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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왕자는 조용히 살고싶다-91화 (92/219)

91화

카이엔이 남작의 영토를 물려받고 나서, 첫 북부 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에피넬 백작가로 가게 되었다.

이전에 세자르 남작과 함께 회의에 참석해본 적이 있기에 어떤 자료들을 준비 해야하는지 대강 알고 있었다.

저번과 마찬가지로 바이스와 에빌이 동행하기로 했고 그들은 마차에 올랐다.

그때 카이엔은 ‘왕자’로서 그 자리에 앉아있었지만 이번에는 세자르 영지를 다스리는 ‘아베르나 백작’으로서 참석하는 자리였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와 동등한 권한을 갖게 되는 셈이었다.

물론 그가 왕자에서 백작이 되었다고 해서 왕족이란 특성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함께 회의할 귀족들이 그를 홀대하진 않겠지만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에피넬 백작가에 도착하니 이미 문밖까지 나와있던 백작의 시종이 즉시 그들을 안내해주었다.

회의를 마친 뒤엔 함께 석찬을 가질 예정이란 말에 카이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에 참석하는 멤버는 저번과 같았다. 나트폰트라 변경백령의 경우엔 저번과 마찬가지로 대리인을 보내겠지.

아직도 전염병의 여파로 끙끙대고 있다면 대리인도 못 올지도 몰랐다.

정오가 되기 전에 도착한 카이엔은 방에서 간단히 점심 식사를 했다.

가져온 자료를 힐끗 쳐다보며 그가 말했다.

“이 정도 준비해왔으면 괜찮겠지?”

“물론입니다. 제가 같이 들어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어서 아쉽군요.”

바이스의 눈빛은 마치, 아이 혼자 눈에 닿지 않는 곳으로 보내야하는 부모 같았다.

심히 걱정된다는 눈빛에 카이엔은 인상을 썼다.

“이쪽에선 별일 없었으니까 괜찮겠지.”

“그 말도 맞군요.”

회의 시간이 되기 전까지 카이엔은 가져온 자료를 몇 번이고 읽어보았다.

세자르에선 특이사항이라고 할법한 일이 없어서 말할 것도 없었다.

토벌의 경우엔 그를 대신해 바이스가 관리했는데 그쪽도 별 문제없이 해결됐다.

다만, 아직 다른 지역의 경우엔 토벌이 끝나지 않았거나 현재 진행 중이라는 말에 카이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숲은 워낙 넓어서, 각 지역에 출몰하는 몬스터도 다르고 습성도 달랐기에 사냥철이 다른 건 당연했다.

어느덧 회의 시간이 가까워지자 카이엔은 자료를 챙기고 두 사람과 함께 방에서 나왔다.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인이 그들을 회의실로 안내해주었고 회의실 문 바로 앞에서 바이스와 에빌은 걸음을 멈췄다.

“잘하고 오세요.”

“알아.”

툭, 한 마디 내뱉고 카이엔은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15분정도 일찍 왔는데 안에는 이미 에피넬 백작이 있었고 그는 카이엔을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더니만 크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왕자님!!”

“…이제 왕자라고 안 불러도 될 텐데.”

“아,아하하…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죄송합니다.”

“됐어.”

“백작위를 받으신 것, 축하드립니다. 국왕 폐하께서 통이 너무 작으신 것 같기도 하지만요.”

농담 삼아 건넨 말에 카이엔도 피식 웃었다.

더 높은 작위를 얻으려면 넓은 영지가 필수인데 이 근처에 그가 가질만한 땅이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회의실 안에 두 사람밖에 없으니 긴장이 될법도 한데 오히려 그 긴장 때문인지 에피넬 백작은 카이엔에게 말을 붙였다. 나쁘지 않았기에 카이엔은 적당히 말 상대를 해주었다.

“처음 공문이 왔을 땐 얼마나 놀랐던지…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아냐. 어차피 작게 할 생각이었으니까. 유언도 그랬고.”

“왕자님은 분명 잘해내실겁니다. 저도 그렇고, 여기 모이는 이들도 같은 생각일 겁니다.”

“흠, 무리하지 않아도 되는데.”

“아닙니다. 왕자님은 분명히 좋은 영주가 되실 겁니다.”

아부인 건지 아닌 건지 구별이 잘 되지 않았다.

세자르 남작만큼은 아니지만 나이 든 백작이 하는 말에 카이엔은 쓰게 웃었다. 남작도, 그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던 걸까.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에피넬 백작. 그대는 자식에게 자리를 넘겨줄 생각이 없는가?”

“네? 아… 제 눈에 영 안 차서 아직도 공부만 시키고 있습니다. 그래도 삼 년 안에는 이 자리를 넘겨주고 쉴 생각입니다.”

“건강할 때 넘겨주는 게 나아. 그래야 일하느라 못했던 것들을 할 수 있지.”

“명심하겠습니다.”

이윽고 다른 귀족들이 하나둘 회의실 안으로 들어오자 자연스럽게 대화는 끊어졌다.

