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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왕자는 조용히 살고싶다-102화 (103/219)

102화

다크 엘프들이 겔로스 바로 앞까지 데려다주었기에 카이엔 일행은 드디어 겔로스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아직 사령 기사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은 멀쩡했지만 점점 안으로 들어갈수록 쑥대밭이 된 땅이 눈에 들어왔다.

‘여긴 이제 망했군.’

겔로스가 그리 작은 나라도 아니건만, 이 나라 내에서 해결하지 못하니 결국 에밀이 나선 거다.

하나 아직 왕족이 기능을 하고 있기에 에밀이 자랑하는 성기사와 신관들이 언데드 퇴치를 외치면서 이 땅을 휩쓸지 못한 걸지도 몰랐다.

위기 상황이라고 해도 에밀이 이 땅에 들어와 활개 치게 된다면 나중에 땅을 뺏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테니.

그 미련함이 쌓이고 쌓여서 이 땅을 죽게 했다.

‘여긴 누가 가지게 되려나.’

어차피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카이엔은 걸음을 재촉했다.

사령 기사의 군대는 살아있는 사람만을 해치우고 간 건지 곳곳에 시체가 있다는 것만 빼면 거리는 정상적인 축에 속했다.

프라우디에가 추적한 결과, 사령 기사의 군대가 남하한다는 걸 확인하고 그들 또한 그 뒤를 쫓았다.

사령 기사가 훑고 지나가지 않은 땅에는 아직 생존자가 남아있었지만 그들은 미처 타국으로 피신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대화하며 정보라도 얻고 싶었지만 워낙 경계가 심해서 가까이 갈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일행은 사령 기사의 뒤를 쫓는 것에 집중했다.

낮에는 땅속으로 들어가 이동을 멈추지만 해가 저물기 시작하면 대규모의 언데드 군단이 움직였다. 꽤 멀었던 간격에 점점 좁혀지면서 카이엔 일행은 가까스로 사령 기사를 발견했다.

잘린 목을 허리춤에 장신구처럼 매달고 있는 듀라한이었다.

매달린 목은 무표정했으며 푸른 불꽃에 휩싸인 말에 타고 있으니 저절로 카이엔의 고개가 위를 향했다.

일행을 발견한 사령 기사는 검집에서 검을 빼 들었다.

공격태세를 취하는 그를 보고 프라우디에는 사령 기사의 지배하에 있는 언데드를 제어했다.

그 수가 상당히 많았기에 그로서는 사령 기사를 제외한 언데드들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막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다짜고짜 달려들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사령 기사의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음. 아아. 새로운 후보인가?”

“허?”

“이거 놀랍군. ‘그 녀석’이 보고 있길래 별 볼 일 없는 녀석인 줄 알았는데.”

목소리의 주인은 소리 내어 웃었다. 음산하긴 했지만 상상했던 것보다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호쾌하기까지 한 웃음소리에 카이엔은, 그것이 사령 기사의 목소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령 기사가 아닌, 다른 이가 그의 입을 빌려서 말하고 있다고 느꼈다.

과연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카이엔에게 친절하게 말을 걸었다.

“거참, 조금 놀아보려고 했더니 사방에서 방해가 오는군. 루키푸게 녀석, 몸 좀 사려야겠어.”

“어떻게 그놈을 아는 거지?”

“지옥은 생각보다 좁지. 인맥이란게 다 고만고만하다.”

“…당신 대체 누구야?”

제멋대로 말을 걸고. 카이엔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후보에 대해 언급했지만 이 상황 자체를 재밌어하고 있었다. 카이엔의 물음에 사령 기사의 뒤에 있는 누군가가 대답했다.

“벨레드. 궁금하면 루키푸게에게 더 물어보려무나. 그놈도 아는 건 얼마 없겠지만.”

자신의 이름을 벨레드라고 소개한 이는 큭큭 거리며 웃었다. 뭐가 웃긴 건지 모르겠다며 카이엔은 여전히 인상을 쓴 채였다.

