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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왕자는 조용히 살고싶다-97화 (98/219)

97화

“일단 움직입시다. 계속 여기 있어서 좋을 것도 없으니까요. 그리델라 님, 추적은 어떤가요?”

“주변에 마력이 엉망으로 꼬여있어서 찾기가 힘들어요.”

“그럼 일 층부터 하나하나 문을 열어보죠.”

인기척은 여전히 느껴지지 않으니 괜찮을 거라며 세 사람은 주변부터 확인해보기로 했다.

저택에는 아주 많은 방이 있었기에 하나하나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꽤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수많은 문을 하나씩 열어보면서 그들은 그 안을 확인했다. 빈방도 대부분이었고 내부는 규칙 없이 중구난방 했다.

드레스룸

욕실

사람같이 생긴 밀랍 인형이 잔뜩 있는 방

식당

공부방 등등.

평범한 방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다. 대표적으로는 반성실이라는 문패가 붙어있는, 아주 좁은 방에 의자 하나만 달랑 있는 곳이라던가.

카이엔이 반성실 안을 자세히 확인하려고 하자 바이스가 팔을 뻗어 앞을 가로막았다.

“별거 없습니다. 하나, 안에서 열리지 않는 구조 같군요. 좁은 방이니 이정도로 충분합니다.”

“그래? 알겠어. 대체 에이들러는 어디 있는 거람…”

“2층도 있으니까 일단 갈까요? 여긴 없는 것 같은데.”

그리델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일행은 계단을 올라갔다.

짧아진 팔다리에 작아진 몸으로 움직이려니 얼마 걷지 않은 것 같은데 굉장히 피곤해졌다.

내색하지 않으며 카이엔은 열심히 발을 움직였다.

2층에도 복도에 줄지에 늘어선 문이 너무 많아서 그걸 보니 의욕이 팍 꺾이는 것 같았다.

도서실

서재

댄스 연습실

초상화의 방

창고

응접실

이쪽도 빈방이 꽤 많았고 1층에 비하면 방의 크기가 더 크고 넓었다.

그러나 아직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고 주인도 보이지 않았다. 마력으로 주변을 탐색하던 그리델라도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더 올라가 봐야 하나? 안 보이는데…”

“흠. 큰일이군요. 찾지 못하면 곤란한데.”

“왠지 내가 생각하는 곤란함과 네가 생각하는 곤란함이 좀 다를 것 같다.”

“기분 탓입니다.”

웃으면서 바이스가 대꾸했다.

분명 동갑내기 수준으로 어려졌을 텐데 바이스는 묘하게 어른스러워 보였다. 침착하고 덤덤하게 대처해서일까.

납치범이라도 나타나면 얼른 잡아서 에이들러에 대해 물어보면 될 텐데 이곳은 빈집마냥 고요하고 을씨년스러웠다.

실은 1층에서 봤던 밀랍 인형들이 살아서 움직이는 놈들인데 인형인 척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던 건 아닐까, 무서운 상상을 하던 카이엔은 타박거리는 가벼운 발소리에 깜짝 놀라 몸을 떨었다.

“우왓…”

“발소리군요.”

“누가 오나 본데?”

그 소리가 굉장히 가벼운 게, 어른이라기보단 어린아이가 뛰면서 내는 소리 같았다.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잠시 후 누군가가 복도의 귀퉁이를 돌아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채 숨을 헐떡이면서, 마치 무언가에 쫓기는 듯 다급하게 나타난 사람의 얼굴을 보고 일행은 경계를 풀었다.

“사,살려주세요!”

낯선 이들을 발견한 에이들러가 목소리를 높였다.

옷차림은 단정했지만 겁을 잔뜩 먹었는지 얼굴이 새하얬다. 에이들러를 발견하자 카이엔이 급하게 외쳤다.

“에이들러! 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어?”

“흠, 못 알아보는 거 아닐까요?”

카이엔이 그의 이름을 부르자 에이들러는 달리는 것을 멈추고 숨을 몰아쉬면서 눈앞의 세 사람을 응시했다.

백금빛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여성은 모르는 사람이 확실했고 아이들 쪽은 어쩐지 낯이 익었다.

한참 동안 카이엔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에이들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카이엔, 형?”

“그래.”

“왜 이렇게 쪼끄매진 거야?”

“여기 들어오니까 그렇게 되더라. 너 찾으러 왔어. 얼른 여기서 나가자.”

“자…잠깐! 일단 지금은 숨어야 해!”

“쫓기고 있는 겁니까?”

