 수 없었던 말들이었다.
가라앉은 눈을 한, 죽음을 앞둔 아버지가 마른 입술을 움직였다.
“…미안하다.”
미안하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그는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 자리에 끝까지 있지 못하고 그는 방 밖으로 나왔다.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형님에게는 아버지가 더 할 말이 있는 것 같으니 들어가 보라고 했다.
형님은 혼란스러워했지만 이내 방 안으로 들어갔다. 고요히 가라앉은 그곳에서, 이베리카는 걸음을 돌렸다.
아버지의 사망 후. 형이 당주가 되었다.
가문의 뱀파이어들이 그의 처분에 관해 물었다. 형님은 침묵했다.
아버지가 죽은 지금. 형님이 그를 보호해줄 이유도 의무도 없었다. 그것을 알기에 뱀파이어들은, 자신들의 폐쇄적인 공동체에 뱀파이어와 담피르의 혼혈이라는 불순한 존재를 남겨두고 싶지 않아 아우성치었다. 그 대상이 눈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침묵 끝에 형님은 입을 열었다.
그저, 조용히 있기를 원한다고 했다. 그것이 당주의 뜻이었기에 뱀파이어들은 불만스러워하면서도 명령에 따랐다.
그놈의 지겨운 피. 그것이 무엇이 중요하다고. 너희는 나와는 다른 거냐?
항상 그에게 따라붙는 혼혈이라는 단어. 그것이, 그리도 중요하다는 말인가.
다른 이의 피를 마시며 살아가는 괴물인 주제에 어째서 자신들이 다른 이들보다, 인간보다 고귀하다고 여기는 것인가.
늘 무력하고, 힘없이 웅크려있던 그에게 처음으로 살의란 감정이 발아한 날.
그에게, 마침 자신의 대리인을 해줄 누군가를 찾고 있던 악마가 다가왔다.
“…뭐야. 별거 없었잖아.”
손끝에 묻은 피를 핥으며 그는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멸시하는 눈으로 보기에, 경멸하기에 나와는 다른 줄 알았더니.
바닥을 채운 수십 구의 시신과 피 웅덩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를 깔보고 무시하던 이들은, 뱀파이어들은, 지금 모조리 그의 손에 참살당했다.
세르포그의 일족이 모두 모인 그날은.
간략하게 이루어지는 형님의 언약식의 날이었다. 그리고 그날, 세르포그는 멸족했다.
단 한 명도 남김없이 남김없이 그가 먹어 치웠다.
언약식에 그가 난입하자 뱀파이어들은 마치 그때를 기다린 것처럼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그저, 언약식이 이루어지는 그 장소에 한 걸음 들어온 것뿐이었다.
그를 죽이려 드는 이들을 죽이자 앉아있던 다른 뱀파이어들도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님은 그들은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눈엣가시 같던 혼혈을 처리할 기회라고 여긴 뱀파이어들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들었다면 무언가가 달라졌을까. 가라앉은 눈으로 이베리카는 수많은 시신 사이에서 형님의 시신을 꺼냈다. 다른 이들에 비하면, 비교적 평온하게 눈을 감은 모습이었다.
- 충분한가?
힘을 준 악마가 물었다.
이걸로 충분하냐고.
아직, 증오하는 뱀파이어는 많이 있지 않냐고.
…뱀파이어와 인간의 혼혈은 담피르라고 불린다.
그들은, 과거 뱀파이어의 개체 수가 그리 많지 않았고 인간과 적대하면서 활동했을 적에 뱀파이어를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일컬어졌다고 한다.
그럼 나는 무엇일까.
담피르와 뱀파이어의 혼혈인 그는 대체 무엇이라고 부르면 좋을까.
- 이대로 끝낼 셈이냐?
“아뇨. 다른 뱀파이어들을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네요.”
흩어져 산다면 모를까. 그 고집스러운 종족들은 가문별로 한 군데 콕 틀어박혀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으니.
당주들끼리 주고받는 서신을 확인한다면 위치쯤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안고 있던 시신을 내려놓고 그는 죽인 이들의 시신을 밟으면서 앞으로 걸어갔다. 문 바로 앞까지 가서야, 그는 잊어버릴 뻔했다면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발밑에서 자란 그림자가 점점 부풀어 오르더니 홀 안을 가득 채운 시체를 모조리 삼키고 사라졌다.
***
“나한테, 일족이란 게 있나?”
그 말에 글러티나는 무슨 일이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세르포그의 가주가 담피르를 부인으로 삼았음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생이 이베리카 세르포그였다.
혼혈이 그 폐쇄적인 공동체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을지는, 그녀 역시 익히 짐작이 갔다.
“…확실히, 내게도 변명의 여지가 없군.”
그녀도 그땐 어렸지만 그 결혼을 반대했다면 좀 더 나았을까.
이베리카가 아무 이유 없이 날뛰면서 뱀파이어들을 학살하진 않았을 거다. 하지만…
“너 혼자서 덤빈 건 아닐 텐데. 그때, 나 역시 그 자리에 있었다. 적은 다수였지만 지금의 넌 혼자지. 분명 무슨 방법이 있을 터.”
