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이노스는 실혈증에 대해 조사하면서도 평소처럼 지내고 있었다.
조금 늦게 잠자리에 들긴 했지만 피곤했던지라 금세 잠이 들었고 아무 생각 없이 쿨쿨 잘 자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져서 번쩍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조금 전까지 그가 누워있던 자리에 시퍼런 칼날이 박혔고 이노스는 방어 목적으로 마법을 사용했다.
실혈증에 대해 조사하는 와중에 그의 방까지 들어와서 죽이려 드는 놈이 적이 아닐 리가 없다.
그런 생각에 마법부터 썼는데 그의 손에서 폭발하듯 튀어 나간 파이어볼은 침입자는 물론이고 그의 방 절반을 날려버렸다.
콰과광!!
쿠릉… 쿠르릉-
덕분에 멀쩡했던 벽이 날아가면서 돌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어.”
망했다.
혼나겠다.
그 생각부터 들어서 이노스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연기가 풀풀 나서 시야를 가리자 이노스는 마법으로 바람을 불러와서 연기를 걷어냈다.
거참, 뛰어난 스승님한테 배우는데 왜 이렇게 조준이 엉망인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눈물이 날 정도의 조준력과 위력이었다.
그러나 그가 방을 날려버린 보람이 아예 없진 않았다.
누가 그를 죽이려 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연기가 걷히고 난 다음에 보니 무너진 건물 잔해에 깔린 사람이 꽤 많았다.
저 사람들도 조종당했을 테니 제 의지는 없었을 테지만…
“어어…”
저렇게 무거운 잔해에 깔렸으니 죽었겠지?
이노스는 침음하며 애써 시선을 돌렸다.
이 와중에, 저 튀어나온 팔다리 주변에 무기들이 떨어져 있다는 것만이 그를 위로해주었다.
“아아- 어쩔 수 없지. 그것보다, 전부 이쪽으로 온 건가?”
그의 궁은 3층으로 되어있었고 그는 3층에서 지내고 있었다. 아까 쓴 마법 덕분에 방 절반이 날아가면서 천장 또한 시원하게 무너져내린 탓에 밤하늘이 보였다.
가구와 커튼 등에 옮겨붙은 불은 꺼지지 않았고 소란에 아래층까지 불이 옮겨간 건지 활활 잘 타고 있었다.
밤중에 불난 건물이라니. 눈에 띄기 참 좋았다.
그 덕에 황성으로 숨어둔 괴물들이 전부 이쪽으로 몰려들었다.
“…차라리 이편이 낫네요.”
다른 형제들이나 사샤쪽으로 안 가고 이쪽으로 와서 다행이라면서 이노스는 주변에 굴러다니는 검을 하나 챙겼다.
뚫린 벽이나 구멍을 통해, 혹은 벽을 타고 기어 오는 인간형의 괴물들은 주변의 불길 때문인지 더욱 악귀같이 보였다.
몸을 비틀면서, 괴상한 소리를 내면서 달려드는 것들을 검으로 베어버리면서 이노스는 주변을 살폈다.
그의 검은 위력이 약해서 단칼에 구울을 죽일 수 없었다. 베여도 잠깐 주춤하거나 아무렇지도 않게 돌진해오는 놈들을 보며 이노스는 경악했다.
“으아아악!!”
도망치랴 공격하랴, 이노스는 정신이 없었다.
여기서 더 궁이 무너져내릴까 봐 마법을 자제하려던 그였지만 반쯤 무너진 성보다는 그의 목숨이 더 중요했기에 어쩔 수 없이 마법을 썼다.
몸에 불이 붙어도 달려드는 놈들에게 얼음 칼날을 선사해줬는데 그대로 구울들의 사지를 잘라버리고도 앞으로 나아간 얼음들은 위태롭게 버티고 있던 벽을 무너뜨렸다.
비명을 지르면서 이노스는 구울들에게 계속 마법을 썼다.
그럴 때마다 불이 옮겨붙거나 더 거세지거나 주변이 무너져내리는 등,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으악! 왁! 으와악-!! …어?”
정신없이 싸우느라 온몸이 먼지며 재투성이가 된 이노스는 뒤에서 달려드는 구울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미처 피할 수가 없어서 이대로 끝인가 싶어서 눈을 질끈 감았는데 이상하게 잠잠해서 슬며시 눈을 떴다. 그에게 덤벼든 구울은 검에 꽂힌 채 한쪽 벽에 처박혀있었다.
