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실혈증.
처음 그 증상이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그리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유행병처럼 번지기 시작하고, 그때가 되어서야 모두 상황의 심각함을 인지했으나 귀족들은 여전히 그것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
제국의 한 지역에서 유행하던 실혈증이 점점 퍼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직 결정되지 않은 황태자 자리 때문에 서로가 지지하는 황족의 뒤에 서서 편 가르기를 하며 견제하느라 바빴다.
평민들에게만 번지는 병이니 신경 쓸 가치가 없다고 여긴 탓이었다.
하나, 슬금슬금 귀족 영애들부터 시작해 실혈증 환자가 늘어나기 시작했고 막내 황녀인 사샤가 원인모를 빈혈을 일으키며 쓰러졌다.
확실히 실혈증이라고 진단되지는 않았지만 다들 기겁을 하면서 그때가 되어서야 원인 파악에 나섰다.
그리고 이노스는, 외부에서 마법 공부를 하다가 그 소식을 접하고 뒤늦게 황성으로 향했다.
“사샤!”
주변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노스는 사샤의 방문을 열어젖혔다.
아직 어린 여동생은 이불에 파묻혀있어서 잘 보이지 않았다. 시녀들을 지나쳐 침대 바로 앞까지 간 이노스는 잠들어있는 여동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얼굴. 혈색이 없어 입술마저도 제빛을 잃었다.
이 황성 안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어째서 사샤가 이렇게 된 걸까. 이노스는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쓰러진 지 얼마나 됐죠?”
“아… 이틀입니다.”
“깨어난 적은요?”
“몇 번 있으셨지만 금방 다시 잠드셨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아아, 실혈증이랬죠? 진작에 조사했으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텐데.”
“아직 실혈증이 확실한 건 아닙니다. 그러니 황자님…”
“그게 아니면 뭐라는 건데!”
시녀들의 잘못이 아니었지만 이노스는 언성을 높였다.
소리를 질렀다가, 곧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그는 고개를 숙였다.
실혈증에 걸린 사람 중에서 회복된 사례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하나 사샤는 아직 어렸고 약했다.
몸이 약할수록 그런 증상을 버텨낼 수 있을 리가 없는데.
그가 왔음에도, 이 소란 틈에서도 눈을 뜨지 못하는 여동생을 보는 이노스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정말이지… 왜 이렇게 약한 건지… 응?”
이불을 턱 아래까지 덮고 있으니 더욱 작아 보인다면서 이노스는 이불 위쪽을 살짝 접어 내렸다.
그리고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사샤의 목덜미에 시커먼 벌레 같은 것들이 뭉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깜짝 놀라 그가 외쳤다.
“무, 무슨… 사샤 목이 왜 저래요?”
“네?”
“무슨 말씀이신지…”
“저게 안 보이는 거예요?”
“그렇게 말씀하셔도…”
시녀들은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그 반응에 이노스는 자신이 잘못 본 건가 싶어서 눈을 비비고 다시 한번 확인했지만 사샤의 목덜미에는 정말로 이상한 것이 붙어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고 그 혼자만 볼 수 있는 것.
그와 다른 이들의 차이점.
그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한 끝에 이노스가 말했다.
…“가서 마법사 좀 불러올래요? 실력 있는 사람으로요.”
“네? 네. 알겠습니다.”
의아해하긴 했지만 시녀들은 그의 명령이 따랐다.
황실 마법사 중 한 명이 다행히 황성에 있었기에 그는 부름을 받고 사샤의 방에 왔다.
황녀의 방에 있는 이노스를 보고 고개 숙여 인사한 다음 그는 이노스의 요청대로 사샤의 목을 확인했다.
“으음…”
“보이나요?”
“잘 모르겠습니다만.”
“네? 마력 좀 집중해서 봐보세요! 제가 볼 수 있는데 황실 마법사인 당신이 못 볼 리가 없잖아요!”
