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라운지 바, 카지노, 또 다른 라운지 바 구역, 극장.
비셰는 쉬지 않고 곳곳을 돌아다녔다.
혼자 있는 미녀라는 것만으로도 가게를 방문한 손님들의 추파가 끊이지 않았다.
술과 함께 있어서 쉬워 보였는지, 바깥에서는 아무 말도 못 했을텐데 이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감이 상승해서 그런 건지 그녀의 관심을 끌기 위해 주절주절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런 이들에게 술을 권하고 웃으면서 자존심을 치켜세워주니 정보를 술술 뱉어냈다.
하나 실혈증에 관해선 많이 알아내지 못했다.
애초에 귀족들에게 실혈증은 아직도 자기네들과는 머나먼 이야기일지도 몰랐다.
평민들에게 먼저 나타난 증상이었기에 일부 귀족이 실혈증 증상이 있다는 말을 들어도 자기는 아닐 거라고 여기는 것이었다.
집요하게 따라붙으려는 남자에게 암시를 걸어 시선을 돌리게 한 다음 비셰는 라운지 바에서 빠져나왔다.
“어휴, 이것도 오래간만에 하니까 지치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 역시 다른 몽마들처럼 인간을 유혹하고 정신을 조작해서 정기를 빼내는 일을 했었는데, 세자르의 생활이 너무 평온하다 보니까 몸이 금세 평화에 적응해버린 모양이다.
어차피 하룻밤 안에 원하는 정보를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며칠만 더 고생해보자며 비셰는 마지막으로 카지노에 한 번만 더 가보기로 했다.
적당히 바람잡이 역할을 하면서 동료들의 일을 도와줄 생각이었다.
“저기… 저기요!”
누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비셰는 못 들은 척 하고 무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녀의 손을 덥석 붙잡았고 비셰는 얼굴을 찌푸리면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를 붙잡은 사람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헉…”
“어… 혹시…?”
예전에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모자를 눌러썼지만 붉은색 머리카락은 몇 가닥 삐져나와 있었고 눈동자는 정확히 그녀의 얼굴에 꽂혀있었다.
상대방 역시 확신을 가지고 그녀를 붙잡은 것 같지는 않았는데 비셰는 누가 볼세라 얼른 그 사람을 끌고 인적이 드문 구석으로 향했다.
“…이런 데 오는 취미 있었어요?”
“아니거든요?!”
주변에 다른 사람이 없단 걸 확인하자마자 비셰가 한마디 했고 그 말에 이노스가 짜증스레 목소리를 높였다.
억울하다면서 제 머리를 붙잡고 앓는 소리를 내는 것도 잠시, 이노스가 비셰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당신은 카이엔 옆에 있던 그 사람 맞죠? 남자 아니었어요?”
“사정이 있어서 그래요.”
“아, 이종족인거예요? 그래서 그런가… 아무튼! 저는 도박장이나 술집을 들락거리는 망나니가 아니에요!”
“믿어줄게요. 그런데 여기 왜 있었던 거예요?”
“그야… 여기에 사람이 몰리는 만큼 정보도 많이 모일 것 같았거든요. 별 수확이 없어서 돌아가려고 하는데 왠지 익숙한 느낌이 들어서 붙잡았어요.”
감이 좋아서 그녀를 알아차렸다는 말이었다.
비셰는 알만 하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미약한 흑마법사의 기운조차 알아차리고 카이엔에게 제국의 일을 알렸던 이노스였다.
현재 그녀는 남성체에서 여성체로 모습을 바꾼 상태지만 외모의 차이가 크지 않아서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라면 남매로 여길 수 있을 정도였으니, 이노스는 잠깐 본 것만으로도 그녀를 알아차린 것이다.
그나저나 황자쯤이나 되는 사람이 이런 데까지 와서 알아야 할 정보가 대체 뭘까. 궁금해져서 비셰가 물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여기 오신 거에요? 제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여기는 건전과 불건전 사이에서 줄타기 하는 곳인데.”
“줄타기는 무슨. 도박장인데 당연히 불건전하죠.”
“아하하…”
“전 실혈증에 대해 알아보는 중이었어요. 그런데 그럴듯한 소식이 없어서 지금 굉장히 힘들어요.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실혈증이요?”
