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할 수 있겠어? 힘들 것 같은데.”
“괜찮아요. 마력은 충분해요.”
다만 말이 놀랄까 봐 그게 걱정이라며 프라우디에는 작게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정말로 프라우디에는 올레이스 백작령 근처에 도착하자 마법으로 그들의 모습을 감춘 뒤 마차를 천천히 공중으로 띄웠다.
말들에겐 미리 수면제를 먹인 뒤라 저항은 없었다.
얼른 이동하자면서 프라우디에는 무섭지도 않은 건지, 마부석에 앉아있는 바이스의 옆에 딱 붙어서 마법으로 마차를 움직였다.
손쉽게 방벽을 넘어 더스크라이즈의 땅에 마차를 내려놓은 뒤에야 그는 안심했다며 긴 숨을 내쉬었다.
“고생했어, 프라우디에.”
“뭘요. 말들이 깨어나야 하니까 저희도 잠시 쉬어요.”
“내일 이동해도 되겠습니다. 벌써 해가 저물고 있으니까요.”
마차로 달리는 속도보다 하늘을 나는 게 더 빨라서 시간이 단축되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방벽을 넘어와야 했다면 하루가 지난 다음에야 들어올 수 있었을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행은 다시 움직였다. 엔베인이 더스크라이즈 출신이긴 하지만 숲 곳곳을 모두 아는 건 아니라서 어느 정도 앞으로 나아간 뒤에야 길 안내가 가능했다.
이전에 방문했을 때는 몬스터를 단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작은 몬스터들과 마주칠 수 있었다.
물론 멀찍이서 쳐다보기만 할 뿐 먼저 덤벼들지 않았기에 카이엔은 적당히 몬스터들을 쫓아내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이쪽 길이 빠릅니다.”
“흠. 겔로스로 이어지는 길은 알고 계시나요?”
“조금은요. 저희 마을은 그쪽의 인간들과 이따금 거래를 하곤 했으니까요.”
직접 가본 적은 없지만 그 길이 그 길이라며 엔베인은 차분하게 방향을 가리켰다.
물론 지금 겔로스에서 큰일이 난 이상 거래는 끊겼을 테니 다른 다크 엘프들과 마주칠 일도 없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동족들과 만나도 기뻐할 수 없는 게, 그는 마검과 동화되어서 머리카락의 색도 눈동자의 색도 바뀌었으니 그들이 그를 알아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드넓은 더스크라이즈의 땅은 깊숙이 들어갈수록 언데드와 마주칠 확률이 높았지만 이상하게도 그들이 언데드와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깊숙한 곳에서 몬스터가 죽으면 그 시체가 저절로 언데드가 되어서 비척비척 일어나 움직이는 곳이라던데.
휴식 시간에 바이스가 이견을 제시하자 프라우디에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 제가 마력으로 주변 땅을 훑고 있거든요. 아마 그래서 그럴 거예요. 마력을 느끼고 저희를 피해 가는 거요.”
“흠. 그렇군요. 힘들진 않으십니까?”
“흑마법 연습하는 셈 치고 있어요.”
“그렇군요.”
이동하는 내내 마력을 흩뿌리는 게 쉽지는 않을 텐데 프라우디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자네인이 건넨 차를 홀짝이는 모습을 보고 카이엔이 말했다.
“계속 그러고 있던 건 아니지?”
“지금 저희가 중심부를 지나고 있으니까 그런 거예요. 중심부를 지나친 다음엔 쉴 테니까 괜찮아요.”
“그래. 너무 무리하진 마. 언데드든 몬스터든 나오면 싸우면 되니까. 그러려고 다 같이 온 거고.”
전투가 일어날 일이 없다면 여기서 절반 정도는 세자르에 두고 왔을 것이다.
사령 기사가 악마와 마왕 대리전과 연관되어 있을 거란 건 오로지 카이엔의 추측일 뿐이었다.
만약 전혀 관련이 없는 자라면 말이 통하지 않을 테고, 남은 건 전투 뿐일 거다.
‘그렇게 되면 도망쳐야지.’
남의 땅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신경 써줄 정도로 그가 한가하진 않았다.
무사히 중심부를 통과하고 나서 프라우디에는 마력을 거두었다.
다크 엘프들이 워낙 뿔뿔이 흩어져서 사는 데다가 이전에 마검으로 벌어진 사건 때문에 더 깊숙한 곳으로 꽁꽁 몸을 숨겼을 거라고 엔베인이 말해주었다.