“어… 어어… 에엑?!”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격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로 주변을 살피던 이노스는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도 없었는데, 고개를 돌리니 초로의 남성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백발을 말끔하게 뒤로 넘긴 노신사는 제국의 후작 중 한 명인 웨이버 빌헬름이었다. 그는 이노스를 보고 뚱하니 대꾸했다.
“뭘 보고 놀라십니까?”
“후작이 왜 여기에…”
“폐하와 이야기를 나눌 것이 있어서 어제 황성에서 묵었습니다.”
“아… 아아~”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지.”
“빌헬름 후작은 저번에도 제 편을 들어줬잖아요. 카이엔을 만나고 난 후였나, 아무튼. 그래서 혹시나 했죠.”
“흠. 의심하진 않으십니까?”
“에이, 그럴 필요 없어 보이는데요?”
손을 저으며 이노스는 떨어뜨린 검부터 챙겼다.
빌헬름 후작까지 견제하기엔 주변에 적이 너무 많았다. 빌헬름 후작은 제국에서도 검술에 일가견이 있는 거로 유명하니 도움을 좀 받아야겠다며 그가 말했다.
“저 도와주려고 여기까지 오신 거 맞죠? 일단 이 괴물들을 다 없애고 사샤에게 가야겠어요!”
“돕기는 하겠습니다.”
등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이렇게 든든했었나?
의아함은 잠시 접어두고 이노스는 다시 싸움에 몰두했다. 그러나 검만으로 구울과 맞서기엔 무리여서 궁을 더 부술 각오를 하고 마법을 썼는데 그의 마법이 구울과 함께 불타고 있던 가구가 있던 바닥 한쪽을 통째로 무너뜨린 걸 보고 빌헬름 후작… 티아마티스가 혀를 찼다.
“도대체 왜 실력이 그 모양이신지…”
“아 왜요!!”
“재능이 있으신 건지 없으신 건지.”
“그럼 좋은 스승이라도 소개해주시던가요!”
“황자 자리를 버리고 일반인이 되실 생각이 있으시다면야.”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요?”
그 물음에 빌헬름 후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에잉, 나중에 꼭 알려줘요!”
이노스도 투덜거리기만 할 뿐, 그에게 대답을 촉구하지 않았다.
찜찜한 기분 탓에 황성에 하루 머물다 가기로 했던 티아마티스는 직감이 들어맞은 것에 한숨을 쉬었다.
자네인이 다른 이들과 함께 제국에 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난리가 났는데도 보이지 않는 거로 봐선,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어디쯤 있을지 확인해본 그는 쯧 하고 혀를 차곤 손가락을 튕겼다.
“ 뭐 하세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무렵, 글러티나와 프라우디에, 자네인은 황성을 향해 이동 중이었다.
다만 방향을 잡기가 어려워서 중간중간 멈춰서 제대로 나아가고 있는지 확인하느라 시간이 걸렸다. 육로를 통하는 것보단 빨랐지만 지체되는 시간이 있으니 마음은 더욱 조급해졌다.
그러던 중 그들의 앞에 갑자기 거대한 포탈이 생겼다. 난데없이 나타난 그것에 자네인은 화들짝 놀랐지만 포탈에서 느껴지는 티아마티스의 마력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이 그의 안배인 것을 알고 그녀가 말했다.
“티아마티스 님이 보내신 것 같아. 들어갈게.”
두 사람을 등에 태운 자네인이 포탈을 통과했고, 그들은 순식간에 황성에 도착했다.
눈에 보이는 황성의 모습에 글러티나가 탄성을 내뱉었다.
“화…황성?!”
“어쨌든 도착해서 다행이에요!”
“저쪽에서 연기가 나는데… 이노스 황자의 궁 아닌가?”
“아.”
“제가 황녀님과 비셰 씨가 있는 곳으로 갈게요. 자네인, 글러티나 씨와 함께 일단 이노스 황자님께 가주세요!”
“응.”
프라우디에는 자네인의 등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흑마법으로 만든 검은 날개를 등에 붙이고 그는 사샤가 있는 궁으로 향했다.
불타고 있는 이노스의 궁을 향해 괴물들이 몰려들고 있어서 사샤의 궁은 상대적으로 한적했다.
퉁퉁하고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아래를 확인하니 그를 발견한 비셰가 차마 창문을 열지는 못하고 유리만 두드리고 있는게 보였다.