제국의 황자가 실혈증에 대해 조사하고 있다니. 하지만 황실에서 대대적으로 조사하는 일은 아닐 게 분명했다.
황실에서 직접 나섰다면 황자인 이노스가 직접 발로 뛰는 일은 없을 테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비셰가 물었다.
“혹시… 주변에 실혈증 환자가 있는 거에요?”
“네. 제 여동생이에요. 전 황성 밖에서 마법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사샤가 쓰러졌다는 말을 듣고 급하게 황성으로 갔거든요. 목에 이상한 게 붙어있던데 다른 마법사들은 눈에 마력을 집중해야 볼 수 있다고 해요. 저는 바로 보였지만요.”
“…황자님은 제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굉장하신 분이셨군요?”
“그런 말 자주 들어요.”
듣는 이에 따라서는 무례하다며 화를 냈을 테지만 이노스는 건성으로 넘겼다. 비슷한 말을 워낙 자주 들어서였다.
비셰를 혼내는 대신 그는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서로 묻고 답하기를 하자고 약속하진 않았지만 저절로 튀어 나간 탓이었다.
“그러는 당신은 왜 카이엔 옆에 아니라 여기 있는 거에요? 그것도 그런 모습으로.”
“아, 저도 사정이 있어서요. 정보 수집하러 왔는데 수확은 없었어요.”
“정보?”
“저도 황자님처럼 실혈증에 대해 조사하고 있어요. 으음, 정확히 말하자면 제국에서 실혈증 환자가 대거 발생했다는 소식에 그 원인을 찾으러 온 거고요.”
“뭔가 알고 있는 게 있나요?”
다급히 이노스가 비셰의 어깨를 붙잡았고 곧 깜짝 놀라며 손을 떼었다.
“미, 미안해요. 급해서…”
“괜찮아요! 바로 손도 뗐고 사과도 했잖아요. 제 복장이 좀 눈 둘 데가 없어서 좀 더 민망하죠?”
“그래도 죄송해요.”
“저희도 실혈증에 대해 알아보고 있고 환자를 직접 보고 싶었어요. 도움이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황녀님을 만나 뵐 수 있을까요?”
“그럼요. 봐준다면 저야 고맙죠. 바로 갈까요?”
“아뇨. 오늘 막 도착한 참이라서… 내일 황성으로 갈게요.”
“근처로 마차를 보내줄 테니까 그걸 타고 오세요. 이거 가지고 계시고요.”
이노스는 손가락에 끼워져있던 반지를 빼서 비셰에게 건네주었다.
비셰가 두 손으로 그것을 받자 이노스가 말했다.
“이 앞으로 마차를 세워놓는다면 굉장히 눈에 띌 테니까 다른 곳으로 정할게요.”
“아, 그럼 광장의 시계탑 근처로요.”
“마차의 창문에 장미꽃을 얹어둘게요. 마부에게 그 반지를 보여주세요.”
“네.”
“아, 혹시 카이엔도 같이 왔나요?”
“아뇨. 왕자님은 세자르에 계세요. 저를 포함해서 다른 네 명이요. 다 아시는 얼굴이에요.”
“그렇군요.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비밀 통로로 안내해드릴게요. 황자님이 이런데 드나드는 걸 들키면 곤란하잖아요. 이쪽으로 오세요.”
비셰가 카이엔의 옆에 있던 사람이란 걸 알기에 이노스는 순순히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비셰가 벽에 손을 대니 숨겨진 문이 나타났고 그들은 어두운 복도를 지나갔다.
아무것도 없는 길을 걸어가다 보면 함정인가 의심할 법도 하지만 이노스는 쫄래쫄래 비셰를 따라갔다.
그러다 보니 금세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심지어 도박장과는 꽤 떨어진 건물 밖으로 나오게 되어서 이노스가 깜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 연결된 거에요?!”
“그렇죠, 뭐.”
“와아… 제가 황제가 되면 이런 데는 싹 밀어버리려고 했는데.”
“헉, 그건 좀…”
몽마들의 터전이 사라진다!
다른 곳에서 이만큼 큰 사업장을 차리려면 돈도 시간도 엄청나게 소요돼버린다.
비셰의 반응에 이노스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걱정 마세요. 어차피 전 황제가 못 되거든요. 그러니까 특별히 봐 드릴게요.”
