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글라스가 마차를 몰기로 하고 경계를 위해 라스가 옆자리에 앉기로 했다.
마차에 식량과 노숙에 필요한 물품들을 가득 싣고 카이엔과 일행이 탄 마차가 검은 숲으로 들어갔다.
새끼 케르베로스는 제집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에 폴짝폴짝 뛸 정도로 기뻐했다.
토벌을 마친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마차를 타고 달리는 종일, 몬스터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다. 물론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즉시 카이엔이 방향을 틀게 한 덕분이기도 했다
.
기사단을 따라 검은 숲 안에 들어온 적이 있는 카이엔이었지만 지금 그들이 향하는 곳은, 그가 지금까지 가보지 않은 장소였다.
얼마든지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었지만 그는 걱정하지 않았다.
그때, 에피넬 백작이 카이엔에게 새끼 케르베로스를 주면서 용병들을 털어서 알게 된 서식지의 위치 또한 알려주었다.
글라스가 지도를 보며 그 방향대로 마차를 몰았고 라스는 케르베로스의 냄새가 나는지 확인했다.
하루 이틀만에 갈만한 거리가 아니었기에 카이엔은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워낙 소규모로 움직이느라 짐도 조금밖에 싸오지 않았다.
바이스는 20일분의 식량과 더불어 비상식량이라며 말린 과일이며 육포 같은 것도 챙겨주었다. 아껴먹는다면 한달 정도는 버틸 수 있겠지만 오고 가는 시간을 계산하면 서식지를 찾는데 2주 이상의 시간을 허비할 수 없었다.
식량으로 챙겨온 것도 쉽게 상하지 않을 것들과 복잡한 조리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는 것들뿐이라 식사를 준비하는데 그리 많은 시간을 소요할 필요도 없었다.
세자르를 떠난지 일주일째. 들판을 벗어나 울퉁불퉁한 암석지대가 나타났다.
익숙한 지형인지 새끼 케르베로스가 방방 뛰었다.
지형이 바뀌자 물이 보이지 않아서 잘 씻을 수 없게 되었다. 카이엔은 긴 머리카락을 묶어서 위로 틀어 올렸고 글라스가 긴 막대를 꽂아서 머리를 고정해주었다.
“확실히 힘드네.”
“그렇죠.”
“너희는 괜찮아?”
“우리는 너보단 낫지.”
“네. 인간보다 체력이 월등히 좋으니까요.”
게다가 엔베인은 마검에 침식되어 몸이 반쯤 언데드화 되었기에 자지 않아도 된다며 늘 밤새 보초를 섰다.
카이엔은 미안해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왕자님은 어떠십니까?”
“나도 별 문제는 없어.”
마주치게 된 몬스터를 해치우는건 쉬웠다.
글러티나도 엔베인도 덤벼드는 몬스터를 막힘없이 썰어버렸다.
엔베인이 본격적으로 마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는건 처음이라 카이엔은 살짝 놀랐다.
‘한몸처럼 휘두르네… 아니 한몸 맞지 참.’
바위 뒤에서 기어 나온 전갈같이 생긴 몬스터를 거의 으깨놓다시피 처리한 다음에야 그들은 걸음을 옮겼다.
머리만 잘라놨다가 몸통이 살아 움직일지도 모른다는 글러티나의 의견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울퉁불퉁한 길이었지만 마차가 지나는 데는 문제없었다. 다만, 안전이 걱정되기에 글러티나가 마차 지붕 위에 올라가서 주변을 감시했다.
협곡에 들어서면서 물이 없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지나가는 길에 계곡을 발견한 그들은 잠시 쉬었다가 가기로 했다.
충분히 식수로 쓸 수 있는 물임을 확인한 다음 비상용 식수를 길렀고 다들 간단히 몸을 씻기로 했다.
글라스가 목욕 시중을 들어야 한다면서 허둥지둥 수건이며 비누를 꺼내는 것을 보고 카이엔이 말했다.
“대충 내가 알아서 씻을게.”
“그래도…”
“오래 지체할 시간 없잖아.”
몸에 비누만 좀 문지르고 나온다면서 카이엔은 새끼 케르베로스와 함께 물 안으로 들어갔다.