“수,숨바꼭질 하자고 했는데 잡히면 죽을지도…”

“흠. 그럼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납치범이자 이 저택 주인이 나타난다는 거군요?”

에이들러가 납치범이자 저택 주인에게 쫓기고 있다고 말하니, 바이스는 바로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빼 들었다.

여기 서서 기다리다가 낯선 자가 모습을 보이면 그 즉시 베어버릴 셈이었다.

그 모습에 카이엔이 식겁해서 외쳤다.

“야! 적이 무슨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덤비려는 거야?”

“어차피 칼 맞으면 다 죽을 텐데요.”

“일단 숨어서 상황 파악부터 하자.”

“그런데 여기 숨을만한 곳이 있던가요?”

“음, 도서실은 어때? 제가 서가 위로 올려줄게요.”

그 위까지 확인하진 않을 거라며 그리델라가 제안했고 네 사람은 즉시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리델라가 어린아이인 셋을 마법으로 띄워서 높은 서가 위에 올려주었다.

먼지가 있어서 재채기를 하지 않기 위해 코와 입을 막았다.

세 사람의 모습이 아래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 그리델라는 서가의 뒤에 숨어서 누가 들어오면 그 움직임에 맞춰서 숨기로 했다.

과연, 여기로 들어올까?

숨죽인채 그들은 범인을 기다렸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끼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에이들러가 냈던 것만큼 가벼운 발소리가 들렸다.

“어디에 있을까-”

여자아이의 목소리였다. 묘하게 소름이 끼쳐서 카이엔은 몸을 떨었다. 여기서는,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타박, 타박.

가벼운 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

소녀는 도서관 안을 대충 둘러본 다음 밖으로 나갔다. 끼익, 하고 다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갔구나. 안심하려는 순간,

쾅!

닫혔던 문이 벌컥 다시 열렸다.

그리고,

“흐음- 없나 보네.”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뒤를 이었고 다시 문이 닫혔다.

벌렁거리는 가슴을 붙잡고 카이엔은 몸을 축 늘어뜨렸다.

먼지 때문에 코랑 입을 막고 있어서 망정이지, 깜짝 놀라서 작은 소리라도 냈다면 들켰을 게 뻔했다.

소녀가 나간 것을 확인한 그리델라가 다시 마법으로 세 사람을 내려주었다.

자기 옷의 먼지는 대충 털어낸 바이스는 카이엔의 옷과 머리카락에 묻은 먼지는 정성껏 떼어냈다. 그런 바이스를 내버려 두고 카이엔은 에이들러에게 말을 걸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까 여기 들어온 녀석이 납치범이면서 이곳 주인인 거지?”

“으응… 여기는 인형의 집, 이랬어. 주인은 아까 그 여자애가 맞고. 드레스를 입고 있는 정말 예쁜 아이인데… 나를 데려와서는 같이 놀자고 했어.”

떨리는 목소리로 에이들러는 말을 이어나갔다. 한 마디 한 마디 이어나갈수록 몸이 떨리기 시작해서 에이들러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팔을 감쌌다.

그것뿐이라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같이 놀 상대가 없어서 그를 데려온 거라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에이들러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무서웠어… 나 너무 무서웠어…“

훌쩍이는 에이들러였지만 언제 그 여자아이가 올지 몰라서 열심히 눈물을 닦으면서 지금까지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에이들러는 들뜬 마음으로 세자르로 향하고 있었다.

정식으로 만나러 갈 수 있는 그럴듯한 핑계가 생겨서 이번에야말로 마음 편하게 세자르에서 카이엔과 만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번에는 슬로세이랑 싸우지도 않을 거고 사고도 치지 않을 거라며 굳게 다짐했다.

이전에 봤던 몬스터들은 잘 있을지, 손님이 더 늘지는 않았는지.

카이엔에게 궁금한 점도 참 많았고 같이 하고 싶은 일들도 참 많았다.

정식 절차를 밟아서 세자르로 향하는 그를 호위하는 기사들은 굉장히 든든했다.

예전에 몰래 짐 마차에 숨어들었다가 카이엔과 함께 세자르로 가게 됐을 땐 호위의 수가 적어서인지 도적도 심심치 않게 만났지만 이번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세자르로 갈 때까지 아무 일도 없을 줄 알았지만, 도적보다 훨씬 심각한 위험이 나타났다.

“밖이 소란스럽네?”

마차가 흔들렸고 밖에서 기사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별일 아닌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건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함께 탔던 시종과 시녀가 급하게 바깥 상황을 확인했지만 쓰러지고 말았다.

두꺼운 마차가 종이 상자처럼 우그러지면서 누군가가 문을 잡아 뜯었다. 그리고, 그 뒤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눈을 떴을 때 그는 식탁 앞에 앉아있었다.