아무튼, 이 녀석이 그들을 적대하는 것 같진 않아서 다행이라고 여겼는데 슬쩍 뒤를 돌아보니 다들 얼굴이 새하얘져서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이스는 사령 기사가 덤벼들면 금방이라도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싸울 생각 없는 것 같은데?’

게다가 먼저 말도 걸어줬고. 카이엔은 의아해했지만 프라우디에가 그의 옷을 잡아당기며 소곤거렸다.

“와,왕자님…”

“왜?”

“그,그게…”

“호오 보기 드문 아이로고. 흠?”

프라우디에는 카이엔에게 무어라 전할 말이 있는 건지 입술을 달싹였다. 하나 벨레드가 더 빨랐다.

그는 프라우디에를 빤히 쳐다보더니만 이윽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소리만으로도 마력이 요동쳤다.

카이엔은 반사적으로 프라우디에를 감쌌다. 악마가 프라우디에를 보고 웃을 일이 뭐가 있겠는가, 속의 리치왕을 알아차린 걸지도 몰랐다. 과연 벨레드는 아쉬워하며 입을 열었다.

“리치왕이라.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좀 더 강한 놈을 계약자로 꼬드길 걸 그랬군. 그랬다면 좀 더 오래 재밌게 놀 수 있었을 거 아니냐. 안 그래도 리치왕 이후로는 제대로 된 흑마법사나 네크로맨서를 보기 힘들었는데. 그 맹랑한 녀석이 보이는 족족 없애버렸으니…”

“당신은 대체 뭘 하는 놈이길래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야? 설마, 악마가 대놓고 일을 벌인 건 아니겠지?”

“아니지. 난 그저 네가 있길래 슬쩍 나온 것뿐이란다. 이야기 좀 나눌까 하고 말이지. 너도 그걸 바라지 않느냐? 보아하니 루키푸게 놈이 아무것도 말 안 해준 것 같은데.”

“끄으응…”

“애초에 마왕 대리전이란 것도 웃기는 말이지. 그냥 지옥에서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싸우게 하면 그만일 것을 번거롭게 계약이니 뭐니 해서 말이야. 사고 치기 좋아하는 놈들은 이때다 싶어서 사고 치고 있고 웬 어중이떠중이들이 설치고 있고. 너도 보아하니 운 나쁘게 말려든 모양인데?”

차마 아니라고 대꾸할 수 없어서 카이엔이 표정을 구겼다.

뭐가 그리 즐거운 건지 벨레드는 웃기만 했다. 그 역시 악마일 터인데, 악마치고는 굉장히 밝고 활기찼다.

“아무튼 너도 물건이긴 하구나. 이렇게 큰 사건이 벌어진 땅에 제 발로 걸어오다니. 물론 혼자 온 건 아니지만 네가 약하니 어쩔 수 없구나. 게다가 리치왕이라… 흠, 내가 아는 놈 중에 리치왕을 굉장히 좋아하던 녀석이 있었는데.”

“알릴…겁니까?”

슬쩍 카이엔이 말투를 바꾸었다.

프라우디에에 대해 악마들이 알면 상황이 나빠질지도 모른다. 그 반응에 벨레드는 고민하는 척 하다가 대답했다.

“아니. 내가 뭐하러? 계속 안달복달하게 둘 거다. 그나저나 약한 아이야, 넌 대체 어쩌다가 말려든거냐?”

“…저도 모릅니다. 알고 싶어서 온 거고요.”

“그건 나도 모른다. 널 선택한 악마가 알고 있겠지.”

“으으으… 괜히 왔어…”

“나처럼 호의적인 악마와 만난 걸 행운으로 여기거라.”

별로 행운 같진 않았지만 카이엔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나 표정으로 다 드러나서 벨레드는 숨죽여 웃었다.

사령 기사가 겔로스를 말아먹는 걸 구경하고 있다가 다른 후보가 오는 걸 봐서 냉큼 중간에 끼어들었는데, 아무래도 잘한 것 같았다.

“…허?”

이런 일도 있고 말이다.

그는 웃음을 멈추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사령 기사의 몸체가 크게 흔들렸다.