수영하는 것도 좋아하는건지 새끼 케르베로스는 개헤엄을 치면서 신나게 놀았다.
“멍멍!”
“왈!”
“먕먕먕!”
- 물!
- 시원해!
- 어푸어푸.
참 잘 논다면서 피식 웃고 카이엔은 몸을 씻었다.
물이 차가워서 오래 있고싶지 않아서, 물을 끼얹은 몸에 비누칠을 하고 다시 씻는 것 정도만 했다.
어차피 돌아가면 바이스가 검은 숲에서 묻혀온 먼지를 씻어내야 한다면서 욕조에 담가놓을 것을 알기에 지금은 적당히 씻기로 했다.
협곡에 들어선지 3일째. 온통 돌무더기 뿐인 곳을 지나다 보니 웅장할 정도로 높은 돌 산맥들이 주변에 널린 곳까지 오게 되었다.
새끼 케르베로스는 여길 안다며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흠? 그럼 거의 다 왔나보네?”
“멍!”
- 응!
“그럼 네 집 찾아보자. 알겠어?”
”멍멍! 그르릉-”
- 나, 놀고 있다가 누가 잡아갔어. 이쯤에서.
“그랬구나.”
그럼 부모는 제 새끼를 찾아 헤매고 있을터.
그놈이 다짜고짜 덤벼들지 않고 그의 말을 들어준다면 충돌없이 해결될 문제였다.
얼른 새끼 케르베로스를 엄마에게 데려다주고 세자르로 돌아가야겠다며 카이엔은 조금만 더 힘을 내기로 했다. 그런데, 무언가가 이상했다.
새끼 케르베로스는 이곳을 아는 눈치였다. 그런데 몬스터의 기척도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제 영역에 들어온 인간을 놔두는 몬스터따윈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방이 조용한 것에 의문을 품는건 카이엔 뿐만이 아니었다.
주변 경계를 위해 앞장서서 걷던 라스가 걸음을 멈추었다.
“…왕자님. 이거 좀 이상하군요.”
“음?”
“피 냄새가 나는군.”
“네. 그런데 이상해요. 뭔가가 많이 섞인듯한…?”
글러티나의 말에 글라스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동의했다.
카이엔은 잘 모르겠지만 후각이 뛰어난 그들은 무언가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글러티나가 검을 빼 들고 주변을 경계했고 라스 역시 매서운 눈으로 사방을 살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새끼 케르베로스는 무슨 일인지 몰라 멍멍거리며 짖었고 카이엔은 조심스럽게 새끼 케르베로스를 안아 들었다.
“왈!”
- 왜 그래?
“으음… 아무래도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나봐. 확실하진 않지만 조심해야겠어.”
주변을 경계하면서 그들은 걸음을 옮겼다. 피냄새가 짙어진다며 라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혹시 이곳의 케르베로스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이 어린 케르베로스가 끔찍한 광경을 보지 못하게 막고 싶어서 카이엔은 긴장한 채 정면을 응시했다.
그보다 후각이 뛰어난 새끼 케르베로스역시 이상한 상황임을 눈치챈 건지 카이엔의 품을 벗어나 앞으로 달려 나가려고 낑낑댔다.
그럴수록 카이엔은 새끼 케르베로스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끼이잉-”
- 나 갈래! 가볼래!
“가만히 있어. 위험하면 어쩌려고…”
협곡 깊숙히 들어갈수록 카이엔은 불안해졌다. 바람소리만 들릴 뿐, 그 어떤 몬스터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때, 라스와 나란히 앞을 경계하면서 걷던 글러티나가 홱 뒤돌아서며 외쳤다.
“글라스, 피해라!”
“?”
그 외침에 카이엔은 의아해했고 그 순간 그의 옆에 서있던 글라스가 카이엔의 허리를 낚아채고 옆으로 몸을 던졌다.
조금 전까지 발을 디디고 있던 자리를 향해 거대한 불덩어리가 날아와 부딪쳤다.
온통 바위 뿐이라 태울 것이 없어 불길은 금세 사그라들었지만 땅에 움푹 패인 자국이 남았다. 카이엔을 데리고 피한 글라스는 비명을 지르며 외쳤다.