살포시 미소를 짓고 프라우디에는 궁 근처를 서성이는 구울부터 모조리 처리했다.
땅에 솟아오른 검은 가시들이 구울들을 꿰뚫더니 몸집을 불려, 그것들을 모조리 집어삼키고 땅속으로 녹아들었다.
‘결계라도 설치해야 하나?’
다른 곳이 더 위험할지도 모르고, 지금 괴물들의 시선을 이노스가 잡아끌고 있으니 차라리 이곳이 안전할지도 몰랐다.
프라우디에가 잠시 생각에 잠겼을 때. 적막을 깨고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흑마법사? 계약자도 아니면서 흑마법사라고?”
“헛…!”
낯선 이의 목소리에 프라우디에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고 뒤로 물러났다.
방금까지 아무도 없었건만. 달을 등지고 선 채, 누군가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
눈동자가 붉은빛으로 빛나는, 장신의 사내였다.
암녹색 머리카락을 리본으로 낮게 묶고 있는 그는 이상하다는 눈으로 프라우디에를 응시했다.
“다른 악마의 계약자가 아니라면, 굳이 힘 빼면서 싸워 봤자인데.”
“당신이 이 사태의 주범인가요? 그림자에서 살아가던 뱀파이어 일족, 그 4개의 가문을 모조리 파멸시킨 게 당신인가요?”
“그런 것까지 알고 있다니 보통 인간은 아닌 모양이군. 인간 냄새가 나는 것 같지도 않고.”
악마.
그 말이 나오자 프라우디에가 사내에게 물었다. 그는 정확한 대답을 해주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뱀파이어로 추정되는 청년은 프라우디에를 붙잡으려는 듯 달려들었지만 프라우디에는 잽싸게 그 손을 피했다.
힐끗 비셰와 사샤가 있는 방을 확인하고 프라우디에는 이 뱀파이어의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기로 했다.
“당신을 벌할 권한이 있는 건 제가 아니라 글러티나 씨예요. 하지만, 저 역시 당신에게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많은 사람을 괴물로 만들어버린 건지에 대해서죠.”
“흠. 그래서 황성에 있었던 건가?”
“일반 백성이 아닌 황녀가 당했으니, 당연히 전문가를 부를 수밖에요.”
“하하! 그래서 네가 그 전문가라는 거냐?”
“조금은 그렇지 않을까 싶네요.”
다행히 적은 그를 얕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린아이 같은 외모인 프라우디에니, 그럴 만도 했다. 프라우디에는 조용히 속으로 리치왕을 불렀다.
‘어떻게 해야 하죠? 이길 수 있을까요?’
- 글쎄. 일단 겉모습만 번드레 한 것 같진 않은데.
‘엑.’
- 글러티나에게 들었다시피, 저놈은 제힘만으로도 세 개의 뱀파이어 가문을 모조리 없애버렸다고 했잖아. 가까이 붙지 마라. 네 몸에 흐르는 피는 독룡의 것이며 네 심장은 역대 최악의 리치의 것이기에 검은 마나로 물들어있지만 뱀파이어에겐 그리 큰 위험이 되진 못할 테니.
“주의할게요.”
마지막 한 마디는 목소리를 내어서 말하고 프라우디에는 거대한 낫을 소환했다.
제 키만 한 사슬 낫을 휘두르면서 프라우디에는 뱀파이어를 향해 덤벼들었다. 뱀파이어는 그의 공격을 가볍게 피하면서 반격했지만 프라우디에 역시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낫에 휘감겨있던 사슬이 프라우디에의 마력에 반응해 뱀파이어를 향해 달려들었다.
팔을 휘감은 사슬에 매달린 추가 프라우디에가 마력을 부여하자 순식간에 그 무게를 불렸다. 잠시 뱀파이어가 휘청거린 틈을 타 프라우디에가 낫을 휘둘렀다.
몸을 숙여 공격을 피한 뱀파이어가 프라우디에를 걷어찼다. 몸을 말고 낫의 손잡이 부분으로 발차기를 막은 프라우디에가 사슬을 잡아당겼다.
무게 감소. 되감기.
차르륵 사슬이 감기면서 뱀파이어가 끌려왔어야했 지만 그는 끌려오지 않고 버티고 선 채로 붙잡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제 팔을 감은 사슬을 붙잡았다.
카르륵.
