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황성에서 잠복한 지 사흘째 되는 밤.
아직 누군가가 접근하는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글러티나는 궁전의 지붕 위에서 황성의 전경을 살폈다.
평온한 밤이었다.
‘대체 누굴까.’
네 개의 뱀파이어 혈족.
과연 그중에 누가 배신자일까.
누가 모두를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어버린 걸까.
글러티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약한 바람에 은빛 머리카락이 흩날렸고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고 입을 열었다.
“…비셰?”
“아. 금방 알아차리시네요?”
“그 정도야 뭐…”
글러티나는 말끝을 흐렸다. 비셰는 창밖으로 몸을 반쯤 내밀고 있었다.
그러더니 그는 낑낑거리면서 지붕 위로 올라왔다. 겨우 올라온 비셰는 한숨을 푹 쉬더니만 물었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세요?”
“글쎄… 마음에 걸리는 건 있지.”
“괜찮을 거에요. 저희도 있는 힘껏 도울게요.”
“고마워.”
미소 띤 얼굴로 글러티나는 비셰를 바라보았다.
그에 화답하듯 비셰도 밝은 표정을 지었는데 그런 그를 향해 글러티나가 물었다.
“넌 괜찮았어? 스토커를 피해서 가르간트로 온 거였잖아.”
“다행히 별일 없었어요.”
“남자인 널 쫓아다닌 거야 여자인 널 쫓아다닌 거야?”
“남자 쪽이에요. 쫓아다니던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지만요.”
조금 쓴웃음을 지으며 비셰가 말을 이어나갔다.
“귀족 아가씨였어요. 아르젠 실루이타와 연결된 다른 곳은 여성을 전담하는 몽마들이 있는데 남성체로는 그쪽에서 일하거든요. 술이나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하고 공연을 해요. 예전에, 결혼을 앞둔 아가씨가 제게 고백해서 돌려보낸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얼마 뒤에 자살을 해버렸고, 살짝 우울해진 와중에 집착이 심한 다른 아가씨가 생겨버린 거에요. 으음… 그쪽은 받아주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고 해서 다른 몽마들의 도움으로 기억을 지웠지만 절 보면 다시 떠올릴까 봐 잠시 피해있기로 한 거에요.”
“스토커는 아니었구나.”
“구구절절 늘어놓을 만한 일은 아니니까요. 스토커이기도 했지만요.”
카이엔이 그 말을 믿어줘서 다행이었다며, 비셰는 고개를 숙였다.
어쩌다 보니 다시 제국으로 와버리긴 했지만 이번 일만 끝나면 돌아갈 테니 그 아가씨와 만나는 일은 없을 테고.
그 이외의 다른 몽마들도 그런 식으로 이상한 인간들과 엮이는 일이 많았다. 주로 여성형으로 일하는 몽마들이 그러했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남성체로 모습을 바꿔서 일하거나 대충 맞장구쳐주면서 연기를 하곤 했다.
“몽마들은 오래 살아요. 좀 더 쉽고 안전하게 정기를 빼내서 먹으면서 살아가기 위해 인간인 척 그 틈에 섞여서 살아가고 있죠. 이쪽이 그나마 제일 괜찮아 보였거든요.”
인간이 만들어낸 어둠에 살짝 발을 들여서 이용하는 거다.
어차피 환락가에 속한 곳이니 구석에서 누가 마약을 태우든 술을 퍼마시든 신경도 쓰지 않으니까. 그리고, 그런 음지이기에 몽마들이 몸을 숨길 수도 있었다.
인간 스스로 약해진 그 틈을 타 그들은 살아가고 있다.
구차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처음엔 힘들었는데 오래 살다 보니까 계속 가게가 커지더라구요. 덕분에 신경 쓸 일도 많아지고, 처음엔 몽마들로만 꾸려나갔는데 소문이 퍼지니까 곳곳에서 가게로 사람을 팔러 오더라구요. 납치되거나 빚 때문에 팔려 온 사람들을요. 하나둘 거두어서 직원으로 고용하다 보니 점점 그 수는 불어났어요. 주방 일이나 청소 같은 잡일을 시키면서 빚을 갚게 하니까 다들 의아해하면서도 일해서 몸값만큼의 빚을 갚고 나가거나 여기서 일하는 게 더 낫다면서 계속 머무르더라구요. 대를 이어가면서 근무하는 사람도 있어요.”