그와 비슷한 나이대의 소년 소녀들 또한 식탁 앞에 앉아있었다.

죽을상을 한 채, 앞에 놓인 접시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땐 정신이 없어서 잘 몰랐지만 아마 그 아이들은 평민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 즐거운 식사 시간입니다. 예절에 따라 맛있게 먹어주세요~”

식탁의 맨 앞자리에 앉은 소녀가 손뼉을 치며 즐거운 듯이 말했다.

다들 머뭇거리면서 손을 움직이지 못했다. 하나 소녀가 식기를 집어 들고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자 다들 하나둘 앞에 놓인 식기를 집었다.

그러나,

“잘못된 식기 사용! 감점. 그리고 벌이야.”

“악!”

“꺅…!”

소녀의 목소리에 맞춰서, 어딘가에서 나타난 회초리가 식기를 잘못 사용한 아이의 손등을 때렸다.

한번 시작된 회초리 소리는 끝나지 않았다. 계속, 계속 이어졌다.

에이들러는 옆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손을 움직였다.

그에게는 늘 있는 식사 시간, 늘 사용하는 종류의 식기였지만 다른 아이들에게는 그렇지 않은 건지, 회초리 소리와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와 괴로웠다.

눈치 빠른 아이들은 그의 손을 따라 해 어설프게나마 회초리를 피하려고 했다.

길게만 느껴지던 식사 시간이 끝나고, 짧은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한 방에 같이 있게 된 아이들이 소곤거리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개중 가장 나이가 많은 여자아이가 에이들러에게도 말을 걸었다.

“얘, 네가 새로 온 애구나? 어디 다친 덴 없니?”

“응? 으응… 그치만, 나랑 같이 있던 사람들은 많이 다쳤을 거야…”

“뭐? 혼자 있다가 납치된 거 아니야?”

“미쳤어… 얼른 여기서 나가야 돼, 이러다 다들 죽을 거야!”

“주, 죽어?”

“그 이상한 여자애가 감점이니 뭐니 했던 거 기억나? 그런 식으로 무언가 자기 맘에 안 드는 일 하는 애들한테 감점이란 말을 했다가 그 점수가 쌓이면 어디로 데려가더라.”

“…거기 아마 반성실일걸? 저번에 내가 탐색하다가 발견한 방인데, 거기서 사람 목소리가 나더라.”

“헉…”

“히익.”

에이들러도 아이들 사이에 끼어서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었다.

크게 떠들었다가는 그 이상한 여자애가 나타날까봐 소곤거릴 수 밖에 없었다.

아이들의 옷차림은 꽤 화려했지만 그 애들이 말하길, 다들 근처 마을에 살고 있다고 했다.

그 말에 에이들러도 제 신분을 숨기고 근처 마을에 살던 아이인 척 했다. 괜히 신분을 밝혔다가 어색해지는 건 피하고 싶었다.

다른 아이들도 옷은 이곳에 와서 갈아입혀 지게 된 거라고 해서 옷차림으로 신분이 드러나는 일은 없었다.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중에 잡혀 왔다는 말에 그들은 에이들러가 좀 잘 사는 집안의 애인가보다, 라고만 여겼다.

“이제 어쩌지? 계속 시키는 대로 해야 하나?”

“모르겠어… 도망칠 수 있을까? 일단 시간 나는 대로 돌아보고 있긴 한데.”

“다 같이 탈출하는 건?”

“우리가 떼로 덤벼도 못 이길걸?”

“어, 어쩌지?”

여기 있는 아이들 모두 이곳에 오게 된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것이 납치 사건이 일어난 게 최근이어서인지 그게 아니면, 그 이전에 왔던 아이들이 모두 죽어서인지 다들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직접 말해버리면, 더욱 무서워질 것 같아서였다.

그런 아이들의 앞에서 에이들러는 섣불리 구출에 대한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를 호위하기 위해 동행했던 기사들 중 살아남은 사람들이 세자르에 가서 카이엔에게 사건에 대해 전할 테지만 도착할 때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짐작할 수 없었다.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에이들러 역시 불안해하며 사이에 껴서 이야기를 했다.

짧게만 느껴진 휴식 시간 뒤, 문이 벌컥 열리고 다시 소녀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무슨 일인가 싶어서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리는 아이들 앞에서 그녀는 춤 연습을 입에 담았다.