“휴우… 내일 정오쯤에 나갈게요. 그러니까 마차나 준비해두세요.”
“물론이죠. 그럼 내일 봐요!”
“저쪽으로 나가면 바로 큰 길이 나올 거에요.”
여동생의 실혈증에 대한 조금의 단서를 찾아서일까. 이노스는 밝은 얼굴로 인사를 하고 돌아갔고 비셰는 한참 동안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이노스는 혼자 여기까지 온 모양이었고 돌아가는 그를 뒤쫓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카이엔의 친구에 황자니까 좀 더 신경 써줄 필요가 있었다며 비셰는 다시 비밀 통로를 이용해 숙소로 돌아갔다.
아직 자정이 되지 않았으니 다들 자고 있진 않을 거라며 비셰는 걸음을 서둘렀다.
“네? 알아냈다고요?”
“하루도 안 됐는데… 대단하군.”
“아뇨. 운이 좋았어요. 저번에 만났던 황자님 기억하시죠? 왕자님 친구인 그분요.”
“그 사람이 왜?”
“그 황자님도 실혈증에 대해 알아보고 있다고 하셨어요. 여동생이 실혈증 환자라고 하더라고요. 내일 만날 약속을 잡았어요. 그러니까 다들 얼른 푹 쉬고 내일 움직이도록 해요.”
“약속 시각은?”
“정오예요. 늦잠만 안 잔다면 문제없을 거고요.”
“그렇군.”
글러티나가 제일 먼저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창문 쪽으로 걸어가서 문을 살짝 열었다. 찬 바람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럼 일찍 자도록 하지. 그리고 비셰.”
“네?”
“그리 오래 돌아다니진 않은 것 같은데, 술 냄새가 난다.”
“아. 죄송해요. 이 사람 저 사람한테 말 붙이고 다니다 보니까 그만. 전 익숙해져서 잘 못 느낀 것 같아요. 술 냄새 말고 담배 냄새도 나는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여기는 누구 방이지?
비셰는 울상을 지었다.
“저랑 방 바꾸실래요?”
“괜찮아.”
***
이노스는 비셰에게 말해둔 대로 마차 창문에 장미꽃을 얹어두었다.
덕분에 쉽게 마차를 찾은 일행은 황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노스에게 받은 반지가 보통 반지가 아니었던 건지 마부는 비셰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보자마자 바로 그들을 태워주었다.
겉보기엔 그냥 평범한 반지 같았는데 뭔가가 있는 걸까?
의아해하면서 비셰는 생각에 잠겼다.
현재 그는 다시 남성체의 모습으로 변했는데 마부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 거로 봐선 별거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이노스가 미리 마부에게 일러둔 건지 마차는 황성 내부의 사샤의 궁 바로 앞에 멈춰 섰고 그 근처에서 서성거리던 이노스가 그들이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손을 내밀었다.
“이쪽으로요. 어서.”
“으음…”
“많이 급한 건가요?”
“실혈증에 대해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 하니 밤새 잠도 안 왔다고요!”
“조급하긴.”
혀를 차는 글러티나였지만 그녀 역시 조금 긴장한 기색이었다.
실혈증이란 말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그녀는 짐작이 가는 구석이 있었다. 지금은 그것을 확인하러 가는 길이었다.
이노스는 그들을 사샤의 방으로 안내했다. 갑자기 우르르 몰려온 외부인에 사샤의 궁에 있던 시녀와 시종들이 깜짝 놀랐지만 이노스가 괜찮다면서 그들을 뒤로 물렸다.
어제 말해놨는데도 이런다면서 이노스가 짜증스레 말했다.
“제 동생인데 제가 잘못되게 둘리도 없잖아요? 하여간…”
“진정하세요.”
“휴우, 정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부탁하는 거에요.”
방 안에서 사샤를 돌보던 시녀들도 모조리 쫓아낸 다음 이노스는 방문을 닫았다.
보는 눈이 더 없다는걸 확인하고 이노스가 말했다.
“좀 봐주세요. 어떤가요?”
“…으음.”
글러티나는 이노스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확인했다.
그녀의 눈에는, 정확히 보였다.