“으와앗, 이건 또 뭐야!?”
“너 알면서 피한 거 아니었어?”
“뭐가 날아온다는 것까진 알았는데 불덩이일줄은 몰라서… 그런데 이쪽에 불을 뿜는 몬스터가 있던가요?”
케르베로스 서식지일 텐데 화염이라니. 확실히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카이엔의 표정이 어두워졌고 두 사람이 무사한걸 확인한 셋 중에서 가장 먼저, 엔베인이 공격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마검을 휘둘렀다.
멀리서 휘두른 것 뿐이었지만 그 순간 생겨난 검풍이 빠른 속도로 날아가 거대한 바위벽에 부딪쳤다. 우르르, 소리를 내며 한쪽이 무너져내렸다.
- 재빠르군.
“저쪽인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엔베인은 게슴츠레 눈을 뜬 채 주변을 확인했다.
청력이 뛰어난 그는 육중한 무게를 가진 무언가가 뛰어다니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제 딴에는 발소리를 숨기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소용없었다.
방금 전같은 화염 공격이 계속 날아온다면 굉장히 피곤해질터, 엔베인은 마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다시한번 몬스터가 있는 곳으로 추정되는 방향을 향해 검을 휘두르면서 그와 동시에 왼손으로 허리춤의 단도를 꺼내 던졌다. 명중 여부는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건, 그의 공격을 피하면서 가능한 한 조용히 움직이며 뒤통수를 노리려던 놈의 균형이 깨지면서 작은 소리라도 내는 것.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분명히, 라스도 글러티나도 눈치챌 수 있을 터.
엔베인의 예상은 적중했다.
그가 단도를 던지고 몇 초 뒤, 글러티나가 지면을 밟고 높이 뛰어올랐다.
가볍게 날아오른 그녀는 족히 몇 백미터는 되는 바위 절벽 위로 올라갔고 그들을 공격한 자를 발견했다.
시커먼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게 굉장히 기분나빠서 그녀는 바로 검을 휘둘렀다.
검은 로브를 입은 사람은 급하게 방어 마법을 쓰는 것 같았지만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글러티나의 검은 실드를 찢고 그대로 검은 로브를 베었다.
“크헉!”
“넌 누구냐! 네놈이 불을 쏜 것은 아닐 테니 어딘가에 다른 놈이 있을 터-”
말을 하던 중, 글러티나는 옆으로 점프했다.
낮은 짐승의 울음소리. 반대편에 있었을 짐승이 절벽 끝에서 이쪽으로 달려와서 뛰어내린 것이었다.
짐승의 모습을 보고 글러티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곳에 서식하는 놈은 아니군.”
“그르르르-”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는 짐승의 머리는 사자와 비슷했지만 머리통이 털빛과 몸통의 털빛이 달랐다. 앞다리는 맹금류의 것과 비슷했으며 꼬리에는 아까 봤던 전갈 몬스터에게 달려있던 것과 비슷한 독 꼬리가 붙어있었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놈의 정체를 알아채고 글러티나가 말했다.
“흑마법사인가? 요즘 꽤 많이 보이는군.”
“큭… 네놈은 누구냐!”
“글쎄. 네놈이 알바는 아니지. 그나저나, 이곳은 케르베로스가 사는 거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된 거지?”
“그 몬스터들을 잡으러 온 건가? 이미 늦었지! 그놈들은 죄다 내 실험재료로 써먹었으니까!”
“흠…”
새끼 케르베로스의 엄마를 찾아주러 온 것뿐인데, 흑마법사를 만나버렸고 그놈은 지금 자기가 여기 살던 케르베로스들을 몽땅 없애버렸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카이엔도 참, 재수도 없지.
어떻게 가는 길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건지 모르겠다며 글러티나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 모습을 보고 오해한 흑마법사는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네놈들도 사냥을 위해 온 것 같다만 당장 꺼져라! 여긴 이제부터 내 구역이니까!”
“검은 숲은, 누구의 땅도 아니다. 그리고 네 말이 사실인지 증명해볼 필요도 있으니…”
글러티나는 힐끗 흑마법사를 지키듯 그 앞을 막아선 짐승을 바라보았다.