“황자님은 태생적으로 몸에 마력이 집중적으로 발현되어 있으십니다. 그래서 그러신 거-”
“얼른요!”
이노스의 재촉에 황실 마법사는 눈에 마력을 집중했고, 이노스의 말대로 새까만 무언가가 사샤의 목덜미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확인했다.
소스라치게 놀라 그가 외쳤다.
“저, 저건 대체…!”
“몰라요?”
“저도 처음 보는 겁니다만!”
“다른 실혈증 환자들은요?”
“본적이 없어서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시간을 주십시오. 수도에도 실혈증 환자가 있을 테니 몇 명 찾아가서 확인하면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럼 부탁 좀 할게요. 그런데 저걸 알아보려면 꽤 강한 마법사들 필요할 것 같은데 괜찮을지 모르겠네요.”
“마력 소모도 꽤 큽니다.”
“저는 왜 잘 보인 건지 모르겠네요.”
“이노스 황자님께서는 마법을 배우기로 하시고 체내의 마나를 일깨우신 뒤로 특히 눈 쪽으로 집중되었다고 듣지 않으셨습니까. 아마 그것 때문일 겁니다.”
“어휴, 심장이나 강화될 것이지. 심장이 강화됐으면 칼 맞아도 한 방에 안 죽을지도 모르잖아요.”
“그건 아닙니다만… 일단 저는 마법사들을 모아서 움직여보겠습니다.”
“알아낸 게 있으면 바로 보고해주세요. 폐하께는 제가 말씀드릴게요.”
다른 이도 아니고 막내 황녀가 앓아누웠으니, 황제도 기꺼이 황실 마법사를 쓰게 해줄 것이다.
이노스는 그렇게 믿고 다시 사샤를 바라보았다.
저런 게 목 근처에서 꿈틀거리고 있어도 사샤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저것이 있어서 사샤가 제대로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거라면, 저걸 떼어낸다면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는 걸까?
여동생의 가느다란 목을 향해 손을 뻗어보려다가 이노스는 손을 거두었다.
괜히 만졌다가 탈이라도 나면 큰일이니, 일단 저것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
제국행이 결정된 글러티나, 비셰, 자네인, 프라우디에는 은밀히 가르간트를 벗어나 제국으로 들어갔다.
이전에도 한번 국경을 넘은 경력이 있는 비셰인지라 개구멍과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길을 통해 일행을 안내했다.
졸지에 밀입국을 하게 돼버린 그들은 이래도 되는 건가, 싶으면서도 비셰를 따라갔다.
“그치만 나트폰트라 변경백령을 거쳤다가 거기 사람들에게 들킬지도 모르잖아요. 특히 프라우디에는 거기 다녀왔었고!”
“아 맞다. 그랬었죠.”
“이편이 나아요. 그리고 어둠은 오히려 저희에게 도움이 되고요.”
뱀파이어와 몽마, 호문쿨루스, 독룡.
그들에게 있어서 밤이든 낮이든, 움직이는 데에는 별 지장이 없었다.
인간만큼 쉽게 지치지도 않을뿐더러 움직임도 빠르니 그들은 카이엔의 예상보다 며칠이나 앞당겨서 제국에 도착했다.
물론, 중간중간 실혈증에 대한 정보를 찾느라 지체되는 시간 또한 있었지만 그들은 무사히 비셰의 안내를 받아 수도까지 도착했다.
놀랍게도 비셰가 일하던 곳은 제국의 중심지에 떡하니 있었다.
“여기 땅값이 엄청 비싸요. 물론 처음에 터를 잡았을 때는 헐값이었지만요.”
“그랬구나.”
제국 최대 규모의 도박장 겸 술집이라는 말에 글러티나는 혀를 찼다.
오면서 몇 번이고 들은 말이었기에 이제는 대충 흘려들었다.
다만 프라우디에는 안전상 문제는 없었는지 매번 비셰를 걱정했다.