강렬한 빛.

다들 그 빛에 놀라서 하늘을 보았다. 그곳에는, 햇빛을 마치 후광처럼 등진 세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진분홍색, 푸른색, 금색 머리카락에 치렁치렁 하늘하늘한 옷을 입고 있는, 세 명의 소녀였다.

순간 카이엔은 그의 눈을 의심했다. 어쩐지, 예전에 티아마티스가 해줬던 말이 떠올랐다.

- “그놈이 워낙 세서. 아, 그때 그런 녀석들도 있었지.”

- “마법 소녀.”

- “그런 애들 있어. 무슨 나풀거리는 옷 입고 날아다니면서 싸우던 애들. 엄청나게 강하긴 했는데 리치왕녀석 죽은 이후론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네. 세상이 쑥대밭이 되니 너도나도 각성해서 난리였으니.”

설마.

설마.

설마?

‘여기서 왜 쟤들이 나와!!’

명백히 리치왕을 적대하는 적으로 추정되는 소녀들의 등장에 카이엔은 급하게 프라우디에를 등 뒤로 숨겼고 벨레드는 조종하고 있는 사령 기사의 몸을 추스르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 역시 이 상황이 매우 당황스러운 모양이다.

“이런 미친놈들을 봤나.”

“설마 저놈들…”

“그 설마가 맞지.”

친근하게 대꾸해주는 악마를 보고 카이엔은 인상을 썼다.

그리고 그 순간 하늘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겉모습처럼 앳된 목소리였다.

“지상을 어지럽히는 존재가 나타났다는 부름에 우리가 왔다!”

“세상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인간을 지키기 위해.”

“엘리멘티아 플레임!”

“엘리멘티아 아쿠아!”

“엘리멘티아 에아!”

“…뭐야 저게.”

“하하.”

왠지 모르게 유치해 보이는 소개였다.

창피하지도 않는 걸가? 하나 외치는 이들은 당당했다.

어이가 없어서 카이엔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는데 세 소녀 중 가운데에 서 있던 분홍색 머리카락의 소녀가 손가락으로 사령 기사를 가리키며 외쳤다.

“법도를 어지럽히고 죽지 못하고 살아있는 시체들을 벌하기 위해 우리가 왔다.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갈지어다!”

“…자네, 피하는 게 좋을 것 같다만.”

“어?”

“일행 중에 다크 엘프가 있군. 게다가 언데드야. 저놈들 눈에 띄어서 좋을게 없어.”

악마의 충고에 카이엔은 당황했다.

도대체 왜 이 악마가 그를 도와주는 건지 몰라 의아해하고 있으니 벨레드가 한 마디 덧붙였다.

“저놈들은 아직 네가 상대할 수 없어. 몸을 피하고 적에 대한 것부터 알아내는 게 낫겠지. 지옥에서도 자네를 구경하고 싶으니 이쯤에서 돌아가게.”

“그-”

“네. 그럴게요.”

프라우디에가 카이엔의 팔을 붙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있으면 위험하다는 건, 그 역시 잘 알고 있기에 카이엔도 동의한다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벨레드는, 얼굴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들리고 있었지만 어쩐지 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것이 아직도 이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아 어리둥절해 하는 자기 때문인지, 과거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어린아이가 되어 버린 리치왕 때문인지, 카이엔은 알 수 없었다.

벨레드는 사령 기사의 몸을 움직여서 카이엔을 향해 손을 뻗었다.

“좀 아플지도 모르겠군.”

“무슨… 으헉!”

그 순간, 거센 힘의 파동이 카이엔에게 직격했다.

악마가 한 공격치곤 약한 게 충분히 힘을 빼고 공격한 것 같았지만 카이엔은 그대로 프라우디에와 뒤로 밀려나 버렸다.

튕겨 나가는 그를 급하게 앞으로 달려 나온 라스가 안전하게 붙잡았다.

벨레드가 마법 소녀들이 나타난 이후로는 목소리를 줄여서 카이엔과 프라우디에에게만 들릴 정도로 말했던지라 카이엔은 얼른 라스의 귀를 잡아당기며 소곤거렸다.