쇠 긁히는 소리가 나면서 사슬의 파편이 후두둑 아래로 떨어졌다.
무덤덤한 시선이 프라우디에를 향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네가 계약자가 아니라면 난 너를 상대할 필요가 없다.”
“저는 있어요. 당신이 이곳에 위협이 되는 이상, 막을 겁니다.”
“…상관없으려나.”
귓가에서 벌레가 윙윙거리기라도 하는 건지, 살짝 인상을 쓰며 그는 오른쪽 귀를 손으로 탁탁 털었다.
방해될 게 분명하니 귀찮긴 하더라도 처리하고 가야겠다는 반응. 프라우디에는 두 손으로 낫을 꼭 쥐었다.
프라우디에가 갑자기 등장한 누군가와 맞서 싸우는 걸 확인하고 비셰는 사샤의 손을 잡았다.
“황녀님, 일단 이노스 님께 가요. 그곳에 다들 계실 거에요.”
“밖은 위험하다면서?”
“이젠 괜찮아요.”
프라우디에가 바깥의 구울들을 모조리 처리해준 데다가 적으로 추정되는 이의 시선도 끌어주고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이곳에서 빠져나갈 기회가 없다.
“성물 잘 가지고 계셔요.”
안 그래도 어두운 밤에 위에서는 싸우느라 집중하고 있을 테니, 말이라도 타고 이노스의 궁으로 가야 했다.
이성이 없는 구울에게는 몽마의 능력이 통하지 않으니 비셰는 남성체로 모습을 바꾸고 사샤를 업은 채로 방 밖으로 달려 나왔다.
건물 안에 있는 구울들을 피하면서 복도를 달리고 계단을 뛰어내리면서 구울을 밟고 가는 기행을 선보이면서 비셰는 이를 악물었다. 급하게 마구간으로 가서 말을 하나 뺀 다음에 사샤를 앞에 태우고 그가 뒤에 타서 말 고삐를 잡았다.
여성체일 때보다 남성체일 때 근력이 조금 더 강했다. 비셰는 지치긴 했지만 바로 말을 몰았다.
“꽉 잡으세요!”
프라우디에가 이곳에 있다면, 괴물들이 몰려갔을 이노스의 궁엔 자네인과 글러티나가 있을 거다.
그 혼자서 사샤를 보호하는 게 역부족이니 그쪽이 더 안전할 것이라는 계산 하에 비셰는 서둘러 움직였다.
조용히 해주면 좋으련만, 그의 속도 모르고 말은 히힝 하는 울음소리를 내면서 몸을 비틀다가 겨우 그가 원하는 대로 앞으로 달려 나갔다.
뒤에서 누가 공격이라도 하면 큰일이라 사샤를 앞에 태운 비셰는 한 손으로는 고삐를, 다른 한쪽 팔로는 사샤를 붙잡고 말을 타야 했다. 승마 해본 적이 드물어서 말은 속도를 잘 내지 못했다. 보다 못한 사샤가 두 손으로 고삐를 움켜쥐었다.
“내가 움직일 테니까 나만 잘 잡고 있어!”
“네? 네에…”
“말 안 타봤어?”
“탈 일이 없어서…”
“하긴 그러겠네.”
귀족들이나 취미나 교양으로 승마를 하고 평민들은 애초에 말을 탈 만한 일이 거의 없다.
교양으로 승마를 배운 적이 있기에 사샤는 비셰보다 능숙하게 말을 몰았다. 황성의 지리는 비셰보다 그녀가 더 잘 알고 있었기에 방향을 잡는 것도 수월했다.
비셰가 고삐를 잡았을 때와 말이 달리는 소리부터가 달랐다.
다그닥거리는 소리에 근처에 퍼져있던 구울이 접근했다. 비셰가 할 수 있는 것은 미숙한 마법이나마 사용하면서 구울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뿐이었다.
위력이 강하지 않아도 달려오는 놈들이 발 디딜만한 곳의 땅을 들어 올려 넘어지게 하거나 얼음 마법으로 눈을 얼려서 시야를 가리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도망치던 와중 비셰가 외쳤다.
“황녀님, 오른쪽으로요!”
“뭣…”
다급한 목소리에 사샤는 급하게 고삐를 잡아채 말의 방향을 틀었다.
비셰가 사샤를 감싸 안았고 그의 팔을 스치고 날아온 붉은 가시가 지면에 꽂혔다.
