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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왕자는 조용히 살고싶다-98화 (99/219)

98화

에이들러는 계속 도망쳤다고 한다.

이곳에 남은 사람이 그 뿐인 건지 움직이면서 만난 사람은 아무것도 없었다.

도중에 핏자국을 발견하게 되면 두려움과 동시에 아직 청소가 덜 끝났구나, 하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었다며 훌쩍이는 걸 보고 카이엔은 말없이 에이들러의 등을 토닥였다.

바로 직전까지 에이들러가 쫓기고 있던 걸로 봐선 그 청소란 게 끝나서 에이들러를 잡으러 오는 모양이었다.

그들이 저택에 도착했을 때 1층에 핏자국 같은 건 없었고 피 냄새조차 나지 않았다.

조금 더 일찍 도착했다면 안 그래도 피투성이인 곳에서 싸울뻔했다며 카이엔은 살짝 인상을 썼다. 시간을 지체하지 않았다면, 좀 더 많은 아이를 구할 수 있었을까?

이곳에 남아있는 건 아마, 에이들러 뿐인 것 같았다.

“그럼 어서 탈출하자.”

“범인도 잡아야 합니다. 또 이런 일을 벌어지게 둘 수는 없으니까요.”

“어떻게 하지? 죽치고 기다려야 하나?”

“확실히 이길 방법은 있고?”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칼 맞으면 다 죽는 법입니다.”

살벌한 소리를 하는 바이스를 보고 카이엔은 질색했다.

안 그래도 잔뜩 겁을 먹은 상태인 에이들러는 카이엔에게 단단히 붙어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본 모습이라면 모를까, 그 역시 어려진 상태여서 그를 끌어안고 꼭 붙어있는 에이들러를 지탱하는 데에 힘이 들었다.

“으음… 에이들러, 혹시 여기 주인인 애에 대한 정보가 더 있을까?”

“저도 잘은 모르겠지만… 다른 애들이 했던 말이 있는데 굉장히 이상했어요.”

에이들러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소녀가 말했던 규칙 혹은 예절 같은 거였다며 말하는 것들은 굉장히 이상했다.

항상 태도는 사근사근하게, 걸음은 사뿐사뿐하게, 목소리는 사랑스럽게.

편식은 나쁘지만 싫어하는 음식이 하나쯤은 있어야 귀엽다.

음식을 먹을 땐 아주 조금씩 입에 넣기.

묻고 싶은 것이 있으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보기.

옷을 더럽힐 정도로 소란스러운 놀이는 하지 말기.

예쁜 목소리로 말하며 소리를 지르거나 시끄럽게 떠들지 말기.

에이들러가 손가락으로 꼽으며 하나씩 말하는 것을 듣다가 바이스가 입을 열었다.

“뭡니까, 그 괴상한 취미의 나열 같은 것은? 하긴, 여기는 인형의 집 같으니 그럴 만도 하군요. 저희는 1층을 탐색하다가 사람 모양의 인형 같은 게 있는 방을 발견했는데 아무래도 그게 진짜 사람이었나 봅니다.”

“네에?!”

“멋있게 생기지도 않고 평범하게 못생긴 어른 들 뿐이었잖습니까. 요즘 들어 왕자님께서 이상한 일에 휘말리고 계시니 저절로 식견이 늘어만 가는군요.”

“뭔 소리야…”

아무래도 바이스는 짐작 가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짧게 한숨을 쉰 뒤 마저 말을 이어나갔다.

“저택 주인은 인간이 아닌 게 확실한 것 같네요. 에이들러 왕자님께 했던 괴상한 요구에 인간 시체로 추정되는 밀랍 인형 같은 걸로 봐선, 과거에는 그 소녀 쪽이 피해자였던 모양이지만요. 아마 사육당하는 쪽이었을 겁니다.”

“사육?”