“취한 사람들에게 정기를 빼내는 일뿐인걸요. 착취 같은 건 없어요. 인간 종업원들은 주로 주방에서 일하고 있거든요. 손님으로 찾아오는 버러지 같은 인간들이랑 마주칠 수 없게끔 관리하고 있어요.”
“하긴. 그런데 방문하는 놈들이 제대로 된 사람일 리가 없으니까.”
“용케도 영업하는구나.”
“이젠 다들 실력이 수준급이에요. 방에 들어가자마자 환상부터 보여주고 마시지도 않은 술값 계산을 하게 하기도 하거든요. 좀 마법사 느낌이 나는 놈이 와서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최고위급 몽마들이 가고요.”
그들이 거기서 할 일은 휴식과 정보수집.
그것뿐이라며 비셰는 그들을 안내했다.
‘아르젠 실루이타’라는 커다란 간판이 붙은 엄청나게 화려한 건물을 보고 일행은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휘황찬란한 불빛이 번쩍이고 있는 거대 도박장은 양옆으로도 커다란 건물들을 끼고 있었다.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보통이 아닐 거라고 짐작하긴 했지만 이 정도였을 줄이야.
가장 키가 작은 프라우디에의 경우엔 건물을 보려고 고개를 뒤로 젖혀야 할 정도였다.
“그런데 건물 이름은 왜 저래?”
“아, 여길 처음 지은 분 이름에서 따온 거래요. 그분이 은발이었거든요.”
“… 그 사람도 몽마지?”
“두말하면 입 아프죠. 자, 직원용 문은 이쪽이에요.”
손을 흔들면서 비셰가 그들에게 말했다.
다들 얼굴을 잘 가리라면서 후드를 씌우고 특히 프라우디에 에겐 절대로 후드가 벗겨지게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왜 프라우디에한테만 몇 번이고 강조하는 거야?”
“그야 제일 예쁘게 생겼으니까요. 인간들도 문제지만 몽마들도 예쁜 사람을 좋아하거든요. 게다가 프라우디에는 겉보기엔 어린애고요. 분명 얼굴 보면 귀엽다면서 다들 한 번씩 얼굴 만져보고 껴안아 보려고 할걸요?”
“으와… 저 이거 꼭 잡고 있을래요.”
후드가 벗겨지지 않게 잡고 있겠다며 프라우디에가 말했다.
그 모습에 피식 웃고 비셰는 그들을 데리고 직원용 문 앞에 섰다.
외부인이 함부로 출입하지 않게끔 마련된 인증을 거친 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날이 저물지 않은 상태라 도박장도 술집도 밤에 비하면 한가한 편이라 다들 숙소 근처에서 어슬렁대고 있었다. 그래서 비셰가 문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후드를 벗고 걸어 다니자 그를 알아본 몽마들이 깜짝 놀라 외쳤다.
“비셰!?”
“너 도망갔다면서! 이제 괜찮아?”
“야 오랜만이다!”
“다들 안녕하세요? 잘 지냈어요?”
수십 명의 인큐버스와 서큐버스, 그와 더불어 꿈을 먹는 드림 이터까지.
소란이 소란을 불러와 어느새 다들 비셰 주변으로 몰려왔다.
“너 대체 뭘 하다가 온 거야?”
“아, 말하자면 복잡한데 완전히 돌아온 건 아니고 잠깐 조사할 게 있어서 왔어요. 지금은 한 명의 주인님을 모시고 있는 하인 입장이랍니다!”
“뭐어-?”
“설마.”
“거짓말.”
안타깝게도 다들 비셰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난 동료들에게 안부 인사를 건네면서 비셰는 본론을 꺼냈다.
실혈증.
그가 일행과 함께 제국을 방문한 이유였다.
“혹시 실혈증에 대해 알고 계시나요? 요즘 그것 때문에 소란스럽다던데.”