딱 하나 남은 빈자리는 나트폰트라 변경백령의 대리인이 앉을 자리였는데 이번에도 또 늦냐는 투덜거림에 다들 말은 하지 않지만 속으로 동의했다.

카이엔은 아무 생각 없이 빈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5분 뒤, 회의실 문이 열리면서 빈자리의 주인공이 등장했다. 그러나 안에 들어온 이는 대리인이 아니라 변경백 본인이었다. 그것에 다들 화들짝 놀라 물었다.

“아니, 직접 오신 겁니까?!”

“바쁘실 텐데…”

“이번만입니다.”

담담히 대답한 나트폰트라 변경백은 빈자리에 앉았다.

별일도 다 있다며 중얼거리는 말을 들었을 텐데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대답했다.

“한 번씩은 직접 와야죠. 대리인한테만 맡길 수는 없는 일이라 직접 왔습니다.”

“흠흠, 그럼 회의를 시작하죠.”

에피넬 백작가에서 열리는 회의인 만큼, 의장인 에피넬 백작이 시작을 알렸다.

진행은 그전과 같았기에 카이엔도 무리 없이 발언할 수 있었다. 영주성에 거주하는 이종족 손님의 수가 늘긴 했지만, 전원의 정체가 널리 퍼진 게 아니기에 카이엔은 대충 유명한 이들만 간추려서 언급했다.

다크 엘프인 엔베인과 호수에서 둥둥 떠다니는 인어 슬로세이 정도였다.

늑대인간이나 뱀파이어의 경우엔 이미 정체불명의 인물에게 습격당한 전적이 있으니 언급을 피했다.

다른 영지들도 별 탈 없는 시간을 보냈지만, 올해 역병이라는 큰일을 겪은 나트폰트라 변경백은 가져온 자료를 나눠주면서 역병의 피해와 현재 영지의 복구 상황을 설명했다.

“왕자님이 와주셔서 살았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별거 아니었어.”

솔직히 일은 프라우디에가 다 했고 그는 얼굴만 비춘 게 다였다.

그러나 여기서 프라우디에를 언급할 수 없기에 카이엔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인사는 그때 잔뜩 받았지만 변경백은 다시 한번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 이야기는 저도 들었습니다.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왕자님!”

“왕자님이 직접! 그 위험한 곳으로 가시기로 했다고 하셨다면서요? 왕족의 귀감이십니다.”

“…다들 잊어버린 것 같은데, 이제 더이상 날 왕자라고 부르지 않아도 돼.”

“아차…”

“부르기가 쉽지 않군요.”

카이엔의 말에 다들 머쓱해 하며 말을 돌렸다.

카이엔은 그날, 자신을 대표하는 다른 이름을 지었고 그가 ‘카이엔 이디에우스 아베르나 백작’이 되었다는 걸 왕성에서 공표했다.

이젠 왕자 말고 ‘아베르나 백작’으로 불려야 했지만 다들 적응하지 못해 계속 그를 왕자님이라고 불렀다.

마을 사람들 역시, 십 년동안 왕자님이라고 불렀는데 이제 와서 백작님으로 수정하려니 많이 힘들다며 고충을 토로했다.

맨날 보는 사람들은 고치기 어려워도 어쩌다가 한 번씩 보는 이들은 괜찮을 줄 알았는데.

속으로 한숨을 쉬며 카이엔은 다른 영지와 인접한 검은 숲에 대한 정보를 귀담아들었다.

바이스의 말대로 아직 토벌이 끝나지 않은 곳도 있었고 바로 며칠 전에 끝난 곳도 있었다.

매끄럽게 진행된 회의가 끝난 뒤엔 석찬이 이어졌다. 다들 자리를 옮겨서 회의실에서 나눴던 이야기보다 한결 가벼운 대화를 나누었다.

다만 나트폰트라 변경백은 내일 아침 일찍 떠나야 한다면서 식사를 마치고 얼마 안 있어서 자리를 떠났다. 아직도 영지 복구가 덜 된 모양이었다.

술 대신 요청한 사과 주스를 마시면서 카이엔은 귀족들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었다.

“왕자님, 이쪽은 토벌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참이라 상인들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내일 시장을 둘러보시는 건 어떤지요.”

“시장? 책잡히지 않을 자신 있는 건가?”

“으음…”

“왕자님의 눈으로 보시고 부족한 점을 알려주신다면 바로 고치겠습니다.”

“그렇다면 괜찮겠지.”

시장이라.

세자르와는 다른 점이 많을 테니 보고 배울 점이 있다면 알아가는 것도 좋으리라.

내일 꼭 구경을 가보겠다며 카이엔은 마음을 먹었다.

***

영주성 근처 마을과 시장을 구경하기로 해서 카이엔은 며칠 더 머물다가 가기로 했다.

에피넬 백작은 왕자님 모시는 데 부족함이 없게 하겠다면서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였다. 한숨을 쉬며 카이엔은 외출 준비를 했다.