“의외네. 인간이 일하기엔 위험할 텐데.”
“위험한 일은 웬만해선 저희가 다 하니까요. 카지노의 딜러 일부는 손재주가 뛰어난 인간이지만요.”
몽마는 인간보다 몸이 튼튼해서 쉽게 다치지 않고 위험한 일이 생긴다고 해도 마법이나 정신 조작으로 회피할 수도 있다.
한 번씩 큰 사고가 터지지만 않으면 힘든 일은 없다며 비셰가 말했다.
남의 이야기를 하듯 담담한 어조였다.
“뱀파이어는 어땠나요?”
“응?”
그런 비셰의 질문에 글러티나는 의문을 표했지만 곧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우리는…”
느리게 입술이 열렸다.
뱀파이어는, 인간의 피를 마실 수 있다. 피라면 뭐든지 흡수할 수 있다. 다만, 자기보다 약한 인간을 습격하는 걸 치욕으로 여기기도 한다.
그들은 고고한 뱀파이어니까.
밤의 귀족으로 군림하면서 압도적인 무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조용히 살아가는 것을 원했다.
어차피 피를 마시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으니 조용히 같은 피를 가진 이들끼리 모여서 살았다.
다만, 그것을 지루하게 여겨 자극이 필요하다고 여긴 치기 어린 몇 명이 혈족의 울타리 밖으로 나갔고 그 정체가 알려지면서 탄압을 받게 되었다. 그게 언제 적 이야기더라? 글러티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지금 인간들에게 있어서 뱀파이어는 존재 여부를 알 수 없는, 전설 속의 존재나 마찬가지일 테지.
비셰는 조용히 글러티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나는.”
그저 조용히 살아가는 것이 좋았다.
평온한 일상을 보내면서 자신을 연마하고 수련에 몰두하는 것이 좋았다.
카이엔이 그러는 것처럼. 그저, 그녀가 만든 울타리 안을 돌보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인간인 친구가, 이종족인 친구가 생긴 지금은, 그저 성안에 틀어박혀서 지내고 싶지 않게 되었다.
그녀의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만약 다른 혈족들을 찾을 수 있게 된다면, 한데 다시 뭉칠 수 있다면, 그 이후의 혈족들은 좀 더 인생을 즐겨도 되지 않을까. 피를 빠는 건 안 되지만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정도라면, 괜찮지 않을까.
글러티나는 제 생각을 이야기했고 비셰는 조용히 그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세상 사람들이 전부 다 카이엔 같다면. 아니, 적어도 그 영지의 사람들 같다면 이종족도 인간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을 텐데.”
“그러게요. 확실히 그곳 사람들은 정말 신기해요. 이종족이란 걸 알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대해주니까요.”
“위치 때문일까. 아니, 역시 카이엔 때문인 것 같아.”
처음 세자르에 왔을 때부터 거대한 만티코어와 함께였던 어린 왕자.
그 어린아이를 해치지 않고 오히려 지키고 돌보았던 몬스터.
그걸 본 인간들은 제 생각을 하나둘씩 고쳐나갔을 것이다.
“그만 들어가서 쉬어요. 여기까지 오는데 힘들었잖아요.”
“난 괜찮은데.”
“아무리 뱀파이어가 낮보다 밤에 움직이기 쉽다고 해도요. 밤을 새우고 나서 낮에 쉬진 않을 거 아니에요.”
“으음…”
“얼른 들어가요.”
비셰의 재촉에 글러티나는 지붕에서 내려왔다. 올라올 때도 끙끙댔던 비셰가 내려올 때도 안절부절 못하자 그녀가 지붕 아래로 내려오는 걸 도와주었다.