“아아- 그렇지 참. 예전엔 평민들 위주로 퍼졌는데 지금은 귀족들도 그런 증상을 겪는다더라.”
“주로 젊은 사람이나 어린아이. 그렇다고 노년이나 중년이 안 걸리는 건 아니지만.”
“원인 불명이야. 참 곤란해. 물론 그런 일이 있다고 손님이 줄어드는 건 아니더라.”
몽마들이 비셰에게 몰려들 때 글러티나와 자네인은 재빨리 프라우디에를 데리고 뒤로 물러났다.
덕분에 몇 걸음 뒤에서 비셰가 그들에게 실혈증에 대해 물어보는 걸 들을 수 있었다.
뛰어난 청력으로 정보를 걸러내면서 글러티나가 입을 열었다.
“…그 환자를 직접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뭔가 짚이는 구석이라도 있는 거야?”
“그저, 잠깐 피를 빠는 정도라면 이 정도로 많은 환자가 생길 리는 없으니까. …피를 다 뺏긴 인간은 괴물이 되어버리니까.”
뱀파이어에게 물린 것만으로는 뱀파이어가 되지 못한다. 피의 세례가 없는 한.
다만 피를 다 빨리게 된다면 끊임없이 피와 살을 탐하는 괴물이 돼버린다.
실혈증 환자가 늘어났다는 건 뭘까.
한 명이 제국을 헤집고 다닌다면 이 정도 속도로 퍼질 리 없다.
피를 모으는 개체가 따로 있을지도 모르고 그 개체의 수에 따라서, 변종 괴물이 탄생할 확률도 높아진다.
프라우디에가 비셰에게 텔레파시로 의사를 전달했다.
- 실혈증의 시작이 언제인지 물어봐 주세요.
“응? 아아- 혹시 너희 실혈증이 언제부터 있었는지 알고 있어?”
“글쎄? 우리도 그건 잘…”
“이미 몇 달 지나지 않았나?”
“더 오래됐을 지도 모르지. 점점 퍼졌다고 하잖아.”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알아볼 게 있어서요. 그래서 잠깐 여기 온 거예요. 일 끝나면 돌아갈 거고요.”
“잘 지내나 보구나. 다행이네.”
워낙 몰려든 몽마들이 많으니 각자 한마디씩만 해도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 소란에 상급 몽마가 나타나 몰려든 이들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분홍색 머리카락에 군청색의 몸에 딱 달라붙는 드레스를 입고 있는 대단히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을 한 몽마였다.
그녀는 목소리에 마력을 실으면서 외쳤다.
“너희 다들 뭐하는 거야? 곧 영업 시작인데! 다들 자리로 돌아가, 빨리-”
“네에-”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에이, 재미없게시리.”
“비셰, 다음에 또 보자-”
상급 몽마의 말에 다들 순순히 제자리로 돌아갔다. 영업시간이 다가오는 것도 한몫했다.
겨우 다 돌려보낸 뒤 분홍색 머리카락을 화려한 장식으로 꾸민 상급 몽마가 비셰를 보며 물었다.
“비셰 너 한 오 년 정도는 어디 산속에 처박혀있겠다고 하지 않았니? 벌써 왔어?”
“사정이 있어서요.”
“놀러온 거야?”
“그건 아니에요. 뒤에 일행도 있는걸요?”
“일행? 하아, 아까 그 애들은 일행이 있으면서도 확인도 안 했던 건가?”
“저랑 같이 와서겠죠.”
“정말이지… 너무 마음을 놓고 있으면 안 되는데.”
한숨을 푹 쉬며 그녀가 비셰의 어깨에 턱하고 손을 올렸다.
“너 없어지고 나서도 다행히 별일은 없었어. 하지만 돌아다닐 땐 꼭 다른 모습으로 변신해야 한다.”
“알아요. 저, 숙소 좀 내어주실 수 있나요?”
“빈방이야 많지. 마침 네 방 근처에도 몇 개 있으니까 줄게.”