여러 몬스터의 신체를 엮어서 만든 키메라는 눈을 부라리면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저놈을 순식간에 행동불능으로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던 끝에 글러티나는 깔끔하게 조금 전에 전갈 몬스터를 해치웠을 때처럼 머리부터 꼬리 끝까지 잘근잘근 밟아 고깃덩어리 비슷한 거로 만들어버리기로 했다.
이 거대한 바위 위에서라면 카이엔도 그 광경을 보진 못할테니 다진 고깃덩어리가 쫓아오는 악몽 같은 건 꾸진 않을 테고.
키메라를 먼저 해치우고 흑마법사는 될 수 있으면 산 채로 잡아간다. 빠르게 해야 할 일을 정리한 그녀는 정면의 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래쪽이 조금 소란스럽긴 했지만 문제없으리라.
“막아라!”
“크워어!!”
흑마법사의 지시에 키메라가 괴성을 지르며 글러티나에게 달려들었다. 또다시 불을 뿜을 생각인 건지 입을 쩍 벌린 채 몸을 던지는 모습은 굉장히 위협적이었지만 글러티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평소와 같은 무덤덤한 얼굴로 그녀는 검을 휘둘렀다.
“하하! 고작 그런 검으로 찢을 수 있는 가죽이 아닌-”
흑마법사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검으로 피해입힐 수 없을 거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글러티나는 너무나도 여유롭게 키메라의 가죽을 찢고 피를 보았다.
그다음엔 울부짖는 키메라의 꼬리를 자르고 앞발을 베었다. 마무리는 미간의 정중앙에 검을 꽂아 넣는걸로 끝나는 듯했다.
‘키메라는 심장이 어디 있을까?’
가장 피가 콸콸 쏟아져나오는 부위는? 심장이 하나가 아닐 가능성은?
역시 잘근잘근 밟아버려야 하나? 짧은 고민 끝에 그녀는 가볍게 키메라의 머리에서 검을 빼냈다.
뇌가 정상적으로 움직일 수 없게 휘저어놨으니 이 정도만 하면 되리라.
나중에 카이엔이 확인해본다고 해도 곤란하니 이쯤 해두는게 나을거라고 판단한 뒤 그녀는 흑마법사를 향해 검을 겨눴다.
“자, 설명을 좀 듣고싶은데?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니라서.”
“크윽… 내가 겨우 한 마리만 만들었을까보냐! 지금쯤이면 아래에 있을 놈들은 전멸… 어?”
“네 목숨이나 걱정해라!”
“크헉!”
힘 조절을 할 자신이 없어서 글러티나는 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그대로 흑마법사의 머리를 후려쳤다.
그녀가 싸움을 시작한 것과 동시에 아래쪽에서도 키메라가 나타난 모양인데 라스와 엔베인 정도라면 손쉽게 해치웠을거라고 믿었다.
흑마법사를 기절시키긴 했지만 그대로 들고가는건 조금 찝찝한지라 글러티나는 밧줄로 흑마법사의 몸을 묶고 밧줄 끝을 잡고 질질 끌고 갔다.
위에서 내려다 보니 아래쪽도 다 정리가 된 것 같았다. 가볍게, 그녀는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잡아 왔어.”
“어. 이놈은 또 뭐야? 흑마법사?”
“정답.”
“하… 요즘 왜 이렇게 많아? 정기 모임이라도 갖는 건가? 그게 아니면 올해가 사고 치기 좋다는 말이라도 들었나?”
하는 말은 농담 같았지만 카이엔의 표정은 전혀 농담하는 사람 같지 않았다.
뒷골이 당긴다며 뒷목을 붙잡는 그를 보며 글라스는 안절부절 못했다.
“…일단 이놈이 주범 같으니 이야기나 좀 들어봐야지. 기절한 건가?”
“때리면 일어날 거다.”
퍽!
말을 마침과 동시에 글러티나는 흑마법사를 걷어찼다.
그러나 여전히 요지부동인 모습에 그녀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계속 때리다 보면 일어나겠지.”
“누님 그러다가 죽겠어요…”
“적당히 때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