인간들은 잠들어있고 뱀파이어와 몽마가 궁전의 지붕 위에서 담담히 마음속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있을 때.
깨어있는 자는 아직 더 있었다.
방 안에서 자네인은 프라우디에를 지켜보고 있었다.
새벽까지 기다렸다가 음기가 가장 강해지는 시간에 점을 친다고 했기에.
프라우디에는 방바닥에 마법진을 그린 종이를 놓아두고 그 앞에 앉아있었다.
작은 꾸러미를 열어 그 안에 담긴 색색의 구슬을 둥근 원이며 알 수 없는 글자들을 써놓은 종이 위에 뿌렸다.
데구루루 굴러가 종이 밖으로 벗어나는 것들도 있었지만 착 달라붙는 것도 있었고 구슬이라고 하기엔 미묘하게 울퉁불퉁한 것들은 툭툭 종이 위로 떨어졌다.
“으음…”
프라우디에가 침음했다.
“어때?”
“확실하게 잡히지 않네요.”
짧게 한숨을 쉬며 프라우디에는 점술의 결과를 응시했다.
카이엔이 점점 위험해지고 있으니까 그들이 먼저, 적이 다가오기 전에 쳐부술 수는 없을까 그걸 알아보고 싶었는데 잘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자들은 각자 악마에게서 힘을 얻고 그 자를 대신해 싸우고 있으니 그만큼 실력은 있다는 건지. 악마의 힘이 점술을 가로막고 있는 건지.
아무리 그의 심장에 리치왕의 라이프 베슬이 박혀있다고 해도 미래를 점칠 수 없었다.
“왕자님이 이번 일에 같이 오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상대가 인간의 피를 빠는 뱀파이어라면 저희는 괜찮을 테니까요.”
뱀파이어, 몽마, 독룡, 그리고 독룡의 피가 흐르고 있는 호문쿨루스.
그를 인간의 범주에 넣어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그 의문에 자네인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너는 인간이야, 프라우디에.”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생명이지만요.”
“그래도 영혼이 깃들었잖아.”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계속한다면 끝이 없다는 걸 알기에 프라우디에는 살포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
이노스는 일행이 잘 지낼 수 있도록 편의를 봐주었다.
글러티나가 검은 벌레를 떼어내 주고 이틀 뒤, 사샤는 조금 창백해지긴 했지만 눈을 떴고 무사히 침상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다만, 의식불명으로 누워있던 것도 그러던 와중에 잠깐씩 눈을 떴던 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노스는 무사해서 다행이라는 말만 반복하면서 사샤의 안전을 위해 좀 더 힘을 쓰기로 했다.
뱀파이어 같은 밤의 종족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면 일단 신관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이곳에 있는 이들의 정체를 들키게 된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한 끝에 이노스는 성물을 하나 구해 사샤의 방에 두기로 했다.
“저건 또 뭐예요?”
“요즘 사샤의 기가 허해진 것 같아서 구해봤어요.”
“어디서 사기당하고 온 거 아니에요?”
“아니거든요? 여동생을 생각하는 오라버니의 상냥한 마음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건가요?”
“그야 오라버니가 하는 행동을 생각하면…”
사샤가 게슴츠레 눈을 떴다. 상처받았다면서 이노스는 호들갑을 떨며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우는 시늉을 하며 이노스가 말했다.
“아무튼 사샤가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다들 그러는 거에요? 전 모른다고요.”
“의식불명이었다고요. 중간중간 눈을 뜨긴 했지만 엄청 짧았고… 못 일어나는 시간이 더 많았고요.”
“그런 것 치곤 몸은 괜찮은데요. 좀 뻐근하긴 하지만.”
“그건 저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답니다.”
빠르게 회복한 이노스가 몸을 일으켰다.
사샤는 멀쩡하다고 했지만 그는 그녀에게 당분간은 움직이지 말라고 일러두었다.
사샤에게 흔적을 남긴 뱀파이어가 그것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실혈증이 처음 나타난 마을에 조사단을 보냈지만 아직도 보고는 오지 않은 상태였다.