이노스가 검은 벌레 같은 게 뭉쳐있다고 언급한 것처럼, 정말 그대로 생긴 이형체가 사샤의 목에 붙어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글러티나는 침대 가까이 다가갔다.
“없앨 수 있어.”
“정말요?”
“응.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줬으면 해. 떼어내는 방식이 좀 과격하거든.”
“어, 그런가요? 그럼 거기 두 분이 저 좀 잡아주실래요? 깜짝 놀라서 달려들어 버리면 안 되잖아요.”
“네에?”
“얼른요.”
자기 좀 붙잡고 있어 주라는 말에 비셰가 어이없어하며 물었지만 이노스의 반응은 굳건했다.
결국 자네인과 비셰가 각자 이노스의 팔 하나씩 잡고 있기로 하고 그 뒤에 글러티나가 움직였다.
글러티나는 침대 위에 올라가서 사샤의 몸을 반쯤 일으켜 세웠다.
깊이 잠든 것처럼 눈을 뜨지 못하는 사샤가 제대로 숨을 쉬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글러티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숙여, 사샤의 목덜미를 물었다.
정확히는, 사샤의 목덜미에 있는 검은 것을 물어뜯었다.
짐승이 사냥한 고기를 이빨로 물어뜯는 것처럼 글러티나는 검은색 이형체를 거칠게 떼어냈다.
“헉…”
글러티나의 몸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뒤에서 보면 충분히 오해할만한 상황이긴 했다.
이노스는 눈으로 글러티나와 사샤를 확인했다. 글러티나가 검은 벌레 같은 그것을 물어뜯었고 그것은 그녀의 입에 물린 채로 서서히 사라졌다.
“후- 이걸로 응급처치는 됐어.”
“어떻게 한 거에요?”
“본 그대로야.”
“물어뜯은 거요? 다른 사람이 했어도 효과가 있을 것 같진 않은걸요.”
“내가 뱀파이어라서 그런 거지. 아까 그건 타깃의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붙여놓은 거라고 생각하면 되고.”
글러티나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걸로, 제국의 실혈증이 뱀파이어의 짓이란 걸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뱀파이어가 벌인 짓이라면 같은 뱀파이어인 그녀가 막아야 한다. 역시 오길 잘했다며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곧 눈을 뜰 테고 금방 건강해질 거야.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정말 감사해요.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더 없을까요?”
“글쎄… 네 여동생이 노려진 이상 범인이 이곳으로 다시 올 수도 있으니까, 우리가 황성에 있을 수 있게 처리해주면 좋겠는데.”
“잠복을 하는 게 나을 것 같긴 해요.”
“실혈증 발생 지역 탐색은요?”
“아, 그것도 있었지.”
“일단 사샤가 걱정이니 실혈증이 처음으로 발생했던 지역에는 따로 사람을 보낼게요.”
이노스가 모두의 말을 정리했다.
실혈증에 대해 다들 심각하게 논의하는 추세이니 조사단을 보내는 건 황명으로 처리할 수 있을 것 같다면서, 일행에게 사샤를 부탁했다.
“일단 사샤가 나았다는 건 비밀로 해두는 것도 좋겠구요.”
“응. 그편이 나아. 계속 환자를 찾아가서 낫게 하는 것보단 주범을 해치우는 게 더 나으니까.”
“귀족에 이어서 황녀까지 노릴 정도면 분명 뭔가 원하는 게 있지 않을까요? 황녀를 괴물로 만들려고만 하진 않았을 텐데.”
“그랬을 수도 있겠지. 목적을 알 수 없으니…”
도대체 왜 실혈증이 이렇게까지 퍼진 걸까?
제 배를 채우기 위해 이런 큰일을 벌일 정도로 어리석은 뱀파이어가 세상에 존재했다는 말인가? 그게 아니라면, 뱀파이어는 그저 눈속임인 걸까.
글러티나는 고민에 빠졌다.
적의 위치를 알지 못하는 이상 섣불리 움직이는 게 더 나쁠 수가 있다.
그들은 범인이 사샤를 다시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전제하에 황성에 몸을 숨기고 있기로 했고 이노스가 그것을 허락했다.
다만, 아직 사샤가 눈을 뜨지 못했으니 이곳에는 간단한 결계만 설치해두고 그의 궁으로 가서 좀 더 정확한 계획을 짜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