“벗어나자. 얼른.”

“네? 알겠습니다.”

라스는 영문을 모르는 듯했지만 카이엔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공중에 떠 있는 소녀들의 시선은 사령 기사를 향해있었다.

인간과 겉모습이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이종족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기에 카이엔은 일행을 데리고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그들이 물러나는 것에 맞춰서 벨레드는 사령 기사를 조종해 소녀들의 시선을 끌었다. 검을 휘두르며 악마가 광소했다.

“크하하하-!! 과거의 유물이 되살아나 멋대로 영웅 행세를 하는군! 누구의 짓인지는 눈에 훤하다만!!”

“시끄럽다, 이 악마!”

“네놈들 뒤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고 또다시 절대 선의 노릇을 하려는 건가? 할 수 있으면 어디 해보시지!”

아무래도 그는, 불청객의 등장도 반기는 모양이다. 신나게 검을 휘두르면서 말하는 게 어쩐지 연기를 하는 것만 같지는 않았다.

사령 기사가 휘두르는 검에 검푸른 불꽃이 일어났고 마법 소녀 세 명이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었다.

세 소녀는 각자 검과 창, 활을 손에 들고 사령기사와 언데드 군단에 맞서 싸웠다.

양 진영이 부딪치면서 번쩍이는 섬광과 굉음이 터져 나왔다. 그 소란의 틈을 타 카이엔은 일행과 함께 급하게 뒤로 몸을 뺐다. 그 순간 벨레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 저놈들에 대해 알아봐야 할 것이다. 네가 정말로 이 대리전에서 우승하고 싶다면 말이야.

아니 우승하고 싶진 않은데.

인상을 찌푸리며 카이엔은 손바닥으로 귀를 문질렀다. 꼭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만 같아서 기분이 나빠졌다.

프라우디에는 힘을 거둔지 오래였고 사령 기사는 세 명을 상대로도 엄청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실은 사령 기사가 아니라 그 몸을 제압한 벨레드가 마음대로 써먹고 있는 것에 불과했지만, 고작 언데드 하나의 몸을 빌려서 악마가 저 정도로 큰 힘을 낼 수 있다는 건 굉장히 위협적이었다.

“…사령 기사는 오래 버티지 못할 거예요.”

프라우디에가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몸이, 힘을 버티지 못해요.”

“으음…”

“왜, 저희를 도와주는 걸까요?”

“글쎄… 그건 나도 모르겠어. 일단 얼른 뒤로 빠지자.”

마차에 탄 일행은 겔로스를 벗어나 더스크라이즈로 향했다.

올 때도 더스크라이즈를 통했으니 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순간이동 마법진이라도 있으면 한결 나았을 거라며 프라우디에가 한숨을 푹 쉬었지만 지금 상황으로는 만들기가 굉장히 어려운 모양이었다.

더스크라이즈에서 다시 만난 다크 엘프들에게 겔로스의 사령 기사가 없어졌다는 말을 전달하고 그들은 세자르로 돌아갔다.

그들이 세자르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령 기사의 군대가 전멸하고 세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소문이 흘러들어왔다.

사령기사를 물리친 소녀들은 엉망이 된 겔로스를 복구하기 위해 사람들을 돕고 엉망인 치안으로 인해 자잘하게 일어나는 범죄들을 소탕한다고 했다.

‘역시 죽었구나.’

벨레드가 시선을 끄는 사이 그들은 안전하게 탈출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카이엔은 사령 기사의 사망을 알리는 목소리를 들었다.

이전에 들었던 목소리가, 후보가 한 명 줄었음을 알렸다.

곰곰이 머릿속으로 나머지 후보의 수를 가늠하다가 카이엔은 티아마티스에게 마법 소녀들의 등장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천 년 전, 고대를 알고 있는 이는 오직 티아마티스 뿐이었으니까.

아마 그 아이들도 악마들이 내세운 대리인이 분명했다. 어째서 과거 정의의 편이었을 아이들이 악마의 손 위에서 놀아나고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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