그녀가 허공에 손을 휘젓자 열쇠 꾸러미가 나타났다. 찰그랑거리는 쇳소리를 내면서 열쇠를 확인한 그녀는 세 개의 열쇠를 비셰에게 내밀었다.
“네 방은 네가 알아서 열 수 있지? 나머지 세 사람 것.”
“감사합니다.”
“다들 얼굴을 가리고 있네?”
“보셔도 돼요. 음, 다들 인간은 아니거든요.”
“그래? 그럼 미안하지만 볼 수 있을까?”
상급 몽마의 요청에 글러티나와 자네인, 프라우디에 모두 후드를 벗었다.
얼굴을 확인한 상급 몽마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비셰에게 한 번 더 주의를 주었다.
“여기 혼잡하니까, 길 잃어버릴지도 모르니까 네가 잘 챙겨줘야 해. 알겠지?”
“알아요-”
“어린애도 있다니… 애들 정서에 이런 데는 안 좋아.”
“이곳을 누비고 다니는 건 저 혼자로도 충분해요!”
“으음, 도와주지 않아도 되는 건가?”
“네. 이런 것도 해본 사람이 해야지 안 그러면 힘들어요. 숙소부터 안내해드릴 테니까 쉬고 계세요.”
“난 영업 준비하러 간다. 네 일 잘 처리하고 돌아가.”
“네에-”
글러티나의 물음에 대답해준 비셰는 일하러 가는 상급 몽마를 향해 활기차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숙소부터 보자면서 비셰는 일행을 방으로 안내했다.
다들 방에서 나오지 말고 웬만하면 이 안에 있으라고 당부하면서 그가 방문을 열었다.
방은 그리 크지 않았다. 방마다 화장실과 욕실이 있긴 했지만 안의 가구라곤 침대와 책상, 의자, 옷장, 서랍 정도였다.
“어차피 몽마들은 다 마계에도 거처가 있거든요. 귀한건 거기 두지, 여기 두지 않아요.”
쉴 수만 있다면 충분하기에 이런 식이라고 비셰가 설명해주었다.
글러티나는 뱀파이어 로드로서 성에 살았고 프라우디에와 자네인은 귀족적인 생활을 했기에 지금 보이는 방이 아주 작아 보였다.
하나 다들 불평하지 않고 비셰에게 열쇠를 하나씩 받았다. 한 방에 네 명이 다 들어가자 금방 꽉 차버렸다.
“마법에 능한 몽마는 공간을 연결해서 좀 더 넓게 방을 쓰긴 하는데 전 그 정도까진 못해서요. 음, 그럼 저는 준비 좀 하고 다녀올게요.”
“괜찮겠어요? 저희는…”
“아까도 말했지만 해본 사람이 해야지, 안 그러면 힘들어요.”
비셰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정보 수집도 말이 좋아서 정보 수집이지, 술에 취해 분별력과 경계심과 저항치가 낮아진 사람을 상대로 원하는 말을 뽑아내는 것이었고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취객도 다루기 쉬운 취객이 있고 그렇지 않은 놈들이 있으니 여기서는 그가 나서는 게 최선이었다.
“위험하지 않겠어?”
“괜찮아요! 아무렇게나 정기 빼먹고 살면 편하죠. 하지만 괜히 나돌아다니다가 재수 없게 신관이라도 만나면 끝장이라 이렇게 인간인 척 하고 간판 걸고 영업하는 거잖아요. 신관, 그것도 뛰어난 신성력을 가진 인간이 이런데 올리가 없으니까요.”
“그래도…”
“여기까지 오는데 고생 많이 하셨으니까 쉬고 계세요. 잠깐 감도 잡을 겸 정보 수집이라도 하고 올게요. 여기가 사람이 많이 몰리는 만큼 소문도 많거든요. 좀 오래 있다가 올지도 모르니까 짐부터 푸세요.”