“인간의 욕망이야 뻔하지 않습니까? 젊음에 대한 욕구, 미에 대한 욕구, 남보다 더 잘나고 싶다는 못난 마음. 그래서 노예 같은게 있는 거고요. 모종의 이유로 학대받던 아이가 힘을 얻고 괴롭히던 나쁜 놈들을 처리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왜 엄한 애를 납치해와서 난리야?”

“보통 사람은 자신에게 불합리한 일이 생기면 자신이 그 구덩이에서 벗어나게 되었을 때 남도 자신과 똑같이 만들어주고 싶다고 여기는 법이랍니다.”

“미친…”

“아무튼 목적인 현 왕자님을 찾았으니 저희는 그만 돌아가도 될 것 같네요.”

“나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리델라가 한 마디 얹었다.

에이들러와 만난 직후, 그녀는 탈출하는 데 지장이 없을지 마력으로 탐색을 시도했다.

들어오는 건 가능해도 나가는 건 분명히 들킬 게 뻔하다는 결론을 내린지라 그리델라 역시 싸워야 한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여기서 주범을 해치우지 않는 이상 비슷한 일은 몇 번이고 일어날 테니까.

문제는 그녀와 바이스 둘만으로 적을 상대해야 한다는 거다.

‘바이스 씨야 엄청나게 강하겠지만…’

지금 몸은 많이 쳐줘도 열두 살 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였다. 본 모습보다 키가 30cm도 넘게 줄어든 상태인데 과연 검을 휘두를 수는 있을까. 그것이 걱정이었다.

아까 검을 뽑은 걸 봐선 사용하는 데에 무리는 없을 테지만 본 실력을 낼 수 있을 리가.

두 사람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카이엔은 잠시 생각한 끝에 입을 열었다.

“일단, 그 밀랍 인형의 방으로 가보자. 조사 좀 하게.”

“괘,괜찮을까…?”

“괜찮아. 자, 손잡고 가자. 너도 놀러 와서 이게 무슨 일인가 싶겠지. 고생이 많다.”

에이들러를 토닥이며 카이엔은 탐색에 나서기로 정했다.

도서관 문을 열고 주변을 두리번거린 뒤 밖으로 나갔다. 다행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발소리를 내지 않게 조심하며 네 사람은 1층이 밀랍 인형이 잔뜩 있던 방 안으로 들어갔다.

멀찍이 서서 대충 봤을 땐 몰랐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정말 사람 몸에 밀랍을 부어 굳혀서 만든 것 같기도 했다.

쳐다보기만 하는 카이엔과 달리 바이스는 무섭지도 않은 건지 툭툭 건드려보기도 하고 때려보기도 했다.

“이거 떼어보면 안 될까요?”

“뭐?!”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죽었을 테니까요.”

괜찮을 거라며 바이스는 검을 들고 밀랍 인형을 찔렀다.

푹 하고 검이 찍히는 모습에 카이엔은 얼른 에이들러의 눈을 가렸다.

“…나는 저택 주인 녀석보다 저놈이 더 무섭다고 단언할 수 있어.”

“으응…”

“흐음, 피는 안 나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안까지 굳어버린 건지.”

그리델라와 바이스는 밀랍 인형에 대해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리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방을 조사했지만 단서를 찾지는 못했다. 역시 저택 주인과 싸워서 해치우는 수밖에 없는 걸까.

바이스의 추측대로라면 이곳의 주인인 소녀 역시 이전에 그가 마주쳤던 흑마법사와 마찬가지로 무슨 이유가 있어서 사건을 일으킬만한 존재가 된 걸지도 몰랐다.

어차피 싸워야 한다면, 찾으러 가면 그만이었다.

물어보는 건 그때 해도 늦지 않았다. 그들은 조사를 마치고 방에서 나왔다.

“입구 근처에 가면 발각될 거야. 그러니까 그쪽으로 가자.”

그리델라의 말에 일행은 입구로 향했다. 그러나 그들보다 먼저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새하얀 소녀였다.

기껏해야 열다섯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가녀린 체구의 소녀는 문을 바라보고 있다가 뒤돌아섰다. 눈동자 색은 선명한 붉은 색이었다.