그는 동포들이 어디로 움직였는지 짐작했지만 그쪽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겔로스로 향했다.
마검과 동화된 몸이지만 그 역시 다크 엘프. 엘프긴 엘프였기에 태어나고 자란 더스크라이즈의 땅을 읽고 일행을 올바른 방향으로 안내해주었다.
“온통 숲이라 헷갈리네.”
“그래도 몬스터가 나오지 않아 다행이에요.”
나온다고 해도 크기가 작은 녀석들뿐이었고 위협이 될만한 대형 몬스터들은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프라우디에가 더 이상 마력을 뿌리지 않아도 몬스터들은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엔베인은 어째선지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과거, 이곳의 몬스터들을 죄다 삼켰던 마검이 여기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는 그 마검과 한 몸이 된 상태였다.
마검의 기운을 기억하는 몬스터들이 희미하게나마 느껴질 그 불길한 기운을 본능적으로 피하고 있다고밖에 해석할 수 없었다.
‘다행인 거지…’
괜한 전투가 벌어져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으니까.
겔로스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기에 그들은 좀 더 속도를 높이기로 했다.
그런데 이동하던 중, 그들은 다크 엘프들과 마주쳤다.
무장하고 천막을 친 무리를 보고 엔베인은 깜짝 놀랐다.
이곳에 다크 엘프의 거주지 따윈 없었는데? 그는 황급히 마차에서 내렸고 그곳의 다크 엘프들 역시 여기까지 들어온 마차를 이상하게 여기며 가까이 다가왔다.
“마차? 어디서 온 거지?”
“너희, 대체 어디서 들어온 거야?”
“가르간트입니다만.”
“가르간트? 엄청 멀잖아! 하긴, 에밀 사람들이 여기까지 올 리는 없지.”
“용케 길을 찾아왔네. 어… 동족? 왠지 얼굴이 익숙한데… 혹시 너 엔베인이냐?”
“뭐?”
“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걔는 자기가 마검을 잡고 있겠다고 해서 쇠사슬로 칭칭 묶어서 마을에 말뚝 박아놨었잖아!”
“아냐 잘 봐봐! 맞다니까!”
다크 엘프 한 명의 외침에 그곳의 모든 다크 엘프의 시선이 엔베인을 향했다.
엔베인과 그의 허리춤에 매인 시커먼 검을 보고 다들 경악을 했다.
“엔베인!”
“너 살아있었구나!!”
“어… 어쩌다 보니까… 도움을 받아서.”
“게다가 멀쩡해! 살아있어!”
“멀쩡하진 않은 거 아냐? 완전 외모가 바뀌었잖아.”
“에이, 얼굴은 그대로잖아. 너 괜찮아? 미안하다, 우리가 그때 이후론 마을에 안 가서….”
“그럴 수밖에 없지.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그런데 여기서 다들 뭘 하고 있었던거야?”
다행히 다크 엘프들의 관심이 가르간트에서 온 일행에서 엔베인으로 옮겨갔다.
엔베인의 물음에 과거 같은 마을에서 지냈던 것 같은 다크 엘프들이 얼른 설명해주었다.
“겔로스에서 난리가 났잖아. 우리도 그 땅과 연결되어있으니 방어하고 있지.”
“너희는 그걸 어떻게 알았어?”
“에밀에서 피난민을 받아주지만 거기로 못 가고 여기로 넘어오는 인간들도 있어. 괜히 숲 깊숙이 들어갔다가 몬스터 밥이 될지도 모르니 적당히 살 곳 내주고 있지. 그리고, 혹시라도 이쪽으로 뭔가가 들어올까 봐 경계하고 있고.”
“처음엔 무슨 일이 있는지 몰랐는데 도망쳐온 인간들이 알려주더라. 그리고 그 사람들이 여기로 오고 있단 소문이 또 퍼진 건지 그 뒤엔 에밀에서 찾아왔어.“
이야기를 듣자 하니, 피난민 중에서 우연히 다크 엘프들이 지나는 길까지 온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다크 엘프들은 더 많은 인간이 숲으로 들어올 것을 염려하여 일부가 거주지를 옮겼다.
안 그래도 이전에 수상한 마검의 등장으로 곤욕을 치른 적이 있는 다크 엘프들이었다.