…식사 시간과 마찬가지로 춤 연습 시간 역시, 회초리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소녀가 그들에게 무엇을 바라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아이들은 맞지 않기 위해 눈물을 삼키면서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에이들러는 그나마 예절이나 몸가짐을 바르게 하는 데에는 익숙해진 상태라 고초를 덜 겪었지만 다른 아이들은 그렇지 못했다.

하루가 지나도 이틀이 지나고 시간이 더욱 지날수록 풀리기는커녕 계속된 긴장에 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쓰러져서 구토하기 시작했다.

작은 몸을 웅크리면서 끙끙대는 모습에 아이들의 리더격인 여자아이가 얼른 아이에게 다가가려고 했지만 저택의 주인인 소녀가 더 빨랐다.

소녀는 덜덜 떨고 있는 아이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소녀가 사라지자마자 다들 불안해하며 외쳤다.

“어,어떻게 해?!”

“잡혀간 거야? 주,죽는거야?”

“다들 진정해! 금방 다시 올 것 같으니까…”

“차라리 지금 도망치자! 다들 뿔뿔이 흩어지면 그나마 나을 거야.”

모두의 시선이 대화를 이끌어나가던 여자아이에게 향했다. 그 아이 역시 열세 살 밖에 되지 않은 어린 소녀였지만 이들 중에서는 가장 나이가 많았기에, 다들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 시선에 그녀는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흩어지자. 1층이든 2층이든, 문을 못 찾으면 창문으로라도 나가자. 다들 한계야, 더이상은 못 버텨. 여기서 말라죽거나 잡혀가서 죽을 거야.”

“어서 가자!”

“응!”

총 여덟 명의 아이들이 바로 문을 열고 복도로 달려 나갔다. 에이들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우물쭈물하다가 다른 아이들과는 반대로, 계단 위로 올라갔다.

다들 탈출했단 걸 소녀가 눈치챈다면 분명 입구를 막을 테니, 위층으로 올라가서 로프라도 찾아서 그걸 타고 밖으로 나가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래층에서 비명이 들리자 에이들러는 숨을 헐떡이며 계단을 올라갔다.

아무도 쓰지 않는 것 같은 빈방을 찾아내 그 안에 들어가 침대 아래에 몸을 숨겼다.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에이들러는 조심스럽게 침대 밑에서 빠져나왔다. 문에 귀를 가져다 대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걸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탈출에 필요한 물건을 모아서 어서 빨리 도망쳐야만 했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1층으로 갔었던 걸까? 부디 한 명이라도 무사히 탈출했기를 바라면서 에이들러는 발소리를 내지 않게 주의하며 복도를 걸어갔다.

2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에이들러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2층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우으…”

선명한 핏자국이 남아있었다. 아직 채 마르지도 않은 핏자국이었다.

에이들러는 손으로 입을 막으면서 조심스럽게 그 옆을 지나갔다.

계단을 내려가 바로 1층으로 왔다. 다행히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하나, 핏자국은 남아있었다. 1층 바닥이 전부 피로 물들어있어서 발을 디딜 틈이 없었다.

다시 위층으로 올라가 반대쪽 계단이나 뒷문을 찾지 않는 이상, 핏자국과 피 웅덩이를 밟고 지나가야 했다.

속이 울렁거리는 걸 참으며 에이들러는 뒷걸음질 쳤고, 누군가와 부딪쳤다.

“어…”

“응? 너도 여기 있었네?”

소녀는 손에 대걸레와 물통을 들고 있었다. 핏자국을 지우기 위함이었을 텐데, 그녀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채로 에이들러를 쳐다보았다.

“너도 나가려고?”

“어…어어…”

“으음, 그럼 안 되는데. 기껏 다 치웠는데 또 치워야 하잖아.”

다 죽었다는 말인가?

에이들러는 덜덜 떨면서 고개를 저었다.

목소리가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를 보며 소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지. 넌 그나마 잘 따라왔던 애니까 한 번만 용서해주는 걸로 할까? 정말, 쉬운 일들인데 왜 다들 그렇게 못하는 건지. 나는 다 잘했는데.”

소녀는 에이들러를 지나쳐 피로 가득한 1층으로 내려왔다. 들고 있던 대걸레를 내려놓으며 핏자국을 문질러 닦으며 그녀가 말했다.

“금방 다 치울 테니까, 얌전히 있어. 숨바꼭질은 좋지만 뒤처리가 너무 힘들단 말이야. 아니면, 한 번 더 할까? 숨바꼭질.”

소녀의 입이 길게 호선을 그렸다.

“청소 다 끝나면, 찾으러 갈게? 걱정 마. 여기 말고 다른 데도 있으니까. 청소가 끝나기 전까진, 건드리지 않을게. 약속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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