글러티나는 이베리카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어두운 밤.
새까만 하늘 위에서 두 명의 뱀파이어가 마주 보고 서서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대, 세르포그의 아이여. 너 역시 악마와 계약한 건가?”
“그러는 당신은 어떻지?”
“나는 아니다. 다만.”
글러티나는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가 이베리카를 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 내가 지키고 있는 나의 친우가 계약자이다. 그러니 그를 위해서라도, 나는 그대를 막아서겠다.”
글러티나는 일족의 복수를 언급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 있는 이베리카를 일족의 배신자나 원수라고 말하지 않고, 그저 카이엔에게 위협이 될만한 악마의 대리인이라고 정정했다.
그 모습에 이베리카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편, 티아마티스는 프라우디에가 기운을 가다듬는 것을 감시하고 달이 멀쩡해진 것을 확인한 뒤에야 안도했다.
하마터면 저기 있는 뱀파이어가 아니라 프라우디에 때문에 제국이 망할뻔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생각 없이 무슨 짓을 하려고 했던 거냐며 그는 프라우디에를 혼냈다.
“이상한 거 막 불러 내지마! 다음에 또 그러면 쥐어 박는 걸론 안 끝날 거다!”
“그치만…”
“그치만은 무슨. 난 이제 황자 쪽으로 가본다.”
“네?”
“거기에 자네인이랑 그 황자 놈만 두고 왔잖아. 그리고.”
티아마티스는 이베리카를 힐끗 보며 말했다.
“황성이 죄다 갈려 나가게 둘 수는 없으니. 일단, 티 안 나게 이노스 황자에게 간섭해볼 생각이다. 겔로스도 망했는데 제국까지 망하면 그 땅덩어리 노리고 전쟁이 날 텐데 난 그 꼴 못 본다.”
“네에…”
“넌 여기 있어라.”
그 말만 하고 티아마티스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훌쩍 가버렸다.
그제야 프라우디에는 적과 대치하고 있는 글러티나를 볼 수 있었다. 두 사람은 공중에 서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치, 상대방이 먼저 움직이는 걸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나 혼자 덤벼든 건 아니었지. 그저…”
먼저 손을 쓴 건 이베리카였다.
하늘에 떠 있던 그들의 그림자는 구름이 지나가면서 달빛에 어렴풋이 드러났다. 지면에 드리워진 작은 점과 같았던 이베리카의 그림자가 점점 커지고 불어나기 시작하더니 그 안에서 무언가가 솟아올랐다.
그것들은, 모조리 뱀파이어였다.
“내가 잡아먹은 녀석들이 움직이는 것뿐.”
피를 취하고 그 시체를 거두었다. 그것이, 악마가 그에게 선사한 힘이었다.
죽인 이를 마음대로 써먹을 수 있으니 난전을 벌이기 좋을 것이라며 그 악마는 웃었다. 덕분에 시간이 지날수록 뱀파이어들을 죽이는 게 쉬웠다며 이베리카는 고개를 숙여 발아래를 확인했다.
그가 조종하는 수백 명의, 생전처럼 움직이는 인형들이었다.
이베리카의 능력에 글러티나는 크게 놀랐다. 그리고, 어째서 얼굴을 가리거나, 가리지 않고 그들을 습격했던 자들이 그토록 강했는지 알게 되었다.
이베리카에게 당해 잡아먹히긴 했지만 그들 역시 뱀파이어였을 테고 모스피아 가문은 맨 마지막에 공격당했으므로 그 많은 가문이 뒤섞여있었던 것이다.
뱀파이어 혈족의 수는 그리 많지 않다. 개체 수를 잘 늘리고 싶어 하지 않는 경향이 강했으니까. 하나 저 규모를 봐선 그 불문율을 어긴 가문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림자에서 솟아오른 뱀파이어들의 수는 상당히 많았다. 긴장한 그녀에게 이베리카가 물었다.
“당신이 마지막 뱀파이어입니까?”
“너를 제외한다면, 그럴지도 모르지.”
바보 같은 동생놈.
글라스를 떠올리고 글러티나는 입술을 비틀었다.
그 대화를 끝으로 이베리카가 움직였다. 정확히는, 그가 불러낸 것들이 일제히 글러티나를 향해 덤벼들었다.
그저 피를 탐하는 괴물이 되어버린 그것들을 피하면서 글러티나는 검을 움직였다. 이베리카는 지켜보기만 할 생각인 건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공중으로 날아드는 뱀파이어들을 검으로 베어 떨어뜨리면서 글러티나는 이베리카를 보았다. 자신이 불러낸 뱀파이어들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긴 건지, 그는 그저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확실히 이 정도 숫자가 떼로 덤벼들면 부담스럽긴 하지.
그래서, 그때도 무력하게 당하지 않았던가.
하나 또다시 질 생각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