인간들에겐 미안하지만, 피난민 틈에 껴서 이상한 인간이 들어오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었다.
묵묵히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 엔베인이 물었다.
“혹시 사령 기사에 대해 알고있는 게 있어?”
“응? 어어- 에밀에서 말해주길, 원래는 인간이 맞는데 억울하게 모함을 받아서 죽었대. 그런데 어떻게 된 건지 목이 잘렸는데도 살아 움직였고.”
“그래서 광장에서 난리가 났는데 그때 검은 번개가 내리치더니만 목 없는 기사가 되었다더라. 죽은 기사가 걸음 한 자리에서 시체가 일어나니 그 수가 계속 늘어나고 있고. 이대로 가다간 겔로스는 시체 밭이 될 거야.”
“으음…”
그 이야기를 들은 엔베인은 난감해하며 카이엔을 보았다.
그들이 알고 있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사령 기사의 탄생 기원은 그들도 모르는 이야기였다.
입에서 입으로 전달된 만큼 달라진 점도 있겠지만, 어느 정돈 진실일 터였다.
다크 엘프들의 이야기를 들은 카이엔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얼마나 원한이 깊었으면 목이 잘렸어도 움직였을까. 살아났을까.
카이엔은 그것을 염려하며 사령 기사에 대한 정보가 더 없나, 궁금해했다.
아마 그놈이 최후의 9인 중 한 명일 것이다.
‘그나저나 다들 흑마법과 연결되어있으니 알아보기는 쉽군. 악마들 취향 참…’
‘그런데 나는 왜 몬스터 말 알아듣는 거냐고.’
물론 시체나 영혼을 다루는게 더 싫지만.
사령 기사를 움직이는 게 그의 원혼일지 그게 아니라면 그거 악마와의 계약 끝에 조종당하는 건지 왜 이제야 그 힘이 드러난 건지, 모조리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사령 기사가 나타난 건 최근이었지만 목소리가 최후의 10인을 알린 건 훨씬 전의 일이었으니까.
혹시, 미리 구두로 약속을 한 다음에 나중에 힘을 받을 수도 있는 걸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라면 사령 기사가 허무하게 인간의 목숨을 잃고 언데드가 되었을 리도 없으니.
***
‘나는, 무엇을 하는거지?’
사령 기사는 모든 것을 죽이기 위해 움직였다.
처음 그가 탄생했을 때. 그는 처형장을 지키고 있던 자들을 모조리 베었고 그의 앞을 막는 기사들을 베었으며 기어이 영주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도망치는 이들까지 죽였다.
처음에는 몸을 가득 채우는 분노로 움직였던 그였다. 하지만 죽여야 할 놈들을 모조리 죽인 후에도 그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이제는 그가 왜 이러고 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싸우고 또 싸울 뿐.
그저 앞으로 나아가면서 모든 것을 파괴해야 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의 군대는 막강했으며 계속 그 수가 불어났다.
이 땅에 묻힌 시체는 아주 많았기에, 무장한 언데드가 끊임없이 땅속에서 기어 나왔다.
개중에는 백골마저도 스러져서 얼마 남지 않은 것들도 있었다.
그는 언데드 군단을 지휘하는 군단장이 되어서 움직였다.
푸른 염화를 내뿜는 유령 군마의 위에 올라, 그는 언데드 무리를 호령했다.
막힘없이 진군하는 군단의 수는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싸우면 싸울수록 그 수가 늘어났다.
그러나 그런 움직임도 오래 가지 못했다.
저 앞으로 가고 싶었지만 치명적인 힘들이 막아서서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몇 번이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했지만 튼튼한 벽이 가로막아 도저히 부수고 지나갈 수 없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한자리에 묶여있다 보니,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방향을 바꿨다.
어느 날.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낮임에도 불구하고 침침한 날.
사령 기사와 그 군대는 북쪽의 에밀 대신 남서쪽의 투아 공국을 향해 방향을 바꾸었다.
투아에서는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주변국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애석하게도 그 작은 나라를 도와줄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사령 기사의 군단은 지나는 길에 있는 생명을 멸하면서 움직이는지라 이전보다 이동속도가 느렸지만, 방향을 바꾸지 않고 투아를 향해 진군했다.
에밀에서도 그 움직임을 눈치챘지만 그들 역시 무시못할 정도의 타격을 입은지라 바로 군대를 파견할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