예전에 읽었던 책에서 언급되었던 백색증에 대해 떠올리고 카이엔은 살짝 인상을 썼다.

백색증 환자는 아주 드물게 발생하고 특유의 붉은 눈동자와 새하얀 피부와 머리색으로 인해 사람들이 멀리한다.

지금은 이것이 병이라는 게 알려졌지만, 과거에는 더욱 심각한 무지때문에 백색증 아이가 태어나면 그대로 죽여서 아예 태어나지 않은 것처럼 취급하거나 불길한 징조라면서 아이는 물론이고 가족 모두가 죽임당하는 일도 빈번했다.

그런 백색증을 가진 소녀가 이곳에 있다.

아마, 희귀한 것을 취급하는 취미라도 있었던 모양인 부유한 집안에.

가족의 일원이 아니라 애완동물 취급을 받으면서 길러졌던.

그런, 아이가.

소녀는 그들을 발견하고 활짝 웃었다.

“와, 다른 사람들도 있었네? 너는 나랑 비슷한 기운이 느껴지는구나? 너는 무슨 소원을 빌었니?”

카이엔을 바라보며 그녀는 노래하듯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이곳의 아이. 주인님의 인형. 항상 예쁘고 귀여운 옷과 물건들로 치장되어서 지냈어. 달콤한 설탕 장식이 되어있는 자그마한 컵케이크같이. 유리 장식장 너머로 보이는, 잘 꾸며진 인형의 집 안에서. 하지만,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그 관심은 줄어들었다. 햇볕 아래에 있지 못하는 나는 점점 약해졌고 점점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저택의 깊숙한 곳으로. 나중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방 안에.”

소녀의 목소리는 아름다웠지만 반대로, 굉장히 기괴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몸을 움직이며 노래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점점, 몸에 힘은 빠지고. 아아, 영원히 어린 아이였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 그 소원을 누군가가 이루어주었어.”

“인형 놀이를 해본 적 있어? 혼자여도 물론 즐겁지만 다른 친구들이 있으면 더 즐겁지. 나와 영원히 같이 있어 줄 아이들이 필요해. 물론 시끄럽고 떠들썩한 애들은 질색이야. 얌전하고 조용하고 귀여운 아이들로만 모을 거야.”

움직이던 소녀의 시선이 카이엔을 향했다.

초점 없는 붉은 눈동자가 뚫어져라 그를 바라보았다.

“넌, 무슨 소원을 빌었어?”

“…소원 같은 거 빈 적 없는데.”

“영원히 살고 싶다면 나랑 비슷한 기운이 느껴지는 사람들을 없애버리면 된다고 했어.”

“여기 사람들은 어떻게 된 거지? 물론 죽어도 싼 놈들이지만…”

“계속 시끄럽게 비명을 지르길래, 조용하게 해줬어.”

죽였다는 말이었다.

소녀는, 자신과 비슷한 기운이 느껴지는 존재라는 말을 했다.

소원이라는 알 수 없는 말도 있었지만 그녀가 노리는 게 카이엔이라는 말에 바이스와 그리델라가 앞을 막아섰다.

소녀가 손을 움직이자 붉은 화살 같은 것이 그들을 향해 쏘아졌다. 그리델라가 바람으로 화살을 튕겨냈고 바이스는 힐끗 뒤를 돌아보며 카이엔에게 물었다.

“뭐 짚이는 구석은 없으십니까? 예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지 않았나요?”

“몰라!”

“그럼 일단 저분부터 해결해야겠군요.”

바이스는 검을 들고 가볍게 휘둘렀다.

자신이 얼마만큼 휘두를 수 있는지 가늠을 마친 그는 바로 앞으로 달려 나갔다.

제 키의 절반쯤 되는 검을 들고 달리는데도 바이스는 꽤 빨랐다.

순식간에 소녀와의 거리를 좁히더니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손끝으로 마법 화살의 방향을 조종하던 소녀의 소매가 길게 찢어졌다.