짧은 대화를 나누고 이노스는 사샤의 방에서 나와 다른 곳으로 향했다.
‘보고가 오지 않는다.’
지금쯤이면 이미 도착했을 텐데. 설마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기에 이노스는 다른 가족들에게도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아직 왕위 계승자가 정해져 있지 않은 지금, 그 혼자서 많은 병력을 이용할 수 없으니 형제자매의 도움이 필요했다.
사샤의 실혈증 증세는 이미 다른 형제들도 모두 알고 있던 것이었기에 그들은 이노스의 요청에 흔쾌히 도움을 주기로 했다.
그 외에도 이노스는 그에게 마법을 가르쳐주는 스승님과 제국 내 마탑에도 조사를 요청해 기사들의 연락이 두절된 마을로 보내기로 했다. 일단 사람을 좀 더 파견해서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실혈증에 대한 조사라는 명목으로, 또 다른 조사단이 파견되었다.
“이번에는 마법사들도 같이 가니까 좀 더 빨리 움직일 거에요.”
“직접 가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그렇지만 괜히 멀리까지 갔다가 허탕칠 수는 없잖아요. 발견되는 게 있으면 즉시 알리라고 했으니 조사단이 도착만 한다면 금방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거에요.”
이노스는 조금이라도 여유를 가지려고 했다.
먼저 파견된 인원의 안전이 불확실했지만 조급해한다고 해서 나아질 것도 없으니까.
그런 그의 의견에 따르면서 글러티나와 일행은 황성에서 사샤를 주시하면서 삼엄히 궁을 경호했다.
새로운 조사단이 파견된 지 닷새째.
늦은 밤, 이노스의 시종이 다급하게 방문을 두드렸다.
“황자님! 이노스 황자님!!”
문 두드리는 소리와 그 외침에 이노스는 자다가 깨서 부스스한 머리를 대충 정리하면서 손가락을 튕겼다.
몸을 일으키지 않고 마법으로 방문을 열어버린 그는 졸린 눈을 비비며 물었다.
“무슨 일 있나요? 이렇게 갑자기.”
“조사단에서 급한 연락이 왔습니다. 이쪽에 마법사 분도…”
“…심각한 일인가 보군요.”
밤중에 다급하게 그의 방문을 두드릴 정도라면.
이노스는 주름진 잠옷을 툭툭 털며 몸을 일으켰다.
그가 들어와도 좋다고 허락하자 시종과 마법사가 방으로 들어왔다. 손짓 한 번으로 방 안의 불을 모조리 켜고 이노스가 물었다.
“말해주세요. 무슨 일이죠?”
“급한 통신이었습니다. 조사단은 마법으로 이동속도를 높이며 어제 저녁 무렵에 마을에 도착했고 그때부터 탐색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런데 해가 지자마자 아무도 없던 마을에서 갑자기 괴물들이 대거 출몰, 전투 해야겠다고 알린 뒤로 소식이 없습니다.”
면목이 없다는 듯 마법사의 고개가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가만히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노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저, 연락이 끊어진 것 정도라면 아침에 보고했어도 됐을 것을, 저 마법사는 급히 한밤중에 황성까지 찾아와 그 사실을 그에게 알렸다.
무슨 일이 더 있는 걸까.
이노스가 입을 열었다.
“일단 알겠어요. 실혈증에 복잡한 무언가가 얽혀 있는 게 확실하군요. 일단, 마탑 쪽에서는 계속 통신을 시도해주세요. 저도 날이 밝으면 움직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돌아가세요.”
시종과 마법사를 돌려보내고 이노스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괴물이라.
그는 글러티나로 인해 이번 일에 뱀파이어가 연관되어 있다는걸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새로 꾸린 조사단을 공격했다는 괴물 역시 글러티나는 알고 있으리라.
지금은 한밤중이라 그녀는 사샤의 궁을 지키고 있을 거다. 날이 밝으면 사람을 보내 그들과 이야기를 해야겠다며 이노스는 다시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하나,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