금방 온다고는 장담 못 하겠다며 웃고, 비셰는 세 사람을 숙소에 남겨두고 복도를 걸어갔다.
뚜벅거리는 구두의 발소리가 어느새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로 바뀌었다.
짧은 머리가 허리 근처에 닿을 정도로 길어지고 여행하느라 입고 있던 망토며 질긴 가죽옷이 단숨에 화려한 보석 장식이 되어있는 붉은색 드레스로 바뀌었다.
바뀐 모습에 어디 하나 빼먹은 곳이 있나, 복도의 거울에서 이리저리 비추어보고 비셰는 미소를 지었다.
손끝으로 귀를 톡톡 두드리자 치렁처렁한 귀걸이가 생겼고 목이 허전한가, 싶어서 목걸이도 하나 만들어냈다.
“이 모습도 오랜만이네.”
세자르에서는 남성체 모습을 하고 있었던 그였다.
여성체면 시녀를 시켜줄 수 있냐고 물었지만 바이스가 단칼에 거절했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
본래 몽마는 성별 구분이 없고 자기가 좀 더 좋아하는 모습이나 일하기 편한 모습으로 변신해서 지내곤 했다.
오랜만의 여성체 모습이 어색한지 한참을 거울 앞에서 서성거리던 비셰는 어디 빠뜨린 곳 없나 점검한 뒤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어? 비셰? 너 왔어?”
“언제 온 거야?”
“방금-”
“오랜만이다. 어? 그런데 너 잠시 숨어있다가 온다고 하지 않았던가?”
“일이 있어서 잠깐 온 거야.”
그를 알아보는 동료들에게 인사를 하며 비셰는 계속 걸어갔다.
직원 숙소인 건물을 빠져나가 비밀 통로로 이동, 카지노와 연결된 바로 향했다.
카지노는 밤낮 가릴 것 없이 성황인지라 라운지 바의 좌석도 몇 개 차 있었다. 그나마 조용한 곳으로 간 비셰는 바텐더 근처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칵테일을 한 잔 주문했다.
바텐더로 일하는 건 당연히 몽마였다.
말끔한 웨이터 차림의 몽마는 비셰를 알아보고 눈인사를 건넸다.
- 오랜만이네.
- 그러게. 여긴 무슨 일 없었어?
- 일은 무슨. 평소랑 똑같이.
목소리를 내지 않고 서로의 생각을 전하면서 두 사람은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비셰의 술 주문에 바텐더인 몽마는 무심히 한 잔을 내려놓았다.
레모네이드를 보고 비셰는 인상을 썼고 그는 피식 웃었다.
“뭐야 이게.”
“오늘 일하는 날 아닐 거 아냐.”
“에휴.”
“혹시 도움이 필요하니?”
“아니. 여기서 시간 좀 때우다가 카지노 가봤다가 바 좀 전전하려고.”
“무리하진 말고.”
“너야말로. 그런데 여기가 언제부터 네 담당이었어?”
“아아, 저번에 맡던 녀석이 여기서 싸움 난 거 말리다가 술병에 머리 얻어맞아서 겉으로는 일단 요양하기로 하고 나로 바뀌었어. 물론 지금은 다른 모습으로 다른 곳에서 일하고 있지만.”
“…이래서 인간 종업원들한테는 일 못 시키겠다니깐. 우리야 그렇게 다쳐도 금방 낫지만 걔네는 죽을 수도 있으니까.”
“그렇지. 배우고 싶다는 애가 있어서 좀 가르쳐주려고 했는데 그 사달이 난 이후로는 그냥 얌전히 주방 일만 하겠다더라.”
작은 목소리로 비셰는 바텐더와 대화를 나누었다.
주변에서 혼자 있는 미인인 그녀를 향한 시선이 쏟아졌다. 비셰는 고개를 까딱였다. 어떻게 해야 실혈증에 대해 알아낼 수 있을까. 잘 알고 있을 만한 사람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