“흠. 괜찮을지 모르겠네요.”

“뭐가?”

“왕자님, 우리 사고 치지는 맙시다.”

“사고는 네가 치겠지.”

늦기 전에 구경이나 가자면서 카이엔은 방에서 나갔다.

일찍 가면 볼 것도 없을 거란 바이스의 말에 점심 식사까지 마치고 나가려는 참이었다.

이름만 호위고 실상 하는 일은 서류 작업인 에빌까지 데리고나와 마차를 타고 영주성 밖으로 나왔다.

마차는 근처에 적당히 세워두고 나오니 과연, 세자르보다 넓고 시끌벅적한 시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토벌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방문한 손님도 굉장히 많았으며 곳곳에서 몬스터 토벌 후 획득한 전리품을 팔고 있었다. 가장 흔한 게 가죽이나 이빨 같은 재료였다.

아직 한낮인데도 불구하고 술집은 성황이었다. 용병인 것처럼 모이는 이들이 한데 모여서 술잔을 나누는 걸 보고 카이엔은 고개를 돌렸다.

“구성은 비슷하군요. 규모만 큰 건가?”

“사람 되게 많다.”

“다행히 지금까지 걸리는 구석은 없군요.”

세자르에게 금지된 것은 살아있는 몬스터를 판매하는 행위였다.

그와 더불어 새끼 몬스터를 사냥하거나 판매하는 것 또한 금지였다.

카이엔은 몬스터의 말을 들을 수 있기에 그의 귀에 몬스터의 비명이 들리지 않게 하는 것 역시 그쪽 상인들이 지켜야 하는 규칙 중 하나였다.

하나 다른 곳은 그렇지않았다.

세자르에서는 엄격하게 금지된 일들이 다른 영지에선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것을 염려해 바이스는 카이엔이 나쁜 것들을 보지 못하게 막으려 했지만 청각은 관리할 수 없었다.

몬스터의 목소리는 오직 카이엔만이 들을 수 있었으니까.

- …마, 엄마.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은 카이엔이 걸음을 멈췄다.

엄마를 잃어버린 것만 같은 아이의 목소리였다. 흐느끼는 소리 역시 섞여 있었다.

인상을 구기며 카이엔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길 잃은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끊어질 듯 말 듯 한 목소리에 카이엔은 걸음을 돌렸다.

“이쪽으로.”

“무슨 소리라도 들으셨나요?”

“응.”

인상을 찌푸린 카이엔을 보며 바이스는 혀를 찼다. 그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지만 카이엔은 들었다는 건, 몬스터의 목소리라는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을 거라 예상하긴 했지만 너무 빨랐다.

적어도, 조금쯤 기분 전환을 하게 해주고 싶었는데.

세자르가 아니라 맘 놓고 행패 부릴 수도 없어서 바이스는 속상한 나머지 한숨을 흘렸다.

뒤에서 그 소리를 들은 에빌은 흠칫 몸을 떨었다.

카이엔이 가리킨 방향대로 그들은 이동했다. 울음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카이엔의 걸음도 빨라졌다.

“…하.”

작은 가게 앞에 철장 안에 들어 있는 새끼 몬스터가 있었다.

아직 어린 강아지 크기였지만 머리가 세 개인 확실한 몬스터였다.

새끼 케르베로스를 발견한 카이엔은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다른 이들에겐 낑낑거리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겠지만, 그의 귀에는 다르게 들렸다.

이 작은 녀석이 제대로 울지도 못하고 훌쩍이고 있었다.

철창 주변에 흙이 묻은 거로 봐선 이 아이가 크게 울 때마다 누군가가 철창을 걷어찼으리라.

카이엔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바이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살까요?”

카이엔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바이스는 바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 가게에 살아있는 몬스터는 새끼 케르베로스밖에 없었다. 벽에 걸려있는 가죽, 깃털, 발톱과 송곳니로 보이는 것들, 피. 그 중에 이 새끼 케르베로스의 어미가 없기를 바라며 카이엔은 바이스를 기다렸다.

안에서 실랑이하는 소리가 밖까지 들려왔다.

아무래도 이곳에 걸려있는 물품들은 가게를 빌려서 용병이 전시해놓은 것뿐이고 이곳에서 팔지 못한 것들은 다른 시장으로 이동하는 모양이었다.

새끼 케르베로스의 경우엔 경매장 비슷한 곳으로 이동한다는 말에 저절로 주먹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너도 좀 진정해.”

그것을 본 에빌이 조심스럽게 카이엔의 팔을 잡아당겼다.

바이스는 바이스대로 그 말을 무시하면서 막무가내로 살 테니까 내놓으라면서 독촉하고 있었다.

안에서 말다툼이 일어나는 걸 무시하고 카이엔은 무릎을 굽히고 몸을 숙여 철창 안의 새끼 케르베로스에게 말을 걸었다.

양발 사이에 고개를 묻은 새끼 케르베로스의 울음소리는 끊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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