놀란 말을 진정시키느라 사샤가 급하게 손을 썼고 비셰는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프라우디에가 시선을 끌어줬음에도, 적이 그들을 눈치채버렸다.
“아하. 역시나.”
“이쪽에 집중하는 게 좋을 텐데요.”
“노리기 쉬운 것이 저쪽에 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다른 뱀파이어들도 그런 식으로 죄다 죽인 건가요?”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 들었냐는 말이었다. 그 말에 뱀파이어는 인상을 썼다.
아랑곳하지 않고 프라우디에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대로 둔다면 저자는 그를 피하면서 비셰와 사샤를 노릴 테고, 그들을 쫓아간다면 필히 이노스의 궁에 도착하게 된다.
이런 위험한 인물을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기에 프라우디에가 입을 열었다.
“화려하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어차피 밤이니 괜찮겠죠.”
보는 눈도 없고.
어차피, 구울때문에 민간인 피해도 났을 테니까.
여기서 좀 더, 큰 사고가 나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판단하에 프라우디에는 결정을 내렸다.
오늘 밤은 제국 최악의 날로 기록이 될 것이다.
프라우디에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고요한 눈동자에 붉은빛이 스산하게 맴돌았다.
악마 계약자라면, 대리인이라면. 카이엔에게도 해가 될 존재니까.
가르간트도 아니고 제국에서 벌어지는 일은 제국에서 해결해줄 수 있을 테지.
프라우디에의 기세에서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뱀파이어는 아래를 한번 내려다본 뒤 프라우디에에게 시선을 돌렸다. 지금은 이쪽이 더 위험해 보였다.
검 보랏빛을 띄던 마력에 붉은 기운이 뒤섞였다.
음산한 기운이 더더욱 짙어졌다.
일렁이는 마력에, 달이 갈라지는 듯한 착시가 보였다.
보름달에 금이 가는 듯하더니 그 사이에서 무언가가 그 틈을 비집고 나오려고 했다.
그것은 거대한 눈알이었으며, 누군가의 손가락인 것 같기도 했다.
구멍을 좀 더 넓히려는 듯 갉작이는 소리가 들렸다. 손톱으로 긁어내는 듯한 소리였다.
기괴한 풍경에 뱀파이어가 헛웃음을 흘렸다.
“…하.”
이놈은 도대체 정체가 뭐지?
뱀파이어는 날카로운 눈빛을 한, 작은 흑마법사를 보았다.
저 안에서 무언가가 넘어오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위험해 보였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저 멀리서부터 날아온 누군가가 그를 지나쳐 프라우디에에게 향했다.
심각함을 눈치채고 달려온 티아마티스는 냅다 프라우디에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멍청아! 힘 조절하려면 제대로 해라!”
“으앗!”
“늦지 않아 다행이네요. 내려주시죠.”
티아마티스에게 들려서 함께 온 글러티나가 옷을 툭툭 털며 덧붙였다.
프라우디에가 사샤에게 가고 자네인과 글러티나는 이노스에게 갔다가 빌헬름 후작으로 움직이고 있는 티아마티스와 만났다. 어떻게 해야 하나 작전을 짜던 중 티아마티스가 짜증을 내더니만 대충 상황 설명을 해주고 글러티나와 함께 날아온 것이었다.
어느새 빌헬름 후작의 모습을 벗어던진 티아마티스는 프라우디에를 혼내기 시작했고 글러티나는 바로 서서 프라우디에와 맞서고 있던 뱀파이어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아는, 인물이었다.
“이베리카 세르포그.”
“나를 아나?”
“수장 회의에서, 얼굴을 본 기억이 있다. …많이 컸군.”
이베리카라고 불린, 암녹색 머리카락의 뱀파이어는 피식 웃었다. 그 모습에 글러티나는 인상을 썼다.
이베리카 세르포그는 매우 조용하고 유순한 성격이었던 걸로 기억했다. 하나, 이 자리에 서 있는 그는 다른 뱀파이어 일족을 몰살시킨 주범으로 추정되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토록 찾아 헤매던 원수가 눈앞에 있음에도 글러티나는 차분했다.
“네가 왜 그런 짓을 한 건지 모르겠군. 지금 꼴을 보아하니, 동족을 모조리 먹어 치운 건가? 네 일족마저도?”
“일족?”
그녀의 물음에 이베리카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가 지은 표정은, 자조와 경멸로 물들어있었다.
“나한테, 일족이라는 게 있긴 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