그녀가 피할 틈을 주지 않고 바이스는 손목의 방향을 꺾어 한 번 더 검을 내리그었다.

검격을 막은 소녀의 흰 팔에서 피가 흘렀다.

“악!”

“어린애 모습이라 얕보인 모양입니다. 저도 어렸을 적부터 고생은 꽤 한지라.”

“너-”

“이쪽도 생각해야지. 너에게도 미약하게나마 마녀의 피가 흘렀던 거야. 그래서, 쓸쓸하게 죽고 나서 이상한 녀석이 접근한 거겠지. 네가 더 잘못을 저지르기 전에 막아야겠어.”

그리델라의 발밑에서 강한 바람이 솟아오르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바람은 두 갈래의 송곳으로 변화해 굉음을 내며 소녀에게 달려들었다.

그 와중에 바이스는 기어코 한 번 더 소녀에게 일격을 날린 다음 뒤로 몸을 뺐다.

검 끝에 흐르는 피를 유심히 살펴보던 그는 고개를 저었다.

“치명상을 입히진 못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막고 있군요.”

“마력일 거예요. 더한 강도의 마력을 둘러 공격하지 않는 이상 무리죠.”

“흐음.”

바이스는 고개를 기울이다가 이해했다며 대답했다.

두 사람이 싸우는 동안 카이엔은 에이들러의 눈을 가리고 있었다. 피 튀기는 광경을 어린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의 마음을 알기에 에이들러는 조용히 카이엔에게 기대어 서 있었다.

쾅!

두 갈래의 바람 송곳이 바닥에 부딪히며 큰 소리를 냈다. 바닥이 갈라지고 부서지며 돌가루가 흩날렸다.

연기가 흩어지자 만신창이가 된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기사들을 상대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일방적인 살육을 행하던 그녀였지만, 그보다 상위의 마녀에게 맥을 못 추는 것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그녀가 누군가에게 빌었던 ‘소원’이라는 것이, 영원히 어린아이로 있고 싶다는. 힘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었기에 벌어진 일인지도 몰랐다.

이 아이가 좀 더 빨리 자신의 힘을 깨닫고 이 저택에서 도망쳤다면 조금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을까? 카이엔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기사들은 물론이고 납치해온 아이들마저 모조리 죽여버린 그녀에게 그 이상의 동정심을 느끼진 않았다.

“커,커흑… 뭐야… 왜…”

“미안해요 바이스 씨, 제대로 끝을 못 내버렸어요.”

“괜찮습니다.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것일 테니까요. 왕자님을 챙겨주세요.”

겉모습이 어려졌다고 애 취급하기냐.

에이들러만 보살펴도 충분할 텐데 그리델라는 그의 앞까지 막아서고 있었다.

바이스는 냉정히 적을 바라보았다. 피투성이에 다리까지 후들거렸지만 그녀는 쓰러지지 않고 그 자리에 버티고 서있었다. 다만, 더이상 공격할 힘은 없어 보였다.

‘흠.’

시끄러운 건 싫으니까, 가능한 비명이 나지않게 처리할 생각이다.

바람 소리조차 내지 않고 휘둘러진 검이 깔끔하게 정면에 놓인 것을 절단했다.

무거운 것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뒤이어 남은 몸이 힘없이 쓰러졌다. 그 순간, 저택이 크게 진동했다.

“빠져나가죠.”

역시 주인을 처리하는 게 옳았던 건지, 소녀의 목숨을 거두자 저택의 형상이 순식간에 일그러지면서 무너져내렸다.

서둘러 문밖으로 나와 저택을 빠져나오자 저택 안에 걸린 마법으로 어린아이가 되었던 두 사람의 몸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때, 카이엔의 귓가에 낯선 목소리로 누군가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최후의 10인이 남았습니다.]

[당신은 인간계에서 진행되는 대리전쟁의 최후 10인 중 한 명입니다.]

[최후의 승자와 계약한 악마는 추후 마왕의 자리에 앉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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